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chapter 8.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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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나와 케이라가 다음으로 간 곳은 각종 수트 제품들이 모여 있는 단지였다.
이곳에는 수트 업계의 명가들이 저마다의 플래그쉽 제품들을 디스플레이 해놓고 있었다.
케이라는 이곳에 오자마자 눈빛이 달라졌다.
그녀는 수트 옆의 제원을 읽더니,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수트 외부의 충격을 마정석으로 만들어내는 강력한 자기장으로 상쇄시키는 방식이야. 이 정도면 오거의 공격을 정면으로 막아도 버틸 수 있겠어. 그만큼 마정석이 많이 들겠지만. 마법이 아니고서도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자기장으로 그런 일도 할 수 있어?”
“음... 너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야. SF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방어막을 펼치는 게 아니라, 수트를 두 겹으로 만들어서, 그 사이에 자기장을 강하게 걸어 버리는 거야. 그럼 외부 타격을 자기장이 흡수할 수 있거든. 자석 두 개를 붙이려면 힘이 들잖아? 그런 효과야.”
나를 정확히 파악한 쉬운 설명이었다.
자기장으로 막는다길래 구형의 파란색 방어막을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떻게 현대인인 나보다 현대 과학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지?
“기본적으로 전부 형상기억합금으로 만들어서 손상됐을 때 복구가 가능해. 미스릴을 써서 복구가 더 빠르고. 미스릴 형상기억합금은 드워프나 만들 수 있는 거였는데, 과학으로도 재현이 가능하구나.”
...그냥 가만히 있어야겠다.
옆에서 케이라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만 관찰해야지.
그렇게 그곳에 있는 모든 상가를 둘러본 그녀는 나를 끌고 다음 단지로 넘어갔다.
“다음은 무기를 보러 가자!”
무기점에서도 케이라의 텐션은 떨어지지 않았다.
“초진동 블레이드래. 너 요즘 이거 진짜로 되는지도 몰랐지?”
“응, 아, 이게 진짜 돼? 만화에만 나오던 거 아니야?”
“마정석이 있으니까. 마정석은 쉽게 말하면 아이언맨의 아크 원자로 같은 거라고. 그러니까 상상하던 대부분의 것들을 실용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어.”
그녀는 점원과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이 총을 보시죠. 마정석 에너지를 사용해 만든 일종의 레일건입니다.”
“...총신이 너무 짧은 거 아닌가요?”
“그만큼 순간에 강한 출력을 낼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재료는 어떻게 되죠? 과열을 감당할 수 있나요? 연발이 될 정도인가요?”
“딴딴이를 미량 섞었기 때문에 과열은 걱정 없습니다. 연발도 가능하고요.”
“그럼 너무 비싸겠는데요?”
“아쉽게도 그렇습니다만, 고객님께는 특가로 판매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사지도 않을 거지만, 점원은 누구보다 성심성의껏 답해줬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다.
답답하다고 해서 마스크는 벗었지만, 선글라스로는 케이라의 미모를 가릴 수가 없다.
신비로운 푸른 머리카락만 봐도 다들 KO당하고 있다.
더구나 치마 아래로 뻗어 나온 매끈한 다리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모든 사람의 시선을 빼앗는다.
힐을 신은 건 나도 처음 보는데, 저렇게나 느낌이 다를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케이라는 섹스할 때 외엔 좀 귀여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냥 힐을 안 신었기 때문이다.
지금 케이라는 너무나 섹시하다.
그런 여성분이 남자 밀덕이나 좋아할 소리를 하고 있다?
점원이 진심이 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내가 뒤에서 불을 켜고 점원을 노려봐도, 점원의 눈에 뜬 하트를 사라지게 할 수가 없었다.
아니, 저러다 고백하겠는데?
나는 케이라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허리를 감아 내게로 끌어 당겼다.
“앗, 뭐야?”
“이제 다른 데 가자. 여기 오래 있었어.”
내 말에 점원이 나를 째려봤다.
‘네가 뭔데, 내 행복한 시간을 방해 하냐.’ 이런 눈빛이다.
“치이, 어차피 시간 많잖아?”
케이라가 팔로 내 허리를 감았다.
그 손을 본 점원의 두 눈이 절망에 빠지는 걸 나는 똑똑히 보았다.
내가 뭐긴, 남자친구거든?
“밤에도 일정이 있으니까, 빨리 돌아야 해.”
