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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인들이 나만 좋아한다-9화 (9/137)

〈 9화 〉 chapter 2. 게이트

* * *

9.

쏴아아.

물소리가 들린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이곳은 소연의 방이다.

1.5룸 정도 되는데, 꽤 넓다.

안은 여자여자한 물건들로 채워져 있어서 여자방에 왔다는 게 피부로 와 닿는다.

여자방에 온 거, 얼마만이더라?

적어도 2년은 된 것 같다.

내가 긴장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 닌 게 아니라!

나는 긴장할 필요가 없다.

아니, 적어도 이런 종류의 긴장감, 남녀 사이의 긴장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된 걸까.

‘먼저 씻을게요.’

‘어?’

‘아니, 그, 그게 3일 동안 못 씻었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게이트 안에서 씻기는 힘들었다.

세수 정도 하는 게 고작이어서 씻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나도 몸이 근질근질 하니까.

하지만 이 타이밍에 들어가면 뭔가 이상하잖아.

남자를 방에 데려다 놓고 ‘먼저 씻을게요’라니.

안 그래? 나만 그러는 거야?

탈칵.

물소리가 멈추고, 소연이 화장실 문을 닫고 나왔다.

물소리와 문소리가 별 차이가 없어서 왜 그러나 하고 궁금했는데, 차림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소연은 큰 수건 한 장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수건 아래로 보이는 두 다리는 백옥처럼 하얗고, 열기에 살짝 달아오른 볼이 빨개서 귀여웠다.

물기가 묻어나는 촉촉한 머릿결에 내 눈을 피하려고 이곳저곳 방황하는 큰 눈망울은 자연스레 남심을 자극하는 중이었다.

“흠, 흠.”

소연이 헛기침을 하면서 내 앞에 앉았다.

그녀와 나 사이엔 작은 탁자 하나와 수건 한 장만 있는 상태.

이 정도면, 내가 어떤 짓을 해도 무죄 아닐까?

“저, 저기...”

소연의 고개가 슬쩍 올라왔다가, 내 눈과 마주친 후에 다시 내려갔다.

그녀는 말을 더 잇지 못했다.

대신 얼굴과 목, 드러난 어깨가 매우 빨개졌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이 모든 게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친구, 나한테 반했다.

당연한 결과랄까?

나 정도면 호감형이고, 키도 그럭저럭 적당하다.

거기다 미래가 보장된 키퍼.

심지어 세계 최초의 마법사라고 의심하는 상태.

아, 이래서 잘난 사람은 살기가 힘들다니까.

주변에서 가만히 놔두지를 않네.

...라고 하는 건 역겨우니까 그만 두자.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고.

며칠 전만 해도 나는 찌질 그 자체에 루저일 뿐이었으니까.

아무튼,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소연이가 나에게 마음을 주게 된 건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건 딱 하나, 지금 나는 소연이에게 그 어떤 마음도 없다는 것.

마음이 없어도 몸은 언제든지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니냐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그것도 안 된다.

집에는 케이라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케이라가 내 여자 친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케이라를 두고 여기서 소연이랑 무슨 관계가 되는 건 좀 이상하잖아?

“흠흠, 먼저 고마워.”

“...뭐가요?”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 안하고 말 맞춰 준 거.”

“아, 그건... 선배님이 숨기시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서요.”

“맞아. 정확히 봤어. 눈치가 빠른데?”

“옛날부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칭찬아닌 칭찬에 소연이 고개를 들고 환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에도 귀여웠을 텐데, 차림이 차림인지라 파급력이 남달랐다.

남심이 폭발하며 억지로 사랑의 감정을 일으키려 하는 수준이었다.

안 돼, 참아.

여긴 그러는 곳이 아니야.

“그래서 그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온 거야.”

“저도에요. 묻고 싶은 게 많거든요.”

“그럼 먼저 물어 봐. 내가 다 대답해 줄게.”

“좋아요. 그럼 선배님의 그 능력, 마법이에요?”

소연의 목소리가 약간 들떠 있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이 세계는 마법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마법’이라는 두 글자가 주는 낭만 때문만은 아니다.

마법에 딸려오는 부가 지식을 세계는 기다리고 있었다.

