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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34화 (34/137)

〈 34화 〉 chapter 6. 테러범

* * *

34.

“그럼 지금 한 번 열어 볼까요?”

“(네!)”

엘레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다가, 자신이 아직 반나체 상태인 걸 발견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제지했다.

“(잠깐만, 잠깐만요!)”

엘레나가 두 눈을 감고 짧게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땀이 순식간에 마르면서, 피부가 뽀송뽀송해졌다.

케이라도 저걸 할 줄 알았다.

온 몸이 깨끗해지는 주문이다.

저걸로 정자도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해서, 나는 케이라와 할 때 피임을 하지 않았다.

엘레나도 안 해도 될 것 같다.

엘레나가 손가락으로 날 가리키자, 내 피부도 뽀송뽀송해졌다.

아까 그녀가 혀로 닦아준 거시기도, 다시 한 번 깨끗해졌다.

오, 이게 이런 식이구나.

신기하다.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

케이라는 이런 거 안 해줬다.

대신 그녀는 날 씻기는 걸 좋아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씻으면서 하는 걸 더 좋아했겠지.

엘레나가 내 놀라는 표정을 보고 씽긋 웃는다.

내 분신이 무릎반사 급으로 벌떡 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그녀의 미소가 멈추고 얼굴이 빨갛게 물든다.

“(그... 또... 왜?)”

아직 남자를 모르네.

아니, 반나체 상태로 그렇게 귀엽게 웃으면 안 된다고요, 이사람아.

“귀여워서요. 안아주고 싶은데요.”

“(...네?)”

엘레나의 얼굴이 터질 것 같다.

그녀는 그 상태로 몇초 간 멈춰 있다가, 천천히 뒷걸음질로 침대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버벅 거리면서 갑옷을 다시 입었다.

“(...정민님도 멋지세요...)”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 채 하는 말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이번엔 넘어가기로 했다.

나도 진짜로 ‘루의 힘’이 넘어오는지 궁금했다.

바지를 입고, 옷매무새를 정비했다.

엘레나가 루에게 예의를 차리는 것처럼, 나도 예의를 차리고 싶었다.

루는 생명의 은인, 아니 은신? 이라고 불러야 하나?

“열겠습니다.”

“(네!)”

게이트를 여는 건 숨 쉬는 것처럼 할 수 있었다.

파아앗.

푸른색 원이 허공에 나타났다.

엘레나, 케이라가 나온 게이트와 같은 모양이다.

“어때요?”

“(잠깐만요. 루님의 기운이...)”

나도 느꼈다.

무언가가 게이트를 통과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무언가’는 게이트를 통과하기엔 너무 컸다.

그 탓에 게이트가 삐걱댔다.

자연스럽게 나도.

“쿨럭.”

검은 피를 토하고 말았다.

코에서도 피가 흘렀다.

머리는 이미 깨어진 듯했다.

“(정민님!)”

엘레나의 외침과 함께 따뜻한 빛이 나를 감쌌다.

그러나 동시에 게이트는 더욱 세게 흔들렸다.

이대로는 안 돼.

결국 나는 게이트를 닫았다.

“쿨럭, 쿨럭.”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쏟아졌다.

눈앞이 희미했다.

“(정민님! 정신 차리세요! 제가 치료해 드릴 수 있어요! 정민님!)”

엘레나... 울고 있는 건가.

손을 뻗어 그녀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울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품으로 쓰러졌다.

갑옷은 차가웠지만, 그녀의 마력은 따뜻했다.

“(정민님!)”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침대 위에 정민이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마법으로 깨끗하게 한 옷에는 피의 흔적따윈 없었다.

“(괜찮은 거죠?)”

“괜찮아요. 마력 및 마나 과다 사용으로 인해 쓰러진 것 뿐이에요.”

케이라가 덤덤하게 말했다.

반면 엘레나의 목소리는 떨렸다.

“(그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데...)”

엘레나는 불안했다.

정민이 쓰러진 게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괜히 루의 힘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고집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다며.

“이 정도 피야 일상이죠. 엘레나도 잘 알잖아요? 성기사면 성기사답게 회복시키면 돼요.”

“(맞아요. 그랬어요. 그래서 지금 안정 상태잖아요? 그렇죠?)”

엘레나는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것들을 확인해야 할 정도로 불안했다.

그만큼 정민이 그녀에게 큰 존재가 되어 버렸다.

고작 단 한 번의 관계였을 뿐인데.

