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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23화 (23/137)

〈 23화 〉 chapter 4. GGC

* * *

23.

박창식은 김나리, 김나연 자매의 소꿉친구라고 했다.

셋이 키퍼가 된 시기도 거의 비슷해서, 셋이 함께 활동하던 게 GGC의 전신이라고.

그런 사람이 김나연을 죽이려고 했으니 모든 사람의 충격이 더 컸다.

심지어 그는 자타공인 김나연을 사모하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김나연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맬 때도, 그 옆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던 게 박창식이었다.

“왜 그런 거랍니까?”

“그놈 말로는 나연양이 너무 잘 나가서 불안 했답니다.”

“네?”

내가 가람의 말을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다시 들어도 똑같았다.

“나연이가 S급 키퍼가 될 것 같으니까, 자신에게서 멀어진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여자친구... 여자친구였던 건 맞나요?”

“그럴 예정이었다고 봐야겠죠. 그놈은 공개 고백도 몇 번 했고, 나연이도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었으니까요. 나연이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다면, 벌써 사귀고 있었을 겁니다. 나연이가 너무 빠르게 성장하고, 크루도 너무 잘 되니까 서로 시간이 없어서 미루고 있었다는 느낌이었죠.”

이건 좀 다른 이야기지만, 가람의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분석도 자세하고.

김나연...을 좋아하는 건 아닌 거 같고, 연애 이야기가 좋은 건가?

30대 중반의 아저씨? 형? 아무튼 무겁고 진지한 느낌의 사람이 갑자기 생기발랄해지니까 조금 신기하다.

“그럼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잘 될 텐데 멀어지긴 뭘 멀어져요?”

“나연이가 더 강해지면 그렇게 될 수도 있긴 합니다. S급 키퍼가 되면 지금보다 더 바빠질 테고, 둘 사이가 멀어질 확률이 더 높죠. 나연이의 눈이 높아져서 그런 개새끼는 눈에 차지 않을 수도 있고요. 물론 제가 아는 나연이라면 그래도 그 개새끼를 선택했을 것 같긴 합니다. 애가 정이 많아서...”

확실히 A급과 B급은 비벼볼만 하지만, S급과 B급은 차이가 너무 난다.

남자 쪽에서 마음이 급해질 수도 있는 부분이긴 하다.

“그런데 그렇다고 죽이려고 하는 건 좀... 그게 말이 돼요?”

“그놈 말로는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다고 합니다. 큰 상처를 입어서 불구가 되거나 키퍼의 성장이 멈추기를 바라고 벌인 일이라나요. 그럼 그놈이 나연이를 극진히 보살피고, 나연이가 평생 자기만 의지하게 만들려고요. 그런데 계획보다 변이가 크게 일어나서, 나연이가 죽을 뻔 한 거죠.”

변이의 효과는 변이가 일어난 후에야 알 수 있다.

박창식도 자백했고, 케이라도 내게 그렇게 말해줬다.

“사이코패스 아니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아니죠. 절대 아닙니다.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애초에 그놈은 사랑을 몰라요. 사랑이 없으니까 믿음이 없고, 이상한 방식으로 소유나 집착하려고 하는 거죠.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기보다 잘 나가면 불안하고, 보기 싫은 거죠.”

이상한 놈이다.

이번에 잘 잡힌 거 같다.

멀쩡한 모습에 배신당한 크루원들은 조금 힘들겠지만, 이런 건 빨리 맞고 지나가는 게 이득이다.

막말로 김나연과 박창식이 결혼이라도 한 후에 이런 일이 터졌다? 상처가 열 배는 깊었을 거다.

“그런데 자백은 왜 했대요? 마지막까지 김나연을 한 번 더 사지로 몰아가려던 놈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걸렸으니 도망칠 곳이 없다고 생각했던 거겠죠.”

하긴, 거기서 발뺌해봐야 김나연의 매서운 주먹맛만 더 봤겠지.

그녀의 마지막 주먹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멀리서 봤는데도 오싹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박창식이 맞지도 않고 기절했겠냐고.

“박창식은 어떻게 되나요?”

