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chapter 1. 만남
* * *
2.
“(냉장고? 그게 뭐지?)”
“이런 겁니다.”
냉장고 문을 열며, 나는 푸른 눈동자가 동그래지는 것을 기대했다.
아니나 다를까, 냉장고에서 나온 한기에 케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마법...은 아닌데... 그보다 이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지?)”
“시원한 게 좋으니까요?”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그녀에게 따라주었다.
그녀는 천천히 물을 마시고는 또 한 번 놀랐다.
“(물이 맑고 시원해. 이건 왕이나 부릴 수 있는 사치야. 왕은 전속 마법사가 얼리고 정화해주니까. 이곳은 이런 물이 흔해?)”
“흔하죠. 집마다 하나씩은 있으니까요.”
“(마도왕국 시절에나 가능할 법한 일인 것 같은데. 여긴 그만큼 에너지가 넘쳐나?)”
“어... 넘쳐난다면 넘쳐나는 거겠죠?”
넘쳐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석유 고갈이니, 원자력이 어떠니 하는 이야기가 떠오르니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마법사라 그런가? 하는 질문들이 가볍지가 않다.
이세계 가이드로서의 나는 좀 부족한 거로 가야겠다.
“(저건 또 무슨 기계야?)”
“이건 TV라는 건데요.”
나는 또 그녀의 표정이 바뀌기를 기대하며 TV를 켰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녀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말았다.
“(...와.)”
암요암요. TV를 처음 보면 저런 표정을 짓는 게 정상이지.
저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동의할 거다.
“설명하자면 조금 긴데... 일단 설명할까요?”
“(말해 줘, 꼭.)”
.
.
.
그렇게 2시간.
케이라는 내 방에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졌고. 나는 하나하나 다 설명했다.
중간중간 쉬고도 싶었지만, 쉬려고 할 때마다 세상이 끝난 것처럼 실망하며 나를 보는 그녀 때문에 멈출 수 없었다.
멈추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호기심은 컴퓨터와 인터넷에 대해 듣고서야 멈췄다.
이제 더 말할 게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 스스로도 이 세계에 대한 틀이 약간은 잡힌 듯했다.
그리고 나 역시.
케이라에 대충 파악을 끝냈다.
그녀는 마녀도, 악마도 아니고,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자도 아니다.
“(이 세계의 말을 배우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돼?)”
그냥 호기심 많은 마법사일 뿐.
현대 용어로 말하자면, 일 중독자인 연구원 같은?
위협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찮으면 귀찮은 존재였지만. 뭐, 그 귀찮음도 지금은 외모로 커버가 된다.
“말을 배우겠다고요? 배우는 데 못해도 서너 달은 걸릴 텐데... 돌아갈 생각은 없으신가요?”
“(내가? 내가 왜?)”
“그야 가족이나 친구들...”
...이 있지 않냐고 스스로 물으려다가 멈췄다.
안 봐도 대답이 연상됐기 때문이다.
“(없어.)”
역시.
어쩌면 내 예상을 하나도 벗어나지 않을까.
“아니면 스승이라거나.”
“(죽었어.)”
이 또한 클리셰.
이러면 그 누가 그녀를 이 세계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지금까지 본 바로는 이 세계가 아주 마음에 들어. 그래서 일단은 좀 더 있고 싶은데. 어차피 돌아가는 방법도 딱히 없어 보이고.)”
“방법이 없나요? 마법으로 딱하고 되지 않아요?”
“(마법으로는 차원을 넘을 수 없어. 그래서 게이트가 있는 거야. 이 세계에도 키퍼가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건 잘 몰라?)”
“이쪽은 마법 같은 게 없고, 게이트가 생긴 지 이제 고작 30년이라서요.”
“(고작 30년? 너가 2시간 동안 말한 걸 들어보면 30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너가 모르는 건 아니고?)”
“어? 그런가...?”
이건... 설득력이 있어!
이렇게나 실험을 좋아하는 시대인데 30년이면 뭐든지 알고도 남지 않을까.
다만 내가 모르는 것일 뿐.
“(그러니 당분간 여기서 신세 좀 져도 될까?)”
“네... 가 아니고!”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에 이어서 하니까 나도 모르게 답할 뻔했다.
정신 차리자. 아무리 미녀라도 호구는 사양이야.
“...신세는 이미 충분히 지신 거 같은데요. 제 신세를 더 지려면 공짜로는 안 돼요.”
“(...박한 세상이네. 아니면 너가 지금 박한 사정인 걸까?)”
