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화 〉 chapter 4. GG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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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케이라가 게이트에 들어가는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기로 했었다.
당분간은 마력과 마나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니까.
1달 동안 열심히 게이트를 들락날락거렸기 때문에 재력은 충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거기에 제동을 거는 연락이 왔다.
‘몬스터를 찾아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습니까? 원하지 않으신다면 크루에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가람의 조심스럽고도 정중한 부탁.
크루에 먼저 마법사가 있다고 통보하고 크루의 힘으로 압박할 수도 있는데, 그는 먼저 내게 연락하고 의사를 물어왔다.
역시나 예의바른 사람이다.
들어보니 사정이 급했다.
크루 수장의 동생이 오늘내일 한다니까.
몬스터를 찾는 건 문제 없었다.
백마법에는 좀 더 뛰어난 탐색 마법이 있으니까.
마력과 마나를 쓸 수 있으니 이제 백마법도 쓸 만한 수준까지 빌려올 수 있다.
보상도 마음에 들었다.
도움을 주게 된다면 아마도 가람의 크루, GGC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크루에 들어가는 건 처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케이라에 대해서 밝혀지더라도, 크루가 방패막이 되어줄 수 있을 테니까.
GGC는 그런 목적으로 들어가기에 적당한 크루였다.
대기업이 크루라 방패막이 될 힘이 있었고, 신생 크루라 간섭할 만한 사람이 적었다.
지금 크루에 들어가 간부급이 될 수 있다면, 케이라를 지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다시 그 문제로 돌아왔다.
케이라가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케이라가 같이 못 가면, 난 게이트에 들어가지 않을 거니까.
당장 가람에게 얘기한다면, 가람이 도움을 줄 것이다.
가람의 게이트에 케이라와 함께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를 실험할 수 있다.
그의 입은 무거운 편인 것 같으니, 이 방법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실험 결과 케이라가 게이트 안에 못 들어간다면?
나는 가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거고, 가람과의 관계를 자연히 멀어지게 될 거다.
그런 상태에서 가람의 입을 믿을 수 있을까?
그리고 고작해야 가람은 3일 남짓 본 사람이다.
믿을 만한 사람이란 건 알겠지만, 100% 신뢰를 주기엔 무리가 있다.
다른 키퍼를 고용해서 실험을 한다는 것도 이상하다.
당연히 난 케이라가 이세계인인 걸 밝히지 않을 것이다.
처음 만난 키퍼가 누구라고 믿겠는가?
하지만 이 경우, 키퍼들은 실험 자체에 의문을 가질 것이다.
키퍼가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키퍼가 아니라면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이미 밝혀진 진실이다.
이건 실험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케이라가 나와 함께 게이트로 들어간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만, 혹여 케이라가 게이트 안으로 못 들어간다면... 어떤 소문이 퍼져나갈지 상상이 안 된다.
가람도 안 되고, 다른 키퍼도 안 되고.
남은 선택지는 한 명 밖에 없다.
박소연.
학교 후배이자, 최근 한 달 간 케이라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사람.
그녀라면 믿을 수 있다.
이미 한 달 간 내가 마법사라는 비밀을 누구보다도 잘 지켜준 선례도 있고.
하지만 그래도 될까?
그녀가 비밀을 지키는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첫번째는 성격.
무슨 이유가 있더라도, 입이 무겁지 않으면 비밀을 지킬 수는 없다.
거기에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씨도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두 번째는 생명의 은인.
나는 갱도에서 그녀를 구했다.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이 비밀을 지키는 데 큰 동기가 되어주고 있는 건 틀림없다.
이 두 가지 이유만이라면, 케이라가 이세계인이라는 비밀을 밝히는 것에 주저함은 없을 것이다.
그녀라면 반드시 비밀을 지켜줄 테니까.
그러나 세 번째 이유에서 비밀을 말하는 게 걸린다.
그녀가 내 비밀을 지키는 세 번째 이유는, 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니까.
내게 직접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훤히 보였다.
그녀는 눈빛과 행동으로 나를 좋아한다는 티를 팍팍 냈다.
진짜, 마음만 먹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지 않은 건 케이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쁘고 잘 해주는 케이라가 있는데, 굳이 왜 또?
영웅은 삼처사첩이고 남자의 로망은 언제나 하렘에 있다지만, 소연은 현대인이다.
백번 양보해서 케이라는 자신 외에 다른 여성의 존재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연은? 그녀는 그걸 용납할까? 이제 갓 20살이 된, 아직 핑크빛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그리는 친구가?
나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연에게 그런 일을 강요하는 모양새도 난 싫다.
그래서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다.
가끔은 몸으로 부딪혀오는 유혹을 억지로 밀어냈다.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마음이 사라지길 바라면서.
그런데 그녀에게 케이라를 보여준다?
그건 배신... 까지는 아니라도 분명 큰 실망감을 안겨줄 것이다.
실망감은 앞 선 세 가지 이유를 한 번에 뒤집을 만큼 클 확률이 높다.
지난 1달, 내 가장 큰 우군이었던 소연이 한 순간에 흑화해서 적이 되어 버리는 일이 발생해도 자업자득일 정도.
어쩌면 실망감을 안고서도 내 비밀을 지키며, 여전히 믿음직한 동료로 남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사실 십중팔구로 내가 아는 소연은 이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러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된다.
날 좋아한다고 호구 한 명 잡아서는 이것저것 다 내 마음대로 시키는 꼴이니까.
대학 때 이런 저런 어장에 들어가 있어본 경험자로서, PTSD가 올 것만 같다.
