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chapter 6. 테러범
* * *
35.
신성 마법 중에 ‘신탁 받기’라는 게 있다.
신탁은 신이 원할 때 내려주는 건데, 신탁 받기라니, 사실 이상한 조합이다.
하지만 마법은 실존한다.
신도 신탁을 받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신은 누구에게 신탁을 받느냐고?
바로 마나에게 받는다.
“(신탁 받기는 마나에게 물어보는 거예요. 뭐든 물어볼 수 있어요. 과거, 현재, 미래의 일까지도 가능해요.)”
“아르케니아에도 신탁 받기가 있어요. 마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쓸 수 있어요. 아마 지구에서도 가능할 거예요.”
엘레나와 케이라가 말을 주고받았다.
듣다 보면, 자연스레 의문이 생긴다.
“그런데 왜 루의 힘이 필요한 거예요? 신성마법이면 엘레나도 쓸 수 있지 않아요?”
“(보통 신성마법이랑 달라서, 최소 신성 스탯 2가 필요해요. 그래서 저도 지금은 쓸 수 없고, 성녀 정도가 아니고서야 혼자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동안은 신성이 없이 신성마법을 쓰면 위력이 떨어지는 정도였는데, 이건 아예 사용이 불가능한 모양이다.
하긴 듣기만 해도 효과의 차원이 다르다.
미래의 일을 어떻게 아는 거지?
“마나는 그런 일까지 가능한가? 그런 것치고는 아무나 쓰는 것 같은데.”
가람이 내가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신성 마법에서 마나를 쓰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쓰는 방식과 달라요. 그래서 신성 스탯이 필요하고요. 여기 식으로 말하면, 신성 스탯은 일종의 권한이에요. 마나가 가지고 있는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인 거죠. 신성 스탯이 높을수록 더 높은 권한을 가지게 되고, 더 중요한 정보, 세상의 근간에 접근할 수 있어요. 그곳에서는 미래도 볼 수 있죠. 마법사들은 본다는 표현보단, 고정시킨다는 표현을 좋아하지만요.”
아, 그렇구나.
이해한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뭐가 됐든 신성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내가 쓰러진 건 그 신성을 못 불러와서 그런 거 아닌가?”
엘레나가 열세 번째 검으로서 루에게 빌리는 신성 스탯 +4.
그게 게이트를 통해 넘어오려다가 게이트를 부술 뻔해서, 나는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실험해봐야 확실히 알겠지만, 신성 스탯 1이라면 괜찮을 거야.”
“엘레나가 1만 받을 수도 있어요?”
“(아니요. 힘을 아예 안 받는 건 가능해도, 1만 받는 건 불가능해요. 저는 무슨 마법을 써도, 4의 신성 스탯을 끌어오게 돼 있어요.)”
“뭐야? 그럼 누가 신성 마법을 쓰는 건데?”
“너.”
케이라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이세계체류계약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엘레나의 신성 마법을 빌려와서 내가 쓰면 되는 것이다.
“좋아, 그럼 지금 해볼까? 엘레나, 손 좀 줄 수 있어요?”
엘레나는 내게 왼손을 주는 대신에 머뭇거렸다.
주변 눈치를 살피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그동안 나연 누나 앞에서 마력 충전 잘만 해놓고서는.
나는 획하고 그녀의 왼손을 낚아채 손등에 입맞춤했다.
화아악.
엘레나의 얼굴이 터질 듯 빨개졌다.
좀 너무한 건가? 가람형도 있는데?
“엘레나, 뭐를 빌려오면 될까요? 공통 신성마법이면 되나요?”
“(아, 아니요... 루의 힘이요.)”
“네, 알겠습니다.”
나는 ‘루의 힘(A)’를 가져왔다.
내 상태창에서는 ‘루의 힘열화판(B)’가 됐다.
“됐어요. 이걸...”
엘레나에게 물어 보려고 했는데, 그녀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이 분 어디 가셨어요?”
“이따가 올 거야.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해주세요.”
가람과 나연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보아하니, 부끄러워서 후다닥 도망간 모양이다.
“엘레나 없어도 신성 마법 쓸 수 있지?”
“물론.”
힘을 빌려오면, 빌려온 상대 수준의 숙련도로 사용가능하다.
열세 번째 검인 엘레나는 신성 마법에도 비교적 능통했다.
