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다시 대면하다 (2)
* * *
교수의 물음과 함께 선택지가 나왔다.
[먼저 한다]
[나중에 한다]
나와 유소은의 수정된 계획상, 내가 먼저 상담을 한다고 하고 싸이코 교수와 함께 나가야 유소은이 혼자 남아 컴퓨터를 빼돌리게 된다.
이번 선택지는 상당히 중요한 선택지로 보였다.
만약 내가 여기서 나중에 상담을 한다고 하고 유소은을 먼저 보내버리면, 나는 유소은과 역할을 바꾸기로 한 약속을 시원하게 깨고 뒤통수를 거하게 챠버리는 가라고 할 수 있다.
'배신의 기회까지 주다니. 재미있네.'
물론 나는 유소은과 수정한 계획을 박살내며 그녀를 배신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직 내 자지에는 유소은의 보지 속에 박았던 그녀의 따스함이 남아 있기도 했지만, 그것에 앞서 서로의 목적이 수정된 전략에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굳이 배신할 이유가 없다.
나는 싸이코 교수에게 말했다.
"상담은 제가 먼저 받아도 되겠습니까?"
"음……."
내가 말을 하자, 싸이코 교수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가 내게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상담은 둘이서 조용하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한 명씩 상담하기로 하고, 자네는 다음 번에 상담을 하는 게 어떤가."
싸이코 교수는 역시나 나를 보내버리고 유소은하고만 상담을 하려고 하는 듯했다.
물론 내가 집으로 가버리면, 싸이코 교수는 유소은에게 실 바이러스를 전파시킨 뒤에 육노예로 삼으려 하겠지.
'한 교수, 이런 씨발 새끼, 역시 나를 보내고 유소은만 남기려고 하네…….'
그 정도는 예상했다.
나는 싸이코 교수에게 바로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유소은이 싸이코 교수를 부르는 게 좀 더 빨랐다.
"저, 교수님!"
유소은이 싸이코 교수를 부르자 교수는 유소은 쪽을 바라봤다.
"저 때문에 상훈이가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건 원하지 않아요, 교수님. 전 좀 시간이 많은 편인데……. 혹시 괜찮으시면, 따로따로 상담을 받고, 상훈이 먼저 상담 마치고 그 다음에 제가 혼자 남아서 상담을 드려도 될까요?"
그녀가 따로 상담을 받는 것으로 하고 자신이 뒤에 남아서 상담을 받겠다고 하자, 싸이코 교수는 음흉하게 웃었다.
"흐흐……. 이 친구 먼저 따로 상담하고, 뒤에 혼자 남아서 상담을 받겠다……."
싸이코 교수는 아마도 내가 먼저 상담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면 유소은을 요리할 생각인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싸이코 교수의 생각을 역이용할 것을 미리 짜온 우리였고 말이다.
"그것도 좋겠군. 그럼 그렇게 하지."
먹혀들었다.
그러면 이제는, 먼저 상담을 받기로 한 내가 싸이코 교수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 된다.
나는 싸이코 교수를 불렀다.
"교수님."
"음."
"시간도 늦어서 여자 혼자 밖에 있기는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소은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저하고 교수님이 혹시 잠깐 밖에 나갔다 와도 될까요? 사람도 없고 한적한데, 1층에서 음료수라도 한 잔 꼭 뽑아드리면서 상담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교수님."
나는 그렇게 명분을 깔았다.
따로따로 상담을 받을 건데 유소은을 밖에 내 놓으면 위험하니, 내가 교수님과 잠깐 음료수 한 잔 사 드리면서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명분이었다.
언뜻 생각하면 전혀 아무런 문제가 없는 명분이기 때문에 싸이코 교수는 흔쾌히 허락했다.
"음! 그러지."
싸이코 교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교수는 문 쪽으로 걸어왔다.
가는 도중에는, 앉아있는 유소은을 내려보며 한 마디를 했다.
