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chapter 7. 서큐버스 킴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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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오거.
3m나 되는 근육질 떡대.
떡대에 어울리는 힘은 물론이고, 떡대에 어울리지 않는 스피드, 그리고 떡대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높은 지능.
숲의 제왕이라는 별명이 매우 잘 어울리는 최고의 사냥꾼.
A급으로 분류되는 몬스터지만, 실상은 S급에 가까운 몬스터.
그럼에도 주는 건 없는 쓰레기이기도 하다.
오거에게서 발견되는 마정석은 다른 A급 마정석보다 품질이 낮다.
가죽이나 뼈도 같은 A급의 드레이크보다 급이 두어 단계 떨어진다.
아티팩트를 지니고 나올 확률도 적다.
옷이라고는 가죽 누더기가 전부고, 무기는 십중팔구 나무 몽둥이니까.
간혹 오거의 거시기가 정력에 좋다는 소문이 돌지만, 이미 헛소문으로 판명난지 오래다.
그래서 오거가 나오는 게이트는 인기가 없다.
키퍼로서는 굉장히 짜증나는 상황이다.
처음에는 A급 몬스터가 나와서 좋아했는데, 그게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는 거니까.
희망을 줬다가 뺐는 게 세상에서 제일 나쁜 법이다.
아무튼, 그 오거를 상대하기 위해서 GGC는 키퍼 전원을 동원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잡을 수 없는 몬스터였다.
“언니는 안 들어와도 되지 않아?”
텐트 안 쪽에서 나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연이 나리의 텐트 설치를 도와준 모양이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참이라 귀를 기울였다.
굳이 수장님까지 들어올 필요가 있나?
소연이도 약하다고 해서 빠진 상황이었다.
“다들 고생하는 데 내가 빠지면 안 되지.”
“그래봐야 베이스 캠프에만 있을 거잖아.”
나연의 솔직한 말에 듣고 있던 내가 당황했다.
사실이긴 하지만, 언니 동생 사이가 아니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그래도 있어야 해. 뒤에만 있더라도, 그게 내가 할 일이야.”
수장님의 어조는 단호했다.
어차피 전투에 도움은 안 되겠지만, 게이트 안과 게이트 밖은 느낌이 다르긴 하다.
분명 수장님의 말대로 게이트에 같이 들어가는 게 수장의 일인 것 같은 느낌이다.
이왕이면 앞에 같이 서면 좋겠지만, 그건 솔직히 불가능하고.
“...알았어. 나는 언니가 나처럼 되지 않을까 걱정해서.”
“그럴 일은 없어. 다른 분들이 잘 지켜주실 거니까.”
크루원들을 100% 신뢰한다는 듯한 목소리다.
조금 더 다가가니 나연의 뒷모습과 수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목소리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솔직히 감동 받을 뻔했다.
그러나 바로 박창식의 경우가 떠올랐다.
그런 일을 겪었는데, 크루원들을 100% 신뢰할 수가 있을까?
나는 못할 것 같다.
그럼 저건 연기일까?
...연기래도 감동을 먹긴 해야겠다.
저게 연기면 속아주는 게 맞지.
“좋아, 걱정 마. 내가 꼭 지켜줄게.”
나연도 나처럼 감동 먹은 듯했다.
목숨이라도 내어줄 기세다.
물론 감동 먹기 전에도 그랬겠지만.
“고마워, 나연아.”
수장이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동생 앞에서만 보여주는 진짜 나리의 미소다.
그렇게 몰래 쌍둥이 자매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이곳이 오거가 출몰하는 게이트 안이 아닌 것만 같았다.
내가 엿본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소리를 내어 앞으로 걸었다.
“수장님? 이정민입니다.”
“무슨 일이죠?”
수장님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나는 솔직히 당황할 줄 알았는데, 얼굴도 어느새 평소의 포커페이스로 돌아와 있었다.
“식사 준비가 다 됐습니다. 식사 하러 오시죠.”
“밥? 메뉴는 뭔데?”
“스테이크.”
“오, 스테이크!”
나연의 눈이 반짝인다.
보통 게이트 원정 첫 끼는 대부분 맛있게 먹는다.
첫 끼에 상할 수 있는 음식을 소진하기 마련인데, 일반적으로 신선한 게 맛있을 수밖에 없다.
스테이크는 그 중에서도 키퍼들이 선호하는 메뉴다.
일반인이 구워도 고급 레스토랑의 맛을 그나마 따라 하기 쉬우니까.
“그럼 가시죠.”
나도 스테이크를 제일 좋아한다.
