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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84화 (84/137)

〈 84화 〉 chapter 11. VS 협회

* * *

84.

[저 나이에 수석 연구원? 가능해?]

[뭐 좀 아는 사람 없어?]

수연은 공식 석상에서 얼굴을 내비친 적이 없었다.

이게 처음이다.

이런 자리에서 데뷔하게 만들어서 조금 미안하다.

더 좋은 자리에서, 더 좋은 이미지로 얼굴을 알릴 수 있었는데.

[예쁘다... 뭐야? 엘프한테 안 꿀려.]

[연예인 아니야? 연구원 맞아?]

물론 그녀의 얼굴은 어떤 환경에서도 주목받고 있다.

“저는 딴딴이와 마나의 반응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정민 키퍼가 나타나기 전까지 제 연구는 전혀 진척이 없었습니다. 딴딴이는 마나를 흘려보내기만 할 뿐이었고, 그렇다고 다른 힘에 반응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처음 수연의 목소리는 조금씩 느렸고, 떨렸지만, 이내 원래의 톤으로 돌아왔다.

연구에 대한 이야기는 수연의 세계였다.

그녀는 그 세계에서만큼은 S급 키퍼를 넘어선 존재다.

긴장할 이유가 전혀 없다.

“이정민 키퍼가 나타나고서야 연구의 실마리가 보였습니다. ‘악마의 힘’에 관해서 알게 된 후에는 연구에 가속도가 붙었고요. 이것이 그 연구의 결과입니다. 먼저 영상을 보여 드릴게요.”

영상에는 연구자 복장의 수연이 서 있었다.

수연은 막대기 두 개를 들고 있었고, 두 개의 막대기를 하나로 합쳤다.

그러자 은색 막대기가 분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마치 성욕에 반응하는 딴딴이 같았다.

내가 쓰는 것처럼 빛이 굉장히 밝아지거나 핏빛이 되거나 하진 않았지만, 꾸준하게 빛이 났다.

“분홍빛을 내는 막대기는 100% 딴딴이입니다. 딴딴이가 반응했으니, 저도 악마의 힘을 썼다고 볼 수 있겠죠. 참고로 저는 키퍼도 아닙니다.”

화면이 기자들의 얼굴로 바뀌었다.

다들 놀란 표정이었고, 쉬지 않고 타이핑을 하는 중이었다.

인터넷에서도 수백만의 사람들이 채팅으로 놀람을 표현했다.

[미친, 악마가 둘이야?]

[진짜 누구나 악마의 힘을 쓸 수 있는 거야?]

[잠깐만, 키퍼가 아니라도 되는 거였어?]

“물론 이 정도로 어디 나가서 악마의 힘을 쓴다고 하면 안 됩니다. 저는 이 힘을 제어할 줄 모르고, 그저 발현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그것도 딴딴이라는 증폭기와 마정석을 통해서요.”

스크린에 그림 자료가 떴다.

딴딴이 막대기와 또 다른 막대기의 구조도였다.

“또 하나의 막대기는 마정석에 전류를 흘려 마나를 흘려보내는 단순한 도구입니다. 두 가지 도구로 ‘악마의 힘’을 발현하는 방법 역시 간단합니다. 마나를 딴딴이로 흘려보낸 다음에, 딴딴이를 잡고 강렬한 감정을 떠올리면 됩니다. 키퍼와 일반인 총 20명을 상대로 실험해본 결과, 18명이 ‘악마의 힘’을 발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구조도 다음엔 20개로 분할된 영상이었다.

20명의 사람이 아까 수연이 들고 있었던 막대기 두 개를 들고 서 있었고, 그들의 막대기는 저마다의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빨간색, 녹색, 노란색, 흰색, 파란색...

“색은 떠올린 감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빨간색은 분노, 노란색은 식욕, 이런 식인데 자세한 건 연구가 좀 더 필요합니다. 실패한 2명과 18명의 차이는 감정이 얼마나 강렬한가의 차이인데, 이는 뇌파로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이 부분도 연구가 좀 더 필요합니다.”

그리고 수연은 단상에 준비되어 있던 막대기를 들었다.

영상에서 보던 그 막대기였다.

“혹시 이 자리에서 ‘악마의 힘’을 발현해보고 싶은 사람은 없으세요? 강렬한 경험이 있다면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기자 중 한 사람이 바로 손을 들었다.