“...알았어. 설명 고마웠어요. 수진씨.”
케이라가 나를 껴안은 채로 허리를 숙여서, 나도 강제로 점원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아, 아... 네, 좋은 시간 보내세요.”
참고로, 점원은 여자였다.
케이라의 매력은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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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아티팩트만 남았어.”
신용산 장인 거리의 핵심, 제작 기술자들의 공방 빼고는 모든 곳을 둘러 봤다.
키퍼 전용 장비들을 하나하나 살폈고, 전국의 맛있는 간식들을 오며가며 먹었다.
케이라는 내가 예상했던 대로 매우 기뻐해서, 정말로 뿌듯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케이라를 보며 연예인 아니냐며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에 내 콧대는 하늘을 찌르다 못해 대기권을 돌파한 것 같았다.
더구나 케이라 옆에 있어서 오징어가 되는 건 피하지 못했지만.
“...여자가 아깝다. 돈이 많은 걸까?”
“밤일을 잘 하는... 젠장, 저런 여신과의 밤일이라니, 상상하고 싶지 않아.”
“솔직히 남자도 나쁜 편은 아닌데... 너무 넘사다.”
그래, 나도 그럭저럭 생겼다고.
적어도 못 생기진 않았단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이 내가 봐도 좋다.
솔직히 지금이 내 리즈시절이라고 봐야 했다.
옆에 케이라, 엘레나가 없었다면 여자들에게 대쉬를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괜찮게 생겨 보인다.
물론 그런 여자들 한 트럭을 줘도, 케이라가 더 좋지만.
“응, 빨리 보러 가자.”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케이라의 텐션이 갑자기 떡락 했다.
“...피곤해?”
“응? 아니야. 아티팩트야 내 세계에서도 많이 봤으니까. 크게 관심 없어서.”
“아...”
그럼 돌아갈까? 라고 말하려는데, 케이라가 선수를 쳤다.
“너 보고 싶은 거 아니었어? 그럼 가야지. 나는 오늘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천사다.
케이라는 천사야.
그녀가 현대의 기술에 열광하는 것처럼 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나름 아티팩트에 관심이 많다.
원래도 좋아했지만, 서큐버스 사건을 겪으면서 아티팩트의 효용성을 피부로 느꼈기 때문이다.
‘최후의 한 발’은 아직도 내가 끼고 있다.
경매에 올리겠다고는 했는데, 내가 돈을 지불하고 사야할 것 같다.
“고마워, 그럼 가보자.”
“좋아.”
내가 팔을 살짝 벌리자, 케이라가 그 사이로 팔을 집어넣고 팔짱을 꼈다.
자연스레 그녀의 폭신한 가슴이 느껴졌다.
와... 진짜 다르다.
전여친은 이런 거 안 됐는데.
나, 전생에 거북선에서 노라도 저었던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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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거 없네.”
제작 키퍼들의 공방에선 별로 볼 게 없었다.
조금만 생각하면 나오는, 당연한 결과였다.
키퍼 장비들은 대부분 고가에다, 오더 메이드가 대부분이다.
아티팩트는 더더욱 그렇다.
하나하나가 수제품이고, 제대로 된 것들은 바로 팔려나가게 마련이다.
일종의 소모품이라고 할 수 있는 수트 같은 장비랑은 여러 가지 의미로 다른 제품군이다.
그래서 공방에서 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전에 장인이 만들었던 제품에 관한 설명이나, 실패해서 실용성이 없는 아티팩트 정도?
“실망했어?”
“조금. 네가 별로 관심 없어 했던 이유를 알 거 같아.”
“내 세계도 비슷하거든. 여기도 같네.”
“이럴 줄 알았으면 수트나 좀 더 볼 걸 그랬다.”
케이라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수트도 많이 봐서 질렸으니까 괜찮아. 다음에는 아티팩트 제작을 목적으로 오자, 어때?”
“제작? 가능할까?”
아티팩트를 주문하려면 기본적으로 10억 이상을 들고 와야 했다.
그래도 괜찮은 제품이 나올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너라면 가능할 거야. 돈이야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벌잖아?”
“그거야 그렇지.”
10억.
작은 돈은 아니지만, 이제 그리 크게도 느껴지지 않는다.
시간만 있으면 벌 수 있는 돈이다.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편의점에서 500ml 콜라도 잘 못 사던 게 고작해야 올해 초인데.
