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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31화 (31/137)

〈 31화 〉 chapter 5. 엘레나 루

* * *

31.

“...젠장. 대기업도 아니면서...”

스나이퍼는 아지트로 밀고 들어오는 가람을 피해 책상 밑으로 숨었다.

대충 봐도 적은 B급 키퍼 이상.

그것도 육체 강화계다.

일반인이 1 대 1로 절대로 못이기는 대상이다.

‘도망쳐야 하는데...’

가람이 들어온 곳이 이미 스나이퍼가 사전에 만들어 둔 비밀통로였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렇다고 입구로 가 봐야 다른 사람이 있을 게 뻔했다.

퇴로를 막는 사람들이 입구를 안 막았겠는가.

‘그래도 발버둥은 쳐 봐야지. 잡히나 안 잡히나 같은 철창신세라면.’

철컥.

스나이퍼가 권총에 탄창을 끼워 넣었다.

총 10발.

대박이 터질 수도 있는 수였다.

A급 키퍼든, B급 키퍼든, 총 맞고 뒤지는 건 같으니까.

하지만 스나이퍼의 생각은 바로 바뀌었다.

“순순히 나오면 목숨만은 살려줄게.”

스나이퍼는 가람의 목소리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분명 사람을 죽여 본, 의도적으로 죽여 본 자가 낼 수 있는 목소리였다.

‘빌어먹을... 이거 잘못하면 죽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의뢰를 받는 게 아니었다.

중소 크루의 F급 키퍼를 죽이는 의뢰라기에 승낙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거물이었나 보다.

스나이퍼도 GGC가 곧 대기업이 될 거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대기업이 될 거라는 것과 대기업이라는 이야기는 원래 하늘과 땅 차이다.

게다가 연구 결과에 따라서 대기업이 안 될 수도 있는데, 무서울 리가 없다.

결정적으로 사전 조사 결과, 표적은 진짜 생 초짜 F급 키퍼였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의뢰는 실패.

돈은 절반 밖에 못 받았고, 크루에게 추적을 당해 잡힐 위기에 처했다.

한국에서 스나이퍼를 쓰는 킬러를 찾는 건 비교적 쉬운 일이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쉬운 일이라는 거다.

대기업, 그러니까 인맥과 실력이 없는 크루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걸 해냈다는 건, GGC가 이미 대기업이라는 거다.

규모와 명성이야 금방 뒤따라 올 거다.

‘방법이 없다.’

“항복, 항복할게. 조사도 협조할 테니까.”

스나이퍼는 총을 던지고는 두 손을 들며 천천히 일어났다.

“잘 생각했다. 진짜 목숨만은 살려줄게.”

섬뜩한 말이었다.

스나이퍼는 그냥 철창신세를 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낫겠지.’

남을 죽이는 사람으로써, 그는 당연히 죽음 정도는 각오했다.

하지만 남을 죽이는 사람이라서, 그는 더 죽는 게 싫었다.

죽음이 뭔지 더 잘 아니까.

+++

헬위크라는 게 있다.

한국에서는 지옥주간이라고 불린다.

군 특수부대 훈련 중에서도 기간을 정해 인간을 한계까지 몰아넣는 방식의 훈련이다.

이걸 통과하고 나면 다른 일은 우습게 여길 정도로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고 한다.

‘헬위크도 버텼는데, 이 정도 쯤이야.’란 마인드다.

지난 일주일, 나는 나도 모르게 헬위크를 겪은 것 같다.

운동, 섹스, 운동, 섹스의 무한 반복.

그리고 중간중간 나를 미치게 만드는 마력 충전까지.

내 평생 이렇게 운동을 할 줄은 몰랐고, 섹스를 질린다고 생각할 줄도 몰랐다.

마력이야, 처음에도 힘들었고, 지금도 힘들다.

한계를 매초 경신하는 느낌이랄까.

내가 이 헬위크를 버티게 만드는 건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약물.

약물이 아니고서야 이미 퍼져 버렸을 것이다.

트롤 피로 만든 스태미나 포션은 무슨 정력제라도 되는지, 내 분신은 끊임없이 정자를 생산해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성과.

