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 chapter 1. 만남
* * *
4.
[신분:아르케니아인(임시체류 중)]
[종족:인간]
[나이:21]
[레벨:33/49]
[체력:03][근력:01][민첩:02]
[마나:08][마력:05][친화:09]
[감각:04][신성:01]
[특성:푸른 눈의 계승자(S)]
[기술:푸른 마력(S), 아르케니아 전통마법(A), 차원 공통 백마법(B), 차원 공통 흑마법하급(C), 필그림 이동법(B)]
“(강력한 계약이야. 이렇게 세세하게 나오는 경우는 잘 없는데.)”
씻고 나온 케이라는 내 옆에 앉아서 내가 불러낸 그녀의 상태창을 보고 있었다.
그녀에게선 샴푸 향이 났다.
분명 나와 같은 샴푸인데, 왜 좋은 향이 나는 걸까.
역시 미인이란... 최고다.
그녀는 샴푸라는 존재를 처음 접했지만, 곧잘 사용했다.
샤워기나 드라이기 같은 것들도 한 번만 말하면 어떻게 쓰는지 알아들었다.
이해력과 응용력이 남달랐다.
괜히 마법사를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물론, 그 모든 과정에서 그녀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제일 큰 반응을 보였던 건 옷이었다.
마땅한 속옷이 없는 관계로 내 드로즈를 입고 있는데, 안 입은 것처럼 편하다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거기에 상의는 순면으로 된 흰색 티를 입었다.
이것도 세상 부드럽다면서 놀랐다.
그녀의 세계에서는 이 정도 재질의 면은 왕족들이나 입는 거라고 했다.
실제로 그녀가 가죽 로브 안에 입고 있던 원피스는 촉감이 거칠었다.
흰 티에 드로즈.
이른바 하의실종패션, 또는 여친의 자취방 룩.
거기에 위에는 입은 속옷도 없어서, 두 꼭지가 살짝 튀어나온 게 눈에 보였다.
내 분신은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분신은 아까부터 껄떡이며 말하고 있었다.
‘덮치자, 덮치자, 덮치자, 덮치면 되잖아? 왜 안 돼? 방금도 했는데?’
안 돼. 절대로 안 돼.
저건 성욕에 미친 몽둥이의 의견일 뿐이야.
상식적으로 사고하는 ‘나’라는 인격체는 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
머릿속을 채우는 갖가지 망상들을 정리하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참아야 했다.
그게 지성인이니까.
절대로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여서가 아니다.
레벨 30대면 최소 B급 능력자로, 한국에서는 2천 명밖에 없는 실력자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이 지구가 처음 만나는 마법사일 테니까.
“이 스킬 중에 하나만 빌려 쓸 수 있는 모양이에요.”
내 기술, 이세계체류계약의 능력 중 하나다.
계약한 상대방의 기술을 하나 빌려 쓸 수 있다.
“(그래? 고를 수 있어? 아니면 정해진 거?)”
“일단 다 고를 수 있는 모양인데요.”
케이라의 상태창에 있는 기술 이름은 전부 주변에 파란빛을 두르고 있었다.
“(코스트는? 내가 지불해야 할 건 있어?)”
“케이라는 없어요. 동의만 해주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정신력이 소모된다는데요?”
“(정신력? 마나와 마력이 없어서 그럴 거야.)”
“그거 괜찮은 거예요? 케이라처럼 투명해지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되면 끔찍하겠지만, 한편으론 또 망상이 머리를 채웠다.
내가 마력이 부족하면, 조금 전처럼 케이라와 몸을 섞을 수 있지 않을까?
“(투명해지진 않아. 배가 고프고 머리가 아픈 정도? 많이 사용하면 뇌가 녹아버릴 수도 있겠지만.)”
“...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거시기도 순식간에 쪼그라들었다.
뇌가 녹아내린다니, 투명해지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다.
그건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으니까.
“(게이트 키퍼의 스킬에는 적절한 안전장치가 있어. 너, 지금 겁먹었어?)”
“쫄기는요. 제가 왜 쫄아요.”
“(그럼 해보자. 어떤 식으로 힘이 전달되는지 궁금해.)”
“알겠어요. 그럼 손을 좀 빌려주시겠어요?”
“(손은 왜?)”
“...계약의 문양에 입맞춤해야 돼서요.”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케이라는 쿨하게 왼손을 내밀었다.
이전의 태도를 생각하면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데, 나에겐 아직 당연하지 않아서 내가 오히려 긴장되는 느낌이랄까.
진짜 100% 쌩얼이 연예인이랑 비비는 사람이 내 옷을 입고 내게 입맞춤을 하라고 손을 내미는 거라고!
