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chapter 8.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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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게이트 폭주.
말 그대로다.
게이트가 폭주해서 게이트 내의 것들, 주로 몬스터를 뱉어내는 현상이다.
이유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극히 드문 확률로 일어난다는 것과, 폭주한 게이트의 주인은 폭주와 동시에 죽는다는 것만 알고 있다.
이번에 폭주한 게이트는 오크 게이트인 모양이다.
달려오는 오크의 풍채를 보니, 내가 매번 상대하던 것과 비슷하다.
심지어 회색 오크다.
아마도 D급으로 추정된다.
조금 전 몸통 박치기에 나가떨어지는 오크라면, D급이 거의 확실하다.
그래도 나 혼자라면 세 마리 오크에 죽었겠지만, 케이라가 나선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나는 시간만 살짝 끌어주면 된다.
“취이익!”
오크 한 마리가 대도를 높이 쳐들고 돌진해 온다.
오크를 상대하는 요령은 간단하다.
절묘한 타이밍에 피해주기만 하면 된다.
물론 그 절묘한 타이밍이라는 게 쉽지 않다.
오크가 공격을 되돌릴 수 없는 극한의 지점까지 기다렸다가 피하는 거니까.
오크의 입냄새를 버티고,
날도 안 선 대도에 찢길 상상을 멈추면서,
침착하고 냉정하게 사고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콰직.
내가 옆으로 피하자 그 자리에 대도가 꽂혔다.
콘크리트 바닥을 파고 들 정도로 강력한 위력이었다.
그 탓에 대도를 들고 있던 오크의 팔도 충격이 클 것이다.
지잉하고 울리는 게 내 눈에도 보일 지경이다.
나도 처음에는 당연히 이렇게 못했다.
한 달 내내 오크와 뒹굴며, 몇 번의 부상 위기와 죽을 고비를 넘기고 얻은 노하우였다.
진짜 이제는 오크의 동작이 눈에 다 보였다.
반면 오크는 나를 모른다.
나에게 훨씬 유리한 게임이다.
원래라면 팔이 저려서 잠깐 멈춘 오크에게 공격을 해야 할 차례지만, 지금은 그런 거 없다.
“취이익!”
내가 상대하는 오크는 세 마리니까.
앞의 오크를 봤는지, 이번엔 땅을 전력으로 칠 수 있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면 어쩔 건데?
나는 이번에도 절묘한 타이밍으로 오크의 몸통박치기를 피했다.
“취익...?”
쿠당탕.
전력을 다한 몸통박치기가 상가 유리와 부딪쳤다.
오크는 상가 안으로 굴러 들어가며 안의 상품들과 2차로 몸통박치기를 해야만 했다.
“취이익...!”
마지막 오크 한 마리는 내게 쉽사리 달려들지 않았다.
오크의 근접 전투가 어렵다는 점이 바로 이런 점이다.
앞의 두 놈은 나를 쉽게 보고 마구잡이로 달려들었지만, 마지막 오크는 앞의 두 사람이 당한 걸 보며 배운 거다.
아니, 오크니까 배웠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느낀 거라고 봐야 한다.
급하게 상대하면 체하는 놈이라고.
그리고 기다리면 동료들이 오니까.
“취이익!”
“취익!”
땅을 쳤던 오크도, 상가에 박치기한 오크도 다시 나를 노렸다.
오크의 육체에 그 정도 타격은 타격도 아니다.
두 오크도 아까처럼 쉽사리 덤벼들진 않는다.
이래서 아까 빈틈을 보였을 때 검으로 치명타를 남겨야 했다.
그게 내 마지막 기회였다.
그러나, 당연히 그게 오크들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쩌저저정.
세 개의 얼음 기둥이 오크의 발아래와 머리 위, 그리고 옆에서 돋아났다.
오크들의 반응은 내 예상보다 빨랐다.
정확한 타격지점에서 반 정도는 벗었다.
다른 말로 하면, 반 정도는 맞았다는 이야기다.
콰직, 콰직, 콰직.
얼음 기둥은 오크를 얼리기보다는 그냥 꿰뚫어 버렸다.
