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 은신 중의 섹스 (4)
* * *
"이보람, 네가 원래야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기는 하지만 처녀잖아? 근데, 나하고 뭐가 하고 싶다고?"
나는 놀라서 이보람에게 물었다.
캄캄한 밤.
소파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이보람은 자신도 당황한 듯이 내게 말했다.
"아, 아니, 내가 무슨 말을……! 아냐, 그런 거! 아, 아니, 솔직히 섹스가하고 싶기는 한데……! 하지만 나, 한 번도 해 본 적도 없는데, 섹스……. 그런데 왜……!"
어두운 동아리방 안에서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이보람이 나한테 섹스를 하자고 한다.
아, 그래, 섹스. 좋다.
근데 이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이보람이 나한테 이렇게 이야기를 해 오는 것에 있어서 나는 한 가지의 거의 확실시되는 가능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보람……. 그 사이에 실 바이러스에 전파가 됐다……!'
이보람은 다른 히로인들과 또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가령 유소은처럼 우선 겉으로 다정다감한 성격이라면 그래도 섹스를 하자고 했을 때 뭔가 대화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보람은 다르다.
이보람은 주인공, 즉 나를 전혀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캐릭터다.
그런 이보람이 이렇게 갑자기 나한테 성적 매력을 매우 강하게 느꼈다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직접 이렇게 표출한다는 것은, 내가 봤을 때에는 실 바이러스의 증상이 틀림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았다.
그동안 여러 회차를 거쳐 오면서 실 바이러스의 전파자들을 많이 보기도 했고 나 또한 전파자가 되어 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그 느낌도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보람에게 말했다.
"교수하고 차에 있을 때, 문자 보내다 걸린 것 말고 또 다른 일 있었어?"
이보람이 고개를 저었다.
"상담 하는 척 하고 시간 끌었어."
옆에 앉은 이보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사실 내게도 흥분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만큼 이보람은 성격이 지랄 맞아서 그렇지 메인 히로인답게 정말 예쁜 것은 틀림없었다.
이제는 어둠에 적응된 나는 바로 옆에 있는 그녀를 웬만큼 확인을 할 수가 있었다.
빛나는 눈과 오똑한 코, 붉은 입술, 거기에 완벽한 신체 밸런스.
게다가 이보람은 오늘 나하고 같이 나름 교수와의 심기일전을 준비해서 나온 거였기 때문에 제법 갖춰 입고 나오기도 했다.
하얀 블라우스와 연갈색의 치마 아래로는 그녀의 다리가 보였다.
나는 그런 이보람에게 실 바이러스 전파에 관한 다른 단서를 물었다.
"그거 말고 다른 일은?"
"없었는데?"
"잘 생각해 봐, 특별한 일이 있었는 지를 한 번 떠올려 보라고."
"없었어~!"
이보람이 따지는 듯한 투로 대답했다.
평소의 그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기본적으로는 평소의 이보람의 모습과 같다고 하더라도 내가 봤을 떄 그녀는 실 바이러스에 전파가 된 상태이고, 그녀는 곧 섹스를 엄청나게 갈구하게 될 것이었다.
한 사람과 섹스를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하기 위해서 목숨을 불사하고 뛰어들며 섹스를 갈구하는 도중에는점차 의식을 잃어가는 빈도가 높아질것이다.
나는 우선 이보람이 실 바이러스에 전파되었다는 것을확정짓고 그녀에게 좀 더 물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네가 지금 나하고 섹스가하고 싶은 게, 그냥 나한테 이끌리는 건 아니잖아? 뭔가가 알 수 없는 욕망이 들고, 너도 모르게 섹스라는 말이 나오는, 그런 기분인 거잖아?"
내가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야 이보람은 눈을 더 크게 뜨며 놀란 듯이 되물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나 또한 이전의 회차들 중에그런 기분을 아주 생생하게 느껴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느낌을 이보람에게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보람은 실 바이러스에 전파되어 있는 듯해 보였고, 나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더 채근하듯 물었다.
"그래, 내가 봤을 때, 너는 지금 싸이코 교수의 실 바이러스에 전파가 됐어.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 교수하고 같이 차에서 일어난 일 전부."
내가 실 바이러스 전파에 관해 상세히 말하자 이보람도 내가 하는 이야기에 더욱 신경써서 생각을 해 나갔다.
그러다가 이보람이 말했다.
"으음~, 특별할 게 정말없었는데……. 1층 자판기에서 믹스커피 두 잔 뽑아서 마시면서 이야기를 좀 하다가, 교수 차로 같이 들어갔어. 그게 다야! 메시지 걸려서 도망쳤고."
"더 생각해 봐. 믹스커피 마시면서상담을 할 때, 그리고 차로 들어가서 조금 더 상담을 했을 때, 교수의 행동을 다 떠올려 봐."
"……."
이보람이 조금 더 생각을 했다.
나는 이보람이 더 생각하는 동안 잠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일단 실 바이러스에 전파된 초기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렇게 큰 증세는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상태도 섹스를 더 원하게 될 거였다.