[레벨:15/18]

[체력:04][근력:03][민첩:02]

[마나:01][마력:02][친화:01]

[감각:01][신성:01]

[특성:게이트키퍼(EX)]

[기술:소환게이트(SS, 입문), 이세계체류계약(A, 숙련)]

지난 일주일 동안, 잠재력이 1 더 올랐고, 체력 쪽 스탯이 1씩 올랐다.

거기에 마력도 1 상승.

놀라운 성과다.

보통은 1 달에 1에서 2정도 오르니까.

세 번째는 기간이다.

일주일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못 버텼을 것이다.

운동, 섹스야 약물을 사용하면 1달까지도 어떻게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정신이 좀 피폐해지겠지만, 그래도 망가지진 않겠지.

옆에서 망가지도록 놔두지도 않을 거고.

하지만 마력충전은 정신뿐만 아니라 뇌가 아프게 만들었다.

머리가 시도 때도 없이 지끈 거렸다.

케이라의 말로는 지나친 마력 사용의 부작용이란다.

실제로 아픈 게 아니기 때문에 약물로도 소용없다고 한다.

덕분에 마력 스탯은 늘었지만, 짜증도 함께 늘었다.

그 짜증을 다 받아주는 케이라가 천사다.

쉬는 것 말고는 해결 방법이 없는데, 쉴 수가 없는 게 함정이다.

엘레나는 충전을 받지 않으면 죽으니까.

그래도 내일이면 귀환 게이트를 열 수 있다.

그러면 좀 괜찮아질 거다.

솔직히 그것만 보고 버티고 있는 거다.

삐빅.

알람이 울린다.

다시 그 시간이다.

나는 런닝 머신에서 달리는 걸 멈췄다.

“뭐야? 벌써? 흠... 근데 그거 달리면서는 안 되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미안, 미안. 장난이야, 장난.”

나도 안다, 장난인 거.

근데 짜증이 많아지니 받아줄 수가 없다.

나연도 그걸 느꼈는지, 다행히 바로 빠져 준다.

“(여기요.)”

엘레나가 대게 다가와 수건을 건넸다.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고는 그녀의 손을 낚아챈다.

“할게요.”

“(...네.)”

쪽.

손등에 입맞춤을 하고 마력과 마나를 엘레나 쪽으로 넘기는 일은 이제 쉽다.

하지만 그 다음 일은 여전히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여전히 손으로 마력을 컨트롤 해줘야 했다.

내 손이 그녀의 팔과 어깨, 가슴을 터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항.”

엘레나가 자그맣게 신음을 낸다.

저게 어떤 기분인지, 나도 잘 안다.

매일 밤마다 느끼고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약간 설레기도 했다.

저런 식으로 계속 느끼다가 보면, 내게 호감을 가져서 이 세계에 남는 게 아니냐고.

잠시나마 하렘의 꿈을 꾸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었다.

케이라가 때문에 스스로 검열하긴 했지만, 그래도 꿈은 꿀 수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면, 짜증만 나니 생각을 안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남아서 내게 이득이 되는 게 없다.

마력 충전 기간이 1주일에서 1년으로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

나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엘레나에게서 떨어졌다.

“(후... 감사합니다.)”

그녀가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인사를 했다.

숨소리도 약간 흔들리고 있다.

요즘은 충전을 하는 나보다, 충전을 받는 그녀가 더 힘들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뭘요. 이제 한 번 남았네요.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네.)”

느낌상 한 번만 더 충전하면 끝이다.

엘레나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어째 충격 먹은 표정이다.

왜?

“으윽.”

“(괜찮으세요?)”

“아아, 괜찮아요. 괜찮아. 후우...”

괜찮지 않다.

머리가 아프니까.

역시 생각을 말아야지.

“자, 다시 운동하자고. 지금은 그게 제일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런닝 머신 위를 기계처럼 달렸다.

아무 생각 없이 나연의 말을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처였다.

+++

두근두근.

엘레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충전을 받고 나면 항상 이 상태였다.

이 정도 반복됐으면 쾌감에 익숙해질 만도 한데, 그러기는커녕 쾌감은 날이 갈수록 새로워만 갔다.

그녀가 인내심을 짜내서 참지 않았다면, 충전을 받는 자리에서 바로 자지러지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인내심도 한계가 왔다.

조금만 더 충전이 반복되면, 그녀의 이성도 성욕을 통제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 충전의 시간에도 끝이 다가왔다.

