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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83화 (83/137)

〈 83화 〉 chapter 11. VS 협회

* * *

83.

3일 뒤, 한국 호텔 기자회견장.

“긴장돼?”

“조금은.”

케이라의 물음에 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3일 동안 준비한 것들이 통할지 안 통할지 결정되는 시간이다.

“사실 난 너가 악마로 몰리는 게 좋아.”

“어? 왜?”

“그래야 그나마 경쟁자가 줄어들잖아. 이번에도 수연이랑 뭔가 한 거지?”

“어? 아니, 그게...”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이봐, 이러니까 진짜... 엘레나, 엘레나도 빨리 와서 좀 말려 봐요. 이대로 두고만 볼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케이라님. 다 정민님이 매력적이셔서 발생한 일인 걸요. 정민님께서 저를 옆에 두시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에요.”

“엘레나, 그런 식으로 나오면 독수공방해야 할지도 몰라요. 정민이 마음이야 뭐 알아서 하겠지만, 몸은 어쨌든 한 개뿐이라고요.”

“그건...”

엘레나의 표정이 굳는다.

미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섹스할 때 외에 엘레나는 플라토닉 러브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섹스만 하면 모든 걸 던져 버리고 섹스에만 몰입하게 되지만 말이다.

“걱정 마요, 엘레나. 제가 반드시 외롭게 만들지 않을게요. 정 안 되면 어디 가서 분신술이라도 배워올게요.”

“아, 정민님...”

엘레나의 두 눈에서 사랑의 레이저가 쏘아지는 느낌이다.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다니,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도 당연하다.

덕분에 자연스레 긴장도 풀린다.

으음... 다 케이라 덕인가?

“어, 이제 시작한다.”

우리가 있는 곳은 GGC의 기자회견장 대기실 내 비밀 공간.

비밀 공간에 있으면서도 투명화 마법으로 몸을 숨긴 상태다.

그리고 방금 대화도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왜냐하면 대기실과 기자회견장에 협회 사람들이 쫙 깔렸기 때문이다.

수장님이 발표를 끝내기 전에 잡히면 발표 자체가 무산될 수 있으므로 굉장히 조심해야만 했다.

“GGC 수장 김나리입니다. 이곳에 오신 기자님들, 영상을 시청하고 계실 국민 여러분, 환영합니다.”

스마트폰 화면 중계를 통해 회견장 내부를 볼 수 있었다.

소리는 이어폰으로 듣는 중이다.

“인사는 됐습니다. ‘악마’를 옹호하다니, 제정신인가요? 지금 공범인 걸 자수하는 겁니까?”

앞자리에 앉아있던 한성민이 일어났다.

한성민의 옆에는 이자영 본부장도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저놈 때문에 일이 여기까지 왔는데, 자숙이나 할 것이지 또 나대고 있다.

그동안 저런 놈을 팬질 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부끄럽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스윽.

케이라가 내 손을 잡아준다.

내 조용한 분노를 느낀 모양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건 취소다.

잘못하면 케이라도 못 만날 수 있으니까.

“질문 시간은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독단적으로 행동하니까 해골들이 게이트 밖으로 나온 거 아닙니까.”

“아니, 지금...”

수장님 최고!

속이 다 시원하다.

한성민에 대한 여론은 현재 진행형으로 안 좋아지고 있다.

사건 당일로부터 5일, 이터널 게이트 내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으면 모든 게 괜찮았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악마’라고 여겨지는 내가 1차적 가해자고, 한성민이 2차 가해자라고 보는 게 현재 여론의 흐름이었다.

“명예훼손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거라면 그만두세요. 저는 지금 사실에 입각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겁니다. 사건 당일 한성민 부서장이 속칭 ‘이터널 게이트’로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후로 자극받지 않은 이터널 게이트는 지금까지 조용하니까요. 무엇보다 한성민 부서장은 같이 게이트로 들어갔다가 도망도 못 치고 그 자리에서 죽은 키퍼 20명과 그의 도망에 휘말려 돌아가신 시민의 목숨에 직간접적인 책임이 있습니다. 저는 이에 대해 형사 소송을 진행할 생각입니다.”

무슨 스포츠 중계라도 되듯이, 화면에 한성민의 일그러진 표정이 잡힌다.