“1차 조사는 끝나서 협회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주범이 잡히기까지는 거기에 있을 거고, 주범이 잡히고 나면 법에 따라 심판받을 겁니다. 살인미수에 키퍼와 게이트 내 범죄에 대한 가중처벌이 더해지면, 사형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가람의 표정이 안 좋다.

배신감이 크겠지만,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데 썩 기쁘지도 않겠지.

키퍼는 키퍼의 능력을 활용한 정황이 있을 경우, 가중 처벌 받는다.

큰 힘이 있으면 큰 책임이 따른다 같은 말을 지키는 건 아니다.

키퍼로서 이것저것 면세를 받으니까, 그만큼 법을 잘 지키라는 이야기다.

거기에 이 정도의 가중처벌도 없다면, 사회적으로 불안이 야기될 수도 있고.

키퍼가 정부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이미지는 사회가 유지되는 데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가 됐다.

“주범은 소식이 있나요?”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이 사건에는 주범이 있다.

바로 박창식에게 마법진이 그려진 종이, 스크롤을 건넨 사람이다.

박창식은 그 스크롤을 누군가에게 거액을 주고 샀다고 한다. 몬스터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거라고 들어서 말이다.

전에 고블린 사건의 주범도 같은 사람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도 박창식처럼 주범에게 스크롤을 산 사람이 있었겠지.

주범의 꼬리를 잡진 못했다.

박창식이 알려준 연락처는 전부 무용지물이었다.

어디서 소식을 들은 건지, 주범의 대처는 신속 완벽했다.

“큰일이네요. 지금도 어디선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래도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협회에서 무언가 수를 쓸 겁니다. 곧 좋은 소식이 있겠죠.”

“협회를 굉장히 신뢰하시는 거 같네요. 저는 아직 초보 키퍼라 그런지 스크롤을 만드는 그 범인이 더 무섭습니다.”

“그도 어쩌면 정민씨처럼 마법을 쓰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확실히 미지의 기술입니다. 그래도 협회를 무시하면 안 됩니다. 협회엔 저력이 있어요. 괜히 30년 동안 군림하고 있는 단체가 아닙니다.”

듣고 보니 그렇다.

대한민국 거의 모든 키퍼가 협회에 적을 두고 있다.

대키퍼시대, 협회는 대한민국 전력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분명 무슨 수가 있겠지.

상대가 마법이래도.

‘조금 어설프지만, 이건 스크롤이야’

케이라는 박창식의 품에서 발견된 종이에 대해 그렇게 결론지었다.

스크롤은 누구나 마법을 쓸 수 있도록 해주는 종이를 말한다.

당연히 마법사가 만든다.

‘꼭 마법사라고 볼 수는 없어. 각성 능력 중에 스크롤 관련한 것도 있으니까.’

케이라의 세계, 아르케니아에서는 그런 능력을 각성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아르케니아에서는 그게 아니라도 스크롤을 찍어낼 수 있는 사람이 많아서 별 소용이 없었지만.

마법사든 아니든, 협회가 마법을 쓰는 이와 싸워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협회가 잘 대처하기를 바랄 뿐이다.

안 그러면 소연이가 게이트를 못 나간다고.

박창식을 잡고 나서, 나는 소연이에게 게이트에 들어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요즘 같이 뒤숭숭한 때는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협회가 빨리 저력을 보여줬으면 좋겠네요. 그 왜, 소연이 아시죠? 이런 상황이면 소연이는 무서워서 게이트에 들어가지도 못한다고요.”

“크루가 없으면 확실히 어렵겠죠. 그런데 그 소연씨는 이 사실을 다 압니까?”

“저희 크루 사건은 모르고, 고블린 때는 같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조심하라고 알려줬죠. 요즘 케이트 내에서 일어나는 이상 현상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고.”

“그럼 정민씨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다 아시겠네요?”

“네. 제 비밀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하나랍니다.”

소연이는 심지어 케이라가 이세계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건 아직 그녀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GGC 크루에서 케이라는 여전히 정체불명의 키퍼일 뿐이다.

“그런 사람이라면, 저희 크루에서 함께 활동해도 괜찮습니다.”

김나리였다.

언제봐도 시원시원한 그녀는, 큰 보폭으로 걸어와 나와 케이라, 가람 앞에 앉았다.