‘재련’스킬을 가진 키퍼 덕분에 세계는 미스릴을 마법적으로 가공할 수 있었다.

이런 것처럼 마법이 이 세계에 새로운 지식을 가져다 줄 거라 기대하는 것이다.

마법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동반하기 마련이니까.

“맞아, 마법.”

“진짜예요? 진짜 마법 맞아요? 그럼 막 순간이동도 하고, 하늘도 날고, 사람을 개구리로 만들거나 할 수 있어요?”

“거기까지는 나도 잘... 이제 막 얻은 거라서 말이야.”

“그럼 지금은 어떤 마법을 쓸 수 있어요?”

“눈을 멀게 하는 거나, 바닥을 미끌 거리게 하거나, 생명력을 빼앗거나... 물론 불덩이나 번개다발을 만들 수도 있지.”

“우와...”

소연이 입을 살짝 벌린 채 존경하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뿌듯하다.

사람에게 이런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니.

나, 관종일지도?

“앞으로 숙련도가 올라가면, 좀 더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을 거야. 마법을 연구하다보면 세상에 획을 그을 발견을 하게 될 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렇겠죠? 선배님이 세계 최초의 마법사일 거 아니에요!”

세계 최초.

혹은 세계 최고.

듣기만 해도 심장을 뛰게 만드는 칭호다.

내 이름 앞에 저 칭호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날이 오다니, 정말 꿈인가 싶다.

“그런 셈이야. 그래서 말이야.”

“네네!”

귀엽다.

소연이에게 귀나 꼬리 같은 게 있었으면, 지금 쫑긋하고 서지 않았을까?

이런 반응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들어줄 것 같다.

“내가 마법을 쓴다는 건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어.”

“어째서죠? 역시 부담스러워서?”

“맞아. 지금 마법사인 걸 밝히면 사방에서 관심을 보일 텐데, 지금은 거기에 대처할 능력이 없는 것 같아.”

“하긴... 제가 선배님이라도 그럴 것 같아요. 관종도 아니고, 지나친 관심은 버겁기만 할테죠. 그래도 나중에는 밝히시는 거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키퍼를 하다 보면 이렇게 어쩔 수 없이 들키는 일들이 생길 거니까.”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아니야, 뭐가 너 때문이야. 내가 살려고 한 거지. 그리고 그때 너 없었으면 나도 죽었을 거야. 고마워, 이건 진심이야.”

정말이다.

소연의 염력이 없었으면 나는 개에게 뜯겨 죽었을 것이다.

그건 소연이도 마찬가지다.

내가 없었으면 그녀도 죽었겠지.

“아, 아니에요. 저보다는 선배님이 더...”

칭찬에 약한 건지, 방금까지 이야기 잘 하던 소연이 귀까지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럼 비밀로 해주는 거지?”

“네? 아... 혹시 제가 비밀을 누설하면 어떻게 되나요?”

“응? 그건...”

솔직히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다.

분위기상 이런 태클이 들어오진 않을 것 같았으니까.

뭘 해야 하지? 협박? 약점 같은 걸 잡아야 하나?

약점이라면 지금 딱 잡기 좋은 거 같은데.

저 수건을 치우고 사진을 찍으면... 아니지, 이건 아니야.

“절 죽이러 오시거나 그런 건가요? 아니면...”

죽여? 쟤는 무슨 망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리고 아까부터 얼굴은 왜 계속 붉히고 있는 건데?

그러니까 나도 이상한 망상을 하게 되잖아!

“아니야. 설마 그러기야 하겠어. 그냥 좀... 슬프지 않을까? 나는 널 믿고 부탁했는데, 그 신뢰가 깨질 테니까.”

나는 구체적인 대안 없이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정답이었을까?

“...”

소연이가 넋이 나가 버렸다.

눈도 몽롱한 게, 지금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나를 보고 있지만, 분명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을 것 같다.

이거 두 번째 반한 거 같은데... 내가 뭘 했다고?

“...소연아?”

“아, 네!”

“대답은?”

소연이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나와 1초도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게 좀 귀엽긴 했다.

“당연히 지키죠.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지킬게요. 반드시 지킬게요.”

대답이 조금 과한 느낌이 있지만, 지금은 저 정도가 딱 적당할 지도 모르겠다.