바로 수장님의 예쁜 얼굴이 화면을 채웠지만, 잠깐 나온 표정만으로 실시간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억울해? 지금 억울하다는 건가?]

[아니, 뭘 잘했다고?]

[저런 놈은 바로 xx를 해야]

...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현재 협회는 이정민의 동료 2명, 우리 크루가 크루원으로 인정하는 이세계인 2명을 악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근거는 ‘이정민이 악마의 힘을 쓴다’입니다. 일단 ‘이세계인=악마’라는 공식은 틀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보충 설명해줄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중계화면이 스크린으로 옮겨진다.

스크린에 사람 얼굴이 뜨자마자, 기자회견장에서 헉하는 소리가 연달아 터진다.

나도 아는 얼굴이다.

[미국 키퍼 협회장 조지 랜스]

키퍼계의 거물이 직접 증언을 해줄 줄은 몰랐다.

딴딴이의 힘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증거다.

[안녕하십니까, 한국 국민 여러분, 그리고 전 세계 시민에게 인사드립니다. 친구로부터 한국의 사태에 대해 전해 들었고, 새로운 사실을 발표하기 좋은 기회라 여겨서 이렇게 영상을 찍게 되었습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이세계인은 미국에도 존재합니다. 지구인이 아닌 다른 지성 생명체가 있다는 사실이 사회에 혼란을 가져올 것 같아 비밀로 하고 있었습니다만, 한국의 키퍼 협회가 이세계인의 존재를 밝혔다니 더 이상 숨기는 것도 의미는 없겠죠. 그리고 이대로 모든 이세계인이 악마라는 누명을 쓰게 둘 수도 없고요. 미국의 이세계인은 당연히 악마가 아닙니다. 다른 나라의 이세계인도 악마가 아니라고 전해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한국의 이세계인도 악마가 아니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이 문제는 현장이 더 잘 알겠지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국정, 인종, 종교를 넘어 차원이 다른 사람, 이세계인과의 교류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럴 때 편견과 증오로 새로운 세계를 배척하기보다는, 넓은 마음으로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는 게 비교적 옳다는 걸 그간 지구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이상입니다.]

그리고 영상이 바뀌었다.

이번에 등장한 건 녹색 머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의 귀는 거의 15cm나 되는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나나리루리 베네시아입니다. 저는 엘프입니다.]

그녀는 서툰 영어로 인사를 했다.

채팅창이 난리가 난 건 당연한 일이다.

[와아아아아!]

[엘프! 엘프! 엘프! 엘프!]

[가짜 아니야? 저거 코스프레야!]

[미국 키퍼 협회가 거짓말을 하겠냐, 생각을 좀 해]

[미친, 진짜 엘프가 있어?]

채팅창 반응을 보진 않았겠지만, 엘프는 채팅창을 읽은 듯이 행동했다.

바로 귀를 구부린 것이다.

15cm 되는 귀가 접혀서 입술까지 닿는 광경은 굉장히 이질적이었다.

[이 귀는 장식이 아닙니다. 진짜 제 귑니다. 다른 이세계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모르지만,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언어 소통이 원활했다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매우 아쉽습니다. 다음에 만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나도 엊그제 처음으로 다른 이세계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와 같은 특성을 가진 키퍼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이야기를 못 들었으니까.

아무튼 지금 또 다른 이세계인이 있다는 건 나에게 큰 도움이다.

모든 이세계인이 악마가 아니라는 주장에 완벽한 증거니까.

“일단 저 영상은 진실이고 이는 신용산 크루에서 보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이 많으시겠지만, 제 발표를 끝까지 들은 후에 질문해 주시길 바랍니다.”

기자들은 질문을 안 했지만,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사람들은 채팅으로 질문 러쉬를 했다.

중계를 보고 있는 사람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벌써 백만이다.

“물론 이걸로 저희 크루 소속 이세계인 2명이 악마가 아니라고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협회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것이죠. 다음은 ‘악마의 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도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참고로 이 영상은 미국 키퍼 협회에서 보내준 영상입니다.”

회견장 스크린에 외국인의 얼굴이 나타났다.

자막에는 ‘악마에 대한 지식 특성을 가진 키퍼’라고 적혀 있었다.