지금같이 울창한 숲 속에서 바로 구워 먹는 스테이크의 맛은 그야말로 일품이니까.
우리 셋은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이동 이래 봐야 열 걸음 정도 걸었나?
아무튼 다들 테이블에 앉아 자기 몫의 스테이크를 받았는데, 그제야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GGC의 크루원에 오거 게이트 주인까지 총 27명이 게이트에 들어왔는데, 지금 이 자리엔 26명밖에 없었다.
“한사랑 씨가 안 보입니다.”
“제가 텐트로 가볼게요.”
크루원 한 명이 구석에 있는 텐트로 갔다.
잠시 후에 얼굴이 빨개진 한사랑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잠이 들어서... 죄송합니다.”
“별 일 아니라면 됐어요. 그럼 같이 들죠.”
나리의 말과 함께, 우리는 다 같이 첫 끼를 먹기 시작했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그냥 잠에 들었어.”
한사랑은 식사 내내 왜 늦게 왔는지에 대해서 해명해야 했다.
그것 빼고는 아주 맛있는 식사였다.
조금 식은 게 흠이었지만.
아, 그래.
엘레나가 한사랑을 뚫어지라 쳐다봐서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지만, 엘레나가 대답을 회피한 것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
“따라오는 년놈들은 없네.”
킴리나는 숲 속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녀는 한사랑의 정신 속에 숨어 있다가 방금 빠져 나왔다.
한사랑을 수면제로 재우고, 주변에 마나의 존재를 흐릿하게 하는 마법을 사용한 후에 밖으로 빠져 나왔다.
한사랑의 성욕을 어제부터 미리미리 모아 두었기 때문에, 빠져 나올 때는 한사랑의 성욕을 최대한 억제시킬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사랑의 몸에서는 애액이 꽤 많이 분비됐다.
평소라면 분수가 터져야 하니 그에 비하면 적지만, 애액만으로도 눈치 챌 사람은 알 수 있는 수준이었다.
특히 이상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다니는 금발 여자라면 무조건 냄새로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킴리나를 쫓아오는 사람이 없다?
‘성욕에 미친년이 자기처럼 상시 발정 상태인 줄 아나 보네. 쯧쯧, 이래서 사람은 항상 차분해야 한다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킴리나야말로 누구보다도 성욕에 진심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녀는 누구보다도 내로남불에 진심인 것 같았다.
‘오거를 잡는다고 했지...’
마침 킴리나의 눈앞에 식사를 하고 있는 오거가 보였다.
먹고 있는 건 커다란 늑대였다.
오거는 킴리나의 접근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지금 성욕을 자원으로 기척 감소 마법을 쓰고 있었으니까.
일반적인 마법이었다면 오거가 벌써 눈치 챘을 것이다.
아니, 게이트 밖의 ‘진짜’ 오거였다면 성욕을 자원으로 써도 이미 눈치 챘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트에서 출몰하는 반쪽짜리 오거는 ‘성욕’이라는 걸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킴리나는 게이트 내 생물들에게는 거의 전지전능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죽어라.”
그녀가 손을 뻗자, 분홍색 쐐기들이 오거의 머리를 향해 쏘아졌다.
오거 입장에서는 바로 눈앞에서 쐐기들이 날아오는 거라, 뭘 피할 수도 없었다.
푹푹푹푹푹푹.
오거의 머리가 곤죽이 됐다.
이어서 그녀는 땅에 손을 대고 마나를 불어 넣었다.
스르르륵.
땅이 스프처럼 흐물대더니, 오거가 땅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오거가 완전히 사라진 후에 그녀가 손을 때자 땅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이건 좀 힘드네.”
오거를 죽이는 데 쓴 성욕은 잠시 지나면 회복될 수준이었는데, 도리어 뒤처리 하는 데 쓴 마나는 쉬이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이 정도면 하루에 다섯 마리가 한계였다.
“그 정도면 충분할지도...?”
킴리나가 성욕으로 마나에게 오거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다.
이건 신성으로 신탁을 받는 것과 비슷했다.
성욕은 기본적으로 마나에 대한 권한이 높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면, 성욕도 일종의 신성이라고 볼 수 있었다.
거기에 착안한 어떤 사람들은 성욕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나에 대한 더 높은 권한을 얻으려고, 신성이라는 자원을 흉내 내어 보려고.
결국엔 신이 되려고.
그렇게 악마라고 불리는 이들이 탄생했다.
유사 신성으로 마나에 대한 높은 권한을 획득한 이들.
사람들은 그들을 악마라고 불렀다.
