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화 〉 chapter 2. 게이트
* * *
5.
이 세계에 아직 마법이란 건 없었다.
불을 만들거나, 얼리거나, 번개를 쏘거나 하는 키퍼들은 있었다.
하늘을 날거나, 땅을 파거나, 적을 탐지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진짜 ‘마법’을 능력으로 얻은 이들은 없었다.
마나와 마력을 이용해서 원하는 모든 일을 이루어 내는 사람들.
과학과 비견될 수 있을 만한 유일한 능력.
그런 마법을 배우는 길은 쉽지 않았다.
“...이게 진짜 맞아?”
“(맞아. 의심하지 마, 의심하면 더 안 되니까.)”
나는 지금 한 시간 동안 글자를 적고 있다.
그것도 딱 한 글자.
뱀처럼 구불구불하고 복잡하게 생긴 글자인데, 룬어라고 한다.
뜻은 모으기.
처음에는 따라 쓰기도 힘들었지만, 한 시간이나 쓰고 있으니 눈감고 써도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마법을 배우기 위해 48자의 룬어를 다 외워야 한다고 했을 때는 ‘오 룬어!’라면서 좋아했다.
하지만 한 글자를 한 시간 내내 적고 있을 줄을 상상하지 못했다.
“이제 슬슬 효과가 나타나야 하는 거 아냐? 한 시간이면 된다며?”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아, 여긴 시간이 정확하구나.)”
케이라의 세계, 아르케니아에는 제대로 된 시계가 없었던 모양이다.
있더라도 분초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전자시계 같은 건 없었겠지.
“(그럼 다시 흑마법을 빌려가 봐.)”
“드디어...!”
나는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하고는 차원공통 흑마법을 빌려왔다.
어제오늘 몇 번이나 입맞춤을 했더니, 이제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흑마법으로 주변 마나를 밀어내고, ‘모으기’ 룬어로 그 마나를 심장에 모아야 해.)”
원래라면 전혀 이해하지 못할 말이었지만, 나는 흑마법을 빌려온 상태다.
밥 먹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말대로 행했다.
마력을 일으키자, 마나가 내 뜻에 따라 빈 공간을 만들었다.
이때 쓰는 룬어는 ‘거리 두기’라는 룬어인데, 당연히 내가 배운 룬어가 아니다.
그런데도 손쉽게 쓴다.
이 밖에도 지금은 48개 룬어를 모두 쓸 수 있다.
‘이 지식을 원래 상태에도 가져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지만 그건 안 된다.
이세계체류계약이란 능력은 꽤 쓸만하지만, 밸런스 붕괴를 일으키는 치트는 아니다.
웅웅.
빈 공간에서 밀려난 마나가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는 게 미약하게 느껴진다.
마나를 느끼는 건 바람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감각 스탯이 좀 더 올라가면 물속에 있는 것 같이 느끼기도 한다는데, 나는 미풍 중에서도 약간 바람 같은 느낌이 전부다.
그래서 그럴까, 바람은 나의 작은 마력에도 잘 따라주었다.
심장에 ‘모으기’ 룬어를 그리자, 바람이 룬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잘하고 있어. 이제 룬어를 완성하면 돼.)”
룬어를 완성한다.
아직 배우지 않은 개념이었지만, 능력을 빌린 상태에서는 가능했다.
그러자 약간의 마나가 내 심장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정착했다.
“됐다! 됐어!”
“(그럼 이제 흑마법을 풀어 볼래?)”
다시 그녀가 내민 왼손에 입맞춤했다.
그 순간, 심장의 마나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심장에 집중해. 완성된 룬어를 머릿속과 심장에 계속 떠올려야 해.)”
“어, 어, 어...”
능력이 사라지자마자, 모든 게 깜깜해졌다.
마나의 존재감은 더 옅어졌고, 심장의 룬어도 흩어지고 있었다.
1시간 동안 쓴 모양을 떠올리며 룬어를 되살리려 했지만, 머릿속 이미지조차 흔들렸다.
결국, 심장에 마나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룬어도 사라졌다.
“사라졌는데...?”
“(한 시간으로는 부족했나 봐. 아니면 룬어를 완성하는 개념이 없어서 그런 걸까?)”
“생각보다 귀찮구나.”
“(그래도 이대로 몇 번만 하면 될 거야. 한 일주일?)”
“...뭐? 일주일이나?”
나는 어렴풋하지만 마나가 심장에 정착한 느낌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도 1주일이나 걸린다고?
