〈 102화 〉 chapter 14. 미국 키퍼 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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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인천에서 LA까지 11시간 10분.
내 인생 처음으로 가는 해외였다.
비행기라고는 제주도 갈 때밖에 안 탔었는데, 갑자기 미국행 비행기, 그것도 1등석이라니!
말로만 듣던 1등석 서비스에 감탄했고, 또 부끄러웠다.
사무장이 나에게 건넨 첫인사가 이런 거였으니 오글거릴 수밖에 없었다.
"신용산의 영웅, 백화의 주인, 이세계인의 친절한 이웃 이정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무장은 케이라와 엘레나에게도 기사와 방송에서 떠들어대는 수식어구를 붙여 인사했다.
"최초의 이세계인, 이세계 마법사 케이라 머스탱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애와 사랑의 루의 사랑이 지구에도 가득하기를. 루의 열세 번째 검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엘레나 루님, 저희 비행기에 타신 것을 환영합니다."
1등석엔 우리밖에 없었고, 승무원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와인은 진했고, 식사는 맛있었으며, 그들의 태도에서는 존경이 묻어났다.
아무래도 케이라와 엘레나에게 좀 더 신경 쓰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처음 맞는 이세계인이었으니까.
문화적 차이를 넘어 차원적 차이 때문에 실수하지나 않는지, 불편한 건 없는지 계속 물어봤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잠시였다.
한두 시간 지나니 신기한 건 사라졌고, 승무원들도 약간 편해졌다.
그래서 남은 9시간을 뭘로 채웠냐.
당연히... 흠흠.
좌석이 넓긴 해도, 3명이서 할 수 있는 공간은 안 나왔기 때문에 케이라, 엘레나와 함께하는 쓰리썸은 다음으로 미뤘다.
대신 번갈아 가면서 쉬지 않고 했다.
마법이 있으니 들킬 일은 없었지만, 승무원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하고 있자니 스릴이 넘쳤다.
하늘 위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하기도 했고.
다음에는 이코노미에서 하고 싶다.
좁은 좌석에서 좀 더 밀착해서.
일등석은 솔직히 비행기 느낌이 덜 난다.
이정도면 그냥 여관방이다.
케이라는 내가 수장님과 나연 누나랑 함께 섹스를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말로 하진 않았지만 '졌다' 느낌?
수장님이 일을 서두른 데는 저런 이유도 분명 한 몫 했을 거다.
하렘의 주인으로서 교통 정리가 필요할지도?
하지만 적당한 시기와 질투는 필요하다.
비행기에서의 케이라는 평소 이상으로 적극적이었으니까.
이게 다 질투의 힘 아니려나?
그렇게 11시간이 지나고, LA 국제공항에 내렸다.
출국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미국 키퍼 협회의 키퍼였다.
“Hello, HERO LEE!”
키는 2m 3cm.
갑옷보다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 몸매.
짧게 자른 금발 머리와 호탕한 웃음소리.
키퍼의 기본 타이즈가 그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남자.
이 시대의 캡틴 아메리카.
마이클 로저스.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것도 HERO라고 부르면서!
나는 바로 달려가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정민입니다.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어요. 팬입니다!”
“(어? 어? 아... 이건 통역 마법이군요! 팬이라뇨! 제가 영광입니다!)”
마이클은 전세계 S급 키퍼 중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한성민... 그 빌어먹을 새끼의 위치인데, 당연히 그보다 위상이 몇 배나 높다.
미국은 인구가 6배가 많고, 전세계가 주목하는 곳이니까.
그는 온갖 재해 현장에서 사람들을 구했고, 빌런을 물리쳤고, 게이트를 정복했다.
그의 게이트에서는 별 게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그 힘, 아니 정의감으로 그 누구보다 유명해졌다.
내 손보다 두 배는 될 법한 그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힘이 장난 아니다.