지금은 몸에 안 좋을 것 같아서 아예 콜라를 끊었다.
콜라를 끊을 수 있었던 건, 케이라와 엘레나가 옆에서 나를 채워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쓸데없이 콜라에 의존해 스트레스를 풀 필요가 없다.
아예 스트레스란 게 안 싸이니까.
“좋아. 다음에 올 때는 제작을 해야겠어.”
“그럼 다음에 또 오는 거지?”
“...뭐야? 그게 목적이야?”
케이라가 방긋 웃었다.
선글라스를 벗고 있어서, 배시시 웃는 두 눈이 다 보였다.
나는 숨이 멎을 것 같아서, 그녀에게 키스했다.
“야, 갑자... 읍.”
케이라가 내 가슴을 치다가 멈췄다.
“츄릅, 츄웁.”
상가 사이에 있는 사각 지대였기에 우리를 보는 사람은 없었다.
구석의 CCTV가 하나 있었지만, 그건 괜찮다.
“하압, 정민아, 하음...”
키스는 점점 과격해졌다.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겼고, 그녀가 내 위에 올라탔다.
이쯤 되니, 주변의 마나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케이라가 알아서 주변에 마법을 펼치고 있는 거였다.
아마도 안 보이게 하는 마법과 소리를 없애는 마법이겠지.
...그냥 해버릴까.
그녀도 하고 싶은 거 같은데.
솔직히 처음부터 하고 싶었다.
옷차림이 야하다고 보긴 힘들었지만, 색다른 느낌이었으니까.
밖에서 하는 것도 신선할 거고.
마법이 있으니까, 소리나 냄새를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마법 만세!
쪽, 쪽, 쪽.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들고서 목에다 뽀뽀했다.
꿀이라도 바른 듯 달콤해서, 이젠 진짜 해버리는 일만 남았다.
“...정민아, 잠깐만.”
그런데 케이라가 나를 밀어냈다.
“어?”
그녀는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점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선 왼쪽을 보는데, 왼쪽에 있는 벽이 아니라 그 너머를 보는 듯했다.
심각한 표정이다.
“...뭐야? 무슨 일인데?”
“방금 저쪽에서 마나가 크게 요동쳤어.”
“마법?”
“그거야 모르지. 키퍼일 수도 있고.”
그때, 안내 방송이, 아니 경고 방송이 시작됐다.
[비상! C단지에서 게이트 폭주가 발생했습니다! 모두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반복합니다! C단지에서 게이트 폭주가 발생했습니다! 모두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C단지면, 바로 옆 단지다.
“가자. 내가 앞장설게.”
게이트 폭주는 비상사태이며, 모든 키퍼는 게이트 폭주에 대응하는 게 의무였다.
의무가 아니라도 갔겠지만.
힘이 있는데도 뒤에서 손 놓고 있는 건 사양이다.
“응. 방향은 내가 지시하는 대로.”
케이라가 느낀 마나가 요동치는 장소로 향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복도를 헤치고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조금 더 가자, 이젠 한산한 복도가 나왔다.
대부분 대피한 모양이다.
“정민아, 저기!”
그러나, 아직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사, 살려줘!”
한 남자가 넘어진 채 우릴 보고 손을 뻗고 있었다.
그 뒤에는 오크가 남자를 향해 대도를 휘두르고 있고.
나는 있는 힘껏 달렸다.
나보다 먼저 케이라의 마법이 도달해, 오크의 대도를 쳐냈다.
훤히 드러난 오크의 빈틈을 향해 나는 달려가던 그대로 몸통 박치기를 했다.
“취에엑!”
쓰러진 오크에게서 대도를 빼앗았다.
형편없는 무기였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대도를 내리치자, 오크가 데굴데굴 굴러 피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이미 케이라의 마법이 대기 중이었다.
푸직!
커다란 얼음 기둥이 오크의 복부를 꿰뚫었다.
볼 것도 없이 즉사다.
“...괜찮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그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저 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 쪽은 저희가 막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혹시 앞쪽에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까?”
“윽... 제가 알기로는 없어요.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남자가 절뚝절뚝 거리면서 우리가 온 방향으로 사라졌다.
그를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취에엑!”
오크 세 마리가 저쪽 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정민아, 준비 됐어?”
“응, 물론이지.”
나는 오크의 대도를 들었다.
자,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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