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89화 (89/137)

〈 89화 〉 chapter 12. 메이드

* * *

89.

푸른 하늘, 푸른 숲, 갈색 대지.

이터널 게이트의 첫인상이다.

키퍼의 게이트와 큰 차이가 없다.

“똑같네?”

“그러네요.”

“내가 똑같다고 했잖아.”

나와 엘레나는 이터널 게이트가 처음이고, 케이라는 이전 세계에서 이터널 게이트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다른 키퍼들도 나나 엘레나처럼 가볍게 반응했다.

“와... 이게... 게이트?”

“진짜 다른 세상이잖아...”

반면 게이트에 처음 들어오는 일반인들의 반응은 격했다.

신기한 거 보듯이 고개를 휙휙 돌리는데, 나도 처음에 저랬으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이런 곳이었군요. 확인했으니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게이트 내부를 확인하고 싶었던 기갑부대 대령이 우리에게 인사하고 다시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제비뽑기에 당첨돼 게이트를 구경한 10명의 군인도 함께 나갔다.

이제 이터널 게이트에 남은 건, 내 일행, 윌리엄 박, 그리고 대기업 크루의 키퍼 6명이었다.

S급 키퍼 둘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밖에 남았다.

그러니 6명은 모두 A급 키퍼였다.

“케이라님, 이제 탐색을 시작해 주시겠습니까?”

6명의 키퍼 중에 추적이나 탐색 기술을 가진 키퍼는 없었다.

모두의 합의로 그렇게 정해졌다.

그런 키퍼가 들어오면, 각자 크루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정찰은 오로지 언데드 박멸, 둘째도 언데드 박멸이었다.

케이라가 두 눈을 감고 마나를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나도 눈을 감았다.

내가 눈을 감는 거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이제 없다.

소환사가 소환수에게 힘을 빌려줘야 하는 건 당연하고, 그들은 어제 전투에서 그 위력을 톡톡히 봤으니까.

엊그제만 해도 나를 놀리던 사람들이 내게 감사를 전하는 광경이란.

엘레나는 자기가 턴 언데드를 썼을 때 놀라는 사람들의 얼굴을 내가 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 정말 속이 다 시원했을 거라고.

아무튼, 나는 왼쪽 어깨에서 빠져나가는 에너지, 사령술사 쓰던 힘에 집중했다.

성욕처럼 감정이나 욕구를 극대화한 ‘악마의 힘’중에 하나다.

삶이나 죽음, 혹은 둘 다 정도가 아닐까 싶다.

평소에는 내 어깨 근처에서 흩어지는 것만 같던 에너지였는데, 어제 메이드를 만났을 때는 메이드에게로 에너지가 흐른다는 게 느껴졌다.

사령술사 때처럼 진하진 않아서 에너지 흐름을 통해 공격한다든가 하는 짓은 못했지만, 이 문제가 메이드와 연관이 있다는 건 명백하게 알았다.

지금도 그렇다.

에너지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방향은... 왼쪽.

[왼쪽.]

나는 사전에 케이라에게 빌려 둔 ‘아르케이나 전통마법 열화판(B)’기술로 메시지 마법을 썼다.

“왼쪽입니다. 가시죠.”

케이라가 내 메시지에 따라서 말했다.

[왜 웃어?]

윌리엄 박을 선두로 해서 왼쪽으로 나아가는데, 케이라가 메시지로 말해 왔다.

내 입꼬리가 올라갔나 보다.

[신기해서. 왜 옛날에는 네가 나 대신 탐색을 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됐잖아.]

[신기하긴 하네.]

[그렇지? 나도 제법 쓸모가 있어졌다고.]

[너는 옛날부터 쓸모 있었어.]

솔직히 쓸모 있었던 장면보다, 쓸모없었던 장면이 먼저 떠오른다.

케이라가 저격총에 당한 장면 같은 거 말이다.

그래도 케이라가 그렇게 말해주니, 진짜 쓸모 있었던 것 같다.

앞으로도 더 쓸모 있게 돼야지.

[잠깐만 정지,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아.]

“잠깐만요. 방향을 바꿔야 해요.”

그렇게 내가 말하는 대로 일행은 움직였다.

이걸 내가 직접 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 ‘악마’라는 프레임을 약화하기 위해서이다.

기자회견이 어느 정도 효과를 봤겠지만, 여기서 자연스럽게 악마의 힘을 찾으면 사람들이 할 생각이야 뻔하다.