“(엘레나, 표정 숨겨요. 지금 당신보다 불안한 건, 정민의 가족이에요.)”

케이라는 정민의 가족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르케니아어로 말했다.

케이라와 엘레나는 통역 마법으로 소통하기 때문에, 서로 무슨 언어로 이야기해도 상관없었다.

“(아...)”

엘레나는 그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 엘레나의 방에는 10층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엘레나가 소리를 너무 크게 질러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몰려 온 것이다.

침대 옆에 앉아서 정민의 손을 잡고 있는 건 정민의 어머니.

그 옆에는 정민의 아버지.

또 그 옆에는 정민의 동생.

그리고 나연은 문에 기대어 하품 중 이었다.

참고로 나리는 출타중이다.

케이라가 제일 먼저 와서 상황을 수습하지 않았다면, 정말 큰 사고가 일어날 뻔했다.

아들이 피를 토하는 걸 본 정민의 어머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으니까.

“(성기사답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 주세요. 안 그러면 정민의 가족이 엘레나를 어떻게 보겠어요? 그리고 그러면 정민도...)”

“(헉...!)”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불안해졌다.

‘정민님이 날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돌아가야 하나?’

‘안 돼!’

‘이제 그가 없는 세상은 의미가 없다고!’

‘어떻게 해? 벌써 점수를 잃었나? 그럼 어떻게 다시 복구를...’

수십 개의 생각이 머리를 오갔지만, 이런 경우가 처음인 엘레나의 머리는 쉽게 답을 도출하지 못했다.

그런 그녀에게 먹구름을 가르는 한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 들려왔다.

“(농담이에요. 정민이가 그럴 리 없잖아요? 정민이 믿죠?)”

“(네! 믿어요! 그를 믿어요!)”

엘레나는 지체하지 않고 외쳤다.

이미 그녀에게 정민은 종교와 같았다.

“(그럼 심신 안정 마법이나 좀 써 줘요. 정민의 가족이 불안해하고 있으니까요.)”

“(네, 그럴게요. 정말 좋은 방법이에요.)”

엘레나가 두 눈을 감고 나지막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보이지 않는 마나가 방 안을 채우며 모두를 감쌌다.

나연만이 인위적인 따뜻함을 눈치 챘지만, 엘레나를 슬쩍 쳐다보고 말았다.

“(잘 했어요, 엘레나. 저는 이런 계통의 마법은 못 써서요. 역시 큰 도움이 되네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케이라님의 침착함이야말로 모든 상황에서 꼭 필요한 거죠. 저는 늘 덜렁이라... 아까도...)”

엘레나는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났다.

입술과 입술이 마주칠 때부터, 그녀는 행복감에 폭 빠져서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첫 경험의 아픔도 그다지 크지 않았다.

몸이 튼튼한 건 그녀 평생에 장점이었으니까.

그보다는 머리가 붕 뜨는 것 같은 쾌감의 향연만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처음 느껴보는 기분에 그녀는 흘러가는 대로 가만히 둘 수밖에 없었다.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닌데, 받기만 한 것 같았다.

“(...잘 안 됐나요?)”

“(아니요, 잘 됐어요. 최고였어요!)”

“(그럼 다행이에요. 답은 얻었나요?)”

“(답? 아...)”

엘레나는 전에 케이라와 대화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질문했다.

‘(...정말 그렇게 좋아요?)’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안 좋을 리가 없는데.

하지만 당시 엘레나에게는 중요한 질문이었다.

돌아가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으니까.

케이라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게 엘레나를 자극했다.

당연히 좋다는 자신감에 찬 웃음.

경험해보지 않으면 말로 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보여주는 웃음.

먼저 맛본 자가 우월감에 짓는 웃음.

그 세 가지가 다 아니겠지만, 엘레나는 그렇게 느꼈고,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입었다.

그래서 엘레나는 정민과 하룻밤 자기로 했다.

저 여우같은 케이라가 정민을 독차지하는 건 뭔가 열이 받치니까.

자신도 정민에게 강렬한 기억으로 남고 싶으니까.

몸매, 특히 가슴은 케이라에게지지 않은 자신도 있었다.

사실, 하룻밤 잔다고 해서 여기 꼭 남을 필요는 없었다.

귀환 게이트는 언제든 열 수 있으니까.

돌아가고 싶을 때 돌아가면 된다.

다시 지구로 오는 게 불가능해서 그렇지.

