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화 〉 chapter 13. 쌍둥이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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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서울 근교로 나가는 차 안.
유리창이 모두 코팅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로 가는지 짐작도 안 간다.
이게 전 국정원장의 저택에 가는 방법인가.
“두근두근 하네요. 첩보 영화 속에 있는 거 같아요.”
“영화도 요즘은 이렇게 안 한다고 돌려 까는 거냐?”
“아니, 그걸 또 그렇게 받으시면 어떡해요. 이런 차가 처음이라서 신기한 거죠.”
“알아, 농담이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람 형이 웃었다.
어떻게 맞은편에 앉아 있을 수 있냐면, 이 차가 리무진이었기 때문이다.
뒷좌석에 나, 수장님, 나연 누나, 가람 형, 케이라, 엘레나까지 6명이 앉아 있는데도 공간이 넉넉했다.
“이터널 게이트 내부는 어떻게 정리됐어요?”
“그거 대기업들이 적당히 갈라먹기 했어. 아직 뭐가 나온 게 없어서 큰 잡음은 없고.”
이터널 게이트에서 딴딴이라도 나오면 난리가 나겠지만, 아직은 그런 게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있는데 누군가 말을 안 하는 걸 수도 있고.
“그래도 지분이 어느 정도 있으면 좋을 텐데...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나는 수장님께 고개를 숙였다.
GGC가 이터널 게이트에서 손을 뗀 건 내 이슈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관광 허가는 어떻게 마련했으니까요. 정민씨를 가이드로 쓰면 아마도 예약이 끊이질 않을 거거든요.”
“아,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써 주세요.”
이터널 게이트를 나오니, 세계는 이터널 게이트 관광 문제로 난리였다.
악마 이슈가 지나고 나서야 사람들이 깨달은 것이다.
이터널 게이트는 키퍼가 아니라도 들어갈 수 있다는걸.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관광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외국에서는 하루빨리 관광 루트를 개발하라고 한국 정부에 압박을 넣기도 했다고.
그 와중에 일반인 최초로 이터널 게이트에 들어갔다고 알려진 수연이도 이름을 널리 알렸다.
이미 기자회견장에서의 모습 덕분에 화제였는데, 이번에 제대로 떠 버렸다.
수연이는 그런 유명세가 싫어서 신용산에 가만히 있겠다는 모양이지만, 그 미모에, 그 배경에... 그게 쉬울까?
전 국정원장에 손녀딸이면서 저 미모에, 저 능력을 갖추고 있는 GGC의 수장도 막 유명해지진 않았으니 가능할지도.
하지만 이건 전 국정원장의 입김이 닿아서 정보가 안 퍼진 것 같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수장님같이 카리스마 넘치는 여장부에게 ‘빠순이’가 없었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번 기자회견만으로도 바로 ‘김나리 시녀를 자청하는 모임’이라고 팬클럽이 생겼다던데.
그 김나리가 1주일에 2~3번 나와 사랑을 나눈다는 걸 알게 되면... 팬클럽이 날 죽이려고 들겠지?
사실 이번 방문도 위험하다.
애지중지하던 손녀딸이 이상한 놈팡이한테 홀려서 도와달라고 한 게 아닌가, 그런 걸 확인하려고 불렀을 확률이 90% 이상이다.
어쩌면 수장님 부모님이 계실지도 모른다.
순정 만화처럼 우리 딸이 처음으로 남자 이야기를 했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는 부모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에이, 설마.
“그런데, 거기 수장님 부모님도 계신 거 아니죠?”
“어? 엄마 아빠도 와? 진짜?”
나연 누나가 반색하며 수장님께 물었지만, 수장님은 고개를 저었다.
“부모님은 안 오셔. 아직 아이슬란드에 계셔. 올해도 거기 계실 예정이래.”
“...치, 딸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전혀 궁금하지도 않나.”
“자유로운 분들이시니까. 그리고 매일 전화 안 받는 건 너잖아.”
“그건... 몰라.”
실망하는 나연 누나와 익숙하게 위로하는 수장님이 만들어내는 그림은 참으로 흐뭇했다.
내가 진짜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것만 빼고.
“아이슬란드에 계신다고요? 왜요?”
“여행을 좋아하시거든요. 저희 고등학교 때쯤부터는 한국에 없으셨어요.”
“그러면... 10년 이상?”
“네, 올해로 11년째인 것 같아요.”
대단하다.
그리고 부럽다.
그걸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걸 할 수 있는 재력이... 아, 이젠 나도 있지.
아무튼, 대단한 일인 건 분명하다.
휴양 차 가는 여행이라고 해도, 여행은 여행.
어떤 동기 부여가 있으면 10년이나 여행을 다닐 수 있는 걸까?
“어릴 때부터 꿈이셨대요. 두 분도 여행 동아리에서 만나셨고요. 아버지는 할아버지 때문에 유년기를 외국에서 보내서 경험도 많고요.”
“꿈을 이루셨다니 대단해요. 말처럼 쉬운 건 아닐 텐데요.”
“정민씨도 키퍼가 꿈이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정민씨도 대단하세요.”
“뭘요, 운이 좋았죠.”
어쨌든 부모님이 안 계시다는 건 다행이다.
켕기는 일이 많기 때문에 웬만하면 피하고 싶다.
수장님의 할아버지를 만나는 거나 부모님을 만나는 거나 비슷하기야 하겠지만, ‘전 국정원장’ 타이틀을 달고 있으니 뭔가 말이 통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다 왔다. 내려.”
가람 형의 말과 함께 리무진이 멈췄고, 차 문이 열렸다.
“와...”