그의 근력 스탯은 알려진 바대로라면 15로, 지구에서 가장 높다.
“(안녕하세요, 저는 시몬 테레사입니다. 협회에서 이세계인 전담 팀을 맡고 있죠. 이건 머스탱님의 통역 마법인가요?)”
붉은 머리라고 해야 하나? 붉은 기가 섞인 주황빛 머리의 여성이다.
정갈한 투피스와 머리색이 살짝 언밸런스했지만,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로저스의 첫인상은 말할 것도 없다.
나는 그의 팬이다.
테레사의 물음에는 케이라가 답했다.
“네, 제 마법입니다. 통역사를 거치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더 전달이 잘 되니까요.”
“(신기하네요. 그럼 제 뜻도 훨씬 더 잘 전달되겠네요. 일단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커졌습니다.)”
“무슨 일이죠?”
“(방문 환영 기자 회견에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렸습니다. 이게 현재 밖의 상황입니다.)”
테레사 옆에 서 있던 협회 직원이 테블릿으로 영상을 보여줬다.
출국장 밖과 그 옆에 설치된 기자 회견 장 상황이었다.
[****(언제 나오는 거야? 도착 했다며?)]
[****(우리도 보고 싶다! 이세계인!)]
[****(신은 실존한다!)]
[****(키퍼는 악마야! 악마는 미국에서 떠나라!)]
[****(게이트는 악마의 함정이라고!)]
공항 내에 사람이 가득했다.
무슨 S급 탑스타의 방문을 기다리는 사람들 수준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피켓을 들고서 자기들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영어라서 이해는 안 됐다.
통역은 언어를 통역하는 게 아니라, 말에 담긴 뜻을 해석하는 거니까.
그래도 그들의 차림으로 대충 어떤 사람들인지 짐작이 갔다.
기자.
이세계인을 보려고 온 일반인.
성기사 엘레나 덕분에 신의 존재를 확신한 종교인.
‘DEVIL’이라는 글자로 보아 하니 나를 욕하러 온 사람.
나를 욕하러 온 사람의 피캣에는 양 손으로 지구를 둘러싼 마크가 그려져 있다.
저건 ‘지구해방작전’의 마크다.
옛날에 키퍼 등록하러 갈 때 직접 본 이후로 직접 본 건 처음이다.
인터넷으로는 엄청 많이 봤다.
내가 악마의 힘을 쓴다는 게 알려진 이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내게 메일을 보내왔으니까.
저 단체가 미국에도 있는지 몰랐다.
아니, 미국이 원래 본진인가?
아무튼, 밖에는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달리 사람이 너무 많았다.
나는 테레사에게 질문했다.
“어쩌다 이렇게... 기자 회견은 340명 규모라고 하지 않았나요?”
“(죄송합니다. 최근 여론 흐름이 급격히 변하는 바람에... 예상에 실패한 저희 불찰입니다.)”
“(미안합니다! 또 제가 여기 온다는 소식이 퍼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더 모인 것 같습니다.)”
테레사가 허리를 숙였고, 로저스가 머리를 긁으며 이유를 덧붙였다.
로저스라면 저 정도 인파도 어쩔 수 없긴 하다.
더군다나 이곳은 시골도 아니고 LA다.
SNS에 퍼지기 시작하면 천 명 쯤 모이는 건 일도 아닐 거다.
“(부담이 되신다면, 안전을 이유로 이곳에서 간이 기자 회견을 한 다음에 이동하셔도 됩니다.)”
“밖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요?”
“(내부 영상을 시청하는 걸로 바꾸고, 공항을 빠져나가면서 얼굴을 보이면 될 겁니다.)”
나쁘지 않다.
실제로 ‘지구해방작전’이란 단체가 와 있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실물을 보려고 밖에서 몇 시간이고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나쁜 일일 것이다.
나도 한성민이 온다는 이야기에 행사 현장에 간 적이 있었는데, 몇 시간 기다리고 영상으로만 봐서 실망했던 적이 있다.