이보람에게 싸이코 교수와 있었던 일에 관해 생각을 해 보라고 한 뒤에 나 또한 그런 그녀에 관한 생각을 했다.
여기서 그녀를 구해서 탈출할 방법이 있을까?
이전에 보호의 명목으로 구금해 뒀던 조교 누나처럼 몸을 속박시키기라도 해야 되는 걸까?
그렇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렇게 하기에도 쉽지는 않았다.
조교 누나인 문수경을 속박할 때야 청테이프 같은 도구들을 써서 그녀를 묶어 놓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아리방에 우연찮게 그런 것들이 있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보람을 여기에 두고 혼자 USB를 가지고 탈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전에 경험해 본 적이 있다.
메인 히로인 루트에서 빠져나간 이후가 되면 난이도가 급등하는 것을 이미 체험해 본 이후이다.
내가 이보람을 여기에 묶어놓고 탈출을 하든 그냥 탈출을 하든,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난이도가 찾아오는 것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메인 히로인 루트에서 새로운 어떤 루트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이 있기 때문에 나는 섣불리 판단을 하기가 어려웠다.
'메인 히로인에서 서브 히로인으로 넘어가면 난이도가 급등하니까 그렇게는 안 되는데……. 그러면 어떻게……. 아, 이럴 때 선택지라도 있었더라면……!'
아직 선택지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래서 일단은 이보람과 이야기를 하면서 조금 더 시간을 보내 보기로 했다.
이러다가 선택지가 뜨면 거기에서 판단을 내려 볼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생각을 하는 한편으로 이보람에게도 교수와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라고 하고 기다리던 참이었다.
이보람이 뭔가 생각난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 벽에 시선을 두고 생각을 하던 이보람은 뭔가가 떠오르자말을 꺼내며 내 쪽을 보았다.
"향수……!"
"향수?"
"향수를 썼는데? 그게 연관이 있을까?"
이보람이 여전히 나를 보는 채로 말을 이었다.
"모과 향이 났어. 그게 조금 이상했어. 보통 향수 같은 냄새가 아니고, 케이스는 향수였는데 방향제 같은 냄새라고 할까."
나는 이보람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네. 아아, 그 향을 맡고, 네가 실 바이러스에 전파가 된 거야."
그것 뿐이다.
그것 뿐이라면, 그것이 답이다.
실 바이러스를 이제 향수의 형태로까지 가공을 했다니.
향수라면 설령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닌다고 해도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이보람의 말을 들어 봤을 때 비슷한 향이었다고 하는 방향제라고 해도 그렇고.
바이러스는 공기 중으로도 전파가 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알고 있다.
환기가 되면 전파율이 낮아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람이 싸이코 교수와 상담을 했던 곳은 다름아닌 싸이코 교수의 차 안이었다.
그렇게 되면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전파율은 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주사 같은 것을 활용하는 것이 확실하게 전파를 시킬 수 있는 것이겠지만 밀폐된 공간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실 바이러스를 대놓고일정량 이상 흡입을 하게 되면 전파가 되는 건 당연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실 바이러스의 1차전파가 된 사람들이 섹스를 통해 바이러스를 더욱 전파를 해 갈 테고.
나는 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는 이를 한 번 물었다 떼고 이보람에게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 여기에 숨는 걸로 끝이 아니게 됐는데. 내일이 오기만을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네가 전파자라면 이대로 밤이 지날 때까지 함께 숨어있기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이보람을 보면서 그렇게 말을 하고는 동아리방 내부를 크게 한 번 둘러 보았다.
중앙동아리가 아닌 학과 건물에 있는 소규모 동아리답게 넓지 않은 크기의 동아리방 안에는 물건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보람이 물을 마시려고 손을 댄 듯한 커다란 상자에는 이전 엠티에서 남은 것을 모아 놓은 듯 물병 몇 개 외에도 PT로 된 맥주, 과자, 종이컵, 이런 것들등이 정돈되어들어 있었다.
우리가 앉아 있는 소파의 반대편 구석에 있는 컴퓨터가 한 대 있기는 했지만, 휴대폰도 그렇고 컴퓨터도 그렇고 인터넷이 될 리 없었다. 방해 전파로 인해서 사용이 불가능하다.
그 상자 외에는 다른 물건들을 쓸 만 해 보이는 것을 찾아보기에는 어려웠다.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무릎담요와 돗자리 같은 것들이 몇 개 놓여져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이보람의 실 바이러스 증세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한 상황에서 내가 나가서 그녀를 묶어 놓을 만한 아이템을 찾고 다니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보람이 섹스를 외치며 뛰쳐나갈 수도 있고, 그리고 내가 아이템을 찾으러 다니다가 싸이코 교수한테 발견이 되면 조금 전까지 했던 그 추격전을 다시 해야 될 수도 있었다.
내가 그런 생각들로 복잡할 때 이보람이 내게 말했다.
"상훈아."
"어."
"근데 나, 섹스, 하고 싶은데 진짜……."
이보람이 한 번 더 나를 채근해 왔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기다리던 선택지가 떴다.
[섹스한다]
[섹스하지 않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