한 마리는 복부가 날아갔고, 한 마리는 엉덩이와 다리 한 쪽이 사라졌고, 마지막 한 마리는 머리가 터졌다.
“나이스!”
“너도 잘 했어, 정민아.”
케이라의 칭찬에 내 입 꼬리가 쓰윽하고 올라갔다.
세 마리라 좀 긴장했는데, 내 예상보다 잘 됐다.
솔직히, 내가 봐도 내가 잘 했다.
나, 의외로 무대체질일지도?
“쓸데없는 생각 말고 빨리 가자.”
어느새 내 옆에 선 케이라가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그런 거 안 했는데?”
“얼굴 보면 다 알아. 또 수장 생각이나 했겠지. 이거 잘 끝내면 칭찬을 받아야지 하면서 실실 거렸을 거야.”
“아니, 그건 진짜 아닌데?”
솔직히 쓸데없던 생각은 맞지만, 수장님 생각은 아니다.
했으면 케이라 생각을 했겠지, 왜 갑자기 수장님이야?
“...라고 할 뻔. 빨리 가자. 마나 요동이 거의 코앞이야.”
“푸하하하하.”
너무 뻘해서 웃음이 터졌다.
개그? 케이라가 개그라고?
오늘 진짜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나를 웃느라 살짝 늦게 케이라를 뒤쫓아 달려갔다.
그녀의 귀가 빨갛다.
섹스할 때 외에 저렇게 되는 거 진짜로 처음 본다.
“...그만 웃어. 지금 심각한 상황이야.”
“미안, 미안. 큭.”
이래도 되나 싶지만, 웃음이 계속 나온다.
케이라가 노려보는 것도 귀엽기만 하다.
무섭기보다는, 오히려 발기가 되려 한다.
음... 이건 좋은 일이다.
성욕을 쓸 수 있으면 그보다 더 유용한 게 없으니까.
“코너만 돌면 바로야. 앞장 서.”
“큭, 오케이!”
나는 케이라를 앞지른 후, 코너를 돌았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오크의 빨간 눈이었다.
그다음은 약간 넓은, 광장 비슷한 공간과 그 중간에 있는 커다란 자주색 스파크 덩어리.
마지막으로 광장을 채우고 있는 오크들과, 오크 투사.
“취이이익!”
나는 오크 투사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내가 처음에 눈이 맞은 게 오크 투사의 눈인 걸 알았다.
“오크 투사 한 마리! 오크 여덟 마리야! 후퇴!”
바로 몸을 돌렸다.
오크 투사는 B급 몬스터다.
오크처럼 지능은 낮지만, 오크처럼 본능적으로 전투하는 타입이다.
딱 오크의 상위호환격이라고 보면 된다.
거기다 마나로 몸을 두를 수 있어서, 웬만한 마법으로는 타격을 못 준다.
케이라도 오래 준비해야 오크 투사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몬스터와 여덟 마리의 오크를 상대로 넓은 공간에서 싸운다는 건 지옥이다.
“취익, 취엑!”
오크들이 쫓아왔다.
광장에 비해 좁아진 복도로는 세 마리의 오크만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세 마리는 상대할 수 있어도, 그 다음으로 쫓아오는 투사는 힘들 테니까.
“정민아, 약간만 시간을 끌면서 와 봐. 아까 거기, 좁은 통로까지!”
케이라가 말한 통로가 뭔지는 알았다.
여기서 약 2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크기로 볼 때 두 마리 정도의 오크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다.
그런데 거기까지 시간을 어떻게 끌지?
그때, 내 눈에 천장의 화재 경보기가 보였다.
나는 빠르게 마나를 움직여 경보기 주변에 불을 피웠다.
단순히 불을 피우는 것 정도는 0.5초 만에 할 수 있다.
그래도 그만큼 오크들이 따라잡았지만, 0.5초를 쓴 보람은 있었다.
쏴아아아!
천장에서 스프링클러가 터졌고, 오크들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별 거 없는 거 알면 바로 움직이겠지만, 이게 한계였다.
“취이익!”
역시 오크들은 바로 돌진해왔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케이라, 이게 내 한계야!”
“그 정도면 됐어! 빨리 이쪽으로!”
좁은 통로 앞에 케이라가 양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내가 통로 안으로 들어가자 한 손으로 바닥을 쳤다.
