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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58화 (58/137)

〈 58화 〉 chapter 8. 데이트

* * *

58.

오크 치프.

오크류 몬스터 중 상급에 해당하는 종이다.

덩치는 오거보다 컸다.

키만 4m 정도.

오거보다는 약하다는 평이지만, 힘만큼은 오거도 당할 수 없다고 한다.

주무기는 대부분의 오크들이 쓰는 대도로.

대로로 벤다기 보다는 대도로 쪼갠다는 말이 어울리는 몬스터였다.

슈우웅.

그 대도가 나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덩치에 맞는 무시무시한 크기에 그에 걸맞지 않는 빠른 속도.

나는 재빨리 옆으로 굴러 땅을 피했다.

콰아앙!

“크윽...”

대도와 땅이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소리와 여진만으로도 몸이 들썩였다.

그래서 두 번째 공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슈우웅.

대도는 내 몸을 반으로 짓눌러 버릴 기세로 떨어졌다.

등 뒤에 매고 있던 오크의 도를 꺼낼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럴 시간도 없고, 부딪히자마자 부서질 테니까.

대신 딴딴이를 들었다.

딴딴이라면, 적어도 부서지지는 않겠지!

캉!

딴딴이 묠니르, 망치의 헤드는 치프의 대도에 비해 극히 작았다.

그러나 부서지지 않았다.

역시 딴딴이.

물론 내 팔은 버틸 수 없었다.

날이 하나도 없는 대도가 바로 내 눈앞에서 나를 짓누르기 직전이었다.

온힘을 다해 봐도 대도는 약간 느려질 뿐이다.

“취이익!”

압력이 사라진 건 케이라의 공격 덕분이었다.

나는 급히 옆으로 굴러 일어났다.

콰직, 콰직.

치프가 허공에서 돋아난 얼음 기둥을 부쉈다.

별다른 기술도 없이, 대도만 한 번 휘두르면 케이라가 만든 얼음이 산산조각 났다.

치프의 몸에는 그 어떤 핏자국도 없다.

이제껏 유효타만 날렸던 케이라도 A급 몬스터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정민아! 성욕이야!”

게이트 내의 몬스터는 눈치 채지 못하는 내 필살기.

치프의 두꺼운 가죽을 뚫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재빨리 치프의 주변 건물로 들어갔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가니 창으로 오크 치프의 뒤통수가 보였다.

“취이익!”

치프는 귀찮다는 듯이 연달아 생성되는 얼음 기둥을 쳐내고 있었다.

케이라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2초? 3초?

그 전에 성검기를 완성시켜야 했다.

불끈.

생명의 위기 때문일까.

발기는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우웅.

성욕도 주변에 충만했다.

인간의 3대 욕구라는 식욕, 수면욕, 성욕.

나는 죽음의 순간까지 성욕을 채우고 싶다.

최고의 공격을 하기 위해, 성욕을 있는 대로 대도로 밀어 넣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파직.

대도에 금이 가더니, 순식간에 가루로 변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뭐야!”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나는 손잡이만 남은 도를 던져 버리고는 주변을 살폈다.

비록 장인 거리지만, 내가 들어온 건물은 카페였다.

주변에 무기라고 할 만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아까도 치프의 검을 막아낸 딴딴이 뿐.

날붙이도 아닌데, 이걸로 될까?

주저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얼음 기둥은 점점 가늘어지고, 치프는 이제 케이라의 위치를 안 모양이니까.

얼음 기둥 말고도 다른 공격이 치프에게 닿는 것 같았지만, 치프는 가소롭다는 듯이 콧소리만 냈다.

“취익, 취익.”

난 딴딴이를 들고서 성욕을 모았다.

검기는 어차피 이미지다.

날붙이는 이미지를 형성하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뿐이야.

망치라도, 이미지만 제대로 만들면 날카롭게 만들 수 있다고!

급박한 전투 상황에서도 야한 망상을 멈추지 않는 나의 상상력이라면!

우웅.

...어라?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야한 것을 상상하며 성욕을 망치에 집어넣고 있는데, 그럴수록 망치가 분홍색을 띠었다.

난 아직 날카로운 것을 상상하지도 않았는데, 망치가 색을 띠는 것을 넘어서서 커지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그때부터였다.

