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chapter 5. 엘레나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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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스킨십을 해야 합니다.”
엘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노려본다.
번역이 아주 잘 된 모양이다.
“손등에 입맞춤을 하고, 팔과 가... 슴을 터치하는 정도입니다.”
철컥.
엘레나가 순식간에 가슴을 가렸다.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묵직한 소리가 났다.
“제 마나를 당신의 손등에서부터 심장까지 보내야 하는데, 제 실력이 미천해서 손으로 같이 움직여야 합니다.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그녀의 눈빛이 약간 수그러들었지만, 가슴을 막고 있는 건 여전했다.
건틀릿을 벗은 손이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금 시간이 없습니다. 죄는 나중에 문책하시고, 지금은 빨리 갑옷을 벗어야 합니다. 빨리요.”
“(...알겠습니다.)”
건틀릿과 어깨갑옷, 가슴갑옷까지 벗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갑옷 안에 입는 두꺼운 솜옷까지 벗고 나니, 남은 건 얇은 천 하나 뿐이었다.
꿀꺽.
불순한 의도로 볼 생각은 일체 없었지만, 절로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몸이었다.
자애와 사랑의 신이라더니, 참으로 그에 걸맞는 가슴이다.
저걸 어떻게 갑옷 안에 넣는지 모를 정도다.
갑옷에 이공간 마법이라도 새겨져 있는 건가?
“시간이 없으니 빨리 시작하겠습니다. 왼손을 주세요.”
나는 엘레나의 부드러운 손등에 입술을 댔다.
손은 만져지지만 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빨리 해야만 한다.
쪽.
그녀가 흠칫하고 떠는 게 느껴졌다.
미리 준비해둔 마나를 입술을 통해 손등으로 넘겼다.
입을 떼고 대신 손을 댔다.
그리고 그녀의 몸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내 마나를 느끼며,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손등, 손목, 팔목...
예전 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이게 마나를 다루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지난 3주 간 매일 한 번씩 케이라와 연습한 덕분이었다.
“하읏.”
응?
신음이 뭔가 이상해서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엘레나가 절반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다른 데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나는 좀 더 집중했다.
그만큼 마나가 빠르게 움직여줬다.
어깨, 가슴.
어찌나 집중했던지, 손이 그녀의 가슴을 푹하고 누르는 데도 몰랐다.
엘레나가 별말 안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실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손이 그녀의 가슴에 왔을 땐, 이미 실체가 없어지는 느낌이었으니까.
마나가 심장에 닿았다.
일부 마나가 심장에 약간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이건 충전이 아니라, 첫 계약이니까.
“...죄송합니다. 조금 더 실례할게요. 마나를 아래로 보내야 합니다.”
엘레나의 대답은 없었지만, 대답을 기다릴 순 없었다.
나는 손을 아래로 내렸다.
손은 배를 지나, 그녀의 하복부에 도착했다.
그녀의 자궁이 있는 부위.
그곳에 남은 마나가 전부 자리 잡았다.
촤락.
그녀의 왼 손등에 날개가 펼쳐지듯, 날개 무늬 문양이 생겨났다.
문양에서는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팔과 어깨, 가슴과 심장을 지나, 자궁에 도달했다.
화아악.
엘레나의 심장에서부터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투명한 게 아니라 투명한 듯한 살색.
발그스레한 볼.
하늘을 닮은 푸른 눈동자.
빛나는 태양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황금빛 머리카락까지.
“와...”
경이로운 변화와 경이로운 미모에 나는 절로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이제, 끝난 건가요?)”
“네? 아, 됐습니다.”
“(그, 그럼... 저기 손...)”
“아, 아 죄송...”
나는 아직도 엘레나의 하복부에 손을 대고 있었다.
깜짝 놀라 때려고 하는데, 잘못해서 오히려 아래로 더 내려가고 말았다.
그녀의 하체 갑옷 속, 그녀의 가랑이에 손이 살짝 닿았다.
“꺄아악!”
