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마지막 메인 히로인 (2)
* * *
문수경의 일을 먼저 해결하고 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전 회차에서도 한 번 해 봐서이다.
나는 이전 회차에서처럼 그녀를 내 자취방에 보호 겸 포박을 시켜 놓고 이보람을 만나러 나갔다.
이번에는 문수경이 소지하고 있던 칼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우선 문수경 루트하고 유소은 루트에서는 문수경을 포박할 때 칼 선택지가 떴었다.
그런데 이보람 루트에서는 칼 선택지는 딱히 뜨지 않기도 했다.
오히려 이전 회차에서는 그 칼로 인해 유소은이 응급실에 스스로 실려가게 되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따로 가져올 수도 있었지만 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전 몇 번의 회차에서 싸이코 교수와 맞닥뜨렸을 때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원거리 무기들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는 싸이코 교수에게 칼로 승부를 내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차라리 선택지를 잘 고르는 게 낫다.
문수경을 처리해 두고 카페에 거의 다 왔을 무렵, 카페 주변에서 나는 이보람을 만났다.
'역시 이보람도 예쁘기는 엄청 예쁘네.'
이보람의 비주얼은 이 대학가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띌 정도였다.
하얀 색의 블라우스와 옅은 갈색의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치마는 짧다는 느낌이 들 정도와 보통이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딱 중간 사이즈였다.
이보람은 상의와 하의는 나름 상큼한 느낌으로 입고 왔고 나름 포인트는 빨간 양말인 것 같았다.
블라우스, 치마, 까만 구두, 그리고 양말이 잘 어울렸다.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역시 그녀가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흘끗흘끗 보면서 지나치는 미소녀 레벨이어서일 지도 몰랐다.
나는 이보람을 반겼다.
"어, 왔어?"
"……."
나는 이보람을 반갑게 맞이했는데, 이보람은 평소에 까부는 모습과 달리 어쩐지 약간은 표정이 굳은 듯한 모습으로 내게 눈인사 정도를 하며 내가 먼저 한 인사를 받았다.
나는 그런 그녀와 같이 카페로 갔다.
카페의 커다란 유리문의 손잡이를 밀고 들어가서 나는 이보람과 같이 카페의 카운터에 섰다.
그러자 이보람은 나에게 말을 했다.
"아! 나 지갑 놓고 왔어. 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하고 치즈케익."
「싸이코 교수와 여대생들」의 원작에서도 이보람은 원래 좀 이런 식이다.
이보람은 주인공을 거의 걸어다니는 지갑 취급을 하면서, 절대 보지를 박지는 않으려고 한다.
유소은은 돈이 많지 않지만 어느 정도 베풀려고 하는 성격인 것에 비하면 이보람이 나를 매 시간마다 사사건건 뜯어먹으려고 하는 것은 정 반대의 면이 있다.
한두 번이면 나는 동기이기도 하니까 이보람에게도 사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람의 성향상 매번 이런 식이기 때문에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선택지가 떴다.
[커피와 치즈케익을 바로 결제한다]
[농담으로 이보람에게 결제시킨다]
보통이라면 1번의 선택지를 고를 것이다.
호감을 얻기 위한 당연한 선택지가 호구적인 거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안다.
호구적인 것은 돈으로 뭔가 멋있는 모습을 보여 줄 정도의 돈을 쓰거나 혹은 내가 재력이 풍성해서 어필을 하려고 할 때 먹히는 방법이다.
간혹 한 번 씩이거나 이보람이 내 여자친구이거나 하면 기꺼이 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니고, 물론 사는 것도 호감도를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도 농담을 통한 사회적 지능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
나는 그래서 2번 선택지인 농담으로 이보람에게 결제를 시키는 판단을 하기로 했다.
"잠깐."
"어?"
"가방에 손대지 마."
"내 가방? 왜?"
"움직이지 마. 네일아트 날라가붕게."
"무슨 소리야~!"
"지갑 가져왔지? 네가 지갑 가져왔다에, 내……."
뭘 걸지?
하고 생각해 보니 주머니에 아이템이 3개가 있는 게 떠올랐다.
자물쇠, USB, 그리고 향수.
"내 향수를 건다."
"진짜 안 가져왔어~! 뒤져 봐!"
이보람은 옆으로 메고 있던 자신의 가방을 약간 앞쪽으로 돌렸다.
"오, 당당해. 심리전 좋아. 자, 그럼, 확인 들어갑니다~. 뚜루~, 뚜루~, 뚭뚭뚜, 뚜룹~."
그리고, 역시나였다.
이보람의 지갑은 가방의 한복판에 떡하니 들어있었다.
"있네?"
이보람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치. 안 통하네?"
지갑을 여는 그녀에게, 나는 한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에 약간 가져다 대고는 그녀를 카운터 쪽으로 은근히 밀었다.
"야. 내가 커피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지만, 우리 오늘 밤에 거사를 치러야 되잖아. 네가 사주는 걸 먹어야 내가 더 힘이 나지 않겠어?"
"미친 새끼야! 누가 들으면 오해해! 우리가 오늘 밤에 거사를 치른다고 하면!"
그렇게 말하는 이보람의 얼굴은 그녀를 카페 근처에서 만났을 때보다 살짝 밝아져 있었다.
농담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농담도 봐 가면서 해야 되기는 한다.