절로 감탄이 나왔다.
무슨 게이트 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이세계 같다는 이야기다.
먼저 보이는 건 푸른 산.
여름의 끝자락, 아직은 푸르른 잎들에서 생명력이 느껴진다.
앞에는 푸른 물.
흐르는 물은 얼마나 깨끗한지, 바닥이 다 보인다.
유영하는 물고기의 살이 통통하게 올랐다.
그 사이에는 기와집이 있다.
배산임수.
풍수지리의 명당자리에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자리했다.
한국이라기보다는 ‘조선’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를 맞이하러 온 사람도 한복을 입고 있다.
어째 리무진 타고 현대복을 입고 온 내가 부끄러워지는 느낌이다.
이런 곳이라면 마차를 타고 한복을 입었어야 했는데.
뭔가 기세에 눌리고 있다.
확실히 전 국정원장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수장님의 카리스마도 이런 걸 보고 배운 건가 싶다.
그런 와중에 굉장히 반가운 사람이 나타났다.
“왜 이제야 오는 거야! 이 바보 오빠!”
지민이었다.
동생은 벌처럼 날아 내게 다가와서는 정확한 자세로 보디 블로우를 날렸다.
디딤발과 체중 이동이 완벽했다는 이야기다.
펑.
“...어?”
지민이가 ‘이게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나를 본다.
훗, 이제는 다르다 이거야.
옛날 같으면 배에 힘주고 맞아도 아팠겠지만, 지금은 하나도 안 아프다.
근육도 근육이지만, 내가 지민이의 체중 이동을 볼 수 있다는 게 컸다.
타이밍에 맞춰 살짝만 움직여주면, 저 정도의 주먹쯤이야.
“미안, 미안. 다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
나는 수연이를 녹였던 미소를 무심코 지었다가, 지민이의 헛구역질을 하려는 거 보고 흠칫했다.
아... 잊고 있었던 감각이다.
“뭘 봐줘. 좀 더 맞아, 죽을 때까지 맞아. 2달이나 연락 한번 없다가 웅찬 할아버지가 보자니까 냉큼 달려오는 게 말이 돼? 니가 그러고도 엄마 아빠 아들이냐?”
퍽, 퍽, 퍽.
지민이는 날 샌드백처럼 쳐댔다.
동생도 내 성장을 느꼈는지, 옛날처럼 비전문가라고 봐주는 거 없이 풀스윙이다.
아주 잘 컸다.
동생이라도 일곱 살 차이면 보통 이러지는 않을 텐데... 내 동생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웠나.
“지민아, 그만. 이젠 네가 때려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 네 복수는 내가 대신해줄게.”
지민이를 뒤에서 끌어안아 떼어낸 건 나연 누나였다.
“...치, 언니를 봐서 봐주는 줄 알아. 진짜... 아으...”
“화 풀어, 지민아. 네 피부만 안 좋아져.”
“진짜, 언니! 언니밖에 없다니까요.”
지민이는 나연 누나와 강하게 포옹했다.
대체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걸까?
GGC 크루 하우스에서?
어쩌다가?
“다시 가시죠.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내인이 우리를 다시 이끌었다.
긴 행랑채를 지나, 사랑채로.
“나는 밖에 있을게. 할아버지는 나중에 따로 볼 거야.”
“나도 밖에 있을게. 원장님께는 나중에 보고하지 뭐.”
나연 누나와 가람 형은 밖에 남았다.
가람 형은 GGC 전엔 국정원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사랑채는 기와집 규모만큼이나 커서,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본채인 줄 알았을 것이다.
사랑채에는 두 사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머리의 남성과 백발의 여성.
염색했을 게 분명한 진한 검은색과 하얗게 센 머리가 묘하게 조화를 이루었다.
전 국정원장 김웅찬.
그의 부인 설화연.
두 분 다 70대라고 들었는데, 자세나 눈빛, 외모를 보면 50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불현듯, 저렇게 멋지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이정민입니다.”
“안녕하시오. 김웅찬이라오.”
서로서로 통성명이 끝난 후, 다들 자리에 앉았다.
큰 방이었기에 자리는 넉넉했다.
엘레나의 흰색 갑옷과 기와집 내부가 이질적이면서도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도움 주신 것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어르신...”
“할아버지면 되네.”
할아버지?
괜찮나?
아까 보니 지민이도 할아버지라고 부르긴 하던데... 실례가 아닐까?
[괜찮아요. 격식을 크게 차리시는 분은 아니세요.]
내 주저함을 느낀 건지, 수장님의 메시지 마법이 왔다.
아주 짧은 순간의 주저함이었는데, 어떻게 안 거지?
“네, 할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다면 사회적으로 낙인이 찍힐 뻔했습니다.”
“낙인이야 자네나 수연이 그 아이 힘으로 벗은 거지. 내가 한 게 뭐가 있어.”
수연이도 아셔?
하기야 모르는 게 더 이상하긴 하지만... 이거... 오늘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는데.
“그래도 할아버지의 도움이 없었으면 그 자리 자체가 없었을 겁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래, 그 말도 맞지.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 거 같구먼.”
“그... 굉장히 부족합니다.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겸손한 거 같지만, 눈빛엔 자신감이 가득해.”
“...?”
‘네’라고 반문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당황했지만, 당황하면 지는 분위기니까.
끝까지 포커페이스를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내 포커페이스는 무너졌다.
“암, 남자로 태어나 여자를 네 명이나 홀렸으면 자신감이 없을 수는 없지. 그래, 자네는 앞으로 몇 명이나 더 후릴 셈인가?”
“...네?”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런 공격이면 내가 마음을 먹어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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