바로 그녀의 비명이 터졌고, 이어서 묵직한 주먹이 내 복부를 가격했다.
엄청난 힘에 내 몸이 공중에 떴고, 내 손도 저절로 빠졌다.
어질어질한 상태에서, 엘레나의 발이 내게 날아오는 게 보였다.
강철 갑옷으로 둘러싸인 발, 군화발보다 몇 십 배는 아픈 발이다.
맞으면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내 몸은 이미 공중에 떠 있어서 피할 곳이 없었다.
‘죽는다!’
철푸덕.
죽는 대신에, 나는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것도 나름 아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엘레나의 발은 공중에 멈춰 있었다.
최후에 이성을 되찾은 모양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한 번 봐드린 겁니다. 다음부터는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 의도는 아니고, 실수라...”
나는 급히 일어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실수요? 실수로 사람 죽여도 실수라고 하실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실수라 한 번 봐드린 겁니다. 이제 일어나세요.)”
나는 천천히 일어났다.
엘레나는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지만, 거울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다 보였다.
얼굴이 완전 빨개져 있다.
얼굴이 저정도로 빨개지는 건 두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화가 났거나, 부끄럽거나.
그런데 지금은 부끄러운 쪽에 가까운 느낌이다.
“계약은 원래 하복부까지 마나가 내려가는 게 맞습니다. 사전에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됐습니다. 지나간 일이니 이제 그만 하시죠.)”
“네.”
“(...이제 일주일 뒷면 집으로 갈 수 있는 겁니까?)”
“아니요. 한 시간에 한 번씩 마나를 충전해야 합니다.”
“(네? 이, 이 짓을 한 시간에 한 번씩 해야 한다고요? 여기까지?)”
엘레나가 몸을 돌리며, 자신의 배를 가리켰다.
자연스레 내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림 같은 일자 복근이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리니, 굉장히 탄탄했던 것 같다.
그순간, 느껴지는 살기에 나는 바로 고개를 들었다.
엘레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노려보는 중이었다.
“...다음에는 가슴까지만 가면 됩니다. 가슴, 아니 심장이요.”
“(...정말이죠? 거짓말이니, 실수니 하는 말은 안 통해요. 그러느니... 차라리 사라지겠습니다.)”
꿀꺽.
살기에 목이 베이는 줄 알았다.
치료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검은 검인 모양이다.
역시, 함부로 성교를 맺어야 한다느니 말을 안 꺼낸 게 정답이었다.
그런 건 저 무신경한 케이라에게나 통하는 거지, 소녀소녀해 보이는 엘레나에게는 절대 무리다.
나도 굳이 원하지 않는 상대랑 할 이유도 없고.
1시간에 1번씩 충전하려면 굉장히 힘들겠지만, 뭐 어쩔 수 없다.
1주일만 버티면 된다.
케이라를 살리는 대가가 1주일 고생하는 거라면, 백 번이고 할 수 있다.
“거짓말도, 실수도 아니니 걱정 마세요. 그보다 얼른 옷을 입으시는 게 어떨까요.”
엘레나는 지금 얇은 천 옷 하나로 상체를 가리고 있다.
죽다 살아났기 때문인지, 천 옷은 땀에 젖어 있었다.
그 탓에 엘레나의 가슴이 더욱 존재감을 뽐냈다.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양새다.
“(네? 아, 앜!)”
“정민씨, 괜찮으십니까?”
엘레나가 자기 상태를 파악하고 몸을 가리는 것과 문이 열리고 가람이 들어오는 건 거의 동시였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군요.”
가람이 우리 두 사람을 잠시 번갈아 보다가, 고개를 숙이며 나가 버렸다.
“아니에요! 가람형! 오해라고요!”
나는 다급하게 부르느라, 처음으로 가람을 형이라고 부르며 병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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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이 일단락 된 후의 병실.
네 사람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이쪽은 가람과 김나연, 이쪽은 엘레나 루라고 합니다.”
셋은 어색하게 서로 인사했다.
“엘레나는 두 사람의 말을 못 알아 들을 거예요. 두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저만 소통 가능합니다.”