[저는 미국 키퍼 협회 소속 제니퍼입니다. 전투 능력은 없고, 지식 특성만 가지고 있죠. 보내주신 영상은 잘 봤습니다. 악마들은 분명 서로 싸우고, 서로를 이용하는 데 능숙합니다. 차원을 넘나들면서 힘을 키우는 데 혈안이 돼 있는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악마들만 ‘악마의 힘’을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악마의 힘’이란 감정이 폭발했을 때 발생하는 힘을 말하며,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쓸 수 있고, 항상 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쓰는 악마의 힘이 현실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약한 데 반해서, 악마가 쓰는 악마의 힘은 현실을 파괴할 정도로 강하다는 차이가 있죠.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또 악마의 힘을 눈에 보일 수준으로 쓸 수 있다고 해서 ‘악마’가 아니라는 겁니다. ‘악마’의 정의 중 가장 중요한 건 ‘타인에게서 강제로 감정을 훔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걸 할 수 없다면 ‘악마’가 아닙니다.]

영상은 한 명이 아니었다.

[저는 프랑스 키퍼 협회 소속...]

[저는 브라질 키퍼 협회 소속...]

다른 국적의 키퍼 열 명의 이야기가 다 같았다.

악마의 힘은 누구나 쓸 수 있으며, 악마의 힘을 쓸 수 있다고 누구나 악마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악마가 되는 조건은 타인에게서 강제로 감정을 훔칠 수 있어야 한다.

“이 영상의 진위는 각국 키퍼 협회에서 보증합니다. 더불어 이 키퍼들의 인터뷰 무편집본이 지금 막 공개되었을 겁니다. 각자 보시고 판단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협회를 무시하는 것입니까? 협회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발언 아닙니까? 정작 악마와 동조하며 그동안 숨긴 건 GGC 아닙니까?”

이자영 본부장이 참지 못했는지 마이크를 뺏어 들며 쏘아붙였다.

수장님은 포커페이스와 차분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죄송하지만, 아직 제 말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저는 협회에서 거짓을 말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협회의 주장을 위해서 말을 편집했다고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희처럼 인터뷰 무편집본을 공개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아니면 그 키퍼들을 직접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위 영상에 나온 각 나라 키퍼 중 일부는 이미 한국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3일 만에 준비한 기자회견이라 함께 참석하지 못한 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무편집본은 바로 공개하라고 지시하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이정민이 악마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겁니까? 그는 이미 악마의 힘에 익숙해 보이는데요? 어쩌면 이미 다른 사람의 감정을 빼앗고 다니는 걸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까 질문은 제 발표가 끝나고 받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계속 진행을 방해하시면 잠시 나가 계시라고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중계 화면은 어느새 포커페이스의 수장님과 약간 붉어진 얼굴의 이자영 본부장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이자영 본부장은 몇 번 입술을 오물락 거리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로서는 한 번 태클을 걸어 사람들의 관심을 바꾸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계 화면은 대결 구도가 잡혀 있었고, 이자영이 꼬리를 내린 것처럼 그려졌다.

채팅창 반응도 그랬다.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틀딱]

[GGC 수장 눈빛 죽인다. 눈빛에 베이겠는데?]

[무서워서 쫄았네.]

[아니, 질문할 수도 있는 거잖아?]

[ㅅㅂ 끝나고 시간 준다는데 또 갑질]

옹호하는 댓글도 있었지만, 이자영 본부장을 까는 댓글에 금방 묻혔다.

이런 대결 구도는 수장님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외모에서 전해지는 카리스마가 일단 차이가 너무 난다.

수장님은 예쁘고 멋있지만, 이자영 본부장은 평범하게 생겼으니까.

진짜 수장님이 최고다.

“이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일단 모든 사람이 ‘악마의 힘’을 쓸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개인적 경험에서 미루어 볼 때, 악마의 힘 같은 걸 단 한 번도 써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전문가에게 자문했고, 그분이 직접 이 자리에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또각또각.

투피스 정장을 입은 수연이가 대기실에서 나와 단상으로 올라갔다.

정장 차림에선 평소 볼 수 없었던 진지함이 느껴졌다.

여전히 귀엽지만.

나는 속으로 떨고 있을 수연이를 응원했다.

“안녕하세요. 신용산 크루 수석연구원 우수연입니다.”

수연아, 파이팅!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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