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상담을 받다 (1)
* * *
학교의 복도, 거기에서 연결되는 중앙계단.
평범한 대학교에서 볼 수 있는 돌로 된 바닥 때문인지 공기는 시원한 감도 있는데, 싸이코 교수와 대면하고 있는 상황 때문인지 서늘한 느낌도 든다.
'싸이코 교수를 데리고 일단 1층으로 가려고 했는데, 어떡하지?'
나는 원래 싸이코 교수를 데리고 1층으로 가려고 했다.
1층 중앙계단 쪽이라면 내가 시간을 끌고 있는 장소로부터 4층 맨 끝의 교수실까지의 거리가 좀 되니까, 만일의 상황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유소은에게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주어진다.
그렇지만 싸이코 교수의 제안대로 상담 장소를 4층의 과사무실로 하면, 4층의 싸이코 교수의 교수실까지 복도만 지나면 도착하게 된다.
어떻게 해야 될까?
1층으로 가자고 더 우겨 볼까?
싸이코 교수의 말대로 과사무실로 가야 될까?
나는 고민을 하다가, 1층으로 가자고 다시 말을 해 보기로 했다.
"하하, 교수님, 실은 저도 목이 좀 마른데 음료수를 먹고 싶기도 해서요. 1층의 자판기로 음료수를 좀 뽑아 먹고 싶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해 봤지만, 싸이코 교수는 좀처럼 설득되지 않는 눈치였다.
"음료수라면, 과사무실에 조그마한 냉장고 있지 않은가. 거기에 조교가 늘 음료수를 채워 놓을 텐데."
"그……. 제가 먹고 싶은 다른 음료수가 따로 있어서요."
나는 싸이코 교수를 1층으로 어떻게든 가게 설득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중앙계단으로 가는 발을 떼지 않았다.
"지금 나하고 상담 하자는 거야, 음료수 먹자는 거야? 그건 상담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따로 사 먹든지 하고, 과사무실에 있는 것만 해도 많이 있다고! 굳이 내가 4층에서 1층까지 내려갔다가, 또 다시 4층으로 올라가야 되겠나?"
좋았던 분위기가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존나 삭막하던 분위기로 복도를 지나게 되었을 때 내가 싸이코 교수에게 존나 아부를 해서 분위기를 좀 풀어 봤었는데, 이대로 교수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시 좆될 것 같았다.
내가 존나 미소녀 여대생이면 교수를 더 설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지만 더는 무리인 감이 있었다.
'이런 씨발, 1층으로 교수 데려가는 건 무리겠는데? 더 이야기했다가는 분위기 더 좆된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같은 선택지가 한 번 더 떴다.
[1층 이동을 더 주장한다]
[과사무실로 간다]
여기서 한 번 더 1층 이동을 주장하다가 진짜 여기서 교수가 교수실로 돌아가버리게 되기라도 한다면 가장 좆되는 경우였다.
유소은이 컴퓨터를 빼돌릴 때 걸리게 되기라도 하면, 최악의 경우를 대비했던 대로 내가 교수를 뒤에서 붙잡고 유소은이 칼로 찔러서 교수를 죽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뒤를 장담할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교수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어쩔 수 없다. 교수를 교수실로 바로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과사무실에서라도 상담을 해야 된다. 과사무실도 교수실과는 복도 끝에서 끝. 1층 중앙계단 쪽에 비하면 가깝지만 컴퓨터 빼돌리는 소리는 절대 들릴 수 없는 거리는 되니까, 일단 가보자.'
과사무실로 간다.
1층에서 4층으로 다시 이동하는 만큼의 시간은 덜 벌게 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과사무실에서 내가 시간을 끌어 준다면 관계없을 수 있다.
나는 다시 뜬 선택지에 대해서는 과사무실로 가는 것을 선택을 하기로 했다.
나는 싸이코 교수에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교수님. 아, 당연히 교수님께서 계단을 왕복하게 하시는 수고로움을 제가 드리면 안 되는 건데, 제가 잠깐 생각이 짧았습니다. 과사무실로 가시겠어요?"
"음."
싸이코 교수는 잠깐 나와 실랑이를 했기 때문인지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짧게 대답하며 넥타이를 매만졌다.
