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chapter 5. 엘레나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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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케이라가 사경을 헤매게 됐을 때, 나는 가람에게 전화를 했다.
도움을 구할 때가 가람밖에 없었다.
가람에게 전화를 했다는 건, 케이라의 정체를 밝히겠다고 결정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가람이 와서 케이라의 얼굴을 보게 될 텐데,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외국인? 외국인이라고 해서 한순간 넘어갈 수는 있겠지.
그런데 그럼 그 후에는?
케이라에게는 두 가지 정도 제약이 있다.
첫 번째는 나와 함께가 아니라면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는 점.
두 번째는 세계 어디에 가도 연고가 없는 점.
단순 외국인이라고 하면 이 두 가지를 설명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를 끝까지 숨긴다?
나와 케이라 둘이서 산다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 하지도 않을 거니까.
하지만 누군가와 계속 같이 생활해야 하는 환경이라면, 언젠가는 들키게 마련이다.
지금 나는 크루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특히 가람과 계속 같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정체불명의 적은 내게 테러를 가하려는 게 분명하고, 나를 도울 사람은 크루원들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까놓고 밝히는 게 맞다.
나중에 가서 약간의 배신감을 느끼게 할 바에는.
지금부터 신뢰를 쌓는 게 맞겠지.
무엇보다, 가람에게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까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는 자기 일처럼 바로 달려와 주겠다고 했다.
그게 어떤 기분이었는지, 그 상황에 처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결과적으로는 엘레나가 케이라의 생명의 은인이 됐지만, 엘레나가 오지 않았다면?
아마 가람이 내 은인이었을 것이다.
“...그랬군. 그래서 그동안 네 게이트를 보여주지 않은 거였어.”
난 그간 공짜로 내 게이트를 탐색해 주겠다던 가람의 제안을 계속 거절했다.
한 번 해봤는데 별 거 없었다면서.
“네. 거짓말을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괜찮아. 이 정도 사정이라면야, 당연히 숨겨야지. 그런데 지금 말 한다는 건...”
“맞습니다. 크루에서 저희를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원래 이게 크루에 들어간 목적이기도 했다.
적당한 수준의 방패막.
“음... GGC라면, 무작정 흔들리진 않겠지. 만약 이세계인이라는 게 밝혀지면 이슈는 될 수 있겠지만, 실질적인 이득이 없으... 없겠지? 막 독점 기술 같은 거 가지고 있는 거 아니지?”
“마법사이긴 합니다.”
“...마법사 뿐이라면 아슬아슬하긴 하네. 어차피 너도 마법사니까. 마법사가 하나 더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바뀔 건 없지.”
“다행이네요. 수장님께서는 별 말 안 하실까요?”
“수장? 수장님이야 바로 오케이 하실 거야. 신경 쓸 일이야 많지만, 이건 네 일이잖아? 나연이를 살려준 사람. 당분간 수장님은 네 말이라면 다 받아들여줄 걸?”
옆에 있던 김나연이 쑥스러운 듯이 헛기침을 했다.
“아, 그거라면 좋네요. 사실 대부분의 공은 제 게 아니라, 케이라 것이거든요. 저는 거들었을 뿐이에요. 나연씨의 실질적 은인은 바로 케이라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더 걱정할 게 없지. 수장님께서 제대로 처리해 주실 거야. 보면 알겠지만, 수완이 뛰어나시거든. 그 나이에 그 정도의 크루를 만들어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GGC를 선택한 것입니다.”
“좋아, 그럼 나는 수장님께 보고하러 가볼게. 나연이는 여기 남을 거지?”
“네, 오빠.”
김나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당연히 남아야지. 또 공격이 오면 어떡하려고 그래?”
“아...”
“그리고 가족 연락처 좀 줘봐. 당분간 어디 피해 있으시라고... 아니다, 그냥 크루 하우스로 오시라고 할게.”
“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 건가요?”
“으이구. 헛똑똑이 자식아. 당연히 해야지. 대낮에 서울 한복판에서 널 테러했다는 건, 어떤 수를 쓸지 모른다는 거야. 일반적인 상대라고 생각하면 안 돼. 알겠어?”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똑똑한 척하는 멍청이였으니까.
“이런 일은 가람 오빠말만 들으면 되니까, 그냥 고개만 끄덕이세요.”
“아... 네.”
“좋아, 난 가 볼 테니까, 나연아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가람이 나가자, 병실엔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주로 이야기 하던 건 나와 가람이었으니까.
“큼흠.”
김나연이 헛기침으로 공기를 깼다.
