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chapter 5. 엘레나 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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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세계라뇨? 이곳은 게이트 안이 아닙니까?)”
성기사는 금발벽안이었다.
금발벽안...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다.
아름다웠다.
금발벽안이 아니더라도, 분명 아름다웠을 것이다.
케이라와 비슷한 미모랄까.
이세계인은 다들 이런가?
“게이트 안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신의 게이트는 아닙니다. 제 게이트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신께서는 단 한 번도...)”
성기사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들어보니 그녀도 키퍼는 아닌 듯했다.
하기야 키퍼인 사람이 자기 게이트도 아닌 걸 함부로 만질 리 없다.
키퍼가 아니어야만 눈앞에 나타난 게이트를 자신의 게이트로 착각할 수 있다.
“당혹스럽겠지만, 그게 사실입니다. 일단은 그렇게 알고 계세요. 자세한 설명은 또 가면서 해드리겠습니다.”
“(잠깐만요. 여기가 이세계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거죠? 신께서는 왜 대답이 없죠?)”
성기사의 질문이 이어졌지만, 답할 시간은 없었다.
삐뽀삐보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119가 오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급히 케이라의 옷을 대충 입혔다.
입히면서 들어보니, 여전히 숨소리는 안정적이었다.
천천히 해도 될 것 같았다.
옆에 성기사도 있고.
“가람씨, 오고 계신가요?”
[그래요.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적은 간 모양입니다. 저는 살았어요.”
[정말 다행입니다. 어째서 그런 일이.]
“우선 저는 제 일행과 함께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야할 것 같습니다. 혹시 크루와 연결된 병원이 있나요?”
케이라를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는 방안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위험이 컸다.
성기사의 체력이 넘쳐난다면 또 모르겠지만, 성기사는 이미 힘들어하고 있었다.
느낌상 조금만 더 지나면 투명해질 태세였다.
그래서 크루에 연결된 병원이 있는지 물어보는 거다.
그곳으로 가면, 그래도 케이라의 존재를 조금이나마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연결된 병원이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시려고요?]
“네. 주소를 좀 보내 주세요. 그리고 가람씨는 이쪽에 오셔서 주변 정리를 부탁 드려도 될까요. 조사도 겸해서요.”
[당연하죠. 걱정 말고 병원에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적이 아직 남아 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적은 강력합니다.”
[그건 걱정 마세요. 나연이랑 같이 가고 있으니까요.]
김나연이?
방구석에서 폐인이 된 게 아니었나 보네?
상태야 안 좋겠지만, 김나연이 함께 있다면 안심이다.
그녀는 대한민국에 100명밖에 없는 A급 키퍼니까.
“그럼 걱정은 필요 없겠군요. 잘 부탁드립니다. 이 은혜는 꼭 보답하겠습니다.”
[같은 크루원이 돕고 돕는 거죠. 일을 마치고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정말로, 크루에 들어가길 잘했다.
의지할 곳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줄이야.
마지막으로 성기사에게 케이라의 로브를 건넸다.
“입고 계세요. 인식저하 마법이 걸린 로브입니다. 이제 이동할 건데, 그 차림이면 곤란하거든요.”
“(아니, 설명도 없이..)”
“생명의 은인에게 이러는 게 저도 힘듭니다만, 한 번만 믿고 따라와 주세요. 설명은 나중에 얼마든지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행히 성기사는 말이 통하는 사람이었다.
로브를 입자, 그녀는 거구의 남자처럼 보였다.
방패와 검이 로브 밖으로 조금 튀어나왔지만, 괜찮을 것이다.
지금은 키퍼의 시대니까.
“환자는 어디죠? 어떤 상태입니까!”
119대원들이 원룸으로 뛰어 들어왔다.
진짜 3분 만에 도착하다니, 칭찬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다.
“여깁니다.”
나는 케이라를 그들에게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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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 의사가 케이라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다가 물었다.
“치료 키퍼가 치료했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나는 의사의 안색을 살피며 빠르게 답했다.
이어서 의사는 가슴의 상처를 살핀 후에 일어났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발작이나 쇼크는 없었고요? 바이탈은?”
“안정적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대로 휴식을 취하면서 자연스레 회복하기를 기다리면 되겠군요.”
“네? 그걸로 될까요? 아무리 그래도 가슴에 구멍이 났었는데. 총을 맞았어요. 피도 엄청 났고요.”
성기사의 치료가 대단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심한 상처였다.
진짜 죽을 뻔했으니까.
“음... 검사라도 해볼까요? 일단 제가 보기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상처를 입었는데, 이정도로 깨끗하다면... 그 키퍼에게 감사하십시오.”
나는 무심코 내 뒤에 서 있는 성기사를 보았다.
성기사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통역마법은 나와 그녀만의 대화를 번역 중이니까.
“선생님의 의견이 그렇다면 검사는 안 받아도 될 것 같습니다.”
검사를 받는다고 달라질 게 아니라면, 안 받는 게 나았다.
될 수 있는 한 케이라가 적은 사람에게 노출 되는 게 좋은 거니까.
“피를 많이 흘리셨다니, 수액하나 놔 드리죠. 병실로 옮겨 드릴까요?”
의사는 우리가 GGC 크루에서 온 것도, 웬만하면 정체를 숨기고 싶다는 것도 연락을 받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응급실 한쪽에 커튼을 치고 진료를 받고 있었다.
“네, 그래야할 것 같습니다.”
“그럼 1인실로 가시죠.”
의사가 나가고, 우리는 1인실로 바로 옮겨졌다.
다행히 응급실이나 병원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케이라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안 그래도 눈에 띠는 푸른 머리에, 더 눈에 띠는 외모니까.
