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88화 (88/93)

〈 88화 〉 88화 귀환

* * *

해가 뜨자마자 우리는 곧바로 움직였다.

“아침은 간단히 먹자. 어차피 도시에 들어가면 맛있는 거 실컷 먹을 거니까.”

“네에에에….”

라냐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렇게 꿀잠을 자놓고도 밤을 지새운 나보다 더 피곤해 보이다니. 순수 마법사는 진짜 체력이 없구만. 아무래도 기초적인 체력단련 정도는 시켜놔야겠어.

“아침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응. 부탁할게.”

반면에 시르는 어제 그렇게나 고생(?)하고도 평소의 컨디션이었다. 하지만 어제의 그게 영향이 없지는 않은지, 나와 시선을 마주치자 순식간에 귀가 빨개졌다. 그러면서도 웃는 얼굴은 그대로 유지하는 게 대단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아니, 그냥 귀여워. 무진장 귀여워.

그렇게 시르가 준비한 아침을 가볍게 먹고 다시 타라스트를 향해 걸어갔다. 라냐는 처음엔 힘들게 따라왔지만, 저 멀리 타라스트가 보이기 시작하자 힘이 나기 시작했는지 씩씩하게 걷기 시작했다.

타르스트. 내가 이세계에서 처음으로 방문한 도시. 실제로는 고작 며칠이었지만, 체감상으로는 굉장히 오래간만에 돌아오는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는 반년 정도.

훗.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내가 이세계에 오고 아직 두 달도 안 됐는데. 아무래도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의 밀도가 워낙 짙다 보니 그런 기분이 드는 거겠지.

타라스트에 도착할 때까지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신나서 뛰어가던 라냐가 한번 넘어진 것 정도가 다였다. 얼굴과 옷에 흙을 묻히고 울상이 된 모습에 나와 시르는 즐겁게 웃을 수 있었다. 마지막에 몸개그를 하다니. 제법이야.

당연히 타라스트에 들어가는데도 문제 없었다.

“앗! 시그 님!”

“돌아오셨군요!”

문지기들은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심지어 경례까지 하는 게 완전히 상전으로 보는 눈치였다. 뭐, 그만한 활약을 했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더군다나 이들은 내가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본 자들이었다.

“그때 성벽 위에 있던 분들이군요. 무사한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저, 저희를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제가 기억력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어서요. 도시를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운 분들의 얼굴은 전부 기억하고 있죠.”

“그, 그런…!”

내 말에 문지기들은 눈물이라도 흘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감격했다. 고작 이 정도 말에 이 정도로 감격하다니. 지구보다는 훨씬 감성이 살아있는 세계다.

우리는 문지기와 병사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도시로 들어갔다. 검문? 내가 그걸 왜 받아? 오히려 병사들은 내가 불편한 부분이 없는지 세세하게 신경 썼다. 도시의 영웅을 대우하는데 조금의 부족함이 없는 대우였다.

나는 그것을 거부하거나 겸손을 떨지 않았다. 이런 대우가 편하기도 했고, 선행에 따라오는 보답을 거부할 정도로 내가 구도자인 건 아니거든. 그저 이런 보답을 주목적으로 선행을 하지 않을 뿐이다.

라냐는 그들의 반응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라리레스트의 일이 퍼지진 않았나 보네요.”

“거리가 거리이니까.”

“그곳의 일까지 전해지면… 시그 님의 명성이 얼마나 치솟을지 기대됩니다.”

두 사람도 내가 받는 대우에 의문을 품지 않았다. 이게 당연하니까. 오히려 악신의 추종자들을 박살 낸 일이 퍼졌을 때 내가 받을 대우를 더 신경 썼다.

“와. 생각해보니 진짜 엄청난 일들이 있었네요. 잊힌 신들의 추종자들이 쳐들어오지 않나. 의뢰를 받아서 간 도시엔 악신의 추종자들이 있지 않나. 이게 영웅의 운명 같은 걸까요?”

“나는 운명 따윈 믿지 않아.”

“……네?”

반사적으로 나온 대답에 라냐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르도 의외였는지 입술을 오므리며 당황했다. 귀여워. 그건 그렇고 오해는 풀어야겠군.

“운명이 존재하지 않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내가 그 운명이라는 것을 굳이 따라줄 필요가 없다는 거지. 내가 가는 길은 오로지 나 자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야. 찾아오는 운명이 있을지언정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나의 선택에 달렸어.”

“우와. 무지 오만한 말인데, 시그 님에게는 어울리네요.”

“후후후. 역시 시그 님이십니다.”

라냐는 감탄 반 어이 반의 표정이었지만, 시르는 완전히 이해했는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시르는 이해하겠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그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모험가 길드에 도착했다. 고작 4일 만인데 엄청 오래간만에 보는 기분이군. 두 사람도 마찬가지인지 코앞까지 다가온 길드를 보고 감회가 남다른 표정이었다.

“단순한 호위 의뢰가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덕분에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전부 시그 님의 공입니다.”

“그렇지. 그거면 됐어.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는 거잖아?”

내 말에 두 사람은 마주 웃어주었다. 정말 좋은 인연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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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마어마한 모험을 하고 왔더군.”

