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chapter 13. 쌍둥이의 역습
* * *
95.
침묵이 방 안에 잠깐, 아주 잠깐 내리 앉았다.
김웅찬과 설하연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안 봐도 뻔했다.
수장님은 소리로도 표정을 표현했다.
“할아버지! 어떻게 지금...”
“조용히 하거라. 지금 어른이 말하는데 어디를 끼어들어?”
“할아버지! 이건 너무하신 처사예요. 어떻게...”
“나리야, 일단 조용히 해 봐. 재밌는데 왜 그래? 아침드라마 같고 좋구먼.”
“할머니까지 왜 이래요!”
당황스러우면서도 신선했다.
저렇게까지 무장해제 된 모습은 평소에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관계할 때야 당연히 무장해제 되지만, 저 모습이랑은 결이 다르니까.
“왜 웃지?”
“네?”
“자네, 지금 우리 나리를 아주 사랑스럽게 쳐다보며 웃고 있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은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귀엽잖아?
“잘 모르지만 뒤에 과년한 처자 둘을 앉혀 놓고 그래도 되는 건가?”
“그...”
반사적으로 뒤로 돌아보니, 케이라와 엘레나가 웃고 있다.
하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할아버지! 저 죽는 거 보고 싶어서 이러세요?”
수장님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붉다.
저 정도면 진짜 혈압이 올라 쓰러지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이렇게 실실 웃음이 나오지?
“흥, 못난 것. 이놈 두고 죽을 생각 하나도 없으면서 내가 그런 협박을 들을 것 같아? 네가 맘대로 하는 만큼 나도 맘대로 할 거니까 감수하거라.”
“아니, 할아버지이이!”
이제는 애교까지 부리는 수장님 덕에 내 입꼬리가 귀에 걸린다.
이거 사진 찍어 두고 싶다.
그리고 등줄기를 따라 흐르는 살기.
[이정민. 너 진짜 죽는다?]
꿀꺽.
케이라의 살기가 매우 날카롭다.
너 죽고 나 죽자의 살기.
그나마 엘레나가 말려주고 있어서 내 목이 붙어 있다.
“억울하면 애초에 제대로 된 놈을 데리고 왔어야지. 니 삶은 니 삶이고, 내 삶은 내 삶이라지만 요즘 시대에 삼처사첩하는 놈이 어디 있느냐. 아니지, 빨리 대답 하거라 애송아. 삼처는 이미 모았고, 축첩은 어디까지 갈 거냐?”
할아버지의 질문은 공격적이고 날카로우며, 눈빛조차 베일 것 같이 서 있다.
그래도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한 시점에서 모든 건 끝이다.
그래서 내가 실실 웃은 거기도 하고.
이 자리에서만큼은 케이라나 엘레나가 아니라 수장님을 챙기는 게 맞는 거니까.
“일단 지금 사처입니다. 할아버지도 아시다시피요.”
“그래, 수연이 그 아이도 이미 넘어갔더구나. 내 다 들었다.”
역시나 전 국정원장인가.
곳곳에 정보원이 있는 모양이다.
신용산 소식도 저렇게 잘 아는데, GGC 크루 하우스 내부야 당연히 잘 알겠지.
케이라가 매번 마법을 건다고 해도, 빈틈은 있는 법이니까.
“그 외에도 후보가 여럿 있다고 들었다. 그 아이들도 다 처로 삼을 것이냐?”
“그것까지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 마음이 움직인다면 모두 책임질 겁니다. 책임질 수 있습니다.”
“고삐 풀린 망아지로구나. 처음 고삐를 누가 풀었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괴물을 풀었어, 쯧쯧.”
“괴물이라니요. 말씀이 심하세요, 할아버지!”
“네가 처음 고삐를 쥔 게 아니라는 거 잘 알고 있으니 그만 좀 하거라.”
수장님은 괜히 말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내 고삐를 푼 케이라는 평소보다 조금 더 당황하고 있었다.
포커페이스의 여왕도 이런 자리는 조금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오는 사람 다 받아주는 호구는 아닌 거 같아 다행이구나. 세 자리까지는 안 가겠어.”
“당연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세 자리...”
“당연히 두 자리는 가겠지?”
“...”
나는 답을 할 수 없었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나를 바라볼 때, 두 자리를 넘는 건 기정사실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섣불리 안 한다고 해봐야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나는 반대할 생각이 없다. 내 할아버지만 해도 할머니가 넷이셨으니까. 너 같은 애송이 수준의 능력이면 그 열 배가 되어도 어떻게든 되겠지. 우리 나리가 그중 하나일 뿐이라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다 큰 딸도 아니고 다 큰 손녀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할 생각도 없다. 물론 모든 건 네 놈이 우리 손녀를 행복하게 해 줄 때의 이야기다. 알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행복하게 할 겁니다. 믿어 주십시오!”
솔직히 떠밀리듯 관계를 맺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케이라도, 엘레나도, 수장님도.
하지만 모두 내가 한 선택이었고, 각오도 없이 한 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거였다.
공시생이었던 그때야 한 명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벅찼겠지만, 지금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도 가능하다.
