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chapter 5. 엘레나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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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하읏, 앙, 하아앙.”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연은 얼굴이 빨개졌다.
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나연 정도의 키퍼라면 청력이 이미 일반인을 훨씬 뛰어넘었다.
작은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왔다.
‘미쳤나 봐. 병실에서 대체 뭐하는 거야?’
‘아직 회복도 덜 된 사람을 데리고 뭐하는 거야?’
‘그렇게 하고 싶은 거야? 짐승도 아니고?’
갖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이 정도 생각이면, 보통 때는 외부 소리가 하나도 안 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번엔 생각이 많을수록 소리가 또렷해졌다.
“하윽! 앙, 정민아, 너무 좋아! 더, 더, 하아앙!”
주로 케이라의 신음이 들렸다.
나연은 살면서 저 정도로 쾌락에 빠진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의 꾀임에 넘어가 어릴 적에 봤던 야동의 배우도 저런 소리로 울진 않았다.
콘서트에서 ‘오빠’를 외치며 자지러지던 극성팬들도 저런 소리로 울부짖진 않았다.
3시간을 기다린 후, 공복에 맛집에서 최고로 맛있는 메뉴를 먹었을 때 나오던 리액션도 저런 소리는 아니었다.
“하으윽!”
고통과 쾌감이 교차하면서도, 무한한 갈망이 느껴지는 신음.
인생의 즐거움은 다 여기 있다고 주장하는 소리.
나연의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게 만드는 소리였다.
나연은 아직 처녀였다.
27살이나 먹었지만, 아직도 경험이 없었다.
혼전순결을 주장한다거나, 레즈비언인 건 아니었다.
그저 타이밍이 안 맞았을 뿐이다.
20대 초반에는 놀러 다닌다고 정신이 없었고, 20대 중반에는 계획에도 없던 키퍼가 되어 버렸다.
키퍼 일이 바쁘기도 했고, 그녀에게 잘 맞았다.
무엇보다 훈련할수록 올라가는 스탯이 그녀의 마음에 쏙 들었다.
남자를 만날 시간이 없었고, 만날 생각도 없었다.
사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박창식의 존재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나연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보던 박창식이라는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나연은 남자에 대해서 느긋하게 생각했다.
언제든 부르면 내 것이 될 준비가 되어 있는 남자가 있었으니까.
박창식의 조건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키 크지, 훈남이지, 학력도 좋은 데다가, 키퍼이기까지 하다.
키퍼로서는 나연보다 떨어지지만, 그것도 솔직히 흠이 아니다.
박창식은 자그마치 B급 키퍼니까.
B급 키퍼만 해도 한국에는 2,000명 밖에 없다.
그러니 다른 남자들이 눈에 찰 리가 없다.
김나연의 미모는 고등학교 때부터 꽃처럼 화려하게 피었다.
대쉬하는 남자가 한둘이었겠는가?
그러나 대부분 남자는 박창식보다 별로였다.
간혹 한두 명, 박창식보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 있었지만, 박창식과 그녀가 함께 한 시간이 그걸 상쇄했다.
나연은 착한 동네 오빠가 있는데, 엄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뒤통수를 쳤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그녀를 죽이려고 했다.
유치원 때 이후로 이십 몇 년을 믿고 지내던 사람인데, 결혼상대로 내심 정해놓고 있었는데, 두 가지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김나연을 지탱하고 있던 서너 개의 다리 중에 두 개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하읏!”
그래서 그녀는 저 쾌락의 소리에 감히 무슨 의견을 낼 수 없었다.
해 본 적도 없고, 맘대로 할 수도 없으니까.
그냥 소리에 압도되어서, 놀라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저게... 저렇게 좋아?’
그리고 놀라면 놀랄수록, 박창식의 빈자리는 깊어만 갔다.
‘젠장, 나쁜 자식. 나쁜 자식. 이 빌어먹을 자식아!’
한편,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던 사람도 곤란을 느끼긴 마찬가지였다.
‘자애와 사랑의 루이시여, 당신의 사랑이 지금 이곳에서 피어나고 있습니다. 차원을 넘어 이세계에서도 당신의 존재는 이렇게나 음란... 아니, 사랑스럽습니다.’
엘레나도 아직 경험이 없었다.
교단에서 금지해서는 아니다.
자애와 사랑의 루를 섬기는 교단인 만큼, 결혼해도 성직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성교를 한다고 신성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녀도 시간이 없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열세 번째 검으로 자랐다.
열세 번째 검이 되기 위해 쉬지 않고 훈련했다.
