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chapter 7. 서큐버스 킴리나
* * *
46.
“정민아, 정신 차려! 정민아!”
나는 케이라의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앞에는 케이라의 얼굴이 있었다.
걱정과 안도가 그 얼굴에 섞여 있다.
“...케이라?”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야.”
케이라가 나를 껴안았다.
아직 상황 파악은 안 되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옆에 보니 엘레나도 있었다.
그녀도 케이라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요?”
“(서큐버스였습니다.)”
“서큐버스? 아... 맞아, 서큐버스!”
그제야 꿈 속의 상황이 떠올랐다.
서큐버스와 한 판 벌이고, 마지막에는... 그래, 솔직히 졌다.
전립선은 반칙이지, 치사하게.
그런데 뭔가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나서 도망치려는 서큐버스를 잠깐이나마 붙잡을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후의 한 발’의 힘이 아니었나 싶다.
섹스할 때나 도움이 되나 했더니, 이렇게 쓰일지는 몰랐다.
아, 결국 이것도 섹스구나.
그러고 서큐버스는 왜 도망가려고 한 거지?
어차피 시간만 지나면 나는 또 졌을 텐데?
“서큐버스는 어떻게 됐어요? 다들 괜찮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약간 피로하기만 할 뿐이에요.)”
“나도 괜찮아.”
케이라는 여전히 품 속에서 벗어나질 않은 채 말했다.
이럴 때보면, 정말로 두려움이 많은 친구다.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자고 있을 뿐이에요.)”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쓰러져 있었다.
원래는 나와 케이라, 엘레나, 그리고 가람까지 4사람 밖에 없어야 했지만, 지금 쓰러져 있는 사람은 열댓 명이 넘어 보였다.
도와주러 왔다가 다들 당한 모양이었다.
그 중에는 나연과 나리도 있었다.
“다들 언제 왔대요? 수장님도 오셨네요? 그런데 서큐버스는 어디로 갔죠?”
오거의 시체는 있었지만, 서큐버스의 흔적은 없었다.
“(그게...)”
엘레나가 말을 맺지 못했다.
“뭐죠? 다 괜찮은 거 아니었어요?”
“(수장님만 문제가 좀 있습니다. 수장님이 서큐버스를 처리하신 모양인데...)”
“으으... 여긴...?”
그때, 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깨어나는 중이었다.
“(자세한 건 나연님이 깨어나면 말씀 드리도록 할게요.)”
나연을 시작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동굴 밖에서도 크루원들이 들어왔다.
채령과 한사랑을 제외한 전원이었다.
불가항력적으로 엘레나와 케이라의 모습이 들키게 되었지만, 대부분 가볍게 넘어갔다.
지금은 그보다 수장님의 상태가 더 중요하니까.
“서큐버스는 다른 사람의 정신에 기생할 수 있는 악마입니다. 정황상 수장께서 서큐버스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큰 상처를 입은 서큐버스가 급히 수장의 정신 속으로 숨어 들어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수장이 못 깨어나고 있습니다.”
케이라가 모두에게 수장의 상태에 대해서 말해줬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데? 영영 못 깨어나?”
나연이 물었다.
그녀는 나리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서큐버스가 수장의 정기를 흡수해서 상처를 회복하게 되면 깨어날 겁니다. 그때는 서큐버스도 같이 깨어날 거고요.”
“정기를 흡수해? 설마... 죽는 거야?”
“경우에 따라서는요. 하지만 안 죽게 하겠습니다. 저 포함 모두가, 수장이 없었으면 오늘 다 죽을 뻔 했습니다. 그러니 수장은 꼭 살리도록 하겠습니다.”
케이라의 말에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저 담담한 어투로 어떻게 그걸 느끼게 하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그건 나 말고 모두가 느낀 모양이다.
언니의 위기에 정신이 없을 나연도 케이라의 말에 수긍하고는 침착해지고 있었다.
“좋아. 믿을게.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지?”
“일단 게이트를 나가죠. 크루 하우스에서 시작하겠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긴 게이트 원정이 일단락 났다.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한 채.
+++
“일단 생명력 회복 마법진을 그릴 거예요. 정기가 흡수당해도 죽지 않게요.”
케이라는 크루 하우스 10층의 훈련실에다가 마법진을 그렸다.
자기 피를 잔뜩 뽑아내서 그리는데, 저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의 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말릴 생각을 못했다.
그녀의 각오가 이미 서 있는데, 말려서 무얼 하겠는가?
