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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75화 (75/137)

〈 75화 〉 chapter 10. 이터널 게이트

* * *

75.

철원,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 이름 없는 산 중턱.

삐빅, 삐비빅.

산이라면 으레 들려야할 벌레들 소리 대신에, 이곳은 기계음이 들렸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는 비쩍 말라 있었고, 바닥의 풀들은 생기를 잃은 채 노랗게 죽어 버렸다.

벌레들의 시체가 바닥에 가득하고, 작은 동물들은 처음부터 이 땅으로 들어올 생각도 안 했다.

심지어 하늘의 새들도 이 땅 위를 피해 날아다니고 있었다.

코드 네임, 죽음의 땅.

반경 50m 내에 생물이라고는 인간밖에 없었다.

인간조차도 내내 머물기는 힘들어, 교대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원래 이 정도 크기는 아니었다고 들었어요.”

우리를 이곳으로 안내해 준 박세나가 말했다.

그녀는 단정한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문제라면 키퍼의 기본 전투복이 타이즈형 수트라는 것 정도?

박세나의 섹시 다이너마이트 바디는 언제 봐도 절로 눈이 가고 만다.

“그러면요?”

“저기 중간에 파인 곳 보이시죠? 딱 그 정도였다고 하네요.”

죽음의 땅 중앙 부분, 직경 15m 정도 되는 부분은 움푹 파여 있었다.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꽤 깊이 파낸 것 같다.

“이건 케이라보다 엘레나가 나서야 할 것 같은데요. 어때요, 엘레나?”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아요. 하지만 반드시 이 땅을 만드는 근원을 막아야 합니다. 이대로 두면 말도 안 되는 크기로 성장할 수도 있겠어요.”

“동감이에요.”

협회를 경계한다고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다.

이 일은 딱 봐도 모두의 일이다.

“잘 오셨습니다.”

중저음의 남자 목소리였다.

흔히 동굴 목소리라고 불리는 매력적인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니, 다섯 명의 남녀가 보였다.

그 중 한 남자가 약간 앞에 서 있었다.

박세나가 그를 소개해주었다.

소개하지 않아도 누군지 알지만.

“아, 이제 오셨네요. 이쪽은 대몬스터전담부서장 한성민, 이쪽은 GGC의 이정민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용산의 영웅.”

한성민이 손을 내밀었다.

“저야말로요. 만나서 정말로 반갑습니다.”

나는 한성민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잡았다.

내 손이 떨리고 있는 걸 나도 알고, 그 자리에 모두가 알았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팬입니다. 이렇게 만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싸인 한 장 가능할까요?”

“네?”

한성민은 전국민이 다 아는 S급 키퍼다.

한국 최초의 S급 키퍼이기도 했다.

나는 그를 보면서 키퍼의 꿈을 키웠다.

한때는 그의 기사를 따로 모을 정도로 깊이 몰입했었고.

그 한성민을 실제로 만나다니!

직접 보고도 믿기지가 않는다.

키퍼가 된 건 내 인생에서 제일 잘 한 일이다.

나는 미리 준비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여기 부탁 드려요. 계신 줄 알았으면 책을 들고 왔을 텐데... 아쉽네요.”

“설마... 제 책이요?”

“당연하죠! 키퍼라면 누구나 읽어야할 책이잖아요. 키퍼로서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잘 배울 수 있으니까요.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키퍼로서의 사명감도 생기고요. 정말로 많이 배웠습니다.”

“...이거, 정말 쑥스럽네요.”

그가 종이와 펜을 받아들었다.

쓸 곳이 없는 것 같아서 내가 몸을 돌렸다.

“여기다 대고 쓰세요.”

“...네? 아, 네.”

스윽스윽.

한성민이 싸인을 하는 동안, 나는 나를 보는 세 사람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케이라는 늘 그렇듯 덤덤했고, 엘레나는 재밌다는 듯이 웃고 있다.

그리고 박세나는 경악한 채 나를 쳐다본다.

왜? 당신은 덕질을 해본 적이 없나?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횡재했네요. 이건 가보로 삼...”

나는 말을 잠시 멈췄다.

나는 괜찮은데, 나의 영웅, 나의 히어로께서 많이 당황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옛날 생각이 나서 조금 들뜬 모양이다.

“...농담입니다. 싸인 감사합니다. 한 때 진짜 팬이었어서... 물론 지금도 팬이지만, 악성은 아니에요. 악성은.”

“지금 누구보다도 악성 같은데요. 이정민씨.”

“아마추어같이 왜 그래요. 집 앞에 대기는 타고 있어봐야 악성이지.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어요. 박세나씨.”

박세나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물러갔다.

한성민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거부했다.

...이제 진짜 정신 좀 차려야겠다.

“이쪽은 케이라, 엘레나입니다. 들으셨던 대로의 능력을 지닌 키퍼입니다.”