연애를 할 시간도, 남자를 만날 시간도 없었다.
그 훈련 덕에 그녀는 열세 번째 검이 됐다.
하지만 어느새 30살이 된 그녀다.
주변에 괜찮은 남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 채가고, 그녀의 눈에 차는 사람들은 10살이나 어린 아가들뿐인, 그런 상황이 됐다.
“하으읏! ****!”
케이라의 갈구하는 신음과 정민을 갈구하는 목소리는 엘레나에게 이렇게 묻고 있었다.
열세 번째 검이 됐지만, 그녀의 삶에 기쁨은 있을까?
지금은 몰라도, 앞으로는?
‘아닙니다. 자애와 사랑의 루이시여. 저는 당신의 검이 되어 행복합니다. 비록 사랑의 때를 놓쳐 혼자가 됐지만, 당신의 자애만 있으면 저는 충분합니다. 루의 자애를 이 세상에 베푸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엘레나는 스스로를 세뇌하듯 그렇게 기도했다.
그러나 한 편으론 다른 생각이 계속 올라왔다.
‘루님은 자애와 사랑의 신. 그 분의 자애만 갈구하는 건 잘못된 길이 아닐까. 그 분의 사랑, 그 분이 말씀하시는 사랑을 모르고서 어떻게 그 분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그 분의 존재가 명확한 상황 속에서도, 그 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닐까.’
엘레나는 이 세계로 넘어와서 루의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자애와 사랑으로서의 루야 지금 이곳에서도 있지만, 루의 신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케루온에서는 언제나 느낄 수 있으며, 그녀에게 힘이 되어주던 루의 신성이었다.
차원을 넘었기 때문이었다.
케루온에서도 성직자인 키퍼가 있는데, 그들은 게이트 안에서 신의 존재를 느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니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응~.”
하지만 계속 저 신음을 들으니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정민이 자신의 손등에 입맞춤 하는 모습.
정민의 마나가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와 그 존재감을 느낄 때의 찌릿함.
정민의 큼지막한 손이 가슴을 슬쩍 만질 때 느꼈던 떨림.
정민의 마력과 그녀의 마력이 공명하며 만들어내던 쾌감.
‘루시여, 당신은 분명 이곳에서도 존재하고 계십니다. 당신의 신성은 느껴지지 않지만, 당신의 사랑은 그 어느 곳에서보다 분명하게 느낍니다. 루시여, 제 몸은 당신의 존재 앞에 떨고 있습니다.’
엘레나의 음부가 서서히 젖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민 때문만이 아니라, 그녀는 케루온에서도 그랬다.
차마 스스로를 위로하진 못하고, 다른 친구들의 성교의 자리에 몰래 찾아가, 관음이라는 최악의 방식으로 쌓이고 쌓인 성욕을 풀곤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틀림없는 변태다.
그녀 스스로는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이다.
‘루시여, 당신의 검에게 오늘도 사랑을 베푸소서.’
‘저게 그렇게 좋으면... 내 청춘을 돌려달라고!’
1인실 병실 앞, 불 꺼진 복도의 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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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가람이 우리를 데리러 왔다.
“뭐야, 왜 그렇게 피곤해?”
가람이 내게 물었다.
“그게... 마력 충전하는 게 힘들어서요.”
반 정도는 사실이었다.
1시간 마다 엘레나에게 마력을 충전해야 했는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케이라에게 요구 당하면서 하기에는 더더욱.
엘레나에게 마력 충전을 하기 위해서 관계 도중에 적당히 입고 나간 적도 있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나연씨나 엘레나님의 머릿속에 남진 않았겠지.
“나연아, 너는 왜 또 그렇게 죽을 거 같아?”
“몰라, 말 시키지 마. 밤새느라 피곤하니까.”
A급 키퍼도 밤을 새면 피곤한 모양이다.
하긴, 키퍼도 사람이니까.
엘레나도 다크서클이 어제보다 두 배는 커졌다.
1시간 마다 충전을 받느라 잠을 못 잔 게 크겠지만, 그것 말고 무슨 일이 있나?
유일하게 쌩쌩한 사람은 케이라 뿐이다.
체력이 무한인지, 분명 어젯밤 내내 울부짖었음에도 얼굴에 윤기가 좌르르 흐른다.
...저거 다 내 생명력 아니냐.
서큐버스 같으니라고.
그래도 케이라의 말대로, 내 잠재력은 1이 올라 17이 됐다.
그녀의 가정이 맞았던 것이다.
조, 좋은 일이겠지?