나를 더 악마로 몰아붙이겠지.

기자회견장에서 투명하게 모든 걸 공개하겠다고 해서 약간 마음에 찔리기는 한다.

그러나 그게 뭐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나는 15살짜리 중학생이 아니다.

“여긴 거 같군요.”

때로는 걷고, 때로는 뛰고, 때로는 산을 넘고, 빙판을 넘어서.

우리는 반나절을 투자해 어느 장소에 도달했다.

휙휙 바뀌는 게이트 내 지형과 날씨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기이한 곳.

바로 죽음의 땅이었다.

풀 한 포기 자라지 않고, 비틀어진 나무들만 장식처럼 서 있으며, 흙도 생명을 잃어 검게 변한 곳.

물이 흐르지 않아 고인 채 썩어가고 있는 곳.

악취와 유독가스가 코와 눈을 마비시키는 곳.

이터널 게이트 밖에 있었던 죽음의 땅보다 몇십 배는 심각한 곳이었다.

“다들 버틸 수 있나요?”

“물론이죠.”

“정민씨는요?”

“저도 버틸만합니다.”

코와 눈이 따갑지만, 고통은 언제나 익숙했다.

죽지 않는 고통은 날 강하게 만들 뿐이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더라?

“그럼 케이라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케이라는 이미 마법을 시전해 죽음의 땅 상황을 보고 있었다.

푸른 물결에는 거대한 마법진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스켈레톤들이 보였다.

“저길 뚫어야 합니다. 3km 정도 가면, 마법진이 있어요. 그걸 지워야 저 스켈레톤들이 다시 안 일어날 거예요.”

“하아... 역시 그렇군요.”

윌리엄 박이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의 한숨이 깊어진 이유는 간단했다.

죽음의 땅은 죽은 자들로 가득했다.

대충 훑어봐도 수만.

게다가 케이라가 보여준 화면에 의하면 지금도 태어나고 있었고.

“케이라님, 리젠은 일주일이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메이드만 일주일이었던 거 같네요.”

케이라가 담백하게 팩트를 이야기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더불어 지금 일행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주변 스켈레톤 중에 상위 스켈레톤은 없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좋네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엘레나님은 뒤를 맡아주세요. 김성한님은 케이라님과 정민씨를 보조해 주세요.”

김성한 키퍼는 바람계열 능력자로, 이 파티에서 엘레나와 윌리엄 박 다음으로 강하다.

이 파티에서 가장 약한 나를 그가 보조해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건 ‘보조’라는 거다.

그가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다.

“갑니다!”

덜그럭거리며 몰려오고 있는 스켈레톤에게 윌리엄 박이 발을 구르며 주먹을 내질렀다.

오웅.

공간이 밀려나는 소리가 있다면 이런 걸까.

그의 앞 공간이 일그러졌다.

일그러진 곳에서는 커다란 용의 형상이 꿈틀거리며 나타나더니, 앞으로 쭈우욱 뻗어나가며 스켈레톤 무리를 날려 버렸다.

콰가가가강!

전차가 저지른 파괴현장의 딱 두 배, 그게 승룡파가 지나간 자리에 펼쳐진 참상이었다.

“저게... 승룡파...”

눈을 살짝 크게 뜬 윌리엄 박의 성명절기였다.

S급 키퍼의 진심 어린 기술을 눈앞에서 보니 가슴이 두근두근 댔다.

키퍼를 좋아하며 팬질까지 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내가 존경하던 키퍼와 한 전장에 서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실감 났다.

동시에 빌어먹을 한성민이 생각나서 짜증도 났지만.

우리는 윌리엄 박이 뚫어놓은 길을 따라 나아갔다.

수만의 스켈레톤에게 둘러싸여 있었지만, 우리는 평지를 움직이듯 빠르게 움직였다.

앞뒤로 S급 키퍼를 달고 간 덕이다.

“조심하세요! 프린스입니다!”

스켈레톤 프린스.

A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 정도 돼야 윌리엄 박의 정권을 한 번 막아 냈다.

그 탓에 다른 스켈레톤들이 대열을 덮쳤고, 나는 그때야 검을 한 번 휘두를 수... 없었다.

캉! 카강!

A급 키퍼만 해도 6명.

그들도 어디 가서 약하다는 이야기는 들을 일이 없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100명 밖에 없는 최강 전력이니까.

나의 어설픈 검술 실력을 뽐낼 틈은 없었다.