두 사람에 대한 정보는 리더인 한성민에게만 전달했다.

그의 뒤에 서 있는 협회 키퍼들은 모른다.

모르지만 그들은 케이라와 엘레나를 보면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왜냐고?

그냐 둘 다 너무 예쁘니까.

둘이 함께 서 있으니까, 죽음의 땅도 꽃밭처럼 보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들어가 보시죠.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물론이죠. 그러려고 온 거니까요.”

상황은 심각했고, 시간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우리는 막 이곳에 도착했지만, 쉴 틈도 없이 죽음의 땅으로 들어갔다.

“이 곳을 발견한 건 1달 반 전입니다. 그때는 동굴이 있었고, 동굴 주변이 지금처럼 전부 꺼멓게 죽어 있었습니다.”

“동굴이요?”

“네. 움푹 들어간 저 부분에 동굴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지만요.”

한성민의 말처럼 동굴은 흔적도 없었다.

경사진 비탈면에 아래로 큰 구멍만 있을 뿐이었다.

“땅을 깊이 파내기 위해 동굴을 없애야만 했습니다. 그리고서도 한참을 더 파내려가서야 우리는 이 현상을 일으킬만한 무언가를 발견했습니다. 자, 보시죠.”

우리는 구멍의 가장자리에 서서 구멍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멍은 생각 이상으로 깊었다.

약 10m 정도?

구멍 아래에는 평평한 땅이 있었고, 땅 위에는 흰색 글자가 가득했다.

사람들은 구멍 아래에서 가장자리의 흙을 파고 있었다.

그 아래에도 흰색 글자가 보였다.

흰색 글자 중에 몇 개는 내가 읽을 수 있는 룬어였다.

협회에서 말한 마법진이었다.

“...크네요.”

마법진은 거의 지름 15m짜리로, 구멍과 거의 같은 크기였다.

“큰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지금도 커져가고 있죠. 어떠십니까. 뭔가 알 것 같나요?”

“케이라?”

“일단 내려가서 자세히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안 보이는 부분도 있고요.”

우리는 벽에 걸쳐져 있는 사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아래에서 보니, 흰색 글자가 땅 위에 5cm 정도 떠 있었다.

글자와 우리 몸이 겹치기도 했다.

“처음 여기까지 파내려 왔을 때, 그러니까 2주 전의 마법진 크기는 지름 10m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죽음의 땅도 반경 30m 정도 밖에 안 됐습니다. 빠르게 조치를 취해야 하는 상황인데, 저희는 마법진에 대해 몰라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케이라와 엘레나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마법진을 살폈다.

나도 룬어를 조금 읽을 수 있지만, 내가 참여하는 것은 방해만 될 것이다.

그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

바로 기운을 느끼는 거다.

마법진과 몸이 닿자마자, 미세한 기운이 마법진으로 빨려 들어가는 게 느껴진다.

전에도 느껴본 성질의 기운으로, 사령술사의 힘과 거의 동일했다.

나는 감각을 확장해서 마법진으로 흘러들어가는 기운을 따라갔다.

기운은 어딘가로 슉하고 들어가는 가 싶더니, 그곳에 있는 기운과 합쳐졌다.

합쳐진 기운은 거대했다.

거의 사령술사가 죽고 난 후 남긴 에너지양과 맞먹었다.

즉, 이 기운이 터지면 철원은 지도에서 삭제된다.

“헉...”

나는 그 크기에 놀라 황급히 감각을 닫았다.

“이정민씨?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습니다. 혹시, 마법진을 파괴하려고 시도했었나요?”

“네. 최후의 수단이었지만, 엊그제 한 번.”

마법진을 함부로 건드리는 게 위험하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게이트 내에서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마법진이 종종 발견되었고, 잘못 건드린 키퍼들이 많이 당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는 죽은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마법진이 커지고, 죽음의 땅이 넓어지고 있다면 나라도 건드릴 수밖에 없었을 거다.

어떻게든 막아야 하니까.

물론, 지금부터는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된다.

잘못 하다가 에너지가 폭발이라도 하면 재앙이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군요.”

“네, 다행히... 다행히요? 아쉬운 게 아니라요?”

“다행입니다. 이 마법진에 모인 에너지를 잘못 건드리면, 이 주변이 다 날아갈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로 건드리지 마세요.”

“그런...”

그럼 어떻게 하죠?

라고 얼굴로 묻는 한성민에게 나는 미소로 답해주었다.

“걱정 마세요. 제 친구들이 반드시 안전한 방법을 찾을 테니까요.”

나는 케이라와 엘레나를 믿는다.

둘은 반드시 길을 찾을 것이다.

안 되면?

안 되면 또 백화를 한 번 더 피우면 되지.

이번에도 저번처럼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

“...나는...”

“...불사신이다.”

사령술사 베칸쵸는 이세계에 오자마자 두 개의 보험을 들어놓았다.