길드에 들어온 우리는 다른 모험가들의 환대를 받았다. 라리레스트에서의 일까지는 전해지지 않았지만, 몬스터 군단을 물리친 얘기는 벌써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에 도시를 구한 것도 모자라서, 덮쳐온 몬스터 군단까지 무찌른 모험가! 열광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나는 그들에게 겸손한 척하면서 한껏 잘난 척을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2층에서 쏜살같이 내려온 유리에게 붙잡혀서 길드장실로 끌려가고 말았다. 당연히 시르와 라냐도 함께였다.

대체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을 때, 복잡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던 유리가 내뱉은 말이 저 말이었다.

아. 그런 거군. 나는 히죽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어쩌다가 악신의 칼날들과 싸우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후우. 그래도 그대 덕분에 라리레스트가 무사할 수 있었어. 시그.”

유리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그 감정들을 전부 덮어두고 내게 감사를 표했다. 이런 점이 정말 마음에 든다니까.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나한테 걸린 게 놈들의 불행이자 라리레스트의 행운이었죠.”

“훗. 그런 말도 그대가 하니 전혀 오만하게 들리지 않는군.”

조금 전과는 달리 어딘가 자랑스러워하는 미소를 지은 유리는 이내 진지한 얼굴로 돌아왔다.

“천신교 측에서 간략한 얘기는 전달받았다. 용사와 꽤 깊은 연이 생긴 것 같더군?”

“깊은 연은 무슨. 오해할 소리 하지 말아요. 그저 자그마한 가르침을 줬을 뿐이죠.”

“…부외자가 용사를 가르친 시점에서 보통 관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외자란 천신교도가 아닌 자를 말하는 거겠지. 에밀리아는 아직 약하다. 교단 내에서도 그녀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수두룩하겠지. 그런데 천신교도도 아닌 내가 용사를 가르친 것은 여러모로 따져볼 만한 일이다.

뭐, 알면서도 저지른 거지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멋대로들 떠들라고 그러세요. 그게 문제가 되는 순간 천신교는 나하고 척을 지게 되는 거니까.”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그대는 그런 사람이니까.”

유리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마치 댁이 나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들리잖아. 그럭저럭 친구라고 부를 만한 관계이기는 하지만, 나를 잘 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 정도일까?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런 말을 들으면 질투를 내비쳤었는데.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중증이네.

“천신교도 나쁜 의도로 그러는 건 아닐 거다. 그들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 아니야. 종교 단체가 으레 그렇듯이 정치적인 이유로 움직이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순전히 호의라고 생각한다.”

“걱정마시죠. 나는 세상에 100%의 선의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선의에 계산적인 면모가 섞여 있다고 마구마구 실망하는 고결한 이상주의자와는 거리가 있거든요.”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군.”

유리의 쓴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나는 훗 하고 웃었다.

“내 고향엔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있어요.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알아서 한다는 거죠. 유리도 그런 기색이 보이니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말아요. 최소한 나는 유리가 걱정할 사람이 아니죠.”

“…훗. 그런가.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어. 그대는 나의 은인이기도 하니까.”

이 세계는 아직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만나지 않아서 참 좋다. 지구도 은혜를 모르는 인간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비율상 이곳보다는 많으니까. 그리고 은혜를 입으면 그걸 확실히 보답하려는 것도 이세계의 감성이겠지. 전체적인 도덕 수준은 지구보다 떨어져도 ‘의리’에 관한 부분에서는 오히려 현대보다 나은 부분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가 지구보다 좋은 건 이니지만.

방법을 찾아야지.

“마음은 감사히 받죠. 그런데 할 얘기는 그것뿐인가요?”

“아니. 확실히 다른 용무도 있다.”

이제야 본론인가. 라리레스트에서의 일만으로 부르기에는 유리가 그렇게 배려가 없는 사람은 아니지. 여독을 풀어도 모자랄 판에 자기 궁금증을 풀자고 모험가를 소환하는 무도한 자는 아니다. 유리는 미안한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후우. 정말 미안하군. 그대들도 여러모로 피곤할 텐데, 이쪽의 사정으로 이렇게 불러서….”

“뭐, 됐어요. 그게 모함가라는 거죠. 그리고 사실 그렇게 피곤하지도 않아요. 그렇지?”

“네. 시그 님.”

“저, 저도 괜찮습니다!”

동의를 구하는 말에 시르는 방긋 웃었고 라냐는 진뜩 긴장했다. 뭘 그리 긴장하고 있는 거냐. 길드 마스터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보다 훨씬 대단한 내 옆에서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으면서! 라냐의 태도에 약간 삐친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렇다네요! 자아! 그럼 유리! 4일간 폭풍과도 같은 모험을 보내고 우리를 숙소에도 안 보내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부른 이유를 실토하실까요!”

“…왜 갑자기 기분이 상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례한 짓을 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 정말 미안하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리를 보고 라냐는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나는 녀석이 입을 열 틈을 주지 않고 당당하게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좋아! 받아들이죠! 그럼 이걸로 이 얘기는 끝! 본론이나 들어가죠.”

“…그대는 정말 종잡을 수가 없군.”

유리는 옅게 웃었다. 그래. 차라리 저렇게 웃는 편이 낫지. 나는야 웃음 전도사 시그. 여자를 울리는 건 침대 위에서만 하는 남자지. …이건 절대로 입밖으로 내지 말아야 겠다. 생각만 했는데도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구리네.

내가 머릿속으로 온갖 개드립을 떠올리고 있을 때, 마음이 정리 되었는지 유리가 초연한 태도로 말했다.

“잊힌 신들의 사도들이 토론토라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운명이라는 게 있긴 있나 보다.

허. 시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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