그는 단상 가까이 와서 수연에게 막대기를 받았다.

“두 개를 붙이고... 네, 거기 스위치를 누르면 돼요.”

파앗.

은색의 막대기가 바로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회견장 여기저기서 작은 탄성이 터졌고, 채팅창은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올라갔다.

“많이 긴장하셨나 봐요. 이제 스위치를 끄시면 됩니다.”

기자가 스위치를 끄자마자, 딴딴이는 다시 은색으로 돌아왔다.

“혹시 시험해보실 다른 분 있으세요? 두 분만 더 받겠습니다.”

십수 명이 손을 들었고, 그중에 두 명이 나와서 장치를 테스트했다.

한 사람은 빨간빛을 냈고, 또 한 사람은 빛을 내는 데 실패했다.

그 모든 광경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중계됐다.

“이제 세계 곳곳에서 딴딴이를 연구하던 사람들이 이 방법을 사용하겠지요. 마나와 강렬한 감정과 딴딴이, 굉장히 간단한 조합이라서 누구나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연구 자료를 공개할 테니까, 이 방법을 사용하기 전에 꼭 주의사항을 숙지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질문 세 개만 받을게요!”

“공개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모든 사람이 같이 연구하면 빨리 연구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이 새로운 딴딴이 사용법을 통해 인류가 좀 더 안전하고 편리해지길 소망합니다. 저는 발현하는 방법만 알고 있을 뿐, 어떻게 활용할지는 모르니까요. 세계 곳곳에서 새로운 활용법들이 나타나서 공유되기를 기대합니다. 솔직히 공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간단한 방법이라 부끄럽지만요.”

“그렇게 간단한 거라면 왜 이제껏 발견하지 못한 거죠?”

“이게 대답이 될진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딴딴이를 연구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고, 다들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다 보니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만 해도 측정 장비 안에 딴딴이를 넣고서 마나와 반응시켰지, 제가 직접 들고서 실험할 생각은 못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발상의 전환이지만, 그 전환이 일어나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니까요. 이정민 키퍼가 아니었다면, 딴딴이의 새로운 사용법을 알아내는 데 꽤 오래 걸렸을 겁니다. 어쩌면 100년이 지나도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연구에 큰 도움을 준 이정민 키퍼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이정민은 마정석 도구 없이도 ‘묠니르’를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정민 키퍼는 마법사이기도 합니다. 그는 혼자서 마나를 다룰 줄 알기 때문에 마정석 도구 없이도 딴딴이를 통해 감정을 증폭, 아니 마나를...? 음... 이건 잘 구별이 안 되네요. 아무튼 이정민 키퍼는 혼자서도 딴딴이를 통해 증폭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자들의 손은 내려갈 줄 몰랐지만, 수연은 더 이상 지목하지 않았다.

“기자회견 이후에 따로 질문 시간을 가질 거니까, 궁금한 게 있으시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럼 김나리 수장님?”

수연이 회견장 가장자리로 빠지고, 다시 수장님이 단상에 올라왔다.

“발표 감사합니다. 우수연 연구원님. 덕분에 모든 사람이 ‘악마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악마의 힘’을 다스려야지, ‘악마의 힘’이 무섭다고 배척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겠죠. 전기나 마나처럼 우리가 쓰는 힘의 일종일 뿐이니까요.”

기자들이 대부분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새로운 힘의 등장에 정신이 없어 보였다.

채팅창도 마찬가지였다.

[이건 세기의 발견 아닌가?]

[그래도 악마의 힘이라잖아.]

[악마의 힘이면 어때, 멋있잖아!]

[키퍼가 아니라도 쓸 수 있으면, 나도 가능하겠지?]

[맞아, 일반인도 할 수 있다고 했잖아!]

키퍼가 아니라도 쓸 수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듯했다.

약 0.01%의 키퍼만 누리던 특권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긴 했다.

그전에 딴딴이라는 물건의 가격을 넘어야 하긴 하지만.

“저희 GGC 소속 이정민 키퍼는 이 새로운 힘을 누구보다도 빨리 썼을 뿐입니다. 단순히 그런 이유로 그에게 ‘악마’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은 부당합니다. 따라서 저희는 협회가 이정민 키퍼가 악마라는 주장을 철회하기를 원합니다.”