실제적인 제재를 가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각오라도 받아내야지.

“그럼...”

용건은 끝났고, 확답도 받았으니까 이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소연이가 고개를 들었다.

“네? 벌써 가시려고요?”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다.

아니, 지금 내가 집에 안 가려면 어쩌려고? 뭘 하고 싶은 거야 얘는.

“응. 나도 빨리 집에 가서 씻어야 할 것 같아서. 3일 동안 안 씻었더니 찝찝하다.”

“그, 그렇죠. 선배님도 씻으셔야죠. 그럼 저...”

그 뒤에 나올 말이 무서워 나는 재빨리 말을 끊었다.

“난 가볼게. 다음에 연락해. 또 채굴하러 가야지.”

나는 할 말만 마치고 바로 일어나 문을 열였다.

답은 문을 나서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들려왔다.

“...연락할게요!”

풀죽은 목소리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기운 찬 목소리였다.

그런데 다음에 만나도 될까?

만나면 더 심해질 것 같은데...

모르겠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자고.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숙면을 취했다.

솔직히, 피곤한 일들이 많았다.

+++

이정민의 첫인상은 별 게 없었다.

‘평범했다’ 정도?

키퍼라는 점에서 이미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소연 자신도 이제 키퍼가 됐으니 키퍼래도 평범한 건 평범한 거였다.

소연은 정민이 이틀 간 같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정민이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사람으로서, 동료로서 그렇게 느끼는 거지, 남자로 괜찮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적당한 키에 호감형 얼굴.

꾸민 듯 안 꾸민 듯한 외모는 나쁘진 않았지만 매력 포인트는 아니었다.

둥글능글한 성격은 매력적이었지만, 그녀를 설레게 만드는 포인트는 없었다.

하지만 갱도에서 개가 나타났을 때 모든 게 뒤바뀌었다.

“소연아, 피해!”

“소연아, 돌 던져!”

“소연아!”

“소연아!”

“소연아!”

소연은 박력 넘치는 정민의 호통에 사로잡혔다.

이런 호통은 처음이었다.

그녀 주변엔 착하게 말하는 사람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녀가 착하게 생긴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들을 일이 없긴 했지만.

그래서 그럴까, 급박한 상황에서 감정이 듬뿍 담긴 그의 호통은 소연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더군다나 정민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붉은 눈이 살기를 내뿜는 어두컴컴한 갱도 안에서, 그는 미약한 힘으로 그 살기에 맞서 소연을 지켜 주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정민을 집으로 초대했다.

뭘 기대했는지는 그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호통치며 달려드는 정민?

아니면 호통치면서 그녀를 지켜주는 정민?

정민이 보여준 모습은 오히려 그녀의 예상에서 벗어났다.

‘그냥 좀... 슬프지 않을까? 나는 널 믿고 부탁했는데, 그 신뢰가 깨질 테니까.’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의 뇌 속에서는 폭발이 일어났다.

온갖 호르몬들이 최고로 분비되며, 뉴런들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아무런 생각도 못하고, 그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깨끗한 사람이야. 나는 나쁜 마음을 품고서 그를...’

부끄러웠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흑심만 가득했으니까.

그래도 정민이 간다고 나설 때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뭘 잘못했나 싶어서.

자신에게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나 싶어서.

이대로 보내면 다신 못 만날 것 같아서.

하지만 정민은 그녀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는 듯이 마지막 말을 남겨 주었다.

‘다음에 연락해.’

상심한 그녀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말 한마디.

소연은 그 따뜻함에 취해 있다가 뒤늦게 답했다.

“...연락할게요!”

다음에는 꼭 잡아먹고 말겠다고, 그녀는 속으로 다짐했다.

+++

헉.

뭐야, 꿈이지? 꿈 맞지?

“다 왔습니다.”

꿈에 소연이가 나왔던 것 같은데, 뭔가 무서운 꿈이었던 것 같은데.

내용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가슴이 서늘했다.

그리고 거시기도 좀 작아졌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다 왔습니다.”

“아, 네.”

나는 계산을 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개꿈이겠지.

그보다는 집에 있을 케이라의 상태가 더 궁금했다.

잘 있겠지? 나만의 이세계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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