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chapter 6. 테러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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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이미 늦었어! 다 같이 죽자고!”
남자가 그렇게 말하고 손가락을 튕길 때, 옆에 쓰러져 있던 부하는 자기가 죽을 걸 알고 있었다.
‘스크롤이 전부 다 폭발하겠네.’
며칠 동안 열심히 땅에 묻었던 스크롤이었다.
스크롤을 묻고, 그 위에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장판을 시공했다.
남자의 부하를 하는 동안 별에 별 일을 다 할 수 있게 됐다.
이 정도 능력이면, 키퍼가 아니라도 충분히 장인 소리를 듣지 않았을까?
‘개새끼, 혼자 살겠구나.’
남자가 쓰러진 위치는 스크롤 폭발에서 보호하기 위한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장치를 누르면 남자는 아래로 떨어지고, 폭발은 위로 터지기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반면 부하가 쓰러진 위치는 거기에서 조금 멀었다.
‘나, 죽는 거야?’
죽는 건 무섭지 않았다.
엄마가 눈앞에서 목을 매달았을 때부터, 자신의 인생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 후로는 키퍼에 대한 반감으로만 살았을 뿐이다.
엄마를 죽게 만든 키퍼와, 또 모든 키퍼들에게.
그랬던 그가 키퍼가 된 건 아이러니했다.
그를 돕던 친구들은 내부에서 스파이짓을 할 수 있으니 잘 됐다고 했다.
그 외에도 그가 있던 모임에서 키퍼가 된 이들은 꽤 있었다.
그들은 키퍼가 된 후에도 키퍼처럼 살기보다는, 키퍼를 증오하고 게이트를 증오하며 사는 이들이었다.
‘마법진만 무슨 뜻인지 알았다면...’
부하는 딱 그거 하나만 아쉬웠다.
그의 가슴에도 마법진이 하나 있었다.
그의 게이트 속에서 발견한 거였다.
오거가 살던 동굴 속에 있던 것으로, 크고 복잡하며 정교한 마법진이었다.
무슨 내용인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는 그걸 본 순간 매료되었다.
증오 외에 그가 유일하게 가진 감정이었다.
그는 홀린 듯 몇날 며칠을 들여 그 자리에서 마법진을 따라 그렸다.
하지만 마법진의 정체를 알 방법은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었다.
포기하고 있을 때쯤, 스크롤을 파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부하처럼 키퍼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스크롤을 파는 사람, 남자에게 다가갔다.
남자도 마법진의 정체를 알진 못했지만, 남자에겐 가능성이 있었다.
‘스크롤 제작 및 사용(S)’라는 남자의 기술 숙련도가 올라가면, 마법진의 정체를 알지도 몰랐으니까.
부하는 남자의 부하가 되기로 했다.
스크롤도 스크롤이었고, 남자를 자신이 속한 단체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지금은 주로 돈밖에 모르는 친구였지만, 부하와 같은 아픔을 겪은 이였다.
키퍼에 대한 증오는 기본 베이스였고.
그와, 그의 동료들과 함께할 이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둘 다 실패했다.
딱.
콰가가강.
부하의 몸은 폭발에 휘말려 몇 조각으로 찢겨졌고, 그는 그대로 죽었다.
그러나 폭발 덕에 그가 가슴에 품고 다니던 종이가 붉은 빛을 내다가 스스로 녹아 없어지는 건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일주일 뒤.
폭발의 흔적과 폐허만 남은 철원군 사금리에서 붉은 게이트가 열렸다.
부하의 종이가 녹아 없어진 그 자리였다.
붉은 게이트에서는 붉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나왔다.
검은 날개와 관자놀이에서 솟아오른 두 개의 뿔, 공중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꼬리.
누가 봐도 악마였다.
차림도 보통 사람들의 고정관념 그대로였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가죽쪼가리 하나로 가려놓고, 하체 역시 입은 건지 안 입은 건지 모를 가죽 바지가 전부였다.
“(너무 먼 거 아니야? 진짜... 너무 고생했잖아.)”
악마가 입을 열었다.
알 수 없는 언어였지만, 몸매만큼이나 고혹적인 목소리였다.
“(자, 보자. 누가 나를 불렀지?)”
악마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변은 어두웠고, 아무것도 없었다.
GGC에서 모든 정리와 청소를 마쳤고, 이곳은 주변에 민가가 없는 외진 곳이니까.
“(...뭐야? 분명 누가 나를 불렀는데?)”
악마는 부름에 응해 이곳에 왔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는 건...
‘죽었나?’
악마가 차원 곳곳에 뿌린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방법은 오로지 죽음뿐이었다.
죽음만이 악마가 새로운 차원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은 다른 사람을 제물로 써서 악마를 불러내고, 악마에게 부탁을 하는 방식이다.