“그런 식으로 인신공격을 하면 가격이 더 올라갈 거예요.”
“(그래, 알겠어. 그럼 뭘 지불하면 돼? 나도 공짜로 묵는 건 사양이야.)”
“그럼...”
어라? 그런데 뭘 받으면 되지?
돈? 막 이세계에서 넘어 온 사람이 돈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비싼 장신구 같은 게 있어 보이지도 않고.
아니면 돈을 벌 수는 있나? 미인이니까 얼굴 팔면 돈이야 어떻게 벌겠지만... 그런 일을 할 성격으로 보이진 않는데.
...아니다. 이걸 내가 왜 고민해야 해?
“선제시요. 뭘 줄 수 있는데요.”
“(돈 아니면 노동력.)”
“노동력은 필요 없고, 돈은 어디서 구하게요?”
“(게이트가 있다며? 들어가서 일하면 돼.)”
오, 그런 방법이?
하지만 저건 이쪽 세계 사정을 몰라서 하는 이야기다.
“당신도 알겠지만, 게이트는 아무나 못 들어가요. 일단 신분이 확실해야 하는데, 그건 어떻게 하시게요? 이세계인이란 걸 들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거기에 휘말린 저는 또 어떻게 되고요.”
“(아직 이터널 게이트는 없나?)”
“이터널 게이트? 그건 또 뭐죠?”
“(항상 열려 있는 게이트. 30년이면 아직 없을 만해. 그럼 강도짓이라도 할게.)”
“네?”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어서 되물었는데, 케이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진심이란 이야기다.
천천히 따져보면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녀와 나는 사는 세계가 달랐고, 살아온 방식도 달랐으니까.
범죄나 폭력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살인에 대해서도.
헉. 그러고 보면 나 지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거 아니야?
나에게는 공부에 찌든 허약한 몸뚱이밖에 없지만, 케이라에게는 ‘마법’이라는 힘이 있다.
내가 갑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을인 건가?
“(걱정하지 마. 아무나 죽이지는 않아.)”
내가 갑자기 긴장한 기색을 보이니까 풀어주려고 한 것 같은데, 오히려 더 무섭다.
“그, 그래요. 하지만 강도질도 그렇게 쉽지는 않을 거예요. 여긴 사방이 눈이라...”
“(눈?)”
“감시 장비가 많아요. 특히나 한국은 더하죠.”
“(이러면 어때?) ********.”
케이라가 지팡이를 들고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통역이 되지 않는 언어였다.
마법을 쓰는 모양이다.
그리고 주문이 끝났을 때, 그녀의 모습은 내 앞에서 사라졌다.
“...투명화 마법인가요?”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숨소리 같은 것도 들리지 않았다.
기척이 아예 없었다.
혹시 투명화가 아니라 이동 마법이었나?
후우.
“헉!”
케이라는 갑자기 내 뒤에 나타나 귀에다 숨을 불어넣었다.
나는 깜짝 놀라 앞으로 넘어질 뻔했다.
정말로 상상도 못할 등장이었다.
“(어때? 이 정도면 눈이 많아도 괜찮겠지?)”
“크흠... 괜찮을 것 같네요.”
적외선 감지기 같은 것들로 태클 걸 수도 있지만, 그 이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범죄가 일상이 사람과 같이 살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집이 범죄의 본거지가 되는 건데, 그래도 될까?
내 성격에 그러면 매일 불안에 떨 것 같은데.
그냥 내보내야 하나? 나 혼자 살기도 바쁜데.
“(좋아. 그럼 잠깐 여기 묵어도 되는 거겠지?)”
케이라의 신비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쳐다본다.
저 눈동자를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세계 최초로 만난 이세계인을 길가에 내놓기도 좀 그렇잖아?
이미 연이 닿은 사람이기도 하고.
내가 끝까지 책임지는 것도 아니고, 잠깐, 그녀가 자립할 정도로 잠깐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건 그녀가 미인이라서 그런 게 절대로... 어?
“잠깐만요. 저기 목이 왜 그러죠?”
“(목이 왜?)”
“조금 투명해진 것 같은데요.”
케이라의 피부는 처음부터 맑고 깨끗해서 핏줄이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깨끗하다 못해 목 뒤쪽에 있는 사물의 실루엣이 보일 정도였다.
“(어?)”
그녀가 로브 속에서 손을 꺼내자, 조금 더 확실해졌다.
피부에 색감이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뭐죠? 혹시 돌아가시나요?”
“(아니, 마력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야.)”
“마력 부족요?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이 경우는 죽어.)”
“네?”