쩌저저저정.
케이라의 손에서부터 얼음이 얼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복도 전부를 얼렸다.
오크도, 오크 투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를 쫓아온 오크 여섯 마리 전부 얼음 속에 갇혀서 움직임을 멈췄다.
“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마법의 위력도 위력이지만, 케이라가 너무 멋있었다.
가득한 한기에 웨이브진 머리가 살짝 떠오른 채 바닥을 짚고 있는 모습이 영화에서나 나오는 히어로 포즈였다.
“금방 풀릴 거야. 빨리 성(?)검기 준비. 목표는 투사야.”
그녀는 그 자세 그대로 마나를 불어 넣으며 말했다.
얼음을 좀 더 유지하기 위해서는 계속 마력을 써야 하는 모양이었다.
“아, 알겠어!”
나는 케이라의 계획을 단번에 알아 들었다.
단순하지만 위력적인 방법이다.
못 피하게 얼려두고 필살기로 조지기.
불끈.
성욕을 일으키는 건 쉬웠다.
전투 중에 다른 생각을 하는 건 한 달 내내 익숙해진 거였고, 야한 망상은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케이라라는 재료도 있으니, 벌써 분신은 준비 만땅이었다.
저렇게 멋있는 케이라를 보면서 안 꼴릴 사람은 없다.
화아악.
따뜻한 기운을 대도에 모았다.
케이라 덕분인지, 평소보다 성욕이 더 많이 모였다.
끝나면 케이라에게 상을 줘야지.
야한 상을 줘야지.
“...전투 중에 쓸데없는 생각 좀...”
케이라가 하고 싶은 말은 알겠다.
‘하지 마’라고 하고 싶었겠지.
내 얼굴에서 다 드러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내 힘이 거기에서 나오는 걸 어뜩하냐고.
어쨌든 난 이런 와중에도 제국 근위대 검술을 차분히 시전해 나갔다.
내가 아까 오크 세 마리를 상대로 긴장하면서도 평소의 실력을 보였던 건, 이런 거 때문이 아닐까?
내 전력은 이제 항상 정신 분열 된 상태에서 나온다.
한쪽은 전투, 한쪽은 성욕으로.
파짓.
초승달 모양의 분홍색 검기가 앞으로 날아갔다.
분홍색 검기라는 것 말고는 전부 마음에 드는 성검기.
오크 투사는 다른 오크보다 머리 두 개는 커서, 성검기는 오크 투사의 목을 노리고 날렸다.
쩌저적.
성검기가 도착하기 전에 얼음이 깨졌다.
가장 먼저 벗어난 건 오크 투사다.
오크 투사는 바로 우리를 향해 달려들려다가, 얼어버린 주변 오크에 막혀 멈칫했다.
“쿠에에엑!”
투사는 주먹으로 얼어버린 오크를 쳤다.
쩌저정, 쩌저적.
오크의 얼음이 깨지며 오크들이 깨어났다.
상처하나 없는 투사와 달리, 오크들은 전신에서 피를 흘렸다.
얼음이 깨지면서 상처를 입은 것이다.
그리고 내 성검기가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던 오크 투사의 목을 갈랐다.
투사는 검기가 목을 파고든 순간 고개를 꺾었지만, 결과는 같았다.
목 대신 머리가 반으로 갈렸을 뿐.
푸확!
피가 분수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취에엑?”
막 얼음에서 깨어나 정신 없는 오크들 사이로, 투사의 몸이 쿵하고 쓰러졌다.
“...됐어!”
“아직 안 끝났어...”
케이라의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줄어들었다.
복도 저편에서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공격해! 빨리 처리해야 한다! 우리 구역에서 사상자가 생기면 안 돼!”
“네!”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키퍼들인 모양이다.
“취익? 취엑!”
오크 하나가 나와 케이라 쪽으로 왔지만, 온 몸에서 피를 흘리는 오크를 상대하는 건 쉬웠다.
그렇게 한 마리를 처리하는 동안, 네 사람의 키퍼가 나머지 오크를 처리하고 우리 앞으로 왔다.
“키퍼십니까?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도움이라뇨. 키퍼로서 당연히 할 일입니다.”
