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chapter 3. 고블린과 춤을
* * *
14.
케이라 머스탱.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이세계인.
정확하게는 내가 소환해 낸 거라지만, 솔직히 그렇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냥 그녀가 선물처럼 내게 온 것이라는 게, 더 와 닿는 설명이다.
케이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몸이다.
매끈한 허벅지, 포동포동한 엉덩이, 부드러운 배, 푹신푹신한 가슴, 가슴 끝에 맺힌 분홍색 열매, 움푹 들어간 쇄골,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 가늘고 긴 손가락, 날렵한 턱선, 오똑한 코, 신비한 푸른 눈동자...
솔직히 조금 무덤덤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것 같다.
어쩐지 1시간도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그만큼 그녀의 몸은 매력적이었다.
케이라의 성격 때문에 더 그런 걸 수도 있다.
그녀는 전혀 빼지 않으니까.
빼려고 하면 오히려 더 가까이 와서, 나를 꽈악하고 조여 버린다.
그게 팔이든, 다리든, 아니면 아랫입이든.
처음에도 주저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즐기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은 나보다 그녀가 더 즐기는 것 같기도 하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말이다.
펠라치오만 해도 그렇다.
난 전혀 시킬 생각이 없었는데, 그녀 혼자 어디서 배워 와서는 한 거다.
그래서 너무 좋았다.
그런 그녀와 아직 못 해 본 게 남아 있다.
펠라치오도 받은 마당에 이게 무슨 헛소리냐고?
애널섹스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고?
애널섹스... 그것도 하고 싶긴 하다.
언젠가는 해야지.
하지만 그 전에 할 게 남아 있다.
어떻게 보면 육체관계 중에 가장 기본이지만, 어떻게 보면 최종 단계인 그것.
키스.
나는 아직 그녀의 촉촉한 입술을 맛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대로 그녀를 보낼 수는 없다.
키스를 해야 되니까 죽지 말라니.
이런 변태적인 결론은 좀...
흠흠, 무튼 이건 그냥 생각의 흐름대로 나온 결론이고, 이런 결론이 아니라도 그녀를 보내고 싶진 않다.
간단히 말하면, 이미 정들었다.
그녀는 이미 내 울타리 안에 들어왔다.
그런 사람을 살릴 수 있는데 죽게 놔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마법사인 걸 밝혀야지.
“가람씨, 잠시만 이쪽으로 와 보시겠습니까?”
나는 팀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가람을 데리고 팀원들에게서 멀어졌다.
“흠... 이번엔 또 무슨 일이죠?”
가람은 이미 색안경을 끼고 나를 봤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믿기 힘들 것이다.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해도 밑져야 본전이니 믿어볼 만도 한데, 왜 이렇게 뿔이 난 걸까?
어쩌면 원리원칙을 지키는 강직한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든, 거짓말 자체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건지도.
그런 점은 지금 나에게는 이득이다.
이 사람은 나와 약속만 하면 내 비밀을 함부로 말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먼저 약속하나만 해 주실 수 있나요?”
“약속에 내용에 따라 다릅니다.”
“제 비밀을 지켜 주시면 됩니다.”
“비밀이라... 비밀도 비밀 내용에 따라 다르겠죠.”
“보면 납득하실 겁니다.”
나는 마력과 마나, 룬어로 작은 화구를 만들어냈다.
“이건 제 능력이라고 알려진 ‘화구 생성’입니다.”
“능력이라고 알려진...?”
“그리고...”
화구는 없애 버리고, 다시 한 번 마력을 일으켰다.
마나가 마력을 따라 모였고, 룬어가 그 중심을 잡아 줬다.
이이잉.
오른손과 왼손의 사이에 검은색 구체가 생겨났다.
이어 구체는 천천히 길쭉해져서 화살 모양이 됐다.
이게 흑마법 판 ‘매직 미사일’이다.
“...능력이 두 개?”
각성 능력이 두 개인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다.
상급 키퍼들은 두세 가지 기술을 쓰지만, 그건 전부 같은 계열의 기술일 뿐이다.
화구를 만들 수 있으면, 불꽃 화살을 쏜다든지, 불꽃 비를 내린다든지 하는 것이다.