망치는 강제로 내 힘을 빼앗아가기 시작했다.

주변에 모인 성욕을 싸그리 다 흡수하더니, 얼마 안 되는 내 몸 속의 마나도 싸그리 긁어갔다.

이어서 심장과 뇌가 졸리는 느낌이 났다.

“크윽...”

위험했다.

이건 생명력이 빨리는 거다.

이대로라면 뇌가 녹을지도 모른다.

손을 놓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올 게 뻔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본능적으로 이 과정이 치프를 죽일 수 있는 과정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어떻게든 마나를 모으자, 마나를.

나는 아픈 와중에도 룬어를 떠올리며 주변 마나를 망치 근처로 밀어냈다.

효과가 있었는지, 심장과 뇌가 조금은 편해졌다.

그제야 망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원래 망치 주변으로 홀로그램처럼 거대한 핏빛망치가 떠올라 있었다.

망치 헤드 크기가 치프의 머리 크기와 비슷할 정도로 컸다.

전체 크기는 치프의 대도만 했다.

우우웅.

그리고 망치는 아직도 커지고 있었다.

“취이익?”

치프도 망치 주변의 에너지를 눈치 챈 건지,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치프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취이익!”

밖의 상황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안 봐도 비디오다.

대도를 높이 쳐들고 있겠지.

이 건물과 나를 한꺼번에 날려버릴 생각일 것이다.

그렇게는 안 돼!

“하아압!”

나 역시 망치를 그대로 휘둘렀다.

옆으로 눕혔다가 위로 올라가는 방식으로.

콰지지직.

망치가 카페의 가구를 부수며 날아가는 동안, 치프의 대도는 벽을 부수며 등장했다.

마침내 두 개의 큰 무기가 부딪혔다.

쾅!

대도가 반으로 부서지고, 부서진 반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훙훙훙훙.

날아가는 소리가 굉장히 흉흉했다.

하지만 흉흉한 소리와는 반대로, 대도를 잃은 치프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다.

나는 앞으로 한 발 내딛으며, 치프의 머리를 향해 망치를 내려쳤다.

“취익!?”

치프가 뒤로 물러나며 피했지만, 망치는 아직도 내 고혈을 빨아 먹으며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치프는 완전히 피하지 못했고, 망치가 가슴팍을 스쳐 지나갔다.

빠가가각.

끔찍한 소리가 났다.

갈비뼈가 다 부러지는 소리였다.

치프의 가슴이 완전히 열리고, 안의 내장이 다 드러났다.

그로테스크한 푸른 심장은 아직도 열심히 뛰고 있었다.

“취아악!”

“크윽!”

치프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나도 비명을 지르며 딴딴이를 놓았다.

더 들고 있다가는 나 역시 죽을 것 같았다.

딴딴이는 내가 놓자마자 원상태로 돌아갔다.

쩌저적.

얼음 기둥이 어는 소리가 났다.

케이라가 마지막 일격을 가한 모양이다.

가슴이 열리고 심장이 드러났으니,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후우, 후우...”

나는 숨을 고르며 일어났다.

눈을 감기만 하면 금방 꿀잠에 빠질 것 같았지만, 아직 쉴 때가 아니다.

스르륵.

발로 딴딴이를 내 쪽으로 끌어와 내 발 사이에 두었다.

소환사가 언제 와서 딴딴이를 가져갈지 몰랐다.

적어도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는 딴딴이를 지켜야 했다.

“정민아! 괜찮아? 정민아!”

케이라가 제일 먼저 올라왔다.

그녀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전신은 땀으로 범벅이고, 얼굴에도 피로함이 가득했다.

그녀도 극한까지 마법을 쓴 것 같았다.

와락.

케이라가 달려와 나를 안았다.

그년가 내 몸을 더듬고, 내 얼굴을 만진다.

“괜찮아? 괜찮은 거 맞지?”

“괜찮... 읍.”

“하읍.”

갑작스러웠지만, 케이라와의 키스는 언제나 환영이다.

무엇보다도 이 키스는... 확인이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살아 있다는 확인.

“하아... 하아...”

“하아... 하아...”