케이라는 아무렇지 않게 큰일 날 소리를 했다.
약간의 표정변화는 있었지만, 좀 전 호기심을 표출할 때에 비하면 무표정이나 다름없었다.
“(지금 마력 회복이 안 돼. 다른 차원이라서 그런 것 같은데... 혹시 먹을 거 있어?)”
“먹을 거요?먹으면 회복되는 건가요?”
“(보통은 회복돼.)”
“잠, 잠깐만요.”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다니, 그것도 투명해져서 사라진다니, 그런 걸 두 눈으로 보고 싶진 않았다.
그럼 앞으로 이 방에서 어떻게 자겠냐고.
나는 급히 냉장고를 열어 먹을 게 있나 봤다.
자취생의 냉장고답게,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있는 거라곤 맥주, 콜라, 생수, 그리고 먹다 남은 초코바 뿐.
냉동실에 있어야 할 닭가슴살 팩도 다 먹었는지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먹다 남은 초코바를 꺼냈다.
“...당장은 이런 거밖에 없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아. 이건 그냥 먹으면 되는 거야?)”
“아, 이렇게요. 이걸 먹으면 돼요.”
나는 포장을 다 뜯어내고 초코바만 건넸다. 비닐이 뭔지 잘 모르는 그녀가 포장지까지 다 먹을 수도 있으니까.
와삭.
케이라는 한입 베어 물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죽는 건 아무렇지도 않은데, 처음 먹는 초코바는 놀랄 일인가 보다.
와삭, 와삭, 와삭.
그녀는 초코바를 순삭시켰다.
“...어때요?”
“(맛있어! 이곳 음식은 다 이렇게 맛있나?)”
“아마도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마력은요? 회복되는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 줘.)”
그래, 소화될 때까지 시간이 걸리겠지.
그런데 그럴 시간이 있나? 지금 조금 더 투명해지는 거 같은데?
내 관찰마냥 그녀의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안 돼.)”
“네? 벌써요? 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조금 더 기다려야 되는 거 아니에요?”
“(소화랑은 상관이 없어.)”
“그럼 어떻게 해요?”
“(시도할 만한 방법은 있어.)”
“그게 뭔데요?”
케이라는 대답 대신 나를 보았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나를 위아래로 스캔했다.
눈빛에 변화는 없었지만,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발가벗겨진 느낌이랄까. 혹시 투시 마법 같은 걸 쓰나?
“(성교.)”
“네?”
섹, 뭐?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전통적인 방법이야. 이차원 지성체와의 성교는 이차원에 적응하는 데 큰 도움을 줘.)”
“그, 그런 포르노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어딨어요!”
“(마력은 곧 생명력, 생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성교에서 마력이 탄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아하?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명쾌한 설명...이 아니잖아!
“아니 그렇다고 지금 누구랑 성교하겠다는 건데요!”
“(너랑. 왜, 나랑은 하기가 싫어?)”
케이라의 말투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호기심이 폭발할 때와는 천지 차이의 반응으로, 일상 업무를 하는 듯했다.
내용은 그런 게 아닌데, 절세미녀와 섹스를 하느냐 마느냔데.
“아니 그게...”
물론 싫지 않다.
내가 지금 여자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쏠아다도 아닌데 거리낄 이유가 없다.
거기다 케이라는 분명 절세 미녀다.
몸매는 로브에 가려서 잘 모르겠지만, 저 미모면 몸매가 뭐가 중요할까.
하지만 세상에는 절차라는 게 있고, 나에게도 마음의 준비라는 게 필요하다.
갑자기 이세계인을 만나 정신도 없는데, 섹스라니? 스섹이라니?
“(죽음의 위기니까 부탁 좀 할게. 다른 사람을 찾는다는 것도 무리야. 시간도 없고, 이왕 할 거면 게이트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해야 확실하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나에게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레 물러났고.
턱.
내 종아리에 침대가 걸렸다.
이제 더 갈 곳이 없었다.
그녀가 내 어깨를 밀쳤고, 나는 자연스럽게 침대에 눕게 됐다.
“잠, 잠깐만. 갑자기 이러는 건 아무래도...”
어느 순간 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법인가?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가능했다. 강력한 힘이 나를 누르고 있었다.
이것도 마법인가?
그리고 스윽하는 소리와 함께 내 바지가 벗겨졌다.
내 거기는 아까 전부터 풀 발기 상태였다.
“(뭐야? 준비 만전이잖아?)”
케이라의 목소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어쩐지 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부끄럽다고!!!’
나는 마음속으로 절규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