“남자의 꿈같은 애송이로군. 허나 난 네 놈이 부럽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독점하는 관계에서 오는 행복은 너 같은 문어발이 느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지. 안 그렇소, 여보?”
“물론이에요. 당신과 평생을 살아서 행복해요.”
두 분의 사랑이 참 고와서 보는 내가 다 흐뭇해진다.
동시에 살짝 씁쓸한 표정을 짓는 수장님이 눈에 들어온다.
수장님도 워낙 표정을 숨기는 데 능해 아주 잠깐 드러났을 뿐이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
“문어도 문어 나름이지요. 저는 크라켄입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흥, 젊은 놈이 아주 자신만만하구나. 그 나이 때면 나도 크라켄이 부럽지 않았다. 시간 지나면서 니 놈이 어떻게 변할지 보는 것도 아주 재밌겠구나. 분명 네가 뿌린 씨앗들에 짓눌릴 날이 올 게다.”
이런 음담패설 같은 이야기가 이 자리에 어울리는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래도 뭐, 다 큰 성인들뿐이니 뭔 상관일까.
“할아버지께서 크라켄이셨으면 저는 크툴루로 가겠습니다. 그 정도는 돼야 제 잠재력에 어울리니까요. 그러니 시간이 지나도 걱정 없습니다. 크툴루는 시간이 흘러도 크툴루니까요. 오래오래 사셔서 꼭 두고 보십시오. 제 수장님이 얼마나 행복한 삶은 사는지요.”
“말만 번지르르한 게 기생 오래비나 다름없구나. 남자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어. 나리 너는 이런 애송이가 어디가 좋다고...”
할아버지가 혀를 끌끌 찼지만, 수장님의 표정은 확실히 풀렸다.
내 마음이 닿은 모양이다.
“그렇게 비꼬아 봐야 이젠 소용없어요. 남자 같은 구석이 없기는, 이 할머니도 설레게 하는데. 우리 손녀사위는 패기가 넘치는구나, 아주 보기 좋아. 계속 그렇게만 하렴.”
“여보? 지금 그게 무슨 소리요. 저딴 애송이가 뭐가...”
“당신 지금 쫌생이 같으니까 그만 좀 하세요. 평생을 쫌생이 같은 남자랑 살았다는 게 부끄러워질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
두 분은 무슨 20대 연인처럼 싸우셨다.
그리고 20대 연인처럼 서로를 바라보고 계셨다.
저 두 분을 보니, 수장님의 부모님이 10년 동안이나 해외를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분명 저 두 분처럼 젊고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계실 것 같다.
“뭐, 됐다. 그러나 이건 다 나와 이 사람의 입장이다. 우리 아들 내외의 입장은 다를 수 있어. 애들 내팽개치고 밖을 싸돌아다니는지라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만... 뚜껑은 열어 봐야 알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 부분도 제가 최선을 다해 조율하겠습니다.”
“이 사람 말대로 자신감 하나만큼은 좋아. 세상이 아주 쉬운 모양이야.”
그럴 리가.
내게 세상은 어려웠다.
기적이 일어난 지금도 세상은 여전히 어렵다.
최근 반년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던가.
4번? 5번?
기적이 일어난 만큼 세상은 더욱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깨달은 건, 언제나 죽을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는 거다.
내가 원룸에 사는 공시생이든,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키퍼든.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게 만드는 상황이나 동기가 있다면, 최소한 그걸 따라갔을 때 실패가 없다는 것도 배웠다.
이것도 운이겠지만, 그 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다른 건 몰라도, 내 여자들을 위한 거에는 언제나 죽을 노력을 할 자신도, 각오도 있다.
세상이 쉬워서 저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다.
수장님을 사랑하기에, 수장님과 내 관계가 그 부모님이 허락해주는 관계였으면 한다.
그게 세상이 말하는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라서 안타까워해도,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사이기를 바란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으로 극복해 보겠습니다. 믿어 주십시오.”
“비리를 저지르는 사람보다는 눈코입에서 피를 토하며 움직이는 사람을 믿어야겠지.”
“아니, 그건 어떻게...”
이터널 게이트에서 벌어진 일도 알고 있을 줄이야.
이건 단순히 전 국정원장이라서 아는 게 아닌 것 같다.
나는 한국을 암중에 지배하는 사람을 만나고 있는 건 아닐까?
게다가 내가 기자회견장에서 쓴 말을 다시 쓰면서 나를 놀리고 있다.
내가 한 말 중의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한 말 중에 하나인데, 이렇게 들으니까 많이 부끄럽다.
“다 아는 수가 있다, 애송아. 좋아, 그럼 이젠 뭘 할 거냐? 돈도 있고, 힘도 있고, 명예도 있고, 사람도 있는데, 다음은 뭐지? 영웅 놀이라도 계속하는 거냐?”
순간 느낌이 왔다.
이 질문이다.
할아버지는 이걸 묻고 싶어서 날 부른 거다.
손녀사위의 진로, 아니, 한국에 큰 영향을 끼칠 만한 사람의 진로가 궁금해서 부른 거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눈빛이 내 속을 파헤칠 듯이 나를 향하고 있다.
“저는...”
생각해둔 답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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