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45화 (45/137)

〈 45화 〉 chapter 7. 서큐버스 킴리나

* * *

45.

삐삐! 삐비빅!

김나리의 몸에서 신호음이 울렸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수신기에서 흘러나오는 거였다.

수신기는 각 팀장에게서 신호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신호음은 위기일 때 보내는 것.

“언니, 이건 정민이 쪽이야! 무슨 일이 생겼나 봐!”

나연이 바로 누구에게서 온 신호인지 알아 차렸다.

각 팀장 마다 소리가 달랐기 때문이다.

“빨리 가보자. 가람 오빠가 이걸 눌렀다는 건...”

나연은 이미 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좋은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다.

“일단 침착해 나연아.”

“아니, 그게 말이 돼? 지금 정민이랑 가람 오빠가...”

나리는 나연을 지그시 쳐다봤다.

나리가 있는 이 무리에서는 나연이 제일 강했다.

제일 강한 나연이 이래서야, 다른 사람들도 함께 동요하게 마련이다.

“...알겠어. 그럼 어떻게 해?”

나연이 표정을 정돈했다.

이제야 좀 GGC의 에이스 다웠다.

“가야지.”

“...뭐야? 같은 결론이잖아.”

“달라.”

나리는 강하게 억울한 표정을 짓는 나연에게 미소를 보낸 뒤에 크루원들에게 말했다.

“저희도 다른 두 팀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저희가 중앙에 있으니 신호를 전달해야 합니다. 두 팀이 신호를 따라 가람 팀에게 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하겠습니다. 예비 신호기를 주시겠습니까?”

나리는 크루원에게서 예비 신호기를 받아서 땅바닥에 박았다.

우웅우웅.

신호기는 잘 작동했다.

이제 앞서 간 두 팀이 신호를 받고서는 이곳으로 올 거다.

나리는 종이를 꺼내 신호기 위에 현재 상황에 대해 메모를 남겨 놓았다.

[가람팀 위기 상황. 나연팀은 가람팀을 도우러 감. 정식팀과 한구팀은 여기에서 만난 후 같이 오도록.]

나리는 이럴 때마다 휴대폰이 그리웠다.

게이트 내에서 통신은 매우 힘들었다.

가까운 거리에서야 워키 토키 같은 걸로도 원활하게 되지만, 각 수색 팀은 최소 1km 씩 떨어져 있다.

워키 토키 같은 걸로 통신할 레벨이 아니었다.

거기에 이 게이트는 개활지도 아니고, 숲으로 빽빽한 곳이었다.

간단한 신호 정도는 전달이 되지만, 조금만 복잡해져도 신뢰성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계기를 설치하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경우고.

거대 원정 중에서는 그렇게 하는 팀들도 있긴 했다.

“이제 저희도 출발하겠습니다. 동료가 위기에 처했으니, 최대한 빠르게 가겠습니다. 나연팀장?”

“...네!”

“앞장 서겠습니까?”

“네! 수장님!”

나연이 힘이 잔뜩 들어간 기합과 함께 수신기를 들고 신호를 쫓아 움직였다.

기합만큼이나 나연의 속도는 빨랐다.

울창한 숲 속에서 2km 가량을 5분도 안 되어 주파했다.

키퍼들도 헉헉 거릴 수준이었다.

“저기예요!”

여전히 쌩쌩한 나연이 산 아래에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는 동굴로 보였다.

“나연아, 멈춰!”

나리는 바로 진입하려는 나연을 불렀다.

“왜?”

“정신 차려. 넌 돌격대장이 아니라 팀장이야.”

“아...”

“일단 잠시 숨을 고르자. 그리고...”

빨리 온 건 좋았지만, 너무 빨라서 다들 힘들어 하고 있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데 숨을 고를 시간 정도는 필요했다.

“알겠어. 다음엔 어떻게 해?”

“채령씨는 남아야지. 채령씨?”

나리가 채령을 불렀다.

채령은 이 오거 게이트의 주인으로, GGC 크루 소속이 아니었다.

“헉, 헉... 나리님?”

“채령씨는 여기에서 대기해 주세요. 혹시 모르니 크루원 한 명도 같이 대기하게 하겠습니다. 사랑씨?”

“네, 수장님!”