‘루의 신탁 받기.’
‘루의 힘’ 중에 저런 이름의 마법이 있었다.
마법을 펼치려고 해보니, 신성 1로는 사용이 불가능했다.
“게이트 오픈.”
푸른 원이 내 머리 위에 생성됐다.
케루온으로 연결된 게이트였다.
그 상태에서 다시 ‘루의 신탁 받기’를 사용했다.
사람을 찾는 걸로, 대상은 지금 이곳에 없는 엘레나.
후웅.
신성 마법을 사용하려고 하자, 조금 전과는 반응이 달랐다.
먼저 게이트 너머에서 무언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쓰러지기 전에 느꼈던 기운이랑 비슷한 기운이다.
대신 엘레나나 케이라의 예상대로, 확연히 작았다.
그래도 기운은 게이트를 겨우 넘어왔다.
끼긱 하고 게이트가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다.
[자애와 사랑의 신, 루가 당신에게 축복을 내립니다.]
[신성이 1 상승합니다.]
됐다!
정말로 신성이 올랐어!
다음은 그 신성으로 마나, 한 차원 높은 마나에 접근하는 거였다.
신성을 끌어올리자, 주변의 풍경이 약간 다르게 보였다.
사람들과 사물들 위에, 또다른 그들이 겹쳐 보였다.
또다른 그들은 흰색 배경에 검은 선만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게... 신성의 세계?
내 마나로 겹쳐 있는 그들의 모습에 관여할 수 있었다.
내가 가진 권한으론 약간의 상처를 지우는 게 다였지만, 좀 더 권한이, 신성이 높다면 그들의 전부를 지워 버릴 수도 있었다.
신이 무서운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지금은 신탁을 받아야 한다.
나는 신성과 마력, 마나를 적절히 사용해 마법을 발현했다.
대상은 여기에 없는... 이 아니라, 어느새 여기에 있는 엘레나.
엘레나는 신성을 느끼고 빠르게 돌아온 모양이다.
무릎 꿇고 루의 종 특유의 자세를 취했다.
이러다 나중에 나를 신으로 여기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여기에 있어도 마법이 정상적으로 발현되면 마법을 엘레나를 가리킬 것이다.
이건 세상의 모든 마나에게 물어서 정보를 얻는 거니까.
하지만 마법이 완성되기 직전에, 이상이 발생했다.
“윽.”
머리가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이었다.
집중을 유지할 수 없었고, 마법은 자연스레 취소됐다.
게이트는 그 전에 이미 강제로 닫혀 버렸다.
“(정민님? 정민님?)”
엘레나의 표정이 굉장히 어둡다.
똑같은 장면을 두 번째 보는 거니까.
트라우마로 남는 건 아니겠지?
“윽... 괜찮아요. 이건 견딜 만해요.”
머리는 아팠지만, 피가 나오진 않았다.
쓰러질 정도는 아니다.
그래도 비틀 거릴 정도는 됐지만.
엘레나가 나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마력과 마나 둘 다 부족해.”
케이라의 진단이다.
나도 그렇게 느꼈다.
이 마법은 내 쥐꼬리만 한 마나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가람의 물음에 케이라가 답했다.
“걱정 마세요, 가람님. 훈련으로 충분히 커버 가능한 수준이니까요.”
케이라가 나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예감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고생길이 열린 것이다.
기껏 마력 충전을 그만했다 싶었더니, 이젠 마력 훈련을 해야 해?
하하, 헛웃음만 나온다.
+++
일주일 뒤.
마력 훈련은 예상만큼 힘들었다.
일단 방법이 무식했다.
마력이 바닥날 때까지 마나를 운용하는 것.
혀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마나를 모아 심장에 저장하는 것.
지난 일주일, 머리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케이라의 단호한 채찍과 엘레나의 극진한 간호가 없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체력 훈련을 한 첫 주가 헬위크였다면, 마력 훈련을 한 둘째 주는... 그래, 헬조선이었다.
그리고 헬조선을 이겨낸 나는 놀라운 성과를 얻었다.
[레벨:20/21]
[체력:04][근력:03][민첩:02]
[마나:03][마력:04][친화:02]
[감각:01][신성:01]
스탯은 5가 올랐고, 잠재력도 1 올랐다.