“마법진에 생명력을 보충할 존재가 필요해요. 언니, 이 일은 언니가 해야 할 것 같아요.”
“나? 뭐하면 되는데?”
나연이 나서자, 케이라가 마법진 왼쪽의 빈 공간을 가리켰다.
“저기 앉아계시면 돼요. 죽도록 피곤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거예요.”
“언니를 위해서라면 죽어도 괜찮아.”
마법진의 중앙에는 김나리 수장님을 눕혔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해 보였지만, 그녀는 여전히 못 일어나고 있었다.
“마법진을 발동할게요.”
화아악.
마법진 위에서 빛이 솟아올라 훈련실을 채웠다.
나리와 나연이 빛으로 된 감옥에 갇힌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걸로 된 거야?”
“1차는 끝이에요. 이걸로 서큐버스가 다 회복할 때가지 수장이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럼 서큐버스는? 살아나오는 거 아니야?”
“악마는 엘레나가 처리할 거예요.”
훈련실의 입구에는 모든 장비를 갖춰 입은 엘레나가 서 있었다.
“레나 언니? 가능하겠어요?”
“(걱정 마세요. 저는 루의 열세 번째 검, 성기사입니다. 악마에게는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그런 것치고는 게이트 안에서는 너무 쉽게 당한 거 아닌가?
그동안 엘레나는 매우 믿음직스러웠지만, 지금은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성기사라지만, 지금은 신성도 없잖아?
내 시선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엘레나가 덧붙였다.
“(저도 신성 외에 다른 힘을 억제하는 마법진을 설치할 거예요. 같이 힘 대 힘으로 붙으면 제가 유리합니다. 아무래도 게이트 안에서는 서큐버스의 둥지 속으로 우리가 들어간 모양새라서 당하고 말았지만, 크루 하우스에서는 제가 이길 수 있어요. 제가 못이길 정도의 상위의 존재는 분명 아니에요. 그랬다면 그런 함정을 파는 대신에 정면으로 왔겠죠.)”
듣고 보니 그렇다.
우리 중 제일 강한 엘레나를 잡을 자신이 있었다면 동굴 속에서 마법을 준비하며 기다리진 않았겠지.
“그럼 됐네? 언니는 죽지 않고, 악마는 엘레나 언니가 처리하고?”
나연의 얼굴에 미소가 살짝 돌아왔다.
결과가 보이니 조금은 마음이 놓이나 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게 될까?
나는 근본적인 물음이 들었다.
“그런데, 서큐버스가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해?”
“그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 3일 이상 머무르면 서큐버스도 정신을 유지할 수 없으니까.”
그걸 빼먹었다는 듯이 케이라가 설명했다.
“다른 사람의 정신에 들어간다는 건, 자신의 정신 방벽도 없애는 일이야. 게다가 그곳은 자신의 영역도 아니지. 그 가운데서 자신의 정체성을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존재는 거의 없어. 그런 존재는 신이나 다름없지. 물론 그러면 수장의 정신도 온전하지는 못하겠지만... 만약 그런 경우가 오면 다른 방법을 써야겠지.”
역시 마법사.
내 질문 따위는 이미 오래 전에 생각했다는 듯이 술술 답했다.
이번 일도 케이라와 엘레나, 두 사람만 믿으면 될 것 같다.
하지만 그들도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하나 더 있었다.
+++
2일 뒤.
“...왜 안 나오지?”
내 질문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케이라와 엘레나는 둘이서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나연은 아무것도 모르니까.
케이라는 하루면 서큐버스가 상처를 회복하고 나올 거라고 했는데, 이틀이 지난 지금도 수장님은 그대로 잠에 빠진 채였다.
“나연 누나는 괜찮아요? 거기 앉아 있으면 생명력을 빼앗긴다면서요?”
“나? 나는 괜찮아. 약간 피곤하지만, 그거야 이틀 밤을 새서 그런 거 같고...”
내가 보기에도 나연의 모습은 이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자리에서 이틀 밤을 새도 망가지지 않는다는 게 이상한 점이긴 했지만, 아무튼.
“...언니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슬슬 뭐라도 일어나야 하지 않아?”
나연은 다시 초조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케이라와 엘레나의 말처럼 되나 싶었는데, 아직도 제자리인 것만 같으니까.
나도 걱정이었다.
3일이면 서큐버스도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수장님의 정신도 오염된다고 했으니까.
내가 볼 때는 이제 슬슬 다른 방법을 써야할 것 같았다.
