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chapter 5. 엘레나 루
* * *
32.
탁.
“(차가 맛있네요.)”
엘레나가 컵을 내려놓았다.
말은 담담하게 했지만, 속은 정말로 놀라는 중이었다.
‘이 음료야 말로 루의 힘이 이세계에서도 존재한다는 증명이 틀림없어!’
그녀가 평생 먹어본 그 어떤 음료보다 맛있었다.
100년 된 포도주도 이 음료를 따라올 순 없었다.
“맥심이라고 해요. 이 세계에서는 흔하디 흔한 거죠.”
“(...네? 왕족들이나 먹는 게 아니라요?)”
“아니에요. 흔하디 흔해서 서민들도 쳐다보지 않는 거라고 해요.”
“(그런...)”
엘레나도 이 세계의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이 10층짜리 건물만 봐도 그렇다.
이런 게 하나만 있어도 놀라운데, 이 세상에는 이런 건물이 수백수천 개가 넘는다고 한다.
건물 안의 장비들도 하나같이 그녀의 눈이 돌아가는 것들밖에 없었다.
런닝 머신이란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상품이나, 몸무게를 표시하는 체중계의 정확함이라든가, TV가 보여주는 선명한 화질 같은 것들은 말한 것도 없다.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던 소파나 침대의 편안함도 그녀의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음식만은 달랐다.
재료는 좋았지만, 조리방법이나 조미료가 그녀의 입에 맞지 않았다.
약간 심심하다고 할까?
당연한 이야기다.
음식이란 취향이니까.
30년을 케루온에 맞춰 살았는데, 이곳의 맛에 열광할 수는 없다.
열광한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맥심에 열광했다.
이렇게나 달고 부드러우며, 깊은 맛이 존재하는 줄 그녀는 상상도 못했다.
그녀의 정체성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맛이었다.
그리고 케이라는 맥심이 이 세계에서 흔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이것보다 맛있는 게 있다고? 진짜? 그게, 말이 돼?’
이 세계는 어디까지 무서워지려는 걸까.
신도 없고 마법도 없다기에 처음엔 우습게 생각했던 적도 있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곳은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세계였다.
“(그럼 조금 가져가도 될까요?)”
“물론이죠. 한 박스 챙겨드릴게요. 그거 말고 다른 필요한 건 또 없으세요? 여기 생리대가 진짜 좋은데, 아직 안 써보셨죠?”
“(생리대요?)”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였다.
그렇지만 얼마나 편안할지 감이 왔다.
케이라의 눈빛만 봐도 말이다.
“신세계입니다. 무엇을 기대하든 상상이상일 거예요.”
“(그럼 그것도...)”
“가능해요. 제 생명의 은인이신데 무엇이든 드릴 수 있죠. 저는 정민이까지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
엘레나가 화들짝 놀라며 케이라를 쳐다봤지만, 케이라는 여전히 가벼운 미소만 짓고 있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게 아니군요.)”
“네, 저는 이정민까지도 내어줄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인의 자리도 말인가요?)”
엘레나는 질문하고 아차 싶었다.
이 질문을 한 것 자체가 이미 마음이 기울었다는 이야기였다.
케이라의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물론입니다.”
“(정민님과 상의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맞아요.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이 세계에서는 일부일처가 기본이라고 들었어요. 케이라님은 괜찮으시겠지만, 정민님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루의 종들은 일부일처를 기본으로 한다고 들었어요. 엘레나는 그걸 뛰어넘으실 수 있나요?”
루의 성직자들은 대부분 일부일처를 한다.
사랑의 신 루의 기본방침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러는 건 아니다.
일부는 세상의 관습을 쫓아 일부다처, 일처다부를 하는 이들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따로 제재를 받지는 않는다.
루는 사랑의 신.
결국 모든 종류의 사랑을 인정하니까.
그러니 ‘뛰어넘는다’는 잘못된 언어였다.
“(루께서는 모든 사랑을 긍정하십니다. 거기에는 뛰어넘을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있을 뿐이지요.)”
“그럼 가능하시겠네요. 그렇게 가죠.”
“(...네? 아니, 이야기가 왜 그렇게 되는 거죠? 저는 동의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요. 그리고 정민님은요? 정민님의 의사가 중요한 거 아닌가요?)”
“정민이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겨우 두 달 봤지만, 정민이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니까요. 루의 성직자가 배우자로 삼기에 아주 적합하죠.”
화악.
엘레나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빨개졌다.
어느 부분에서 빨개졌는지는 그녀도 알 수 없었다.
사랑이 넘친다에서? 밤새 관계를 맺는 정민과 케이라를 떠올려서?
아니면 배우자에서? 배우자가 되어 정민과 키스를 나누는 엘레나 자신의 모습에서?
하지만 엘레나는 케이라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녀에게는 30년의 지나온 삶이, 앞으로 30년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그만 하세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저는 돌아갈 겁니다. 루의 열세 번째 검으로서의 임무를 다할 거예요. 저는 루의 검으로서, 루의 종들을 지킬 겁니다.)”
“제가 루의 종이 되기로 맹세를 한다면요?”