나처럼 확연히 다른 계열의 두 능력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나도 각성 능력이 두 개인 것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건 ‘마법’입니다.”
“마법!”
늘 침착할 것만 같던 가람도 목소리가 높아졌다.
키퍼들은 이처럼 늘 마법을 고대해왔다.
마법의 위력을 매번 몸으로 체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번개와 불과 공간 이동까지 쓰는 샤먼 때문에 오늘도 이렇게 고생하고 있지 않은가.
저런 마법을 쓰는 사람이 우리편이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하는 게 이상하다.
“그렇게 큰 건 아닙니다. 고작해야 불 피우기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니까요. 아무튼 제가 쓸 수 있는 마법 중에 ‘서치’라는 게 있습니다.”
“...주변을 수색하는 마법입니까?”
“비슷합니다. 그래서 재혁씨를 발견한 겁니다. 재혁씨는 땅 아래에 있습니다.”
가람이 내 얼굴과 내 손 사이에 떠 있는 매직 미사일을 번갈아 봤다.
그는 후하고 숨을 내뱉더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의심을 했군요.”
와.
조금 놀랐다.
여기서 사과를 할 줄이야.
이 사람은 진짜 된 사람이다.
겉으로 보이는 거랑 똑같다.
“괜찮습니다. 제가 먼저 숨겼으니까요. 솔직히 제 억지에 따라와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억지라... 첫 날 파이어 볼이 인상에 남았습니다. 거짓말 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지요.”
“아, 그 날. 무리한 보람이 있네요.”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되는 건가?
세상일이란 게 참.
“그럼 정민씨가 지켜달라고 한 비밀이란 ‘그 능력’이겠군요.”
“네, 맞습니다. 지켜 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미 던져 놓고 그런 말씀을 하시면... 제 대답은 예스입니다. 그 비밀, 꼭 지켜드리죠.”
“감사합니다. 이제 가 볼까요? 시간이 없습니다. 재혁씨도 식량이 다 떨어졌을 거예요.”
“그렇네요. 제가 사람을 모아오겠습니다.”
가람은 그 말을 하고 캠프 쪽으로 사라졌다.
그가 움직였으니, 이제 남은 건 구출하는 것뿐이다.
나는 천천히 팀원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잘 됐어요?”
“뭐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이선미와 고한결이 나를 보며 질문했다.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가람씨가 다른 키퍼들을 데리고 오기로 했습니다. 이곳, 아니 저쪽을 팔 거예요.”
재혁씨가 앉아 있는 바로 위의 땅을 파는 건 좋지 않다.
거기가 15m 정도로 제일 깊기 때문이다.
저쪽의 땅은 그나마 통로까지 10m 정도로 짧은 편이다.
저리로 파 내려가 아래에서 만나는 게 옳다.
“어떻게 설득한 거예요?”
“그리고 어떻게 발견한 거죠?”
“그, 그게...”
두 사람이 강하게 물어왔다.
솔직히 이 두 사람은 내 안중에 없었다.
그래서 준비된 답도 없었다.
그렇다고 진실을 말하기도 그랬다.
이렇게 퍼져나가면, 진짜 답이 없으니까.
그때, 소연이 나를 도와줬다.
“선배가 귀가 좋거든요. 저번에 채굴할 때도 갱도 내 소리를 다 들어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맞아요. 희미하게 들려서...”
“그걸로 저 깐깐한 사람이 넘어갔어요?”
“사람을 구하는 일인데, 밑져야 본전 아니겠어요? 제가 열심히 설득했죠.”
부랴부랴 둘러 댔다.
앞뒤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흐음...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렇죠. 뭐라도 해봐야죠.”
하지만 다행히도 두 사람은 어느 정도 납득한 모양이다.
납득해서 다행이지만, 어느 정도라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이래서 비밀이 새어나가는 거다.
저 두 사람이 가진 약간의 의심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 그게 바로 소문이 되니까.
가람이 비밀을 지켜준다고 해도, 빠른 시일 내에 내가 마법사인 게 들통 날 것 같았다.
그 전까지, 나름대로의 기초를 다질 수 있을까?
+++
“뚫었습니다! 통로예요!”
아래에서 소리가 올라왔다.
드디어 빈 공간이 나온 모양이다.