그런 싸이코 교수의 모습을 보니, 1층으로 가자고 더 우기지 않고 이 정도에서 내가 접어준 것이 적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층으로 가자고 더 우겼으면 좆될 뻔 한 것 같기도 하다.'
싸이코 교수는 나에게 대답을 하고 난 다음 한 손을 들었다.
그가 테이저건과 전기충격기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 떠올라서 순간 쫄았지만, 교수가 무기를 꺼낼 이유는 현재로서는 없었고 그는 중앙계단 쪽을 가리켰다.
교수가 가리킨 곳은 중앙계단의 아래쪽이 아닌 위쪽이었다.
"저기."
교수는 내게 말을 이었다.
"5층 가기 전에, 그래, 4층하고 5층 저기 중간 있잖나. 반 층 올라가서, 저기에 있는 화분 아래에서 과사무실 열쇠 가져오게."
나는 바로 대답을 했다.
"네."
나는 싸이코 교수의 말에 따라 중앙계단을 걸어올라갔다.
조금 빠르게.
혹시라도 내가 교수를 데리고 과사무실로 가기 전에 유소은이 컴퓨터 본체를 가지고 나오기라도 한다면, 그 때는 정말 내가 계획을 세울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변수로 인해 멸망 플래그가 꽂히는 거라고 볼 수 있었다.
조용한 학교 안에서 가볍게 계단을 뛰어올라가는 나의 발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이 과사무실 열쇠는 이전 회차에서도 봤었다.
김아영 루트로 가려다가 좆되고 문수경 루트로 빠졌을 때, 문수경과 식사와 섹스를 하러 가기 이전에 과사무실을 잠그고 갔던 이전 회차의 기억이 떠오른다.
나는 화분 쪽으로 가서 잠시 화분을 들고는, 그 밑에 있는 열쇠를 집어들어 다시 싸이코 교수 쪽으로 내려왔다.
"가실까요, 교수님?"
교수는 나에게 대답을 하고는 내 뒤를 따랐다.
"그래."
나는 과사무실로 들어가서 스위치를 눌러 천장의 등을 켰다.
실내가 밝아진다.
그리고 나는 싸이코 교수를 과사무실 안으로 먼저 들어가게 하고는, 잠시 문 앞에 서 있다가 문을 확실하게 닫았다.
과사무실과 싸이코 교수의 교수실은 끝과 끝이지만 혹시라도 소리가 들릴까 봐서 확실하게 문단속을 해 두려는 거였다.
과사무실로 가서 창가 쪽으로 간 싸이코 교수는, 근처에 있는 사무용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았다.
과사무실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혹여나 유소은이 컴퓨터를 들고 교수실 밖으로 나오진 않을까 해서 조금 서둘러야 됐지만 지금부터는 시간을 끌어야 됐다.
내가 싸이코 교수와 함께 과사무실로 들어온 이상 이제부터는 유소은이 컴퓨터를 가지고 나와도 된다.
이제 시작이다.
그녀가 컴퓨터 본체를 들고 비상계단을 통해 내려가 학교 건물을 벗어나고, 더 가서 교문까지 벗어났을 때에 계획대로 전화를 해서 폰 진동이 울릴 때까지……. 일단 그 때까지 시간을 끌 수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이번 교수와의 승부가 될 것이다.
내가 결의를 다짐할 때 싸이코 교수는 과사무실을 한 번 둘러보며 지나치듯 말했다.
"오늘은 문수경이가 보이지를 않아. 어디로 간 건지."
어디로 갔냐면 내 자취방으로 갔다.
테이프에 입이 막혀서 말은 못 하지만 지금쯤 실 바이러스의 효과 때문에 한참 섹스섹스를 부르짖고 있을 것이다.
나도 싸이코 교수처럼 과사무실을 조금 둘러보자, 선택지가 떴다.
[차를 권유한다]
[음료수를 권유한다]
[그냥 상담한다]
이 선택지는…….
이 선택지의 경우에는, 차를 마시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으로 보인다.
차는 뜨겁다.
뜨거운 차를 마시다 보면 시간을 더 끌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처음에 싸이코 교수에게 끌려던 시간보다 더 손쉽게 시간을 끌 수도 있다.
차가 식기 전에 돌아가지는 않지 않을까.