물론 한 번 하고 나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은 있었다.

안 그래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정민이다.

몸을 섞고 나면 정말로 자신의 인생 전체를 사로잡아 버릴 것만 예감이 들었다.

그러면 몸을 섞기 전처럼 쉽게 돌아갈 수 없다.

하룻밤이 한 달이 되고, 6개월만 더 지켜보자고 하다가, 1년, 2년이 훅 가버릴 것이다.

그녀가 검을 수련하느라 30년 동안이나 처녀로 지냈던 것처럼 말이다.

그 때가 되면, 되려 케루온으로 돌아가는 걸 주저할 수도 있다.

그리고 결국, 엘레나의 예감대로 됐다.

“(...찾았어요.)”

자그맣게 답하는 엘레나의 얼굴에는 케이라와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만한 만족을 뜻하는 미소가.

“하암...”

자다가 뛰쳐나온 나연은 하품하면서 케이라와 엘레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둘이 자기들만 아는 언어로 쑥덕쑥덕 하더니, 눈을 마주보며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굉장히 우월감에 차 있는 미소다.

‘...레즈? 그건 아닌데? 그럼 저건 뭐야?’

나연은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

10층 거실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가람의 보고를 들으러 온 거였다.

“그 동안의 경과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가람의 말을 케이라가 끊었다.

“통역 마법을 걸게요. 이제 엘레나도 같이 듣는 게 좋으니까요.”

케이라가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나야 마나가 움직이는 걸 느꼈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을 거이다.

“된 겁니까?”

“네, 됐어요. 그리고 가람, 저와 엘레나를 위한다면 말을 편하게 해도 괜찮아요.”

“...네?”

“엘레나도 편하게 대해주는 데 동의할 거예요. 그렇죠?”

엘레나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었는데, 가람이 나를 쳐다본다.

어? 나는 왜? 나랑 관계된 일이야?

내가 그 눈빛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으니까, 가람이 포기하고는 말을 이었다.

“알겠습니다... 흠흠, 아니, 알겠어. 일단 스나이퍼는 잡았어.”

“벌써요? 그럼 곧 주범도 잡겠네요.”

“아니야, 단서가 없어. 스나이퍼에게서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했어.”

“왜요?”

“그는 이번 테러에만 참여한 사람이라, 아는 게 없어.”

“그런...”

“그래서 스크롤을 사용했을 것 같은 사고들을 조사하고 있는데, 이쪽도 큰 성과는 없을 것 같아. 범인은 전화와 택배만을 이용해서 물건을 팔은 것 같으니까.”

“그래도 돈은 받았을 거 아니에요?”

“그것도 마정석을 교환하는 방식으로 했다더라고.”

“쳇...”

마정석의 등장으로 현금 거래가 훨씬 쉬워졌다.

주먹만 한 돌이 천만 원을 가볍게 넘으니까.

“사건이 미궁에 빠졌어. 그 놈이 다시 활동하기 전까지는 어떻게 방법이 없어 보인다.”

다시 활동이라...

“...미끼는 어때요? 제가 미끼가 되는 거죠.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저를 노리고 서울 한복판에서 테러를 벌인 거잖아요. 충분히 미끼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것도 생각해봤지만, 성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야. 스나이퍼는 그 놈이 굉장히 신중한 놈이라고 했어. 한 번 실패한 일을 다시 할까? 신중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완전히 그 놈을 잊을 때까지 기다릴 것 같은데.”

일리가 있다.

F급 키퍼를 처리하는 데 장거리 저격을 준비한 놈이니까.

다음에는 더 완벽하게 하려고 하겠지.

시간이 엄청 들더라도.

진짜 방법이 없나?

이대로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하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답이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혹시, 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알 수 있나요?)”

엘레나였다.

가람이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스나이퍼를 통해 몽타쥬를 확보는 했는데, 그걸로 뭐가 되나?”

“(몽타쥬? 그림으로는 어려워요. 그 스나이퍼란 사람은 범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는 거죠?)”

“그건 그렇지.”

“(그러면 신성마법으로 범인을 특정할 수 있습니다.)”

“정말?”

가람이 몸을 기울이며 엘레나에게 되물었다.

“(네, 가능합니다. 정민님이 루의 힘을 빌려올 수 있다면요.)”

엘레나의 고개가 내 쪽을 향했다.

그러자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엥? 또 나야?

나는 모두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뭔가, 고생길이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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