"끌끌끌……. 자네가 유소은이지? 아주, 안전하게 있게 해 줘야지. 따로 남아서 나하고 일 대 일 상담을 할 때까지 말이야……."
싸이코 교수는 유소은의 보지에 존나 박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결코 그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유소은의 보지에 박는 것은 나뿐이기 때문이다.
나는 싸이코 교수에게 말했다.
"그럼 교수님, 잠깐 나가실까요?"
철컥
나는 싸이코 교수와 함께 나서기 위해 먼저 문을 잡고 열었다.
그런데 내 바로 뒤에서, 싸이코 교수가 내게 말을 했다.
"아, 잠깐."
나는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바로 뒤에서 싸이코 교수가 내게 말했다.
"자네, 나갈 때 저 여학생한테 휴대폰 맡겨 놓고 가게."
"예? 휴대폰은 왜……."
"요즘 젊은 친구들, 문제가 많단 말이야. 걸핏하면 녹음하고, 그걸로 인터넷에 올리기도 하고. 지금은 사적인 이야기를 하러 가는 거니까, 휴대폰은 놓고 가게."
선택지가 나왔다.
[휴대폰을 유소은에게 맡긴다]
[휴대폰을 가져간다]
폰을 두고 가라고?
폰은 나와 유소은의 연락 수단이다.
직접적인 통화는 최대한 수상한 느낌을 주지 않기 위해서 쓰지 않기로 했다.
그렇지만 유소은이 컴퓨터를 다 빼돌려서 교문까지 갔을 때, 혹은 내 쪽에서 싸이코 교수를 제대로 잡아두지 못했을 때, 이런 두 가지 상황에서 나는 진동으로만 폰을 쓰기로 했다.
그래서, 폰을 두고 갈 수는 없다.
"어차피 상담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저의 이야기가 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교수님. 그리고……."
나는 무작정 폰을 가져가겠다가 아닌, 교수에게 의심을 최대한 받지 않으면서 폰을 가져가는 방법을 택했다.
"정 염려되신다면, 전원을 꺼 두겠습니다. 제 핸드폰이 좀 비싼 거여서 맡기기는 조금 그래서요. 교수님 앞에서 끄겠습니다."
"음, 좋아. 그렇게 하게."
나는 교수의 앞에서 바로 폰을 끄는 모습을 일부러 교수에게 보여주었다.
'……. 는 페이크다. 주머니에 폰을 넣으면서, 다시 켠다.'
"가지."
"예, 교수님."
그리고, 나는 교수의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유소은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소리내지 않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다시 켠다!'
내가 이렇게 입모양을 하자, 유소은도 눈을 크게 뜨며 '오케이! 다시 켰다고!' 라고 입모양으로 받으면서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잠깐 그런 후에는 나는 싸이코 교수와 둘이서 복도를 걷게 됐다.
이제 조금 뒤면, 교수실 안에서 유소은이 컴퓨터 본체의 선을 뽑아서 달아날 것이다.
복도로 나오고 나서 잠깐 걸었을 때, 또 선택지가 떴다.
[일상적인 대화를 한다]
[공격적인 대화를 한다]
[아부한다]
[말없이 걷는다]
나는 원래부터도 최대한 싸이코 교수에게 말을 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방심하면, 싸이코 교수는 얼렁뚱땅 나와의 상담을 끝내버리고 유소은 쪽으로 가려고 할 수도 있다.
수가 틀려서 싸이코 교수를 조금 일찍 돌아가게 한 상태에서 내가 뒤에서 그를 잡고 유소은이 교수를 찌르는 것은 최후의 방책이다.
최선은 우리의 계획대로 내가 싸이코 교수를 붙잡고 있는 시간에 유소은이 컴퓨터를 빼돌려 도망가는 것이다.
