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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53화 (53/137)

〈 53화 〉 chapter 8. 데이트

* * *

53.

오크.

트레이드 마크는 들창코와 비상식적으로 튀어나온 어금니, 그리고 색깔 피부다.

지구의 게이트에서 발견된 오크의 피부는 총 다섯 가지로, 빨강 초록 파랑 회색 검정이다.

피부색에 따른 차이점은 없다고 알려져 있다.

오크의 키는 160cm에서 180cm 사이로, 인간과 거의 비슷하다.

평균적으로 인간보다 신체능력이 월등히 높으며, 대신 지능이 많이 떨어진다.

함정을 이용해서 잡는다면 꽤 쉽게 잡을 수 있는 편이라, D급 키퍼들이 마정석 수급처로 자주 이용하는 게 이런 오크 게이트다.

그러나 근접전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하기 때문에 절대로 얕보면 안 된다.

괜히 D등급이 붙은 몬스터가 아니다.

“두 마리야.”

“회색이네요.”

“어떻게 할래?"

"우선은 한 마리를 전력으로 노려볼게요. 선배가 절 지켜주세요.”

“알겠어. 내가 지켜줄게. 대신 신호하면 시작해 줘.”

“네.”

소연이 그녀의 무기, 미스릴 바늘을 꺼냈다.

가람이 평가하기에는 오크의 두개골을 깰 만큼 위력이 있다는데, 실제로 그런지 시험해보는 게 이번 게이트 원정의 목표 중 하나였다.

그리고 나는 엘레나를 떠올렸다.

갑옷을 입고 있는 엘레나의 계곡에 분신을 박아 넣는 상상을 했다.

적당히 벗은 갑옷과 적당히 드러난 살.

차갑고 단단한 갑옷과 따뜻하고 부드러운 피부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갑옷 플레이.

처음 엘레나와 사랑을 나눌 때 이후로는 갑옷 플레이를 한 적이 없다.

엘레나의 갑옷 리베나 루는 사랑을 나누기에 적합한 갑옷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게이트를 나가면 갑옷을 하나 주문해야 겠다.

입고도 사랑을 나누기에 적합한 갑옷으로.

어떤 갑옷이 좋을까.

전투 중에 이런 상상을 하고 있다는 게 웃기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분신이 지금처럼 힘을 찾고, 나는 성욕을 느낄 수 있으니까.

우웅.

따뜻한 기운이 내 주변을 맴도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기운을 검에다가 모았다.

이걸로 준비는 끝.

“좋아, 소연아. 공격.”

“네.”

슈우욱.

미스릴 바늘이 빠르게 날아갔다.

저번보다 빨라진 게 확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오크의 반응은 고블린보다 배는 빨랐다.

“취이익!”

오크 한 명은 바로 이쪽으로 달렸고, 바늘의 표적이 된 오크는 바늘을 쳐내려고 커다란 박도를 들었다.

“치잇!”

소연이 바늘의 방향을 틀었다.

그녀가 바늘을 빙 돌려서 재차 공격에 들어갔지만, 박도를 들고 방어를 준비하는 오크를 뚫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취이익!”

내가 할 일은 소연이 오크 하나를 처리할 때까지, 우리에게 달려드는 다른 오크 하나를 막는 것이다.

아니면 이 오크를 죽이든지.

나는 오늘을 위해 배운 검, 제국 근위대 검술을 따라 검을 들었다.

고급 기술 중에 검의 기운을 날카로운 형태로 밖으로 내보내는 법이 있었다.

엘레나가 성욕에 대해 듣더니, 이걸 배우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이틀간 특훈한 검이었다.

초승달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온 힘을 실어 벤다.

이것 말고도 발의 위치라든가, 무게 중심을 어떻게 바꾸어야 한다던가 하는 자잘한 것들이 있었지만, 기본은 저거였다.

상상하고, 상상에 육체의 힘을 더하는 것.

상상이 오래도록 축적되어 언어 자체로 힘을 가지게 된 룬어를 사용하는 것과 어떻게 보면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겠다.

미숙한 검술이었지만, 엘레나가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한 검이었다.

효과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파짓.

따뜻한 기운이 반월형의 검기가 되어 앞으로 날아갔다.

느릿느릿하며 날카롭지도 않았지만, 장점이 하나 있었다.

“취익?”

내가 검을 휘두르는 걸 보며 멈칫했던 오크가 바로 다시 달려들고 있다.

내게는 오크 앞으로 날아가고 있는 분홍색의 검기가 보이지만, 오크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게이트 내의 오크는 성욕이 없으니까.

성욕으로 하는 공격에 대해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다.

내 검기는 그런 오크의 어깨를 잘랐다.