분명 좋은 일인데, 케이라가 혀로 입술을 훔치는 걸 보니 걱정이 먼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좋아, 그럼 빨리 가자. 크루 하우스에 가면 좀 쉴 수 있으니까.”
우리는 사람이 최대한 안 다니는 통로를 사용해 크루 버스를 타고 하우스로 이동했다.
크루 하우스에서도 다른 사람과 최대한 마주치지 않게 주의하면서 상층의 집무실로 올라갔다.
그곳엔 우리 수장 김나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녀는 제일 먼저 나와 케이라에게 사과를 했다.
그녀는 사과도 카리스마 있었다.
허리가 진짜 직각으로 굽혀져서 그런가?
“이쪽이 그 정체불명의 키퍼이신 케이라 머스탱님. 그리고 저쪽이 엘레나 루님이시군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내게 카드 두 장을 건넸다.
“이게 뭐죠?”
“임시로 만든 외국인 등록증입니다. 보통 사람은 그거면 넘어갈 겁니다.”
“뭐, 이런 걸 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나로서는 상상도 못한 수완이다.
어제 말했는데, 오늘 나오는 게 말이 되나?
“우선 저 두 분이 ‘그거’라는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사람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할 겁니다. 최대한 비밀을 지켜 주세요. 다른 크루원들에게는 필요하다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괜찮겠죠, 정민씨?”
“네, 괜찮습니다.”
크루에 밝히긴 했지만, 대대적으로 알린다는 이야기는 아니니까.
이 방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비밀로 해도 양심상 거리낄 것도 없다.
결국 이 방에 있는 사람하고만 자주 부딪힐 거니까.
물론 이 정도 퍼진 거면 이미 비밀이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언제 밖으로 새어 나가도 이상하지 않다.
“크루 하우스에 있는 동안은 가람과 나연이가 정민씨를 호위하게 될 겁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참아주세요. 그리고 적에 대해서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곧 찾아낼 겁니다.”
“믿고 있습니다. 적을 찾게 되면 꼭 알려 주세요. 저는 몰라도, 케이라는 한 방 먹여야 하니까요.”
수장님이 케이라 쪽을 봤다.
두 사람의 눈이 잠깐 마주쳤는데, 무언으로 뭔가를 주고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강자는 강자를... 아니지, 미인은 미인을 알아보는 건가?
“알겠습니다. 꼭 그렇게 하죠. 필요하면 마법의 도움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혹시 어제의 사고로 트라우마나 PTSD가 생긴 건 아니시죠?”
“그런 거 없습니다. 언제든 돕겠습니다.”
“좋아요. 최상층에 지낼 곳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크루 하우스는 정민씨의 집이나 다름없으니까, 편하게 지내시면 됩니다. 그리고 올라가시면 반가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수장님과의 면담은 그걸로 끝이 났다.
그녀는 굉장히 바쁜 듯했다.
일이 연달아 터졌으니 당연하다.
그 와중에도 케이라와 엘레나의 신분증을 신경 쓰는 섬세함이란.
역시 크루를 잘 골랐다.
“저는 제 방에서 좀 쉬다가 다시 올게요.”
김나연은 최상층에서 헤어졌다.
최상층은 김나리, 김나연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수장님은 나와 내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사생활 공간을 내어준 것이다.
사실, 그렇게 거창할 것 까진 없다.
10층이 워낙 넓어서, 방 몇 개 내어준다고 해도 사생활은 유지되는 편이니까.
“정민이 너는 이 방을 써. 케이라님은 여기, 엘레나 님은 여기를 쓰시면 됩니다. 정민이 부모님은 저기, 동생은 그 맞은편이야. 방마다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으니까, 그냥 개인실이라고 보면 돼.”
내 원룸보다 큰 거 실화냐...
나는 그동안 뭘 했을까.
“나도 잠깐 뭐 좀 준비하고 올게. 가족끼리의 만남은 방해하는 게 아니니까.”
가람형도 가고, 남은 건 우리 셋이었다.
“케이라는 들어가 있어. 엘레나님도요. 저는 일단 가족을 만나고 올게요.”
“응.”
“(네, 알겠습니다.)”
나는 가람형이 가리킨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동생의 목소리다.
“나야. 지민아.”
“엄마, 오빠 왔어!”
문이 열리고, 동생이 튀어 나왔다.
동생은 튀어나오자마자 보디 블로우를 날렸다.
큭.
대비는 했지만, 예상보다 더 아프다.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돌아다니는 거야! 이 바보 오빠!”
참고로 말하지만, 여동생은 실제 복싱 선수였다.
전국체전에서 메달도 딴 적이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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