원래의 나도 그렇지만 「싸이코 교수와 여대생들」의 나 또한 원래와 마찬가지로 못생겼기 때문에, 농담을 하는 것도 자칫하면 한순간에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수 있다.
어쨌거나 그녀와 같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나서, 우리는 함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카페는 조금 소란이 있었다.
카페 자체가 조금 손님이 북적이는 곳이어서였다.
그래서 나와 이보람은 오히려 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는 환경이라고 볼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 이보람을 단둘이 대하자 확실히 그녀가 예쁘기는 예쁘다는 것을 다시금 체감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냥 마주 앉아 있는 것 뿐인데 내 욕망이 반응을 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욕망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현재로서 중요한 것은 밤에 치러질 거사에 대한 논의였다.
"보람아. 개략적인 이야기는 소은이하고 너하고 다같이 있을 때 했던 것 같고, 이제 앞으로는……."
내가 이보람과 같이 밤에 싸이코 교수의 컴퓨터를 빼돌리러 가는 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이보람이 나의 말의 중간에 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상훈아. 그거 말인데. 잠깐만."
"음?"
"밤에 교수실 가는 거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돼?"
"어떤 방향으로 다시 생각해 달라는 말이야?"
"나는 가기 좀 그래서."
"그게 무슨 소리야?"
"나 말고, 소은이랑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카페에서 나와 마주앉아 커피를 마시다가, 이보람은 나에게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즉 이보람의 말은 그런 것이다.
그녀는 자기가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싸이코 교수의 컴퓨터를 탈취하는 일에 대해서, 이보람은 나처럼 싸이코 교수가 무기들을 꽤 여러 종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위험한 일인 것은 맞기 때문에 그 일을 자기가 하고 싶지 않아서 유소은에게 짬을 때리고 싶다고 하는 말인 듯했다.
이보람이 나에게 자신이 아닌 유소은과 같이 가면 안 되냐고 물어봤을 때에는 선택지가 떴다.
[이보람과 간다]
[유소은과 간다]
만약 내가 아직 유소은 루트로 가지 않았다고 해도 이럴 거면 처음부터 유소은으로 가지 굳이 이쪽에서 방향을 틀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이번에는 이보람 루트로 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만났을 때 이보람이 평소의 모습과 달리 조금 편치 않은 기색을 내비쳤던 것도 사실은 이번에 교수실에서 컴퓨터를 빼내 오는 것이 자신이 가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였다고 나는 납득할 수 있었다.
이보람의 설득에 나는 주저없이 선택지를 골랐다.
"나는 보람이 너랑 가고 싶은데."
이보람은 자신의 설득이 먹혀들지 않자 내게 더 이야기를 해 왔다.
"왜 나야? 소은이하고 가도 관계없잖아?"
"소은이는 여성스럽고 조신하잖아. 너하고 가는 게 더 나아."
"나는 남성스럽고 안 조신하다는 말이야?"
"이유야 어찌 됐든 너하고 같이 가고 싶어."
이보람은 목이 타는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깊게 쭉 한 모금을 마신 다음 내게 다시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까, 나는 진짜 못 하겠어. 소은이하고 가."
이번 이보람의 말에는 한 번 더 같은 선택지가 떴다.
[이보람과 간다]
[유소은과 간다]
물론 이번에도 나는 이보람을 선택할 거였다.
"아니. 너하고 가고 싶은데."
"대체 왜! 네가 컴퓨터 빼 내는 동안 나든 유소은이든 교수하고 이야기만 잠깐 하면 되는 거잖아!"
이전 회차에서 나는 유소은이 컴퓨터를 갖고 싶다고 해서 그녀에게 컴퓨터를 맡기고 내가 교수와 시간을 끌었지만, 원래의 계획은 여자가 시간을 끌 동안 내가 컴퓨터를 빼 내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 교수와 시간을 끄는 역할을 이보람은 여전히 하고 싶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나도 그런 이보람에게 지지 않고 맞섰다.
"보람아. 생각해 봐. 이거, 네 문제야. 협박을 받은 것도 내가 아닌 너하고 소은이라고. 네 일인데, 네가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내 일이기도 하지만 소은이 일이기도 하잖아. 그러니까 네가 소은이하고 같이 갈 수도 있는 거고."
"네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소은이라고 하고 싶을 리 없잖아?"
"그냥 네가 처음부터 유소은하고 같이 하고 싶었다고 하면 유소은 성격상 별 말 안 하고 바로 같이 하자고 할 거야. 응? 유소은하고 해."
"난 너랑 하고 싶어."
"……."
이보람은 두 번이나 자신의 의사를 나에게 전했다.
자신은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고, 같이 협박을 받은 유소은하고 내가 가서 문제를 처리하고 오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완고하게 유소은이 아닌 이보람과 함께 가고 싶다고 했다.
내가 그렇게 연이어 두 번을 다 이보람과 가고 싶다고 하고 나서는 이보람은 잠시 깊이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조금 생각을 하던 끝에, 이보람은 나에게 말을 했다.
"야. 진짜 유소은이랑 한 번만 갔다 와. 그렇게 둘이서 가서 한민국 교수 컴퓨터 찾아와서 더이상 그 새끼가 우리한테 협박 못 하게 하는 상황을 네가 만들면, 내가 한 번 해 줄게. 대신 내가 결혼 전까지는 안 하는 주의라……. 그……. 입으로……. 해 줄게. 그러면 어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