“저번엔 인사를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 때는 몰골이 말이 아니라서요.”
저번? 아...
“괜찮습니다. 충격이 크셨다고 들었습니다.”
“...다 사람 보는 눈이 없는 제 잘못이죠. 그럼 저도 나가 있을게요. 두 분도 할 이야기가 있어 보이시니까요.”
“굳이 그러실...”
하지만 김나연은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밖으로 나갔다.
어색한 사이를 견디고 싶진 않았나 보다.
그리고 아직, 사람과 부대끼고 싶진 않겠지.
“...”
“(...)”
그런데, 우리가 할 이야기가 있었나?
아까 다 한 거 같은데.
“아, 저기...”
뭐라고 엘레나에게 말을 걸려는데, 그녀의 얼굴이 아까보다 투명한 게 느껴졌다.
벌써 한 시간이 지났나?
“(뭐죠?)”
“다시 충전해야 할 시간인 거 같습니다.”
“(...벌써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엘레나가 솜옷을 벗고, 다시 얇은 옷차림이 됐다.
나는 그녀의 왼손에 입맞춤을 하며, 마나를 전달했다.
마나 컨트롤이 별로였기 때문에, 이번에도 가슴을 터치할 수밖에 없었다.
“다 끝났습니다.”
내 말에 엘레나가 획 돌아서며 솜옷을 다시 껴입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어 있다.
처음 보는 남자가 가슴을 만지면야, 당연히 저런 반응이겠지.
내 마음도 좋지 않다.
생명의 은인에게 나쁜 일을 하고 있는 느낌이라서.
이 질문이 그녀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어주길 바랄 뿐이다.
“자애와 사랑의 루님에 대해서 알려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다행히, 엘레나의 표정이 바로 밝아졌다.
내 귀가 조금 고생하겠지만, 뭐, 이 정도야.
+++
5시간 뒤.
그 시간 동안 나는 몇 번이고 엘레나의 몸을 터치했고, 내 귀는 그 시간동안 고생했다.
처음에야 들어줄만 했다.
나름의 신앙이라는 게 생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몇 시간 내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매우 힘들었다.
어디서 저런 열정이 나오는 건지.
역시 열세 번째 검이다.
이야기하는 도중에 열세 번째 검에 대해서도 나왔다.
루의 검은 열세 자루밖에 없다고 했다.
즉, 그녀는 그만큼 최상위 실력자라는 이야기다.
아무튼, 5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케이라가 눈을 떴다.
“...정민?”
“케이라, 일어났어? 괜찮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바로 침대로 향했다.
케이라의 얼굴은 약간 초췌한 느낌이었지만, 그래서 더 신비롭기도 했다.
“읍.”
케이라가 나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건, 딥키스였다.
나는 살짝 당황했다.
아무래도 옆에 엘레나가 두 눈 뜨고 빤히 보고 있었으니까.
“츄웁, 웁.”
키스는 꽤 길게 이어졌다.
케이라를 떼어낸다는 선택지는 내 머리 속에 존재하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사람을 밀어내는 일은 할 수 없다.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할 거다.
“하앙...”
“아니, 케이라, 잠깐만.”
그러나 케이라가 내 옷을 벗기려하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보는 그녀에게 엘레나를 가리켰다.
엘레나는 우리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는데, 목 주변이 빨갰다.
“...누구?”
“이세계인, 너를 구해준 사람이야.”
“나를? 아...”
케이라가 놀라며 가슴을 만졌다.
분명 뻥하고 뚫렸던 가슴에는 그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정도면... 성직자신가?”
“루의 성기사래.”
“루?”
“몰라?”
“응, 처음 들어보는데.”
어라? 그럼...
“아르케니아인이 아니신 모양이야.”
이렇게 되는 거겠지.
설마하니, 또다른 세계야?
“엘레나님, 혹시 어디서 오셨나요? 이쪽은 케이라 머스탱, 아르케니아인입니다.”
“(...아르케니아요? 처음 들어보네요. 저는 케루온대륙에서 왔습니다. 저희 세계에서 제일 큰 대륙입니다.)”
엘레나는 케루온인이구나.
또다른 차원이라니, 내 능력은 대체 어디까지 인거지.
“케루온 대륙에서 오셨다네.”
“계약은 벌써 맺은 모양이구나.”
“아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어. 그냥 마나와 마력만 전달했을 뿐이야.”
“...그래?”
“응, 그렇다니까.”
케이라의 표정이 오르락내리락 한다.
귀여운 질투다.
그녀는 천천히 일어나 엘레나 앞에 섰다.
“통역해 줘.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하다고.”