퍼버벙!

스켈레톤 위저드가 불의 창을 날리고, 스켈레톤 아처가 화살을 쏘아도 내게 닿지 않았다.

키퍼들이 각자의 기술로 모든 공격을 사전에 처단했다.

그렇게 10분여.

우리는 3km를 트랙에서 달리는 것처럼 주파했다.

죽음의 땅 중심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있었다.

직경 30m 정도 되는 마법진으로, 그 안에서 스켈레톤들이 일어났다.

“마법진이네요. 그냥 파괴하면 되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케이라가 마법진을 살폈다.

그동안 우리를 덮치는 스켈레톤은 키퍼들이 손쉽게 처리했다.

중심부에는 상위 스켈레톤이 없어서 전투가 오히려 수월했다.

잠시 뒤, 케이라가 일어났다.

“이제 마법진을 파괴할 겁니다. 저를 지켜주세요.”

그녀가 양손을 모으고는 푸른 불꽃을 피워냈다.

그녀의 눈동자가 신비한 빛을 뿜어낸다.

그녀가 손을 내밀자, 불꽃이 천천히 바닥으로, 마법진으로 향한다.

지지직.

마법진과 불꽃 사이에서 자주색 스파크가 튄다.

불꽃은 멈추지 않았다.

스파크를 먹고 조금씩 커진 불꽃이 마법진의 글자를 지우며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파지지직.

그순간, 자주색 번개가 마법진을 따라 원을 그렸다.

땅에서 일어나던 스켈레톤들이 그와 함께 가루로 흩어졌다.

카드드득.

케이라가 손을 움직이자, 푸른 불꽃이 땅을 파헤치며 움직였다.

불꽃이 지나가는 자리에 있는 마법진의 남은 글자들은 불꽃 속으로 사라졌고, 불꽃은 점점 커졌다.

마침내 불꽃이 한 바퀴 돌아 다시 케이라 앞에 왔을 때, 불꽃은 케이라의 키보다 더 커져 있었다.

“하아, 하아.”

케이라가 가쁜 숨을 내쉰다.

마력을 제어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저 불꽃이 삼킨 마나는 거의 백화 급이니까.

모두가 숨죽여 케이라를 보고 있었다.

모두 본능적으로 저 불꽃의 힘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잘못 터지면 여기 있는 사람은 몰살이었다.

케이라도 불꽃을 하늘로 올려보낼까?

나의 최선은 백화를 하늘로 날려 빛으로 변하게 하는 거였는데, 케이라는 달랐다.

그녀는 우리가 온 반대쪽으로 불꽃을 날려 보냈다.

화르르륵.

남은 스켈레톤들이 부나방처럼 푸른 불꽃을 향해 달려들었다.

불꽃은 그들을 지우개처럼 지워 버리면서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나아가면서 더욱더 많은 스켈레톤들이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불꽃은 전혀 크기가 줄지 않고 천천히 나아갔다.

100m, 200m, 300m...

“...엘레나”

케이라가 작게 부르자, 엘레나가 일행의 앞을 막았다.

“다들, 하아, 조심...”

그녀가 겨우 입을 떼고는 양손을 합쳤다가 앞으로 밀었다.

불꽃은 점이 되어 보였다가, 앞으로 폭발했다.

파아아앗!

빛이 가장 먼저 내 눈을 강하게 때렸다.

이어서 진동이 내 중심을 흔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나를 밀어냈다.

순간 넘어질 뻔했다.

내 양옆으로 날아가는 검은 흙과 말라비틀어진 나무가 보인다.

하얀 뼛조각도 나를 지나친다.

콰가가가강.

엘레나의 방패가 우리의 앞을 막지 않았으면 날아가는 건 우리 모두였을 것이다.

그녀의 방패를 꼭대기로 해서, 부채꼴 모양의 땅만 그대로였다.

다른 모든 곳은 뒤집어졌다.

후폭풍이 이럴진대, 그 앞쪽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고오오.

시야의 왼쪽 끝에서부터 오른쪽 끝까지,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사라졌다.

보이는 것은 검은 흙과 뒤섞인 갈색 흙뿐.

스켈레톤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휘청.

쓰러지려고 하는 케이라를 뒤에서 안았다.

온몸에 땀이 한 가득이다.

“수고했어, 좀 쉬어.”

“...나, 잘했어?”

“응. 아주.”

나는 땀 때문에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며,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가 안심할 수 있도록.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