악마들은 성욕 말고도 다양한 자원들을 모았다.
가장 유명한 건 7대 죄악이라 불리는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성욕, 폭식, 나태’지만, 그 외에도 다양한 감정과 개념들이 신성을 모방하기 위해 사용됐다.
서큐버스 킴리나는 성욕을 사용하는 악마였다.
그녀는 신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신성으로 따지면 5정도의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마나는 그녀에게 꽤 괜찮은 정보를 건넸다.
그녀는 오거가 어느 방향, 어느 거리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고독한 늑대과인 오거의 숫자는 생각 이상으로 적었다.
“3일이면 대충 정리되겠어.”
킴리나가 오거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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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이라는데...?”
내 목소리엔 확신이 없었다.
보통 신탁을 받으면 이거다 하는 느낌이 있는데, 지금은 무언가 흐릿했다.
오거를 만나보지 못해서 케이라의 기억을 넘겨받았지만, 그럼에도 신탁은 명확하지 않았다.
“(일단 가 봐요. 불분명한 신탁은 일반적인 일이에요. 더군다나 게이트 내 생물은 게이트 밖 생물과 조금 달라요.)”
“그래? 처음 듣는 이야긴데?”
가람이 엘레나에게 되물었다.
가람이 모르면, 아마 지구에서는 모르는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게이트 내 생물은 번식활동을 하지 않아요.)”
“...어라?”
가람이 크게 깨달은 얼굴을 했다.
그러다 다시 급하게 반박했다.
“잠깐, 오거는 확실히 거시기가 있는데? 한 때는 그게 정력에 좋다고 해서 열풍이었다고!”
“(음... 분명 사용 가능한 장비가 준비되어 있는 건 맞을 거예요. 하지만 사용하는 걸 본적이 있으세요?)”
“그, 그게... 없지.”
가람은 결국 수긍하고 말았다.
엘레나의 세계, 케루온도 게이트가 등장한 지 백 년을 훌쩍 넘었다고 했다.
그런 세계의 사람이 말하는데, 가람이 뭐라고 반박을 하겠는가.
“(그래서 제대로 된 신탁을 받으려면 일단 오거를 찾아야 해요. 또 각 게이트 마다 같은 몬스터라고 볼 수는 없어서, 다른 게이트에서 본 오거로 이 게이트의 오거를 찾기는 힘들어요. 지금처럼 불분명한 신탁을 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신탁이란 이름에 안 맞게 상당히 불친절하네요.”
테러범을 바로 찾았을 때, 그 어떤 능력보다 사기 같았는데 말이다.
내 불평에 엘레나가 미소 지었다.
지금은 오거 수색 1팀으로, 나, 케이라, 엘레나, 가람만 따로 다니고 있다.
그래서 로브의 후드를 넘긴 그녀의 예쁜 얼굴을 자유롭게 볼 수 있었다.
“(신탁이란 게 원래 그래요. 루의 높고 깊은 뜻을 필멸자인 인간이 알기는 힘들죠. 물론 이 경우엔 정민님의 신성이 낮아서 그런 거라고 봐야겠죠.)”
“원래의 엘레나라면 가능한가요?”
“(저라면... 음... 가능할 거 같은데요?)”
와우!
신탁은 처음 느낀 것처럼 사기 기술이 분명하다.
앞으로의 목표는 소환 게이트의 숙련도를 높이는 방향으로 해야겠다.
그래야 엘레나가 루로부터 전달받는 신성 +4를 견딜 수 있을 테니까.
엘레나가 신성을 사용할 수 있으면, 신탁만으로도 많은 일이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일은 아니긴 하다.
이세계인을 부를 수 있는 소환 게이트의 쿨타임은 얼마인지 나도 모르겠고,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게이트는 하루에 한 번밖에 열 수가 없으니까.
많이 써야 숙련도가 오를 텐데, 이래서야 언제 오를지.
그나마 다행인 건 게이트 안에서도 마음껏 게이트를 열 수 있다는 점 정도다.
아, 나 말고도 다른 사람도 게이트를 마음껏 열 수는 있다.
게이트 안에서 게이트를 열어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면 돌아오는 곳이 애매해질 수 있어서 보통은 안 쓰지만.
“저쪽이랬지? 일단 가자. 세세한 건 내가 찾아볼게.”
케이라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걸어갔다.
믿음직했다.
내 신탁은 흐릿하지만, 그녀의 마법이라면?
“좋아, 가자.”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금방 오거를 찾고 게이트를 나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건 아니라도, 일주일이나 걸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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