케이라와 엘레나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듯했다.
한 시간 전부터 두 사람은 쉬지도 않고 서로 의견을 주고 받고 있었으니까.
이제 슬슬 대화가 끝나는 건지, 케이라가 나연에게 물었다.
“언니, 혹시 수장이 남자를 사귄 적이 있어요?”
“...그게 지금 중요해?”
“설명은 나중에 해드릴게요. 지금은 사실 파악이 먼저예요.”
“내가 알기로 없어.”
“혹시 수장이 자위하신 걸 본 적은 있나요?”
“...”
나연이 나를 슬쩍 봤다가, 다시 케이라를 보았다.
“...후, 내가 본 적은 없어. 아마 안 할 거야. 언니는 어릴 때부터 그런 쪽에 이상하리만큼 관심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여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알겠어요. 어떤 상황인지는 알 것 같네요.”
“이걸로 뭐가 돼?”
“돼요. 정보 고마워요.”
그리고는 케이라와 엘레나가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자기들끼리만 통역 마법을 써서 서로의 언어로 말하는 중이라, 나연은 듣지 못했다.
나는 들어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고.
“...정민아.”
“네, 누나.”
“어디가서 이야기하면 알지?”
“...뭐가요? 방금 무슨 소리를 하셨나요?”
“그렇지? 맞아, 아무 소리도 안 했어.”
이런 대화도 나연의 눈에 깃들은 불안을 없애지는 못했다.
이런 대화가 의미가 있으려면 결국 수장님이 다시 깨어나야 하니까.
“...후우”
“...하아”
나와 나연은 침묵과 한숨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무식한 우리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5분 쯤 지났을까? 드디어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났다.
“방법을 바꿔야 할 것 같아요. 이쪽에서 수장의 정신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래도 돼? 다른 사람의 정신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다며? 그리고 서큐버스랑 정신세계에서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첫 날에 그런 이야기를 했다.
엘레나가 수장님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는 건 안 되냐고.
엘레나는 정신 속으로 들어갈 수는 있어도 그 안에서는 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정신세계에 익숙한 건 엘레나가 아니라 서큐버스니까.
“그래도 해야지. 이대로 시간을 허비하면 수장의 정신이 이상해질 거야. 서큐버스도 같이 사라지긴 하겠지만, 우리는 온전한 수장을 구해야 하는 거잖아?”
“그건 그렇지.”
“그래서 진입이야. 들어갈 사람은 너야.”
“...나? 엘레나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엘레나에게 시선이 갔다.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신성이 없는 저보다는, 신성이 있는 정민님이 더 유리할 거예요.)”
“아니, 그래도 그게 말이 돼요? 저는 고작 D급인데요?”
“(정신세계는 스탯으로 결정되는 건 아니에요. 더구나 서큐버스의 정신세계라면, 정민님은 S급에 가까울 거고요.)”
정신세계에서는 내가 S급이라고?
무슨 라노벨 제목 같지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서큐버스의 정신세계라면, 아무래도 내 전문 분야니까.
“그래도... 내가 악마를 상대할 수 있을까요?”
“걱정 마. 악마는 상당히 약해진 상태야. 그리고 회복도 못했지.”
“왜 회복을 못 해? 벌써 이틀이나 지났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회복을 못했으니까 밖으로 못 나온 거야. 생각보다 정기를 흡수하지 못한 탓이지. 그건 수장의 체질 탓이 크고. 나연 언니의 말과 현재의 상황을 종합해보면, 수장은 무성욕자일 거야.”
무성욕자?
솔직히 갑자기 그게 왜 나온 건지는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설명을 들어야 이해가 되겠지.
어쨌거나 지금 확실한 건, 수장님의 정신세계로 내가 들어가는 게 결정됐다는 거다.
케이라와 엘레나가 머리를 맞대고 나온 결론이 그것이라면, 더 뺄 이유는 없다.
나는 두 사람을 믿으니까.
“...알겠어. 그럼 어떻게 들어가?”
“섹스.”
너무 케이라의 목소리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나연의 반응에 내가 들은 사실이 맞다는 걸 알았다.
“...뭐?”
나연이 벌떡 일어나서 반문했지만, 케이라는 다시 못을 박았다.
“정민과 수장이 섹스해야 합니다. 지금으로선 그게 최선이에요.”
흠... 이렇게 보니 내 분신은 쾌락 보다는 다른 용도로 쓰이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케이라나 엘레나 때도 그렇고, 서큐버스랑 한 판 할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 왜 일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