“사랑씨는 여기서 채령씨와 다른 두 팀을 기다리세요. 그 후에 어떻게 할지는 두 팀장의 의견에 맡기겠습니다. 채령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챙겨야 하는 걸 명심해 주세요.”

게이트 주인이 죽으면 게이트도 사라진다.

그렇기에 모든 게이트 원정은 게이트 주인을 지키는 것부터 시작이다.

“좋아, 이제 가자.”

“잠깐만, 언니.”

“왜?”

“언니도 남아. 같은 이유야.”

나리가 나연을 보았다.

이번엔 나연이 눈을 지그시 뜨고 있었다.

나리는 주변을 쓱 돌아 보았다.

다른 크루원들도 같은 의견인 듯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조심히 다녀 오세요.”

“네, 수장님!”

나연은 대답을 한 후 동굴을 향했다.

“제가 선두에 서겠습니다. 다들 준비되셨죠?”

“네!”

나리는 그렇게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크루원들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이럴 때는 수장의 자리가 참 싫었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목숨을 거는데, 그녀는 그럴 수 없었으니까.

평소에는 자신의 게이트라서 넘어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내가 조금 더 강했더라면...’

A급, 아니 B급 키퍼만 되어도 이렇게 후방에 남아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수장님... 괜찮겠죠?”

“별일 없을 겁니다. 크루원들을 믿고 있죠.”

나리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렇듯 평온했다.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겉으로는 평온함을 유지할 것.

그녀가 수장이 되면서 제일 먼저 배운 거였다.

하지만 믿음을 시험할 만한 일이 1분도 안 되어 발생했다.

삐비빅!

이번에는 나연의 위험 신호였다.

“...수장님?”

한사랑 크루원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나리는 생각했다.

이 신호를 도주 신호로 여겨야할지, 아니면 구조 요청으로 받아야할지.

어느쪽으로도 해석은 가능했다.

그리고 어느쪽으로 해석해도 나연이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빠직.

수장의 침착함은 친동생의 위기에 깨어지고 말았다.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고 말씀 드릴게요. 사랑씨는 여기서 채령씨를 지켜 주세요. 그리고 제가 안 나오면, 다른 두 팀과 함께 게이트를 나가세요. 알겠습니까?”

“네? 어떻게...”

“알겠습니까?”

“...네!”

한사랑이 억지로 답한 걸 나리도 알았다.

하지만 이러면 적어도 채령은 안전할 것이다.

나리는 그렇게 합리화하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나연아, 나연아!’

동굴 초입에는 별 게 없었다.

그냥 일반 자연 동굴이었다.

조금 더 들어가니 불빛이 보였다.

나리는 앞서 간 사람들의 헤드라이트 불빛들이라고 생각했다.

‘불빛이 꺼지지 않았다는 건, 아직 다들 살아 있다는 증거.’

그녀는 바로 불빛을 향해 뛰었다.

가까이 갈수록 헉헉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반면에 싸우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친 거야? 그럼 더 빠르게!’

나리는 구조 요청이 맞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빠르게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공동에 도착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공동 안 광경은 괴기했다.

헤드라이트가 저마다의 방향을 비췄고, 헤드라이트의 주인들은 제 자리에서 허리를 흔들며 헉헉대고 있었다.

그 중에 나연이도 있었다.

나연이는 가랑이를 활짝 벌리고 그 사이를 손으로 비비고 있는 중이었다.

“나연아! 무슨 일이야! 정신...”

그리고 나연에게 다가가던 나리도 잠에 빠졌다.

*

“수장님, 저는 어떤가요?”

나리는 정민을 보았다.

정민은 알몸이었다.

탄탄한 가슴과 빨래판 같은 복근을 보며 꽤 단련했다고 생각했다.

그뿐이었다.

“수장님, 아름다우세요.”

목소리가 끈적끈적했다.

옛날에 친구들이 보라고 하던 야동의 남자들 같은 느낌이었다.

나리는 자신도 알몸인 걸 깨달았다.

황급히 가슴과 가랑이를 가렸다.

손으로 가린다고 가려지는 가슴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부끄럽기는 했다.

“괜찮아요.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너무 아름다워요.”

나리는 다시 한 번 끈적끈적한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게 꿈인 걸 깨달았다.

그녀가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 자체가 꿈이었다.