“(1주일이면 빠른 거야. 보통은 첫 룬어를 완성하는데 1달은 걸리니까. 너는 지금 계약의 효과를 보고 있는 거야. 머리는 기억하지 못해도 몸은 기억한다고 할까.)”
“그런 거라면...”
소설이나 만화 같은 데는 하루 만에도 먼치킨이 되곤 하던데, 현실은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렵다.
역시 노오오오력만이 살길인가.
“너는 어때? 다 외웠어?”
“(발음은 거의 다 된 거 같아.)”
“벌써?”
케이라는 어젯밤에 내게 한글의 발음에 대해 배웠다.
어젯밤에 좀 늦게 자기는 했지만, 그녀가 공부한 시간이라고 해봐야 서너 시간이 채 안 된다.
그런데도 발음을 다 외울 수 있나?
“한글, (이라고 했지? 잘 만든 언어 같아. 익히기가 쉽네.)”
“와...”
‘한글’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발음은 정확했다.
나는 테스트를 위해 ‘경찰청 창살’이라고 적어 보여줬다.
“읽어 봐.”
“경찰청 창살.”
그녀는 분명 뜻도 모르면서 제대로 읽었다.
그녀의 말대로 발음은 거의 다 된 거다.
대박이다.
앞으로는 이세계인도 인정한 한글의 우수성이라고 해야겠다.
국뽕이 절로 차오른다.
세종대왕님 만세.
물론 한글이 쉬워서만 이렇게 되는 건 아니다.
다 케이라의 지능과 열정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거겠지.
나와 함께 글자를 쓰기 시작했던 그녀는, 나보다 세 배는 더 많은 A4 용지를 빽빽하게 채웠으니까.
“(나는 한국어를 다 익히는 데 얼마나 걸릴까?)”
“이 속도면 1주일 안에 될 것 같아.”
“(빠른 거야?)”
“미친 듯이 빠른 거 같은데... 머리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빨리 책을 읽고 싶을 뿐이야.)”
케이라가 방에 꽂혀 있는 책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녀가 책을 읽고, 인터넷을 하며 정보를 모으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괴물을 이 세계에 들여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침 먹을까?”
원래 아침 따윈 챙겨 먹지 않지만, 아침부터 공부한 효과 때문이지 배가 고팠다.
아침이란 말에 케이라가 눈빛을 반짝인다.
“(좋아, 나는 라면을 줘.)”
그녀는 어제저녁에 먹은 라면에 푹 빠진 상태다.
MSG의 위력은 차원을 뛰어넘는다.
아침부터 라면... 자취생다운 식단이다.
+++
게이트 키퍼로 활동하려면, 국가에 키퍼 등록을 해야 한다.
등록은 광역시급 관청에서 할 수 있다.
서울에는 두 곳에서 할 수 있다.
하나는 시청이고,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게이트 키퍼 협회 본부다.
협회 앞은 여러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돈이 모이는 곳이니 사람이 모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도 당당히 그 일원이 될 수 있다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물론 사람이 모이니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게이트는 악마의 함정이다! 게이트에 들어가면 악마가 될 거다! 키퍼들은 악마다!’
이런 현수막을 걸고 시위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구해방작전’이란 단체다.
키퍼가 되기 전에는 그들의 말이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아주 조금 했었다.
하지만 키퍼가 되고 보니 정말 말이 안 되는 주장이었다.
저건 그냥 자기가 키퍼가 못 되어서 하는 불평불만일 뿐이다.
실제로 아주 오래된 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지지는 적다.
언론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21세기는 게이트와 키퍼에 의해 돌아가고 있으니까.
정말, 그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가슴이 웅장해진다.
나는 그들을 지나쳐 큰 걸음으로 협회에 들어갔다.
등록 절차는 간단하다.
신청서를 내고, 각성 능력을 보여주면 끝.
그리고 기다리면 면허증이 나온다.
[게이트 키퍼 : 이정민]
[등급 : F]
[각성 능력 : 화구 생성]
협회 직원에게서 면허증을 받았다.
나는 등록 과정에서 최하급 흑마법 중 미니 파이어볼을 사용했다.
최하급 흑마법으로 다른 일도 할 수 있긴 했다.
미끄러지게 한다든가, 생명력을 아주 조금 빼앗는다든가.
하지만 마법사인 걸 밝히는 건 시기상조였기에, 그저 화구만 조금 다룰 줄 안다고 했다.
“등급은 실적을 올리면 자연스럽게 오를 겁니다. S등급의 면허증은 백금으로 되어 있답니다.”