“알겠어. 설명해 줄 거지? 저기 저쪽의 여성분도.”
조금 전 일을 계기로 가람과는 호형호제하기로 했다.
그간 하고 싶었던 일이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아서 못하고 있었었다.
“네, 다 설명해 드릴게요. 우선 형부터 말해 주시겠어요? 혹시 흔적이 있었나요?”
“아니, 없었어. 저격을 한 지점까지는 찾았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어.”
“그런...”
“현장에서는 일반적인 총탄 밖에 발견되지 않았어. 사람들 말로는 폭발이 있었다던데, 그건 뭐였어? 포탄이라도 맞았어?”
“아니요. 총이었어요. 다만...”
그게 뭐였을까? 총알이었는데, 마나와 마력이 느껴지는 총알이었다.
“...마법과 함께 썼다고 봐야겠죠. 마탄이라고 해야 하나... 그게 한 발 뿐이어서 살았어요. 아니었다면...”
“마법이라면... 적은 역시 박창식이랑 관련 있는 인물인가?”
병원에 오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를 노릴만 한 사람은 역시 그 놈 밖에 없다.
“아마도 박창식에게 스크롤을 판 사람이겠죠. 고블린 때도 스크롤을 판 사람일 거고. 저를 노릴 줄은 몰랐네요. 제가 방해물이라고 생각했나 봐요.”
“미안하다. 크루에서 좀 더 신경 써 줬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제가 타깃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니야. 이건 정보가 새어 나간 거야. 어디서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크루에서 빠져나갔을 확률이 높겠지.”
“그럴지도 모르지만, 일에 개입했을 때부터 그 정도는 이미 각오한 일이에요. 이번에는 운이 없었을 뿐이죠.”
나랑 케이라도 나름의 대비는 했다.
적이 오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주변에 알람 마법을 항상 시전해 놨었다.
그런데 먼 거리에서 비마법적인 수단으로 저격을 할 거라고는 상상을 못했다.
케이라야 중세 사람이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못한 게 당연하다.
내가 대비 했어야 했는데... 다 내 잘못이다.
그래도 이렇게 살았으니까, 다음에는 잘 하면 되겠지.
“아니다, 이렇게 살았으니까 운이 좋은 거죠. 다음에는 안 당할 겁니다. 그 범인 놈도 반드시 잡을 거고요.”
“크루 차원에서도 도울 거야. 적어도 나랑 나연이는 돕겠어. 그럴 거지?”
“물론이죠. 뒤에서 다른 사람을 조종하는 놈은 용서할 수 없어요.”
김나연의 두 눈에 불길이 피어오른다.
이건 그녀 자신의 일이기도 했다.
그 범인 때문에 그녀도 죽을 뻔 했으니까.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야말로.”
이제 중요한 일이 남았다.
원래는 될 수 있는 한 끝까지 안 밝히고 싶었다.
크루 활동을 하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그럼 제 일행의 정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일단 저기 누워 있던 사람이 두 분이 보셨던 정체불명의 키퍼, 케이라 머스탱입니다.”
“응? 그는 남자였잖아.”
“이거 때문입니다.”
나는 로브를 엘레나 위에 덮었다.
그러자,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이 걸린 로브입니다. 비싼 거래요.”
“허, 진짜 만능이네.”
“진짜 만능은 아니에요. 저 오늘 죽을 뻔 했다니까요.”
“그렇지. 맞아. 세상에 만능이 있을 리 없지. 그래서 저 분의 정체는 그게 끝인가?”
“아니요. 우선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케이라는 한국인이 아닙니다.”
내 말에 두 사람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아니, 이럴 때 유머가 하나쯤 들어가야 되는 것도 모르나?’
나는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흠흠, 그리고 지구인도 아닙니다.”
이번에는 좀 놀랐는지, 두 사람의 눈빛이 뜨겁다.
“지구인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이세계인입니다.”
“뭐?”
두 사람의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턱이 빠지는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놀라지 말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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