화면에 협회의 이자영 본부장이 잡혔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올라 있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가 악마가 아니라는 증거는 없는 것 같은데요. 저희는 여전히 그와 그의 동료들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계획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본부장의 말은 옳다.

나에겐 나의 결백을 주장할 증거가 없다.

협회 쪽도 나를 범인이라고 주장할 증거가 없긴 마찬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공권력이라는 힘이 있다.

그래서 저들의 비리를 파헤친 것이다.

저들을 저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이 문제가 해결되니까.

여기서 협회장, 본부장의 비리를 터트리고는 회견을 마치는 그림도 제법 깔끔할 것이다.

그래도 마무리는 필요했다.

나와 케이라, 엘레나는 비밀 공간에서 나와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갔다.

파밧! 파바밧!

전방에서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눈을 감지 않도록 눈에 힘을 주고서는 단상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GGC 소속 키퍼 이정민입니다.”

“이 악마!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난 거냐!”

한성민이었다.

참 낯짝도 두껍다.

뒤로 해 처먹은 게 얼마고, 이번 사태가 누구 때문에 일어났는데 아직도 저러는지.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누가 수습해줬는지는 알고 여기에 계시는 겁니까?”

“알지! 너의 자작극이 아니냐! 언데드를 소환하고, 뒤의 기사가 처리해서 너의 명성을 올리려는 속셈이었겠지!”

저게 협회에서 주장하는 바였다.

협회에서는 엘레나가 턴언데드를 쓰는 장면의 영상도 공개했다.

다만 화질이 굉장히 안 좋아서, 영상의 엘레나는 전혀 성스럽지 않아 보였다.

그녀의 분홍빛도 굉장히 어두침침했고.

“누가 수습했는지는 알고 계셔서 다행입니다. 저는 제 변호를 하기에 앞서 시청 사건을 수습한 기사, 엘레나의 억울함을 풀고 싶습니다. 일단 보시죠.”

“볼 게 뭐가 있단 말이냐! 악마는 악마...”

기자회견장에 자리한 커다란 스크린에 국정원에서 찾아낸 초고화질의 영상이 재생됐다.

꽤 먼 거리였지만, 분홍빛으로 빛나는 검과 갑옷이 선명하게 잡혀 있었다.

모든 이가 영상을 통해 엘레나의 성스러움을 느낄 순 없을 것이다.

그래도 엘레나가 언데드와는 거리가 먼, 혹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악마’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을 영상이었다.

“...”

영상은 본 한성민의 입이 저절로 다물어졌다.

영상을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협회가 그날 SNS에 올라온 모든 영상을 통제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기사 엘레나는 악마가 아닙니다. 그녀는 오히려 악마의 대척점에 서 있는 성기사입니다.”

“...어떻게 영상을 보고 알 수 있단...”

한성민의 트집에는 더 이상 어울릴 필요가 없었다.

엘레나가 내 뒤에서 걸어 나와 모두의 앞에 섰고, 투구의 바이저를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회견장의 모두는 넋이 나갔다.

그녀의 얼굴에는 성스러움이 넘쳐났으니까.

그걸 알기에 협회도 박세나 시점의 영상에서 엘레나의 얼굴을 적당히 편집했던 거다.

엘레나는 지금 여기에서 처음으로 얼굴 전체를 공개한다.

나는 역사적인 데뷔를 도와주기 위해 조용히 성욕을 끌어올렸고, 작은 게이트를 열어 그녀에게 신성을 받을 수 있게 해줬다.

“안녕하세요. 저는 자애와 사랑의 신, 루의 열세 번째 검, 엘레나 루입니다.”

한쪽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는 그녀의 등 뒤로 자연스러운 후광이 보였다.

신성 스탯 5의 효과, 루의 열세 번째 성기사가 가지는 위엄이었다.

이 정도면 현장에 있는 사람은 그녀가 성기사임을 믿을 수밖에 없다.

기자들은 이미 전부 넋이 나갔고, 본부장과 한성민도 반쯤은 넋이 나가 엘레나의 카리스마에 홀려 보였다.

물론 나도 그렇다.

엘레나 진짜 멋있다.

누나, 어서 날 가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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