털썩.

“취에엑!”

오크가 비명을 지르며 피가 솟구치는 팔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그게 막아지겠는가?

오크의 투박한 손가락 사이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조금 아깝다.

검기의 속도가 조금만 빨랐으면 바로 머리를 갈라 버릴 수 있었는데 말이다.

다음에는 잘 할 수 있을 거다.

“취이익!”

팔이 잘린 오크가 기합을 내지르며 달려온다.

지금 오크에게는 돌진 말고는 방법이 없다.

애초에 오크에게 돌진 말고 다른 공격 방법이 있는지 의문이지만.

나는 검을 중단에 들고 집중했다.

이번에는 성욕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

성욕에 대해서 재능이 있어 보이는 나도, 전투 중에 성욕을 유지할 수는 없다.

오크에게 검기가 적중할 때까지 발기를 유지한 게 한계였다.

이제는 훈련실에서 굴러가며 배운 검술로 오크를 상대해야 했다.

훙, 훙, 훙.

한쪽 팔, 그것도 오른팔이 없는 오크의 공격은 매우 컸다.

한방에 나를 보내 버리려는 속셈이 너무나 잘 보였기 때문에, 나는 가벼운 발놀림으로 피해 주었다.

한 번 피할 때마다 빈틈이 보였지만, 공격은 참았다.

오크의 가죽과 살을 얕보면 안 된다.

성욕으로 만든 ‘검기’였기에 쉽게 잘린 거지, 지금 내 수준의 스탯과 검술로는 오크의 가죽을 베어낼 수 없다.

어차피 지금도 피가 멈추지 않고 철철 흘러내리고 있으니, 잠시만 기다리면 된다.

“치잇! 좀 죽어! 죽으라고!‘

얼핏 보니, 소연이도 다른 오크 하나를 잘 상대하고 있었다.

어느새 세 개까지 늘어난 바늘로 오크를 정신없게 만들며 조금씩 상처를 더하고 있는 중이었다.

좋아, 시간은 우리편이다.

5분 후, 한쪽 팔이 잘린 오크는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현저히 느려진 오크의 목을 내가 베어 버렸다.

다시 3분 후, 소연은 끝끝내 미스릴 바늘로 오크의 두개골을 관통해 버렸다.

오크는 그러고도 얼마간 더 움직이는 기염을 토했지만, 뇌를 헤집는 바늘을 끝까지 버틸 수는 없었다.

“하아, 하아... 저, 혼자 잡은 거, 인정하시죠?”

“후우, 후우... 내가 더 빠른 거, 너도 봤지?”

“숨이나 고르고 그런 말씀 하시죠?”

“너도 미간이나 펴고 말해.”

소연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염력을 많이 써서 머리는 아프지만, 오크를 잡았다는 것에 기쁜 모양이다.

D급의 오크를 혼자서 잡았다는 건, 어딜 가도 키퍼로서 명함을 내밀 정도가 됐다는 이야기다.

이제 초보는 확실히 벗어났다는 것이기도 하다.

내 얼굴도 비슷할 거 같다.

기뻤다.

마법만이 아니라, 검으로도 확실히 1인분을 하게 되었으니까.

겨우 오크 한 마리 잡고 헉헉대면서 왜 이렇게 좋아하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삶과 삶이 부딪혀 한 생명이 끝나는 싸움이 헉헉대며 끝나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한 번 검을 휘두르면 서너 명씩 픽픽 쓰러지는 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아니면 엘레나 정도 돼야 추풍낙엽처럼 오크들을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짝짝짝.

가람이 박수를 치며 등장했다.

“둘 다 잘했어. 소연이는 진짜 대단해. 아직 스탯이 별로인데 그 정도 하는 걸 보면... 넌 진짜 굴러들어온 호박이다.”

“헤헤. 고마워요, 가람 오빠.”

소연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봤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로 응대했다.

같이 훈련받고, 같은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으니까 소연이는 나를 상대로 이겨보고 싶은 모양이다.

귀여울 따름이다.

가람형이 저렇게 말하는 건 다 소연이 기를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말하는 건지도 모르고 말이다.

나는 칭찬 안 해도 칭찬 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저러는 건데.

“(검기 속도가 너무 느려요. 제가 베기 연습을 좀 더 하라고 하셨잖아요?)”

“엊그젠가 꿈 속 여자에 빠져서 연습을 게을리 하는 걸 제가 봤어요, 엘레나.”

...아님 말고.

+++

철원 모처.

민간인 출입 통제선 안쪽 산 중턱에 동굴이 하나 있었다.

군인들이 지나다니는 길목과 절묘하게 떨어져 있으며, 주변이 지뢰 위험 지역이라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었다.