그것 또한 물론 내가 지금까지처럼 싸이코 교수와의 선택지에 있어서 악수를 두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이겠지만 말이다.
나는 커피포트기 쪽으로 다가가며 싸이코 교수에게 말했다.
"교수님, 제가 차 한 잔 올리겠습니다. 커피하고, 허브티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은데, 어떤 걸로 드시겠습니까?"
"녹차로."
"알겠습니다."
나는 커피포트기에 물을 넣고는 그 앞에 서서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나는 커피포트기에서 물이 끓는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에도 존나 조마조마했다.
싸이코 교수가 갑자기 뭐 두고 온 게 있다거나 한다고 하면서 과사무실을 나가 교수실로 가면 어떻게 하나 싶어서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과사무실에 미리 준비된 찻잔 두 개를 쟁반에 올린 다음 녹차 두 개를 탔다.
싸이코 교수는 내가 차를 타는 모습을 보고는 컴퓨터 앞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나 창가의 테이블 쪽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연녹색 물이 우러나는 찻잔의 녹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났고, 나와 싸이코 교수는 창가에서 티타임을 가지기 시작하게 됐다.
나는 찻잔 하나를 쟁반 위에서 교수에 가까이 놓아 주었다.
"교수님, 한 잔……."
"고맙네."
싸이코 교수는 내가 쟁반과 함께 올려놓은 티스푼으로 녹차를 몇 번 저으며 내게 말했다.
"그래. 자네가 나를 존경한다는 건 복도에서 들어서 충분히 알겠네만. 나한테 상담하고 싶은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건가?"
싸이코 교수는 내게 어떤 것을 상담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선택지는 그 이후에 바로 뜨게 됐다.
[학점 문제]
[진로 문제]
[인생 문제]
[이성 문제]
교수와의 상담이 시작되고 난 이후의 첫 선택지였다.
나는 이 선택지 목록을 보면서 이 선택지가 나에게 과연 무엇을 말하는 건지를 순간적으로 생각해 봤다.
그것은, 바로 이 선택지들 중에서 최대한 시간을 더 벌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르고, 교수가 말을 별로 하지 않을 것 같은 선택지를 고르지 않아야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선택지는 총 네 개다.
학점, 진로, 인생, 이성 문제가 그것이었다.
일단 학점과 진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싸이코 교수는 실 바이러스를 제작해서 여대생들하고 존나 섹스를 즐기는 라이프를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여학생이 학점이나 진로에 관해 물어도 관심이 없을 텐데 내가 학점과 진로를 교수에게 상담하게 된다면 교수는 곧 흥미를 잃고 자리에서 일어날 지도 모른다.
나는 좀 더 생각해 봤다.
'교수가 이 중에서 가장 이야기를 많이 할 것 같은 분야는 뭘까……? 나는 시간을 끌어야 되는데……. 사실은 교수는 이성에 관한 이야기에 관심이 많을 거고 직진을 한다면 이성 문제가 답이지만, 여기서 답은 직진이 맞을까? 학생과 이성 이야기를 하고싶어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인생 문제를 이야기해서 나이가 지긋한 교수에게 긴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건 어떨까? 인생……. 이성…….'
나는 쉽게 결정을 내리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았다.
이성 문제에 관해 상담을 하는 것이 잘 먹히면 가장 좋은 선택이 될 테지만, 만약 이성 문제에 관해 교수가 학생과 이야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낭패다.
그나마 조금은 안전한 쪽이 인생…….
인생에 관해서라면, 교수는 그래도 나한테 분명 하고 싶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게 답일까?
나는 이성 문제에 관해서 교수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답인 게 맞기는 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또 불안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끝없이 생각할 수는 없고, 나는 시간제한의 모래시계가 끝나기 전에 나름의 기지를 발휘해 보기로 했다.
"이스엥 문제에 관해 교수님께 상담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성, 인생, 이 두 가지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될 지에 관해 촉박한 시간 속에서 잘 판단하기가 어려워서 그 두 가지 중 어떤 걸로도 들릴 수 있게 말을 했다.
이스엥.
이렇게 말을 하면, 싸이코 교수는 그에게 더 관심이 있는 걸로 알아듣지 않을까?
이성이든, 인생이든 말이다.
'일부러 애매하게 대답하기는 했는데……. 낚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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