...어쩌면 그냥 지나가는 거 일지도 모른다. 이쪽을 본다는 건 다 내 착각일지도.
그런데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지? 케이라가 저렇게 예쁜데. 아프니까 두 배는 더 예뻐 보인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로 연락주세요.”
간호사가 병실 전화를 가리키고는 밖으로 나갔다.
“후우...”
1인실 소파에 앉는데, 뭔가 긴장이 풀렸다.
겨우,
살아난 것이다.
운과 운이 겹쳐서.
“(여긴 대체 뭐죠?)”
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가 타고 온 마차는 뭐고, 이 건물은 또 왜 이렇게 높죠? 아니, 이 건물만이 아니라...)”
성기사의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대충 케이라와 비슷한 시대배경에서 온 것 같은데, 안 놀라면 사람이 아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이곳은 지구, 이세계입니다.”
“(이세계... 이곳은 신이 없나요? 신들께서 저런 무개성한 건물들을 인정하실 리가 없는데.)”
건물이랑 신이 왜 연결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무개성하다는 데는 동의한다.
“알려진 바로는 신이 없습니다.”
“(설마 했는데... 신이 없는 세계가 있다니...)”
성기사가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흔히 보는 기도하는 자세다. 저건 전 차원 공통인가 보다.
신이 없는 세계라... 그게 저렇게 충격 먹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으니까.
신이 있다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당신... 그러고 보니 통성명도 안 했네요. 저는 이정민이라고 합니다.”
“(...저는 엘레나 루. 루의 열세 번째 검입니다.)”
열세 번째 검?
무언가 높으신 분이라는 느낌이 든다.
어째 치료능력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당신이 심기는 신의 이름이 루인가요?”
“(네. 자애와 사랑의 신이십니다.)”
“그렇군요. 루님께 감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위기의 순간에 당신을 보내신 루님께 감사를 드리고 싶은데요.”
진심이다.
엘레나가 없었다면 케이라는 죽었을 테니까.
엘레나에게는 백번 감사해도 모자라고, 루에게도 절로 감사의 마음이 피어나고 있다.
“(루님께 감사를요? 좋은 생각입니다. 루님은 언제나 감사를 받아야 하는 분이시니까요. 그 분 덕분에 우리는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세상물정 모르는 시골 사람 같았는데,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니까 성직자 느낌이 물씬 났다.
“(이런 식으로 하시면 됩니다.)”
엘레나가 로브를 벗고, 자세를 취했다.
오른손 검지와 중지만을 펼치고, 이마 중간에 대는 자세였다.
무릎을 꿇은 채였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가슴 중앙에 놓았다.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엘레나를 따라 자세를 취하니까, 어디서 본 건지 깨달았다.
“드x곤볼!”
“(...네?)”
그 만화에서 순간이동 할 때 자세랑 비슷했다.
무릎 꿇는 것만 다를 뿐, 오른손 모양은 완전히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엘레나가 좀 우스워 보였다.
....그리고 나도 우습겠지?
“크흠, 아닙니다. 이러고 있으면 되나요?”
“(네. 이런 상태로 루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게 저희의 기본 기도 방법입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본 적 없는 루를 상상하며, 감사를 전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의 검은 제가 안전히 돌려보낼게요.
한 10초정도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바로 앞에 엘레나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포교가 성공해서 기쁜 모양이다.
“그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좋아요. 저는 여기 왜 온 거죠?)”
“제가 불렀지만, 루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봐야겠죠. 모든 것은 그분의 뜻 아닌가요?”
“(맞습니다. 제가 여기에 온 건 우연이 아니겠죠. 저 분을 구하기 위한 자애로우신 루님의 뜻일 겁니다.)”
뭔가 광신도를 속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지만, 나도 70%는 진심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소환게이트에서 하필이면 치료 능력을 가진 성기사가 나온다?
이건 우연일 수 없다.
누군가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딱 필요한 순간에, 딱 필요한 사람이 나타날 리가 없다.
신적인 존재라면, 그 정도 개입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 번 루님께, 그리고 엘레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것은 자애로운 루의 사랑을 따라.)”
엘레나가 선 채로 방금 자세를 취했다.
선 채로 하니까 더 순간이동이 떠올라서 웃기지만, 엄숙한 순간이니까 참았다.
“케이라, 저 친구의 이름이 케이라입니다. 케이라를 구하셨으니, 원하신다면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다만...”
귀환 게이트의 쿨타임은 이번에도 일주일이었다.
“돌아가는 게이트는 일주일 후에나 열 수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일주일이나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어쩔 수 없죠. 일주일이면...)”
엘레나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생명의 은인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들고 싶지는 않는데, 정말 방법이 없다.
이 다음 문제도 말이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여기에 계시려면, 저와 계약을 맺으셔야 합니다.”
“(계약이라뇨?)”
“이세계체류계약이라는 겁니다. 계약을 맺지 않으시면 이세계에서 사라지시게 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직접 보시는 게 설명이 편하겠죠.”
나는 병실 캐비넷을 열어 보았다.
역시 거울이 있었다.
내가 거울을 가리키자, 그녀가 거울 앞에 섰다.
벌써, 턱 주변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죠? 왜?)”
엘레나가 급히 건틀릿을 벗었다.
손은 이미 반투명한 상태였다.
“(신이시여... 루님, 이게 대체...)”
“시간이 없습니다.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별다른 제약은 없습니다. 루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루님의 이름을 함부로 쓰시면 안 됩니다.)”
이 와중에도 루를 신경 쓰는 걸 보면, 참 신도인 건 분명한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쪽은 잘 몰라서. 아무튼, 지금 진짜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약을 맺죠.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게...”
이건 또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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