“구해주셔서 정말로 고맙다네요.”
내 말에 맞춰서 케이라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서 엘레나도 방패와 검을 앞으로 들었다.
“(루의 검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루의 검으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세계에서 만난 마법사와 성기사, 그리고 그 중간에서 통역해주는 나.
이거 꽤 괜찮은 그림일지도?
“그럼, 잠시 나가 주실래요?”
“그럼, 잠... 응? 왜?”
나는 케이라의 말을 무지성으로 통역하다가 말을 멈췄다.
“할 이야기가 있어.”
“아, 그런 거라면. 엘레나님, 잠시만 나가 있으실래요? 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알겠습니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김나연에게도 엘레나를 부탁한다고 말해줬다.
김나연은 5시간 째 밖에 서 있는데도 불평 하나 없었다.
나중에 진짜 보답해야한다.
이렇게 도움만 받고 살아서야...
빨리 강해져야 한다.
힘이든, 돈이든.
케이라가 내 가려운 부분을 긁어줬다.
“강해져야 해.”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까 하자.”
“뭘?”
“섹스.”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는 말투였다.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너의 계약 때문이야.”
“계약? 아... 그런데 그건 잠재력이 오르는 거 아니야?”
“잠재력은 그 무엇보다 중요해. 잠재력이 올라야 다른 스탯도 오르니까.”
맞는 말이다.
남은 잠재력이 없으면, 스탯이 오르지 않으니까.
종종 한계 돌파한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아마도 종종이 아니라 극히 낮은 확률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잠재력 한계까지 오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잠재력이 중요해. 잠재력이 많이 남아 있을수록, 스탯이 더 빨리 오르니까.”
“...그런 게 있었구나. 전혀 몰랐어.”
“이 세계에서는 아직 모르는 지식이었나 보네.”
알아도 쓸모없는 지식이기도 하다.
잠재력 한계를 직접적으로 늘리는 방법은 거의 없을 테니까.
“계속 태클 걸어서 미안한데, 계약에서는 잠재력이 미약하게 오른다는데 수련을 위해서 섹스를 할 이유가 있어?”
“잘은 모르지만, 너나 나 입장에서는 절대로 미약하지 않아.”
“그게 무슨 소리야?”
“그 미약한 것 때문에 내 잠재력이 49에서 50이 됐어. 49와 50의 차이는 48과 49의 차이와 달라, 매우 커. 그게 올라갔는데, 미약할 수가 없어.”
“그럼 나는? 나는 15에서 16이 됐을 뿐인 걸?”
“내 예상대로라면, 바로 17이 될 거야.”
“바로? 하지만 우리 미친 듯이 했었잖아.”
내가 얘기하기에 부끄럽지만, 정말 짐승처럼 했다.
매일 매일, 쉬지 않고.
“아니야. 내가 여기 온지 2달 정도인데, 초반에 며칠 빼고, 너 게이트 들어간 날들을 빼면... 우리가 한 날은 보름 정도뿐이야. 그 보름 동안도 서너 번 한 게 고작이고.”
응?
‘매일 매일, 쉬지 않고’가 그렇게 번역 된다고?
내 계산이 이상했던 건가?
“어때? 절대로 미약한 게 아니지?”
“그, 그러게...”
“그러니 앞으로 쉬지 않고 1주일만 하면 네 잠재력이 20이 될 거야. 일단은 그걸 목표로 하자.”
케이라의 눈빛이 반짝이는 건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막 일어나지 않았나?
이 생각은 대체 언제 한 거지?
스륵.
환자복을 벗는 그녀는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살짝 당황스러워서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물론 그녀는 신경쓰지 않고 한 발 더 다가왔다.
“잠깐만, 그래도 밖에 사람들 있는데.”
“나 마력 충전도 해야 해. 일단 한 번 하고 생각해.”
“알았어. 그래도 일단 내가 얘기는 할게.”
나는 그녀를 피해 문을 열었다.
복도에 두 사람이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오지 마세요. 소리도 듣지 마세요. 부탁 드려... 앜!”
케이라가 내 허리를 끌어당겼기 때문에, 난 말을 마치지 못했다.
탈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사형선고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이겠지?
“웁, 츄웁.”
그러거나 말거나, 케이라의 입술은 달콤했다.
내 분신은 분위기랑 상관없이 불끈 달아올랐고.
“하아, 웁, 정민아, 더, 하읏!”
죽음에서 돌아오면 성욕이 끓어오는 지도 모르겠다.
나도, 그녀도.
이게 생존본능이라는 걸까.
병실은 금방 뜨겁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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