앞을 바라보지만, 늘 뒤를 염두에 두는 건 마법사로서의 기본 소양이니까.

그는 이정민의 창에 맞고 죽음에 이른 순간, 육체를 벗어나 정신만 남아 있는 상태로 철원으로 향했다.

정신은 거의 빛의 속도로 움직였고, 그가 몸을 숨기던 가정집에 도착하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 집의 거실에는 수십 개의 복잡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고, 그 중앙에 한 여자가 누워 있었다.

베칸쵸의 시중을 들던 메이드복 여자였다.

동생과 부모가 베칸쵸에게 식사로 먹힌 비운의 여자.

그녀 자신에게 남은 운명도 베칸쵸에게 먹히는 것 밖에 없었다.

베칸쵸는 곧바로 그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의식은 이미 오래 전에 지워 놓았기에, 그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건 없었다.

‘좋아, 이제 힘을 끌어오기만 하면...’

그가 천 년간 모아놓은 ‘삶’의 에너지, 그걸 죽어 버린 몸에서 이곳으로 가지고 오면 그는 새로운 육체로 되살아나게 된다.

하지만 그때 문제가 생겼다.

‘...왜? 왜 힘이 안 넘어 오는 거지?’

육체와 정신의 연결은 끊겼지만, 정신과 힘은 아직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연결을 통해 여전히 힘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힘이 움직이지 않았다.

안간힘을 써봐도, 힘은 그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힘을 느낄 수도 없게 됐다.

‘...이게 무슨...!’

이건 단순히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그 힘이 없다면, 그는 자신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차원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케이라와 엘레나가 이정민의 마력으로 자신을 유지하듯, 그는 자신의 힘을 방파제 삼아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방파제가 사라지자, 그의 정신이 깎여 나가기 시작했다.

‘으으윽, 빌, 어...을...’

메이드의 정신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그 정신을 방파제 삼아 숨겠지만, 그는 육체를 쉽게 통제하기 위해서 메이드의 정신을 아예 날려 버렸다.

여기 남아 있는 것은 아직 죽지 않은 육체일 뿐이었다.

‘...왜, 왜 이렇게 된 거지?’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빌어먹을 인큐버스.

인큐버스 이정민의 힘은 굉장히 까다로웠다.

심장을 재생하지 못한 건 인큐버스의 힘이 심장에 남아 방해했기 때문이다.

천 년간 모은 힘을 다 쓸 수 있었다면 애송이 악마의 방해 따위 무시하고 육체를 회복했겠지만, 이곳은 그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가 이 차원에 넘어와 모은 힘으로는 그의 모든 힘을 감당할 수 없었고, 새로운 육체를 찾아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놈의 힘이 정신과 영혼에도 영향을 미쳤던 모양이다.

그의 정신과 힘의 연결을 끊을만한 원인은 그 ‘인큐버스의 힘’밖에 없었다.

‘성욕... 그래, 그 놈들의 힘은 내 힘과 비슷하지...’

베칸쵸는 생존 본능과 번식 욕구의 유사성을 검토했다.

어쩌면 그게 그의 패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마지막까지 마법사처럼 죽어 갔다.

그렇게 지난 천 년간, 10개의 차원에서 악명을 떨친 사령술사 베칸쵸는 차원의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

베칸쵸의 죽음으로부터 며칠 뒤, 자정.

철원 사금리의 한 집에서 메이드가 눈을 떴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여전히 베칸쵸처럼 빨갰다.

조명하나 없는 거실의 어둠 속에서도 붉은 안광이 선명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멈췄다.

그녀의 눈앞에는 벽과 액자만 있었지만, 그 벽 너머, 또 길과 산 너머에는, 협회가 조사하는 마법진이 있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남은 지식과 자신을 둘러싼 마법진을 유지하는 힘을 가지고, 공간 이동 마법을 펼쳤다.

팟.

그녀가 협회가 파놓은 구멍 위, 원래는 동굴이 있어야할 위치에 나타났다.

그녀는 동굴이 없어 졌다고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법진을 비추는 불빛이 있다고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빛 때문에 더 어두워진 허공에서, 마법진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을 뿐이다.

“열려라.”

사령술사의 힘, ‘삶’이 그녀의 말을 따라 마법진 적힌 문을 열었다.

...끼이익.

아주 작은 소리, 시전자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그녀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만 문이 열린 걸 알 수 있었다.

한 달 반 동안 생명 에너지를 모으고, 차원 밖의 에너지를 붙잡아 두었지만, 그 에너지로도 아주 조금 문을 여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결국 문은 열렸고, 차원을 관장하는 시스템은 문으로 흘러 들어오는 에너지를 처리해야만 했다.

바로 이터널 게이트로.

철컥, 철컥.

그녀는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이터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연 자가 쓸 수 있는 특권을 쓰기 위해서.

이게 베칸쵸가 들어 놓은 두 번째 보험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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