케이라는 소환 되어 왔을 뿐, 아무사이도 아니라고 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갈까?
케이라의 존재를 아예 모른다면 모를까.
그녀를 알게 된 이상 나와 그녀 사이에 이상한 기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연인... 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몸의 대화를 깊게 나눈 사이다.
오며가며 부딪히다 보면, 소연은 무언가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느끼는 배신감은 훨씬 더 크겠지.
그 정도라면 소연이가 흑화해도 내가 할 말은 없다.
소연이의 마음에 제대로 답도 안 하고, 여친에 준하는 존재를 도와달라고 한 꼴이니까.
이건 진짜 농락한 거다.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정면으로 부딪혀서, 나만 나쁜 놈이 되면 된다.
소연이가 상처를 받겠지만, 어차피 안 될 관계라면 지금 확실히 끊어주는 게 나을 거다.
소연이가 상처를 아주 많이 받겠지만, 케이라가 사라지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그래서 소연이를 불렀다.
딸랑.
카페로 들어오는 소연이는 귀여웠다.
찰랑거리는 단발에 꿈뻑거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큰 눈,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한 볼.
오늘은 한껏 꾸민 티가 났다.
이제껏 게이트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화장도 진하고, 치마도 입었다.
힐을 신으니까 평소엔 드러나지 않던 몸매도 보였다.
글래머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가슴도 골반도 없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사적으로 부르면 저렇게 꾸미고 올 걸 알고 있어서, 내 일이 아닌데 내가 다 씁쓸했다.
“아, 선배님!”
환히 웃으며 다가오는 소연이를 보는 건 힘들었다.
내 가슴을 쿡쿡 무언가로 찌르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그게 말이죠...”
자리에 앉은 소연이가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러다가도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기만 하면 바로 경청모드로 돌아가고, 리액션도 좋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내가 나쁜 놈이다.
“선배...? 무슨 할 말 있으세요?”
내가 아무말없이 있으니까 결국 그녀가 먼저 물어온다.
결말이 어떻게 될지 감지한 걸까? 그녀는 굉장히 불안한 표정이다.
아니다.
내가 굳어 있구나.
“미안.”
“네?”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 있어. 그거 말하려고 부른 거야.”
“아...”
소연이 눈으로 묻는다.
진짜냐고.
나도 눈으로 대답한다.
진짜라고.
그녀의 얼굴이 무너진다.
불안에서 절망으로.
눈에 눈물이 맺힌다.
눈물은 금방 비처럼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숙여서, 나는 더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흐끅. 끅.”
울음이 서글펐다.
나는 최대한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괜히 안타까워하면, 그녀에게 헛된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10분쯤 지나자, 울음이 잦아들었다.
“...진정 됐어?”
“...네.”
“기분은 어때?”
“나빠요. 잔인해요.”
“그래. 그렇겠지. 그럼 이왕 잔인한 김에 좀 더 잔인해져도 될까?”
“네?”
소연이가 고개를 획하고 쳐든다.
부은 눈에 의문이 가득하다.
“지금부터 내 소중한 사람을 만나러 갈 거야.”
“흥, 그러든지 말든지 선배 알아서 하세요.”
“너도 같이 가야 해.”
“네?”
“설명은 가서 해줄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쳐다봤다.
“자, 가자. 가까우니까.”
“아니, 지금 이게 맞는 거예요? 뻥 차놓고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미안. 내가 진짜 면목이 없지만, 너에게 잔인하겠지만, 한 번만 도와줘.”
“...그렇게 나오면...”
소연이 깊은 한숨을 내쉰 후에 일어났다.
“...한 번만 봐드릴게요.”
우리 소연이, 진짜 착하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을게.
+++
“안녕하세요. 케이라 머스탱입니다.”
신비로운 푸른 눈동자였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눈에, 소연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어째서 정민이 이 사람에게 빠지게 됐는지, 왜 자신이 이 사람 대신이 될 수 없었는지.
그리고 이 사람이 이세계인이라는 것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정도로 신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입고 있는 옷은 청바지와 흰 티로 지극히 지구적이었지만, 그걸로 숨길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진짜... 너무하네.’
정민은 잔인했다.
조금 전에 차일 때만 해도 소연은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골키퍼 있다고 골이 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그녀에게도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외모에는 그녀도 나름 자신이 있었으니까.
마음으로는 절대로지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고.
그런데 그 희망은 케이라를 보자마자 바스스 가루가 돼 사라졌다.
외모는 압도적이었고, 인연은 그보다 더 했다.
마력을 주입해주지 않으면 사라지는 관계라니.
생명의 은인이란 관계보다 무거운 관계가 있을 거라고 그녀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 케이라 입장에서는 정민이 삶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소연이 마음을 아무리 쏟아봐야 정민이 타인인 것처럼.
“염치없지만, 도와주세요.”
케이라가 소연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특별한 자세도 아닌데, 기품이 묻어나는 느낌이었다.
소연은 케이라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자신을 차버린 상대의 여자 친구를 도와야 하는 상황이다.
정민이 생명의 은인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정민에게 물을 뿌려버리고는 카페를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생명의 은인이 부탁하는데, 그녀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소연은 어쩔 수 없이 정민의 원룸까지 따라왔다.
그리고 원룸에서 그녀를 맞이한 건, 그 ‘어쩔 수 없음’까지 스르르 녹여 버리는 존재였다.
“...도와 드릴게요.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소연은 왜 케이라를 돕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 진짜 호구인가 봐.’
정민은 너무나도 잔인했다.
케이라는 그보다 더 잔인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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