파고 내려간 것만 약 11m.
꼬박 하루가 걸린 대장정이었다.
“동굴입니다! 다들 내려오세요!”
그 목소리에 주변 사람들이 나와 가람을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그들의 눈에 스며들어 있던 의심의 눈초리는 없다.
‘이걸 왜 해야 하지?’하는 불평불만의 눈빛도 다 사라졌다.
“갑시다.”
나는 가람과 함께 통로를 내려갔다.
그저 일직선으로 파내려간 통로는 굉장히 투박했다.
하지만 삽 한 자루 없이 검과 단검 같은 걸로 이 정도 한 것만 해도 대단했다.
탁.
일직선 통로 끝에서 조심스럽게 아래 땅으로 착지했다.
통로 아래에는 또 다른 통로가 가로로 이어져 있었다.
내가 서치로 찾았던 그 통로다.
“어디로 가죠?”
몇몇의 사람들이 통로에 서서 좌우를 쳐다보며 고민 중이었다.
한 쪽은 박재혁이 있는 곳이고, 다른 쪽은 게이트 끝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게이트 끝이니까, 아마 통로가 중간에 투명한 벽으로 막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막혀 있는 통로가 존재하는 걸까?
벽 너머에 뭔가 있는 건가?
궁금증이 갑자기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지금은 그보다 박재혁이다.
그리고 케이라고.
“이쪽입니다.”
내가 알려주기도 전에 가람이 먼저 박재혁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젠 수신기가 잘 작동하는 것 같았다.
가람이 먼저 달려갔고, 사람들이 그 뒤를 따랐다.
발소리가 동굴을 울렸다.
3분도 안 돼서, 라이트에 벽에 기대어 있는 사람이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막 잠에서 깬 듯, 눈을 찌푸리며 우리를 바라봤다.
“재혁씨! 괜찮으십니까!”
“재혁씨! 우리를 알아보시겠어요?”
밝은 빛과 큰 소리 때문인지, 박재혁은 미간을 한껏 모은 채 말했다.
“이거... 꿈은 아니죠?”
3일은 굶었을 텐데, 박재혁의 상태는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네! 현실입니다!”
“재혁씨는 살아 있어요!”
“같이 돌아가요!”
동료의 생환을 목격한 키퍼들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땅 팔 때는 귀찮아하더니.
다들 츤데렌가?
+++
게이트 밖으로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반겼다.
일주일이 다 되어서도 안 나온 우리 때문에 협회에 비상이 걸려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우리를 보고 놀라는 협회 사람들 앞으로 가람이 나섰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지만, 고블린 부락 소탕 원정을 떠났던 키퍼 23명, 전원 무사 귀환했습니다.”
순간 중강당이 고요해졌다.
그리고,
짝짝짝.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예정보다 늦게 나왔던 팀들 중에 전원 무사 귀환한 사례가 있었던가?
내 기억에는 없다.
감동의 도가니가 될 만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한시가 급하다.
나는 가람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죄송한데, 저는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나중에 연락주세요.”
“네? 아니, 그래도...”
전원 무사 귀환 했으니, 협회에서 이것저것 챙겨주고, 기자들도 올 거다.
여기 있으면 키퍼로서 약간의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가람의 만류는 그런 의미의 만류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 말을 남기고 중강당을 조용히 빠져 나갔다.
지금 그 어떤 것보다 나에게 중요한 건, 케이라다.
“빨리요. 급해요. 제발요.”
내 다급함이 전해진 걸까.
택시는 총알처럼 날아갔다.
평소의 반도 걸리지 않았다.
“거스름돈은 됐어요!”
현금을 던져두고서, 택시가 멈추자마자 날 듯이 뛰었다.
타다다닥.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 없어, 계단도 미친 듯이 올라갔다.
삐비비빅.
비밀번호를 누르자, 내 기억 속의 풍경이 펼쳐졌다.
원룸, 책상, 책상에 앉아 있는 푸른 눈의 미녀.
“늦었네?”
케이라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는 신발을 벗지도 않고 방 안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가 그녀 앞에 섰다.
“미안.”
“뭐하는... 읍.”
그녀의 촉촉한 입술은 내 상상보다 달콤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