‘한 번...’

한 번만 더 참으면 된다.

한 번만 더 참으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람들 앞에서 자지러지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안전한 세계.

자애와 사랑의 루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편안한 세계.

두근거리는 심장도, 설레게 만드는 터치도 없는 평화로운 세계.

또르르.

‘어라...?’

엘레나는 황급히 볼을 훔쳤다.

눈물이었다.

‘왜?’

생각이 이어지기 전에 먼저 훈련실을 나갔다.

자신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눈물을 보여줄 순 없으니까.

‘왜?’

이유야 많았다.

일단 쾌감이 사라진다.

이건 그녀가 인생에서 처음 맛보는 수준의 쾌감이다.

이런 걸 한 번 맛 본 후에 평범한 인생을 즐길 수 있을까 걱정될 정도의 수준이다.

쾌감의 영역을 넘어서서도 엘레나는 이 정도로 강렬한 체험을 한 적이 거의 없다.

열세 번째 검이 되었을 때나, 혹은 검이 되기 위한 고된 훈련 중 한두 번 정도?

사실 비견될 만한 강렬한 체험이 여러 번 있다는 게 엘레나의 대단한 점이긴 하다.

그만큼 인생을 충실하게 살았다는 거니까.

아무튼 이 쾌감은 열세 번째 검이 되었을 때나 느끼는 수준의 쾌감이라는 거다.

그녀가 정민에게 감정을 가지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얼굴이야 적당히 잘 생겼고, 몸은 1주일 동안 탄탄해졌다.

이 세계에서는 그녀와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남자, 아니 사람이었다.

케이라도 마력 부족을 이유로 통역 마법을 항상 유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과 반강제적으로 스킨십을 1시간 마다 한다.

스킨십이 기분 나쁜 것도 아니다, 스킨십만 하면 쾌감이 미친 듯이 솟아오르기도 한다.

감정이 안 생기는 게 이상했다.

엘레나도 지금 이게 무슨 감정인지 알았다.

모쏠이긴 해도 짝사랑도 안 해보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제 한 번이면, 그 사람과도 헤어져야 한다.

눈물이 흐르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신 차려. 어차피 한 때의 감정이야.’

엘레나는 30살이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는 몰라도, 산전 정도는 경험한 사람이기도 하다.

열세 번째 검으로 임명 되었을 때, 그때의 기분이 얼마나 갔던가?

1년? 한 달?

아니, 1주일도 안 갔다.

1주일이 지나자 모든 것은 익숙해졌고,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렸다.

엘레나의 본능은 이 남자를 잡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이성은 경고한다.

‘잡으면? 잡으면 얼마나 갈 것 같아? 길어야 한 달이야. 그 한 달 때문에, 루의 검을 포기하겠다고?’

엘레나는 루의 검이었다.

전쟁터에서 발견된 엘레나는 루의 은혜로 살아남았다.

그녀는 평생을 루의 검이 되기 위해 살았고, 루의 검이 되었으며, 루의 검으로서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백번 양보해서 엘레나가 루의 검이기를 포기할 수 있다고 해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이 세계에서는 루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강렬한 쾌감이 그녀의 정신을 교란시켜서 그렇지, 그녀는 지금 굉장히 허전한 상태였다.

평생을 함께하던 루의 존재가 사라졌으니까.

한 달의 시간이 지나고, 쾌감이 익숙해졌을 때, 그녀는 그 허전함을 버틸 수 있을까?

전쟁 고아였던 그녀가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 속에서 사는 건 전부 루 덕분이었는데, 그 루가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

‘무리야.’

한 달, 고작 한 달 때문에 30년 간의 삶을 버릴 수는 없다.

앞으로 30년의 삶도 버릴 수는 없다.

‘이제 한 번, 한 번만 버티면 돼. 그러면 다 평소대로 돌아갈 수 있어.’

아쉬움은 진하게 남을 것이다.

케루온에 돌아가서 한 동안은 멍할 것이다.

쾌락을 쫓다가 타락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거기엔 루가 있다.

엘레나를 지키는 루가.

“잠시, 이야기를 좀 할까요?”

“(...케이라님?)”

겨우 마음을 다시 잡은 엘레나 앞에, 케이라가 나타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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