“(놀리지 마세요. 설사 진심이라도 저는 돌아갈 겁니다. 루께서는 루의 방식으로 당신을 지킬 겁니다. 이를테면, 정민님이 당신을 지킬 거예요. 사랑의 기사로서. 그것 또한 루의 보호입니다.)”
엘레나는 막힘없이 말했다.
이런 일도 있을까 해서 이미 답을 준비해둔 덕이었다.
“루의 검의 임무는 루의 종을 지키는 것 뿐 입니까? 좋아요. 그럼 이건 어떤가요? 루의 종으로서 할 일이 있을 텐데요.”
“(루의 종으로서 루의 이름을 전파해야 한다. 이 당연한 걸 말씀하시는 거라면,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루께서는 당신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 곳에서도 의무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차원에서도 아마 그렇겠지요.)”
다른 차원에서까지 신의 신성이 미치진 않는다.
그건 게이트로 들어가는 성직자들에 의해서 이미 파악된 일이다.
그리고 케루온의 모든 신들은 그들의 종에게 말했다.
‘게이트 내에서 나를 증명하려 애쓰지 마라.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엘레나에겐, 지구의 엘레나에겐 의무가 없다.
“맞아요. 아르케니아에서도 그렇죠. 힘이 없으니까 의무도 없는 거죠. 의무라는 말이 나왔으니까, 의무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엘레나, 당신은 평소에 어떻게 생각했죠? 게이트 내에 들어가게 되면, 의무를 다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나요?”
“(그건...)”
성직자의 힘은 신에게서 나온다.
신성마법의 중요 부분은 신의 도움, 신성이 없이는 발동시킬 수도 없다.
기계적으로 얘기하면, 신들은 힘을 빌려주는 대신에 신의 종들이 의무를 지키기를 요구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신의 종들은 힘을 얻기 위해서 의무를 지켰다.
따라서 신들은 힘이 없는 다른 차원에서 의무를 요구하지 않았다.
기브 앤 테이크가 안 되는 상황이니까.
평소의 엘레나, 키퍼가 되지 못해 게이트에 들어가지 못하는 엘레나는 이 말을 어처구니 없다고 생각했다.
받는 게 없다고, 신에게 주지 않는다고?
그러면 그동안 받은 건?
아니, 그 전에 그 정도 각오로 믿겠다고 한 건가?
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어린아이란 말인가?
신이 없는 곳이라면 더욱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곳에서도 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는 기회잖아?
“굳이 답을 듣지는 않을게요. 저는 지금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기 보다는,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으니까요.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으신 거죠? 루의 종으로서? 그리고 엘레나로서?”
“(저는...)
지구에 루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있다.
인간이 있으면 루 자체나 다름없는 사랑도 있다는 이야기다.
다른 지성 생명체를 찾아볼 수 없는 일반적인 게이트와는 다른 곳이다.
이곳에서라면, 루를 전파할 수 있다.
루를 믿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어쩌면, 루께서 이곳까지 오실 지도 모른다.
‘어떡하지? 내가 할 수 있을까? 나 혼자서? 외로이... 아니야. 나는 외롭지 않아.’
외롭다는 말은 엘레나의 믿음이 허용하지 않는 말이었다.
이 세계에는 사랑이 존재하고, 사랑이 존재하는 한 그녀는 외로워서는 안 된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사랑을 하고 있다.
영원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 사랑에서 그녀는 충분한 안정감도 누리고 있다.
“(...한 가지만 답해 주실 수 있나요?)”
“얼마든지요.”
엘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질문이 이어질수록 엘레나의 얼굴을 붉어졌다.
그만큼 케이라의 미소는 짙어졌고.
+++
‘씻고 나서 엘레나 방으로 가 봐.’
운동 마지막 타임을 끝낸 후, 케이라가 한 말이다.
뭘 꾸미고 있나?
왜 엘레나 방이지?
그리고 보통이라면 마치고 자기 방으로 오라고도 했을 텐데?
그런 의문이 잠깐 스쳤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충전하면 끝이니까.
똑똑.
“(드, 들어오세요.)”
내가 누구라고도 말하지 않았는데, 엘레나는 나인 걸 아는 눈치다.
이상할 것도 없다.
그녀는 S급 키퍼니까.
[신분:케루온인(임시체류중)]
[종족:인간]
[나이:30]
[레벨:51/55]
[체력:11][근력:07][민첩:08]
[마나:04][마력:08][친화:03]
[감각:09][신성:01]
처음 그녀의 능력치를 봤을 때는 깜짝 놀랐다.
자그마치 50레벨이었다.
S급 키퍼의 기준도 다 채웠다.
엘레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원래는 열세 번째 검으로서 보정 때문에 신성에 +4가 되어 55레벨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녀 입장에서 51레벨은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런 만큼, 엘레나가 느끼는 상실감은 더 클 거다.
55에서 51이 됐으니까.
그것도 제일 올리기 어렵다는 신성이 4가 떨어졌다.
덕분에 숨쉬듯 할 수 있는 일들을 못하게 됐단다.