꽤 긴 키스가 끝나고 우리는 떨어졌다.

케이라가 붉어진 얼굴로 나를 봤고, 나도 그녀를 보았다.

“...다행이다. 이번에도 살았네.”

“덕분에. 고마워, 정민아.”

“내가 더 고마워.”

“내가... 아니다, 몸은 진짜 어때?”

많이 피곤하지만, 그 뿐이다.

“괜찮...”

파직.

그때, 반지가 깨졌다.

내가 가지고 있던 유일한 아티팩트, ‘최후의 한 발’이었다.

반지는 반으로 쪼개짐과 동시에 산산조각 나서 먼지처럼 흩어졌다.

오크의 대도와 같은 운명이었다.

“...이러면 괜찮은 거 아닐까?”

“...일단은, 괜찮겠네. 하지만 다음에는...”

“쓰면 안 된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이번에는 운이 좋았을 뿐이다.

다음번에는 쓰면 아마 죽을 것이다.

“밖은? 소환사는 어떻게 됐어?”

“있어 봐. 내가 볼게.”

케이라가 고개를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거리를 살폈다.

나는 창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서, 귀로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

거리는 조용했다.

오크들은 다 죽은 걸까?

소환사는 도망간 걸까?

“정민아, 이쪽으로 와 봐.”

“응? 왜? 무슨 문제 있어?”

“있을지도... 그, 딴딴이도 들고.”

딴딴이까지?

나는 평소와 다르게 성욕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딴딴이 묠니르를 집었다.

다행히, 망치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뭔데?”

“잠깐만...”

화앗.

케이라가 마법을 썼다.

그녀가 자주 쓰는 청결해지는 마법을 내게 쓴 것이다.

어째서인지 옷은 먼지투성이 그대로였지만, 얼굴만은 굉장히 산뜻했다.

“자, 이제 밖에 봐봐.”

“...무슨 일...”

“와아아아아!”

내가 고개를 내밀자, 건물 밑에 서 있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나는 놀라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와아아아!”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뭐해? 빨리 나가.”

“잠깐, 아니, 그게...”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는 없었다.

케이라가 나를 밀어 버렸으니까.

나는 다시 거리에 얼굴을 내밀었고, 사람들은 계속 환호했다.

“와아아아!”

“짱이에요!”

“구해줘서 고마워요!”

사람들, 키퍼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살았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들은 키퍼들이기에, 오크 치프가 얼마나 강력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저러는 것이다.

방금, 죽다 살았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거다.

그리고 나도, 오크 치프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다.

우연이 겹치긴 했지만, 그 오크를 물리친 건 나다.

그래, 나다.

나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딴딴이를 위로 들었다.

“와아아아아!”

환호성이 두 배는 커진 것 같다.

그에 호응하듯, 안내 방송이 모든 걸 마무리 지어 줬다.

[빌런 코드 네임 소환사는 도주 했습니다.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시민들은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반복합니다. 빌런 코드 네임 소환사는...]

+++

[저기, 아무리 그래도...]

[괜찮아요. 저희는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제 몫은 전부 GGC로 전해 주세요. GGC의 이정민입니다.]

[아니, 그래도...]

나와 케이라는 우리를 붙잡는 신용산 크루의 리더를 뿌리치고, 장인 거리를 떠났다.

신용산 크루 입장에서는 나와 케이라에게 저녁 식사부터해서 크게 대접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나에게는 저녁 예약을 해둔 5성급 호텔 스카이 라운지가 더 소중했다.

케이라와 둘이서만 하는 몇 안 되는 식사니까.

옷과 몸의 찝찝함은 케이라의 마법으로 털어내고, 서울의 야경을 배경으로 코스 요리를 먹었다.

요리와 분위기 모두 완벽했다.

중간에 예상치 못한 일이 있었지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데이트 아닐까?

물론 호텔까지 왔는데 그대로 끝낼 리 없다.

다음은 미리 잡아 놓은 방에서...

“...조금 쉴래?”

“...응.”

하지 않았다.

평소의 우리답지 않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쉬는 데 동의했다.

옷을 입은 채,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서.

“...”

“...”

나와 케이라는 서로를 살포시 껴안고서 잠에 빠졌다.

고생했어, 케이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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