자연 동굴이라 무언가를 하기에 좋은 공간은 아니었다.

공간이 협소하고, 바닥은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그곳에 딱 탁자 하나 정도 놓을 수 있는 정도 크기의 평평한 땅이 있었다.

땅 위에는 크게 적어도 복잡했을 글자와 문양들을 누군가 작은 크기로 빽빽하게 적어 놓았다.

마법진이다.

마법진 위에는 너구리 가족이 자고 있었다.

군인들의 장난을 피해 쉴 곳을 찾아온 듯했다.

얼마나 꿀잠을 자고 있었던지, 그들은 주변 땅이 빛나고 있는데도 깨지 않았다.

화악.

아니, 깨지 못했다.

그들은 이미 죽었으니까.

후우웅.

너구리 가족의 몸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살들이 곤죽이 되어 구멍으로 빠져 나왔다.

털도 힘을 잃더니 희미하게 흩어져 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가죽도, 부분 부분 조각나더니 한 조각씩 마법진 속으로 녹아 내렸다.

파팟.

마법진의 빛이 꺼지자, 그곳에는 너구리 가족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런 식으로 마법진이 해쳐먹은 너구리 가족이 열.

DMZ의 레토나 만한 맷돼지가 스물.

괜히 멀리 왔다가 목숨을 잃은 짬타이거가. 열.

서큐버스 킴리나가 설치하고 간 후, 2달 동안 먹고 또 먹은 마법진은 드디어 발동할 수 있을만한 생명 에너지를 확보했다.

파아앗.

마법진의 글자들이 빛을 내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이번 빛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서, 동굴 밖까지 빛이 빠져 나갔다.

낮이 아니었다면, 주변 군부대에서 수색을 나왔을 것이다.

후우웅.

시간이 조금 지나자, 빛의 색이 변했다.

처음에는 태양과 같은 흰 빛이었는데, 노랗게, 파랗게, 또 검게.

어느새 동굴 주변엔 밤이 내렸다.

밤은 자기 영역 안에 들어온 것들의 생명력을 훔쳤다.

샤아아.

나무들이 말랐고, 땅이 갈라졌다.

밤이 내린 곳은 금세 죽은 땅이 되었다.

임무를 마친 밤은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만 늦었다면, 군인 중 누군가가 밤을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죽은 땅 때문에 이상함을 느끼는 건 시간 문제였지만.

밤은 동굴 안에서 박쥐의 형상이 되었다.

동굴 속 어둠보다 더욱 짙은 밤은 이어서 사람의 형태로 변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창백해 보이는 하얀 피부에, 그에 대비되는 진한 검정색 머리.

검은색 정장에 피부처럼 하얀 셔츠가 인상 깊은 남자였다.

남자가 눈을 떴다.

붉은 눈동자가, 동굴과 동굴 너머에 있는 것들을 관찰했다.

“...흠... 날 부른 건 악마인가?”

가뭄에 쩍쩍 갈라진 땅처럼 메마른 목소리였다.

“형편없는 마법진이야. 그러니 이렇게 목이 마르지.”

남자는 당장 주변의 생명력을 흡수해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마법진 한 구석에 남아 있는 생각을 발견했다.

‘경거망동하지 말 것, 차원의 기술력이 남다름.’

“...그래봐야 2차원 수준이겠지.”

하지만 2차원이라면 그도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었다.

마음가는대로 날뛰다가는, 오랜 세월 쌓아놓은 ‘삶’이 모래성처럼 부서져 버릴 것이다.

“좋아, 그럼 우선 보험을 들어 볼까.”

남자가 땅을 보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자 땅에 그려진 마법진의 모양이 변했다.

아까보다 세 배는 복잡한 마법진이었다.

“됐다. 그리고...”

남자는 손바닥을 편 채로 아래로 밀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마법진이 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동굴에서 마법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평평한 땅 조금만이 어색하게 있을 뿐이었다.

“일단은 정보를 모아야겠어. 악마년도 부하로 삼고.”

남자는 두 눈을 감은 채 잠시 기다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는 동굴이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컴퓨터와 책상이 있는, 일반적인 가정집이었다.

“여기서 시작하는 게 좋겠어.”

탁.

남자가 손을 튕기자, 남자의 모습이 동굴 속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뒤늦게, 통신선을 정리하던 통신병들이 죽은 땅을 발견했다.

“반장님! 여기 뭐가 이상합니다!”

“이상하긴 뭐가? 땡땡이 칠 생각하지 말고 빨리 걸어!”

“아니, 와 보셔야 합니다. 진짭니다!”

“...이건...?”

죽은 땅을 본 유선반장이 바로 휴대폰을 꺼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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