부탁의 대가도 목숨인 경우가 많지만, 그거야 그때 가서 계산할 이야기고.
그러나 가끔은 불러내는 방법을 몰라서, 스스로 죽으면서 불러내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악마가 천천히 땅으로 착륙해 땅의 기억을 읽었다.
폭발과 종이가 사라지는 장면이 보였다.
남자와 부하, 정민과 남자도 보였다.
‘그렇게 된 거였나?’
참 불쌍하게도 죽었다.
악마는 측은한 마음에 복수를 하기로 했다.
무보수로 도와주는 건 악마의 성향에 맞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악마가 할 일이란 결국 사람을 속이고, 힘을 빼앗고, 목숨을 빼앗고, 영혼을 빼앗는 게 전부니까.
그게 복수랑 다른 게 뭔가.
이왕이면 스토리가 쌓인 인물을 노리는 게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도 사실이고.
“(자, 그럼...)”
악마는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들의 기운이 있는 곳을 찾았다.
복수전에 먼저 힘을 좀 회복해야만 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예쁜 아이야.)”
악마의 머릿속에 신성을 펼치던 정민이 떠올랐다.
악마에겐 성직자를 타락시키는 것보다 세상에 재미있는 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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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롤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범죄자, 남자의 이름은 강형식이었다.
그는 당연히 심문에 응하지 않았지만, 세상에는 강제로 답을 하게 만들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자백제부터 시작해서, 특수할 때만 일하는 키퍼들까지.
결국 GGC는 그에게서 ‘몬스터 변이 스크롤’을 사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더불어 왜 이런 일을 한 건지도.
“왜 그랬대요?”
내 질문에 가람이 답했다.
“돈이 좋았대.”
돈이 좋다라, 아주 일반적인 답이다.
그런데 그도 키퍼잖아? 그것도 만능 마법계열.
“키퍼가 돈이 모자라요?”
“게이트에서 아무것도 안 나왔나 봐. 그럼 큰돈을 벌긴 힘들지. 월급쟁이일 뿐이야.”
그 월급이란 게 억에 가까워도?
내가 아직 서민인 걸까.
키퍼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키퍼가 되고 나서는 돈 걱정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말이다.
“나도 잘 이해는 안 돼.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하니까. 돈이 많든 적든 욕심이야 항상 있는 거겠지. 전부 돈 때문은 아닌 거 같긴 해. 키퍼들에게 증오도 많고.”
“그래요?”
“응. 어릴 때 부모님이 키퍼들 갑질 때문에 죽었나 봐. 그 탓에 고아가 됐고... 키퍼들이 좋을 리가 없지.”
“그런...”
“옛날 키퍼들은 전부 망나니라고 봐도 되니까. 협회가 생기고 나서부터가 진짜 키퍼 사회지. 안타까운 이야기야. 그도 일종의 피해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안타까운 건 인정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결국 자기 행동의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한다.
“아니죠. 피해자는 무슨 피해자예요. 그는 완벽한 가해자입니다. 두말 할 것도 없어요.”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너를 죽이려고 한 놈인데.”
“맞아요. 케이라는 진짜 죽을 뻔 했다고요. 아, 맞다. 그런데 그 놈은 왜 저를 죽이려고 했었데요?”
“아, 그거 그냥 자기 일에 걸림돌이 될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던데. 별 이유는 없었던 셈이지.”
“...”
뭐야, 고작 그런 일 때문에 나와 케이라가 죽을 뻔 했다고?
빌어먹을.
진짜, 한 대 날려줬어야 했는데.
“그 놈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법의 심판을 받나요?”
“그 놈에게 스크롤을 산 사람들과 함께 협회 감옥으로 들어갈 거야.”
“협회요?”
사법기관이 아니라?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일은 관례적으로 협회 내에서 처리 해. 괜히 밖으로 새어나가면, 키퍼들에 대한 반감만 커질 테니까.”
“잠깐만요. 그래서 키퍼들에 대한 가중 처벌이 있는 거 아니었어요?”
“맞아. 키퍼들은 같은 범죄라도 가중 처벌을 받지. 하지만 그걸로도 부족해. 이런 일은 정말로 자주 일어나거든.”
“네? 암흑의 시대는 벌써 20년 전에 끝난 거 아니었어요?”
암흑의 시대.
키퍼가 처음 나타나고 아직 협회가 나오지 않았을 때의 시기를 말한다.
그 어떤 법과 질서도 없이 힘을 가진 자가 마구 날 뛰던 시기였고, 사람들이 키퍼를 매우 멀리하던 시기였다. 심리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키퍼가 사람들 사이로 돌아간 건 마정석 뿐만 아니라, 게이트 내 다양한 자원들로 편한 물품을 만들 수 있게 된 이후 부터였다.
싸움만 할 줄 알던 키퍼의 이미지가 사업가로 바뀐 건 그 덕분이었다.