플래티넘 카드!
방송으로 본 적이 있다.
삐까뻔쩍한 게 보는 맛이 있는 카드였다.
언젠가 가질 수 있을까.
지금으로서는 C급도 간당간당해 보이는데.
마법의 유틸성을 생각하면 B급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발급된 코드로 협회 커뮤니티에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게이트에 들어가려면 자주 이용하셔야 할 거예요.”
게이트 키퍼만 들어갈 수 있는 커뮤니티, 속칭 ‘더 게이트.’
여기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수백만은 넘으며, 각종 커뮤니티에는 매일 유출된 ‘더 게이트’ 게시물이 올라오곤 한다.
더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는 코드를 받으니, 진짜 게이트 키퍼가 됐다는 실감이 들었다.
“잡담은 유출해도 별문제 없지만, 비밀 커뮤니티니까, 꼭 비밀은 엄수하셔야 합니다. 아시죠?”
“네, 물론이죠.”
“처음 등록한 키퍼들을 위해서 협회에서는 게이트 탐색을 무료로 도와 드리고 있습니다. 이용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게이트 탐색.
게이트 안에 뭐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직접 들어가서 파악을 해야만 하는데, 금방 각성을 한 키퍼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강한 몬스터가 있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키퍼를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자원을 채취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도 금방 각성을 한 사람은 알 수가 없다.
옆에서 조언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팀들이 있다.
한 번 부르는 데 수억을 줘야 하는 몸값이 비싼 사람들이다.
협회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무료로 1회 제공해준다.
얼핏 보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절대로 승낙하면 안 된다.
협회에서 보내주는 팀이 무언가를 발견하면, 그 수익의 10%는 협회로 가게 되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가 고개를 젓는 건 그 이유는 아니다.
내 게이트는 소환 게이트라서, 안에 뭐가 있는지 살필 필요가 없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게요.”
“돈이 많이 드실 텐데요.”
“키퍼 생활을 하면 금방 모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초보자가 들어갈 만한 게이트를 소개해 드릴까요?”
“환영입니다.”
직원이 태블릿을 건넸다.
모집 광고들이 많이 있었다.
<최하급 마정석="" 게이트,="" F급="" 전투="" 인력="" 환영,="" 시급=""/>
고블린 부락 정리
56시간 소요
시급 100만
고블린이 나오는 게이트에 들어가 고블린을 정리하는 일.
적혀 있는 것처럼 간단하진 않다.
56시간 동안 긴장한 채 싸운다는 게 현대인에게 익숙할 리가 없으니까.
보통 한 번 갔다 오면 며칠은 쉬면서 피로를 푸는 게 정석이라나.
<광석 채굴,="" 장비="" 무료="" 대여,="" 일급=""/>
미스릴 채굴
관련 능력자 우대
채굴 장비 일체 대여
일급 300만, 하루 8시간, 3~4일 예정
완벽한 노가다.
능력이 형편없는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만큼 고되다.
3~4일의 일정을 마치면 온몸이 근육통으로 비명을 지를 게 틀림없다.
<포터, 무기="" 지급,="" 일급=""/>
드레이크 사냥
무기, 방어구 지급
사격 경험자 우대
일급 500만, 2~7일 소요
짐꾼의 일이다.
위험한 일이라 급여가 조금 세다.
사격 경험자 우대인 걸 보니, 총을 지급하는 모양이다.
총을 사용할 수 있으면 위험도가 조금 떨어지기는 해서 직원이 추천하는 것 같다.
“세 곳 다 협회에서 안전을 보장하는 일자리입니다. 지난 몇 년간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고요.”
안전.
게이트 내에서 안전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실과 격리된 세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게이트 내에서 범죄가 일어난다면 잡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막 각성한 키퍼들은 항상 주의하고 또 주의하며, 협회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움직이는 게 좋다.
“평소에 운동은 하셨나요?”
“조금은요.”
아니라고 하기엔 좀 부끄러워서 허세를 부렸다.
직원이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허세란 건 눈치챈 건가?
“그렇다면 채굴을 추천합니다. 첫 시작은 그게 제일 무난하죠. 그 후 어느 정도 능력에 익숙해지면 고블린 같은 거부터 잡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정석적인 답이다.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광석 채굴 팀에서 승인했습니다. 3일 뒤, 협회로 오시면 협회의 입회 아래 게이트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드디어 첫 게이트.
두근두근.
어째 첫 경험보다 더 긴장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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