나는 싸이코 교수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그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상담, 받으러 오는 학생은 많나요, 교수님? 아무래도 교수님이 바쁘시니까 쉽지는 않으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싸이코 교수는 앞을 보고 걸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학생이 원한다면 해 줘야겠지. 상담교수가 지정돼 있어도, 교수들 다 서로 웬만하면 다 봐 주는 편이기도 하고 말이야."
선택지 중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선택지들이 여러 개가 있는데, 나는 왠지 [아부한다] 선택지가 정답이라고 손을 들고 있는 것 같아 그 선택지를 고르기로 했다.
"그 상담, 저는 교수님께 꼭 받아 보고 싶었습니다."
교수는 걸으면서 내 쪽을 보았다.
"왜 난가?"
나는 철저하게 싸이코 교수에게 아부 모드로 가기로 했다.
"교수님들께 다 수업을 받아 보지 않습니까? 그 모든 교수님들 중에서, 한민국 교수님 수업이 저는 가장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을 하자, 처음에는 나와 같이 가는 것 자체가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던 싸이코 교수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끌끌, 그래? 하긴, 내가 좀 다르긴 하지. 자네 같은 인재가 있긴 하구만? 명강의를 알아보지 못하고 멍청한 수업료만 버리는 놈들이 대부분인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지금 듣는 모든 과목 수업이 다 교수님이 강의해 주시는 수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거기까지 이야기를 하니, 교수는 얼굴이 밝아지다 못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껄껄껄! 모든 수업을 다 내 수업으로 받고 싶다고? 크하하! 자네, 어쩜 그렇게 말을 재미있게 하는가?"
기뻐하는 싸이코 교수의 모습을 보고 완벽하게 내 선택이 맞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한숨을 돌렸다.
'후우, 존나 다행이다. 내 판단이 맞을 것 같기는 했지만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제대로 들어갔다.'
나는 내 유머 감각을 칭찬하는 싸이코 교수에게 말했다.
"다행입니다. 저도 교수님 강의를 들을 때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릅니다. 교수님도 저로 인해 웃으시니 너무 좋네요."
이제 싸이코 교수는 처음 나를 상당히 경계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걸어가는 동안 내 쪽을 보고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요즘 보기 드문 훌륭한 청년이야."
나와 싸이코 교수가 그렇게 걸어가는 사이, 나와 그는 복도 끝에 있는 싸이코 교수의 교수실에서 중앙계단이 있는 곳까지 거의 오게 됐다.
나는 중앙계단 쪽으로 손을 뻗었다.
"교수님, 그럼 내려가실까요?"
이제 중앙계단을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내려가서 1층에서 시간을 본격적으로 끌어가면 되는 것이다.
"음……."
그런데 싸이코 교수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중앙계단 앞쪽에 멈춰 서서는 내게 말했다.
"굳이 내려갈 필요까지 있나?"
"예?"
"과사무실이 있지 않은가."
나는 순간 당황했다.
싸이코 교수의 말이 맞다.
상담을 할 거라면, 1층 자판기 쪽보다 과사무실 쪽이 더 편할 것이다.
다행히도 싸이코 교수의 교수실에서 가까운 강의실, 혹은 창고, 이런 쪽이었다면 유소은이 교수실에서 컴퓨터를 빼서 나갈 때 문소리나 발소리 등이 들릴 수 있다.
그러나 과사무실 쪽이라면 복도의 끝과 긑이기 때문에 유소은의 소리가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래도 한 번 더 싸이코 교수에게 1층으로 내려가자고 말해 보기로 했다.
"그게……. 제가 음료수라도……."
싸이코 교수는 내 말에 답했다.
"으음, 음료수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네. 과사무실에 내가 둔 차가 좀 있을 거야. 차나 한 잔 하세."
싸이코 교수는 그렇게 다시 한 번 1층이 아닌 과사무실에서 상담을 하자고 했다.
'어떡한다?'
중앙계단 앞에서 내가 망설일 때, 선택지가 발생했다.
[1층 이동을 더 주장한다]
[과사무실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