우리는 그녀가 할 말이 있다고 해서 크루 하우스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불러 놓고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처리할 일이 많아서요.”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박창식은 개국 공신이다.

그런 사람이 범죄자가 됐는데, 바쁘지 않을 수 없겠지.

“그리고 나연이도...”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가람의 말에 따르면, 김나연은 지금 상처를 크게 입은 듯하다.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단다.

이해는 간다.

어떻게 보면 가장 신뢰했던 사람으로부터의 배신이니까.

“저희를 구해주신 분께 계속 이런 이해를 구하게 돼서 면목이 없네요. 정말로 죄송합니다.”

김나리가 깊이 허리를 숙였다.

뭔가 이제는 그녀의 얼굴보다 정수리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고개를 들어 주세요. 수장님의 마음은 알겠습니다. 용서도 감사도 다 받을게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할지...”

김나리가 다시 허리를 폈다.

정수리가 익숙하긴 하지만, 그녀는 역시 이 모습이 어울린다.

지적이면서도 우아한 자세와 미소.

수장다운 연륜이 느껴지는 모습이다.

참고로 그녀에게는 연륜이란 단어를 써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녀는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27살이란 이야기다.

“선제시 부탁드립니다.”

나는 진심 반 농담 반으로 말했다.

이 사건의 일등공신은 누가 봐도 케이라지만, 사람들은 다 나라고 알고 있는 상황이다.

잘 된 일이다.

이게 다 내가 한 일이면 스스로 우쭐해져서 되도 않은 겸손을 떨면서 이것저것 사양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 나는 케이라의 보상을 받아 내야 한다.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을 거다. 그게 보상이니까.

“자잘한 건 다 치우고 중요한 걸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희 크루의 지분 10%를 드리겠습니다.”

“네?”

단단히 마음먹은 나조차도 조금 놀라게 만드는 수준의 보상이었다.

GGC는 대기업에 근접한, 거대한 크루다.

크루의 지분 10%라는 건, 김나리의 게이트에서 나오는 수익의 지분을 포함한 크루 수익의 10%를 준다는 이야기다.

김나리의 게이트는 치매를 정복할 수 있는 약이 나올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진짜 그렇게 된다면, 게이트에서 버는 돈이 년간 조 단위를 넘어가는 건 일도 아니다.

거기에서 10%.

가볍게 천 억 돌파.

저 정도면 키퍼 안 하고 걍 평생 놀고먹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 놀라실 건 없습니다. 원래 박창식에게 주기로 예정되어 있던 지분이니까요. 아직 정식 서류 절차를 밟지 않은 게 정말로 다행이었습니다.”

“아니, 그래도... 그걸 그렇게 결정해도 되는 겁니까?”

“어차피 제 거라서 괜찮습니다.”

어차피 제 거.

굉장히 쿨해서 너무 멋져 보였다.

당연한 말이다.

게이트 주인은 김나리고, 그녀가 크루 본체나 다름없으니까.

젠장, 나도 크루 수장하고 싶다.

게이트만 있었으면!

“물론 수익만 드리는 거지, 의결권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겠죠. 당연합니다.”

“그래도 제가 그 정도로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건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동생을 구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김나리가 다시 허리를 숙였다.

이젠 그녀의 정수리가 아니라, 그녀의 등과 허리가 눈에 들어온다.

저 블라우스 아래에는 멋진 척추기립근이 있을 테지.

꾸욱.

내가 그런 생각을 한 걸 알았을까?

케이라가 내 발을 지그시 밟았다.

깜짝 놀라 케이라를 보니, 후드 아래 눈빛이 매섭다.

뭐야... 진짜 어떻게 알았지? 여자의 감이란.

“수장님의 뜻은 잘 알았습니다.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일어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보상은 만족스러우신가요?”

“물론이죠.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순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정도 받았으니, 크루에 꼭 보답하도록 하겠습니다.”

“믿고 있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김나리가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부드럽고 긴 손가락이 내 손을 잡는다.

정수리를 보는 것도 좋지만, 이 악수도 마음에 든다.

꾸욱꾸욱.

어떻게 아는지 모르는 케이라의 꾹꾹이도 마음에 들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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