키퍼가 가지고 오는 자원에 의해 사람들의 생활이 2배 이상은 편해졌으니까.
“일단락은 났지. 하지만... 인간이란 게... 뭐, 그런 거 아니겠어?”
“...”
가람형이 하지 않은 말들이 무슨 말인지는 나도 안다.
나도 나이를 허투루 먹은 건 아니니까.
키퍼라는 힘이 있는 인간이 어떻게 나올지는... 안 봐도 유튜브다.
“...그럼 협회 감옥에서는 어떻게 되는 거죠?”
“법대로 해. 죽기 직전까지 고문당하다가, 죽어. 고문당하는 장면은 다른 경범죄자들에게 시청각 교재가 되기도 하지.”
고문에 사형.
나쁘지 않은 처벌이다.
한 일이 있으니, 그 정도는 받아야지.
다만 좀 씁쓸하다.
그런 범죄자가 많아서, 사회 몰래 처리해야 한다는 게.
“걱정할 거 없어. 처벌은 확실히 이루어질 테니까.”
“아, 그게 아니라...”
“다른 것도 괜찮아. 우리가 다함께 노력하면 돼. 이번처럼.”
가람이 씨익하고 웃었다.
그 미소를 보니, GGC가 내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강형식은 오로지 나만 노린 거였는데 말이다.
“그렇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형.”
“나야말로. 그럼 이제 시간 됐으니까, 가볼까?”
나와 가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람은 수장이 부른다고 해서 나를 부르러 온 참이었다.
겸사겸사 수사진행과정도 알려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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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에 주역이라고 들었습니다. 수장으로서 감사를 드립니다.”
검이 내게 인사를 한다.
김나리를 보면 항상 잘 벼린 검이 떠오른다.
고작해야 C급 밖에 안 되는데, 이제 나랑 별 차이도 안 나는데, 어떻게 저런 카리스마를 가질 수 있는지 의문이다.
저러니 수장인가.
나도 수장님께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크루원들이 전부 함께 한 일입니다. 감사는 모두에게 돌려야지요.”
“모두에게 작게나마 감사를 표했으니 걱정마세요. 저는 수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뒤에만 있어서 죄송합니다.”
김나리는 진심으로 짜증나는 것 같았다.
나도 저 프라이드를 배워야겠다.
지금 나는 김나리보다 약하잖아?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각자 맞는 역할이 있는 거니까요.”
김나리의 게이트에서 나오는 식물이 아니면, 이 크루는 돌아가지 않는다.
그것만으로 김나리는 역할을 다한 것이다.
사실 역할이라고 하기도 뭐하다.
김나리는 그냥 크루 그 자체니까.
“알겠습니다. 부모님은 잘 돌아가셨습니까? 그간 불편한 건 없으셨는지 모르겠네요.”
“아주 잘 쉬다 가신다고 했습니다. 다 수장님께서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일상생활로 돌아가셨다.
동생도.
하지만 곧 서울로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그런 예감이 든다.
앞으로도 이런 일에 계속 휘말릴 것 같거든.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기면 얼마든지 크루 하우스를 이용하셔도 됩니다. 그러라고 있는 크루 하우스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않고 쓰겠습니다. 이번에도 체류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금방 나갈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잠시 동안 크루 하우스에 머물기로 했다.
집을 구할 때까지 말이다.
“아니, 오래도록 계셔도 괜찮습니다. 저로서는 오히려 길수록 환영입니다. 나연이가 그나마 저 정도로 활동하는 건 다 정민씨 일행 덕입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갑자기 나연이 왜 나오지? 나는 살짝 당황했다.
“네? 아니, 나연 누나가 저희랑 무슨 상관이...”
“나연 누나라고 부를 정도면 상관이 있습니다. 그 애는 생각처럼 쉽게 마음을 열지 않거든요.”
그건 아닌 거 같은데요. 완전 인싸던데요.
나는 옆에 있는 가람에게 뭐라고 말 좀 해보라고 하고 싶었는데, 가람도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만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지만, 빈자리가 있을 겁니다. 할 수 있다면, 나연이의 빈자리를 채워 주세요. 이건 언니로서의 부탁입니다.”
아...
빌어먹을 새끼.
생각해보니까, 그 빌어먹을 새끼도 고문을 받고 죽는다.
나연 누나가 우울할 만도 하다.
힘내셔야 할 텐데... 쯧.
“걱정 마세요. 나연 누나는 금방 회복할 거니까요. 수장님도 힘내세요.”
“네?”
김나리가 약간 고개를 갸우뚱 한다.
그러다 무슨 말인지 깨달았는지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힘이 될 것 같네요.”
김나리가 미소를 짓는다.
언제나 보던 포커 페이스용 미소지만, 저 미소에서 다양한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건 내 착각이겠지?
지금은... 그래, 부끄러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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