게이트 폭주는 모두의 일이다.
생명에 관련된 일이기에 모두의 일이지만, 특히 키퍼 모두의 일이기도 했다.
게이트 폭주로 인해 일반인이 죽으면 전부 키퍼에게 화살이 돌아가니까.
협회에서 늘 키퍼들에게 강조하는 일이었다.
“일단 폭주 장소로 가서 얘기하시죠.”
네 명 중 리더로 보이는 사람의 말을 따라, 조금 전의 작은 광장으로 이동했다.
자주색 스파크가 여전히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폭주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멈춘다고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리젠되는 몬스터들만 막으면 되겠지요. 반대쪽에서 사상자는 없었습니까?”
“네, 다행히도 없었습니다. 그쪽은요?”
내 말에 리더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입니다. 저희가 온 서쪽과 북쪽은 없었습니다. 동쪽은 지금 저희 크루 키퍼가 갔으니 곧 확인이 될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큰 사고는 아니겠어요. 그런데 크루요?”
“아, 저희는 신용산 크루 소속입니다. 이곳은 저희 땅이니까, 저희가 지켜야지요.”
“아...”
이곳은 신용산 크루의 본거지, 신용산 장인 거리다.
게이트 폭주에 제일 먼저는 몰라도 가장 많이 대응해야 하는 건 신용산 크루가 맞다.
“...그런데 혹시 다른 키퍼들은 없나요?”
나는 폭주 장소에서 이것보다 많은 키퍼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은 제작 키퍼들이 모인 곳이고, 한국 어느 곳보다 키퍼들의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일 확률이 높다.
그런데도 폭주를 위해 모인 키퍼가 고작해야 여덟 명이라니.
심지어 그 중에 한 명은 미등록인원인 케이라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시민들을 지키고 있겠지요. 제작 키퍼들은 전투 능력이 없는 분들도 많고요.”
“그렇군요.”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을 뭔지 알 것 같기는 했다.
다들 제 살길을 찾아 도망갔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각자의 사정은 있고, 키퍼도 사람이니까.
박창식이나 스크롤 테러범을 협회에서 몰래 처리하는 게 이해는 갔다.
안 그래도 키퍼들이 스스로 자기 이미지를 실추시키는 데, 그런 일까지 밝혀지면 금방 여론이 돌아설지도 모른다.
여론이라는 게 언제나 그러니까. 좋은 것 같다가도 손바닥 뒤집듯이 나락을 보내 버리니까.
특히나 아직은 암흑의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나는 암흑의 시대 이후에 어린 시절을 보내서 키퍼에 대한 좋은 기억밖에 없지만, 생각처럼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팀장님! 오크들을 처리하고 왔습니다. 이쪽도 사상자는 없습니다.”
동쪽 통로로 갔던 두 키퍼가 돌아왔다.
푸른 피가 온몸에 묻은 걸 보면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다.
“좋아. 그럼 여기서 폭주가 멈출 때까지 대기한다. 저기, 그...”
“아, 저는 이정민, 이쪽은...”
케이라를 뭐라고 소개해야할지 몰라서 잠깐 머뭇거리는데, 그동안 말없이 폭주 게이트를 보고 있던 케이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게이트 폭주가 아닙니다.”
“...네?”
신용산 크루의 리더가 놀라 반문했다.
“저는 게이트 폭주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정도의 스파크는 아니에요.”
“그건 게이트 마다 다르지 않을까요?”
확신에 찬 케이라의 목소리에 비해 리더의 반문에는 힘이 없었다.
리더는 이게 첫 게이트 폭주인 것 같다.
사실 대부분의 키퍼가 그럴 것이다.
폭주는 드문 확률로 일어나니까.
“무엇보다 주변에 시체가 없습니다. 붉은 피도 보이지 않아요.”
“아...”
리더가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그럼 이건...”
“테러로 짐작 됩니다. 이건 키퍼의 소행이에요. 그렇다면 아마도 목표는...”
케이라가 고개를 한 쪽으로 돌렸다.
그 쪽에 있는 게 뭔지, 그녀가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딴딴이.”
딴딴이 묠니르가 내 뒤통수를 턱하고 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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