그날 한성민은 갑자기 발생한 게이트 폭주를 처리하느라고 못 왔었다.
이유를 듣고 납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실망은 실망.
팬의 마음이란 그런 거다.
이 자리에 내 팬은 적겠지만, 케이라, 엘레나, 로저스를 보려고 온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그들을 실망시키는 것보다는 행복하게 해주는 게 내게, 정확히는 케이라와 엘레나에게 이득이다.
우리가 지구를 기점으로 살아가려면, 이 지구에 우리 편이, 우리 팬이 많은 게 좋으니까.
“(내부 기자 회견이든, 외부 기자 회견이든 사전에 드린 질문 이상은 안 나올 겁니다. 곤란한 질문은 제가 다 컷 하겠습니다.)”
테레사도 외부에서 기자 회견 하기를 바라는 눈치다.
“알겠습니다. 밖에서 하죠. 안전 문제에는 신경을 좀 더 써 주세요.”
“(물론입니다. 그 부분은 염려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역시 히어로다운 선택입니다. 안전은 제가 있으니 걱정 마시죠!)”
이게 어디가 히어로다운 선택이란 건지 잘 모르겠지만, 로저스가 말하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야말로 히어로 중의 히어로니까.
...이건 너무 팬심인가.
“(그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10분 뒤에 시작하겠습니다.)”
테레사가 먼저 출국장을 나갔고, 우리는 모여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점검했다.
“이 정도면 된 거 같은데... 잘 부탁해요, 둘 다.”
“걱정마세요, 정민님.”
“너나 잘해, 정민아.”
케이라의 말이 내 심장을 찌른다.
솔직히 케이라와 엘레나는 걱정할 게 없다.
엘레나는 원래 고위직이고, 케이라야 어떤 상황이든 포커페이스가 깨질 것 같지 않으니까.
반면에 나는 여전히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어색하다.
내가 뭐라고 사람들 앞에 나서냐 말이지.
저번 기자 회견은 수백만 명이 봤지만, 그거야 인터넷이고, 이건 천 명이라도 현장에 있는 사람이다.
묠니르 수여식 때는 백 명 정도 있었는데, 그때도 엄청 긴장했었다.
수장님이 긴장을 풀어주지 않았다면 굉장히 어버버 거렸을 것이다.
“맞아, 나만 잘하면 돼.”
“정민님은 잘 하실 거예요.”
따뜻한 말로 내게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는 엘레나.
그래, 어차피 내 질문은 몇 개 없고... 다 괜찮을 거야.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협회 직원의 안내에 따라, 먼저 로저스가 기자 회견장으로 들어갔다.
와아아아! 로저스! 로저스! I love you!
공항 전체가 진동했다.
역시나 영상으로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감이다.
아침 조회 때 상 받은 적도 없는데, 갑자기 이게 뭔지.
심장이 조금 더 두근두근 대기 시작한다.
기자 회견을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버버 대답한 후에 후회할 정도의 상태다.
그때, 내 뒤에 서 있던 케이라가 내 손을 잡았다.
[정민아, 내가 볼 때, 넌 대단한 사람이야. 이런 건 사령술사와 싸울 때 비하면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잖아. 안 그래?]
케이라가 옳다.
사령술사에게 막대기를 찌를 때 생각하면, 이런 일은 솔직히 아무것도 아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순식간에 멈춘다.
그리고 곧바로 다시 심장이 뛴다.
‘넌 대단한 사람이야.’
케이라가 날 그렇게 봐준다는 게 날 흥분시킨다.
그게 너무 좋다.
“와아아아아! HERO LEE! Friend of another dimension!”
나를 향한 환호와 박수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천천히 내 자리에 가서 앉았다.
변한 게 하나도 없는데, 모든 게 변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지금처럼 테이블 밑에서 케이라와 손깍지를 끼고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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