당장 몇 시간 전만 해도 평생 백수로 살다가 독거노인으로 죽는 미래까지 생각해 본 적도 있는데, 이런 급격한 반전이 아직은 와 닿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왼손 문양에 입맞춤했다.
쪽.
내 상태창에 변화가 생겼다.
[기술:소환게이트(SS), 이세계체류계약(A), 푸른 마력열화판(A)]
“(어떻게 됐어?)”
전혀 안타깝진 않지만, 그녀는 내 상태창을 볼 수 없었다.
상태창이란 건 본디 극비 개인정보다.
나는 볼 수 있는데, 하하하.
“푸른 마력열화판 이라고 생겼어요.”
“(푸른 마력을 가져갔다고?)”
케이라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내가 뭘 잘못했나?
“일단 써 볼게요.”
“(잠깐!)”
그녀가 뭐라고 하려는 것 같았지만, 무시하고 푸른 마력을 일으켜 보았다.
힘을 얻으니 빨리 써 보고 싶은 마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푸른 마력을 일으키는 방식은 초심자인 내가 보기에도 독특했다.
하지만 스킬의 위력으로 숙련된 조교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다.
마력의 집중, 회전이 동시에 일어났다.
화륵.
오른손 위에 투명한 불꽃이 나타났다.
신기했다.
내 능력으로 이런 걸 할 수 있다니.
진짜로 게이트키퍼가 된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놀란 얼굴을 한 케이라가 보였다.
오늘 내가 본 어떤 장면보다 경악 중이었다.
내가 의문의 눈빛을 보내자, 그녀는 답 대신에 내 턱을 잡더니 거울 쪽으로 돌렸다.
거울에는 오른손을 든 나의 모습이 보였다.
투명한 불꽃은 거울에 잡히지 않았다.
대신 내 눈동자 색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라처럼 신비한 푸른색이었다.
“...어?”
“(일단 그만, 잘못하면 죽어.)”
놀랄 새도 없이, 그녀의 말을 따라 마력의 불꽃을 꺼트렸다.
불꽃이 사라지자,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 대신 피로감이 몰려 들어왔다.
“허억, 허억...”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온 몸에 힘이 빠져서 앉아 있는 것도 힘들었다.
눈만 감으면 바로 잘 것 같았다.
“후하... 후우...”
“(그대로 자면 안 돼. 아직 알아야 할 게 많아.)”
“...안 자요.”
하지만 절로 눈이 감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막는 손길이 있었다.
“(눈 뜨라니까.)”
케이라였다.
그녀는 어느새 내 위로 올라와 엎드리고는 강제로 내 눈을 열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예쁜 눈동자다.
하지만 눈동자보다 그녀의 자세 때문에 눈이 확 떠졌다.
헐렁한 티 때문에 가슴이 보일랑 말랑하고 있었다.
아쉽게도 볼 기회는 금방 사라졌다.
그녀가 금방 일어났기 때문이다.
“(눈동자 색은 바로 돌아왔네. 혹시 스킬을 다른 거로 바꿀래? 확인할 게 있어.)”
“알겠어요. 그럼 손을...”
그녀가 왼손을 내 입에 댔다.
이번에는 ‘차원 공통 흑마법하급’을 가져왔다.
그게 제일 정신력을 덜 소모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킬은 내게 오자마자 최하급으로 변경됐다.
“했어요.”
“(혹시 푸른 마력을 다시 쓸 수 있어? 지금 상태로.)”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또 죽으라고?
나는 고개를 미세하게 저었다.
“못하죠.”
“(그럼 마력을 어떻게 회전했는지, 어떤 식으로 모았는지는 기억나?)”
“그거야...”
어라?
머릿속이 하얗다.
푸른 마력을 끌어올리면서 그 방식이 독특하다고 생각한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 독특한 방식이 무엇인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 번만 들으면 잊을 수가 없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럼 됐어. 완벽하게 힘만 빌려주는 방식인가 보네. 다행이다.)”
다행인가?
이렇게 기억에 안 남으면 하나도 못 배울 텐데.
“뭐가 다행이죠?”
“(푸른 마력은 일인전승의 비의야. 오직 한 사람만 배울 수 있고, 정해진 절차를 따라야 해. 그렇지 않으면 죽어.)”
“...네? 그런 거라면 처음부터 푸른 마력은 가져다 쓰면 안 된다고 말해줬어야죠.”
“(내 실수였어. 당연히 못 쓸 거라고 생각했거든. 미안해.)”
화가 끓어오르려다가도 케이라의 얼굴을 보니 금방 식어 버린다.