엘레나의 방은 처음인 것 같다.
별다른 건 없었다.
침대, 책상, 의자... 크루에서 처음 제공해 준 그대로다.
좋게 말해서, 성직자의 겸손함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그래도 하나는 다르다.
이 방에는 커다란 거치대가 있다.
바로 엘레나의 갑옷을 걸어두는 거치대다.
아, 그러고 보니 거치대를 보느라 이 방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다.
거치대는 나연이 힘을 써서 만들었다.
‘저런 예술품이 바닥에 나뒹구는 건 말이 안 되는 거야!’
나연의 말처럼, 엘레나의 갑옷은 예술품에 가까웠다.
순백의 표면에 금색의 문양으로 포인트를 준 갑옷으로, 문양이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이음새에도 루 고유의 장식들이 들어가 있다.
찬찬히 뜯어볼 만한 맛이 있는 갑옷이다.
어떤 전시관에 저 갑옷 하나만 전시한다고 해도, 기꺼이 돈을 내고 관람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저런 풀 플레이트 메일을 볼 기회도 적을뿐더러, 만화나 게임에 나올 법한 비주얼로 된 갑옷은 더더욱 볼 일이 없으니까.
저건 정말 마법이 있는 세계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거치대엔 갑옷이 없었다.
대신 그 어떤 거치대보다 뛰어난 거치대에 갑옷이 걸려 있었다.
엘레나다.
그녀는 갑옷을 입은 채 등을 돌리고 있다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투구는 쓰고 있지 않아서, 그녀의 밝은 금발이 몸의 회전을 따라 원을 그리며 촤라락 하고 펼쳐졌다가 다시 차분하게 내려앉았다.
그녀의 금발은 갑옷과 정말 잘 어울렸다.
왜 갑옷일까?
검과 방패도 들고 있고?
아, 집에 간다고 벌써 준비하는 걸까?
그런가 보다.
저렇게 빨리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간 정이 있었는데.
뭐... 맘대로 불러온 내가 할 말은 아니다.
그녀가 원하면 빨리 보내주는 수밖에.
그러니까 마지막 충전을 시작하자.
“자, 왼손을...”
철컥.
엘레나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오른손엔 검이 들려져 있었고, 검 손잡이는 내 쪽으로 향했다.
마치, 내가 잡으라는 듯이.
뭐지?
새로운 충전방법... 일 리가 없었다.
그래도 기세에 밀려 나는 그 검을 잡았다.
그러자 엘레나는 그 검의 끝을 자신의 심장이 있는 부위에 댔다.
“이 심장을 당신에게 바칩니다. 나의 사랑에게.”
엘레나가 내 눈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정확한 한국어였다.
“...네?”
아무튼 너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나는 무의식적으로 반문하고 말았다.
그리고 멍한 반문은 그녀가 원하던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아악!”
철컥, 철컥.
엘레나가 순식간에 검과 방패를 갈무리하더니, 커튼 뒤로 숨었다.
커튼 뒤로 숨는다고 숨겨질 갑옷이 아니라서, 발과 방패와 검이 다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일까.
지끈 거리는 머리가 시간이 지나자 슬슬 돌아가기 시작했다.
한 1분쯤 지나니까, 대충 감이 왔다.
이건... 내가 잘못한 게 맞다.
나는 엘레나에게 다가가 커튼 밑으로 나와 있는 발을 손으로 톡톡 치면서 물었다.
“...다시 할까요?”
“(...됐어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이번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말도 안 하고 무작정 해버린 제 잘못인 걸요.)”
바른 말이다.
언질을 조금이라도 줬다면, 맞춰줬을 텐데.
그래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게 있기 마련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러니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럼 이만 갈까요?”
“(...네?)”
“다시 하기 싫으니까 가야죠.”
“(그, 그게 아니잖아요! 지금...!)”
“그럼 다른 용건이라도?”
화락.
나는 커튼을 걷어내고, 엘레나의 얼굴을 내게로 돌렸다.
그녀와 내 눈이 0.001초 정도 마주쳤고, 그녀가 고개를 내려 피했다.
그녀의 얼굴은 폭발할 듯 빨갰다.
“(그, 그... 그...)”
“용건 없으면 진짜 가요?”
엘레나가 고개를 슬금슬금 들어서 다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 당신, 당신을 원해요. 저를 안아주세요!)”
엘레나는 외치듯 말하고는 그 자리에서 철푸덕 주저앉았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 옆에 앉았다.
“잘 했어요.”
“(...심술이 심하시네요.)”
“심술이라뇨.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예요. 앞으로는 꼭 말로 하는 거예요?”
“(...당신은요? 당신은 어떤데요?)”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
나를 갈구하는 푸른 눈동자에서 다른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신비한 푸른 눈동자 말고, 이 올곧은 푸른 눈동자도 나는 좋아한다.
이것 역시 거짓말이 아니다.
“저도 당신을 안고 싶습니다.”
“꺄... 읍.”
아까처럼 도망치려는 엘레나를 붙잡아 그 입을 내 입으로 막았다.
붉은 입술이 매우 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