현실에서 그녀가 정민이랑 이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왜 꿈을 꾸고 있지? 잠들기 전 상황이...”

“수장님, 이리로 와요. 아니면 제가 갈까...”

“닥쳐! 정민씨는 너 같이 느끼한 목소리가 아니라고!”

나리는 시원하게 질렀다.

꿈속이니까.

보는 사람도, 보는 카메라도 없으니까.

“네? 아니... 그...”

꿈 속의 정민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니, 꿈에 들어오기 전 정민의 표정이 떠올랐다.

정민은 미간을 찌푸린 채 허리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동굴 속에서!

나리는 그제야 꿈을 꾸기 전 상황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연이! 나연아!”

나리는 꿈에서 깨고 싶었다.

꿈에서 깨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학창시절, 공부하다 잠들면 잠에서 깨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본 덕이었다.

꽈아악.

그녀는 자기 목을 졸랐다.

얼굴이 붉어질 때까지, 머리가 하얘질 때까지.

보통은 절대로 불가능하겠지만, 꿈이란 걸 확신하는 그녀는 할 수 있었다.

“수장님? 수장님!”

꿈속의 정민은 걱정하는 목소리도 뭔가 기름이 끼어 있는 것 같았다.

‘끝까지 열받게 하네. 저리 꺼지라고...’

나리는 의식이 희미해지는 걸 느꼈다.

*

나리는 눈을 떴다.

동굴의 천장을 보고는 몸을 일으켰다.

주변은 처음 들어왔을 때 본 그대로였다.

그녀가 시야를 좀 더 넓혔다.

공동 안쪽 오거의 시체와 그 옆에 서 있는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악마? 서큐버스?’

나리는 평소 판타지 소설을 정독했다.

재밌어서가 아니라, 판타지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각종 신화와 전설도 대부분 섭렵했다.

수장으로서 배움이 끊이질 말아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킴리나의 모습에서 서큐버스를 연상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동굴 속에서 뭐하고 있는지도 대충 짐작했다.

왜 자신이 그런 꿈을 꾸게 되었는지도.

“나연아!”

나리는 동굴이 울리도록 크게 소리치며 나연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럼에도 나연은 깨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나리의 몸이 자연스레 서큐버스에게로 향했다.

‘서큐버스라면 목숨에 지장이 없을 확률이 높아. 설령 목숨에 지장이 있다 하더라도 끌려갈 수는 없어. 여기서는... 도박이다.’

여동생의 목숨이 달린 일이기에 나리는 더욱 더 빠르게 결정했다.

정보가 부족하다고 어떡해, 어떡해 하고 있다가는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혹시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그녀는 그녀 자신이 한 일이라면 받아들일 용의도, 책임질 자세도 되어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크루, GGC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나리는 달려가면서 검을 뽑았다.

화아악.

흰 빛이 검에 맺혔다.

그녀의 유일한 스킬, 화이트 스트라이킹(C)이었다.

파지직.

“크아악!”

마지막에 서큐버스가 움직인 탓에 검은 어깨를 베었다.

하지만 오히려 좋았다.

심장이 코앞에 있었으니까.

나리는 조금 더 검에 힘을 실었다.

“죽어.”

흰 빛이 서큐버스의 심장을 베고 나왔고, 심장에서 푸른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리는 눈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아아악!”

서큐버스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동시에 동굴 속 모든 사람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러나 숨소리까지 멈추지는 않았다.

나리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좋아, 이제 확실히 숨을 끊으면...’

나리는 서큐버스의 목을 확실히 쳐내기 위해 거리를 가늠했다.

‘지금!’

그녀가 한 발짝 내딛으며 검을 가로로 베었다.

흰 빛이 서큐버스의 목과 몸을 분리시켰다.

가람이 봤다면 실력이 늘었다고 칭찬할 정도로 깔끔한 검격이었다.

하지만 나리는 목이 날아간 서큐버스가 손을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손이 움직이는 걸 눈으로 봤지만 반응하지 못했다.

덮썩.

서큐버스의 왼손이 나리가 검을 잡고 있는 오른 손의 손목을 잡았다.

나리가 놀라 손을 털어내며 거리를 벌렸지만, 이미 손목이 불에 댄 듯 뜨거웠다.

‘이게 무슨...’

그리고 나리는 정신을 잃었다.

손목의 뜨거움이 머리까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