이래서 미인이랑 살라고 하는 건가?
돌이켜 보면 그녀는 만류하려고 하긴 했다.
안 듣고 내가 먼저 써 버려서 그렇지.
무언가에 홀린 듯.
응? 진짜 홀린 건가?
“알겠어요. 그럼 다른 건 괜찮은 거죠?”
“(괜찮아. 이번에는 뭘 빌려 갔어?)”
“흑마법이요. 최하급으로 바뀌었어요.”
“(최하급 공격 마법 한개 정도는 쓸 만해. 한 번 써볼래?)”
“...지금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는데, 써도 되는 걸까?
잘못하면 죽는다며?
“(평소에 운동 안 하는구나?)”
반박할 말도, 반박할 힘도 없었다.
가장 최근에 한 운동이라곤, 케이라와 했던 허리 운동밖에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상태 보니 지금은 안 되겠다. 마나를 가지게 되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거야.)”
“마나를 가져요? 어떻게요?”
방금까지 한 말이 힘만 빌려 쓴다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마나를 어떻게 가진다고?
“(키퍼잖아? 키퍼는 자연스레 마나와 친해질 수 있어.)”
“아니, 그 전에 이 세계에는 마나가 없는데요.”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수많은 키퍼 중 ‘마나’와 ‘친화’가 올랐다는 키퍼는 없었다.
그래도 ‘마력’은 꽤 많은 이들이 올랐지만, ‘마나’와 ‘친화’는 올릴 방법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계에 ‘마나’가 없다고 생각했다.
“(마나가 없어? 세상 모든 것은 마나로 되어 있는데 그게 무슨 소리?)”
“하지만 그래서 이 세계에서는 마법도 못 쓰고...”
“(내가 조금 전에 썼잖아? 이 세계에도 마나가 있어.)”
“아...!”
나는 케이라가 자체 마력을 바탕으로 마법을 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녀는 마나가 있다고 확신했고, 그럼 그녀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녀는 마법의 전문가니까.
“그럼... 저도 마법을 배울 수 있나요?”
“(물론이야. 상태창에도 나와 있잖아. 차원 공통이라고. 내가 쓰는 마법이 차원 공통인 줄은 나도 몰랐던 사실이야.)”
“와우!”
마법사라니, 내가 마법사라니.
푸른 마력을 썼을 때와는 또 달랐다.
그때는 순수한 힘을 얻은 느낌이라면, 지금은 최고급 맥가이버 칼을 산 느낌.
그것도 그 칼이란 걸 전 세계에서 나만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케이라가 샤워기를 보면서 놀랐던 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요. 이곳에서 마법사란 존재는 그런 거라고요.”
“(조금 알 것 같아.)”
“그런데... 머리가 좋아야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케이라는 딱 봐도 머리가 좋아 보였다.
마법사에게 가지는 고정관념 중 하나가 딱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늙어서 조금 불안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위한 마법도 있으니까 괜찮아.)”
“휴... 다행이네...”
뭐, 늙어?
26살이니까, 21살인 케이라에 비해서 늙은 건 맞지만, 그렇게 늙은 건 아니지 않나?
그러고 보니 케이라는 왜 자꾸 반말이지?
통역이 제멋대로 되는 건가?
“케이라, 혹시 제 말이 반말로 들리나요?”
“(반말? 그게 뭐지?)”
“반말이 아니라... 혹시 격식이나 예의를 차리는 말로 들리나요?”
“(맞아. 딱딱한 말이야. 귀족이나 쓸법한 말.)”
보아하니 아르케니아 말에는 존대라는 개념이 없는 모양이다.
영어 같은 느낌? 그럼 괜히 존대했잖아.
“그럼 그냥 이렇게 말해도 되지?”
“(괜찮아. 훨씬 편해.)”
진작 이렇게 할걸.
그런데 존대는 없어도 호칭은 있을 거 아니야.
“혹시 ‘오빠’라고 불러줄 수 있어?”
내 말에 케이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건 ‘오빠’라는 개념이 저 세계에 있다는 뜻이다.
“(싫어. 너가 편해.)”
“아니, 내가 나이가 많으니까 오빠라고 하는 게 자연스럽잖아.”
“(싫어. 소름 끼쳐. 나는 모든 사람을 ‘너’라고 불러왔어.)”
“소원이야, 한 번만 안 돼?”
“(안 돼.)”
어디서 힘이 났던지, 나는 그 뒤로도 한참을 매달렸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쳇, 귀여운 여동생이 오빠라고 부르는 거 듣고 싶었는데.
쳇쳇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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