믿을 수 없는 성장세였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제 겨우 20이다.
D급 키퍼라는 이야기다.
이렇게나 수명을 갈아 넣어 수련을 하는데도 고작 D급이다.
내 쓰레기 같은 잠재력이란.
케이라와 엘레나가 없었다면, 나는 키퍼로서도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다시 한 번 그녀들에게 감사해야지.
“형, 지하에 무슨 이런 시설까지 있는 거죠?”
“적은 항상 존재하니까.”
가람이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우리는 지금 크루 하우스 지하에 내려와 있었다.
그것도 자그마치 지하 10층.
지하로 내려갈수록 층의 넓이가 줄어들긴 했지만, 10층이면 일반적인 건물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깊이였다.
거기에 10층에는 떡하니 철창살로 된 감옥이 있었다.
이쯤 되면 GGC의 정체를 의심해봐야 한다.
국가 비밀 기관이라든가? 그런 곳 아닐까?
감옥은 총 다섯 개가 있었고, 한 곳 빼고는 다 비어 있었다.
한 곳에는 한 남자가 쇠사슬에 매달려 공중에 떠 있었다.
“저 남자가 스나이퍼야.”
가람의 목소리에 매달려 있던 스나이퍼가 눈을 떴다.
그는 가람을 확인하고는 몸을 흔들며 가람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으으, 미안,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매달려 있는 거 빼고는 겉으로 볼 때 괜찮아 보였는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잘못 했으면 조용.”
“...”
스나이퍼는 바로 입을 닫았다.
공포로 정신이 나갔는데도, 저렇게 통제가 될 수가 있나?
이쯤 되면 가람의 정체도 의심해 봐야 한다.
대한민국 키퍼 관리국의 요원 같은 걸지도?
“형... 대체 어떻게 하신 거예요?”
“영업비밀이야.”
가람이 씨익하고 웃는데, 내가 다 등골이 서늘했다.
우리는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케이라가 두 눈을 감고 주문을, 룬어를 읊조렸다.
이곳에 온 건, 스나이퍼의 기억에서 범인의 기억을 꺼내기 위해서다.
그래야 그 기억을 바탕으로 ‘신탁 받기’를 쓸 수 있다.
신탁이라면서 무슨 기억이 또 필요하냐라고 물으신다면, 나는 신이 아니다라고 답해주고 싶다.
인간이 하는 일에는 제약이 있는 법이다.
고작 신성 스탯 2로 원하면 짠하고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쉽지 않다.
잠시 후, 케이라가 눈을 떴다.
케이라 치고는 꽤 오래 주문을 외웠다.
기억을 꺼내는 게 어려운 일일 모양이다.
“됐습니다. 가람님, 스나이퍼에게 명령을. 그리고 정민아, 이리 와.”
가람이 스나이퍼를 다그쳤다.
“어이 너, 빨리 공범을 떠올려 봐.”
“모릅니다. 더 아는 게 없어요.”
“잔말 말고 그냥 떠올려. 그거면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떠올리겠습니다!”
스나이퍼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케이라가 오른손을 스나이퍼 위에 올리고, 왼손을 내 머리 위에 올렸다.
“...이거다. 정민아, 보여?”
처음에는 무슨 말인가 했다.
내 눈에 보이는 걸 케이라도 같이 보고 있을 테니까.
바로 스나이퍼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다음,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검은색 슈트를 입고 있는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얼굴을 평범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워서 인상이 꽤 강렬했다.
“보여. 이걸로 찾으면 되는 거야?”
“그래. 내가 유지하는 동안 찾아야 해. 빨리.”
그럼 빠르게 가보자고.
위층에서 테스트는 이미 끝났다.
지금 마력과 마나로 신탁은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파아앗.
내 머리 위에 게이트가 열렸고, 신성이 게이트를 통해 넘어왔다.
나는 신성 마법을 위한 룬어를 떠올리며, 루의 신탁을 받았다.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지도, 빨리 지도를.”
가람이 내 앞에 태블릿을 내밀었다.
한국 지도였다.
나는 강원도를 확대했고, 철원을 확대했고, 사금리를 확대했다.
이미지는 사금리의 한 곳에서 붉은 점을 띄워주고 있었다.
그곳을 내 손가락으로 짚었다.
“여깁니다.”
이제 잡는 일만 남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