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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천재가 가면-83화 (83/93)

〈 83화 〉 83화 귀갓길

* * *

이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가 아니라 굳은 각오가 담긴 눈동자를 보면서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떠올렸다.

길게 떠올릴 것도 없었다. 천신교의 신전으로 가던 도중 나눈 대화로 인해 분위기는 경직되었다.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라냐의 눈빛을 제외하면) 먼저 달려나간 우리를 따라잡은 네 사람은 기껏 따라잡아 놓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도 리에스와 파리에는 여러모로 생각할 게 있는지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피리우레스는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이내 한탄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용사파티에게 쓸데없는 간섭하지 말라는 거겠지. 하지만 대놓고 불만을 말하기엔 내가 해준 조언이 틀린 것도 아니거든. 오히려 앞으로도 노려질 용사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아주 귀중한 조언이다. 확신해.

그렇게 즐거운 두 명과 침묵하는 네 명은 신전에 도착했고, 미리 도착한 에밀리아와 다른 교단의 사람들, 공직자들의 환대를 받았다. 그제야 분위기가 풀려서 다들 인사를 받아주었지만, 표정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그런 부분은 눈치가 좋았던 에밀리아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런 걸 물을 때가 아니라는 것은 알아서 당장은 넘어갔다.

그 뒤에는 별로 말할 것도 없는 재미없는 시간이었다. 천신교에서 조사결과를 얘기하자 각 교단의 사람들은 미쳐 날뛰었고 자신들에게도 불똥이 튈까 두려운 공직자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었다. 실제로 일부 사제들은 자리에 참석한 공직자들도 공범으로 보며 무시무시한 눈빛과 말을 쏟아 냈지만, 나와 에밀리아가 말리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나와 에밀리아는 악신의 칼날을 토벌한 경력이 있는 자들. 그 자리에서 가장 발언력이 강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우리 둘 다 대화를 이끌어 나가지는 않았다. 에밀리아는 그런 쪽에는 관심도 재능도 없었고 나는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너무 높은 명성과 직위는 오히려 발목을 잡는 법. 적당하게 교통정리를 하면서 내 존재감만 박아 넣는 거로 충분하다. 그렇게 적당 적당하게 조율한 결과 2시간 만에 모든 회의를 끝낼 수 있었다.

애초에 악신의 추종자들의 스파이었던 자들은 극형.

그자들에게 포섭당해 적극적으로 협조한 자들도 극형.

협조하긴 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던 자들은 재산의 99%를 몰수하고 팔이나 다리 중 하나를 잘리는 중형.

악신의 추종자들에게 협력하는 줄 몰랐던 사람들은 재산의 50%를 몰수하고 구금 3년.

하나 같이 지구였으면 허용될 수 없는 형벌들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선 이 정도만 해도 상당히 관대한 처벌이었다. 본래는 마지막 유형도 극형이 마땅했지만, 에밀리아의 설득에 저 정도 형벌로 그친 것이다.

나? 내가 왜 저들을 실드쳐? 실드로 치면 모를까.

그 상단의 직원들처럼 진짜 무고한 사람들도 아니고. 알고 협력했든 모르고 협력했든, 사악한 행위에 가담한다는 것부터가 악인이라는 증거다. 내가 직접 처벌할 필요는 없지만, 이 세계의 법률에서 구해줄 마음이 들지 않는 사람들. 그렇다면 이 세계의 법률로 처벌받으면 그만이다.

아. 그래. 상단직원들처럼 엮이기는 했지만, 무고한 자들은 전부 무죄 방면이었다. 에밀리아는 모르고 협조한 자들에게도 동정심을 발휘했지만, 나는 진짜로 무고한 사람들만 옹호했기 때문에 내 의견은 훨씬 수월하게 받아들여졌다.

열심히 진땀을 빼며 사제들을 상대하던 에밀리아가 조금 불쌍하긴 했지만, 자기가 선택한 선의의 길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증명해야 했다.

선의는 정말 좋은 것이고 세상을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원동력이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이기는 힘이 아니다.

반드시 이겨야 하는 이유다.

이것을 착각해서 선이 패배하는 사례를 가지고 악이 옳다거나 선은 쓰레기라는 식의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과를 착각하는 것은 꽤 흔히 있는 일이다. 굳이 비판할 필요도 없는 작은 착각이고 사회를 지탱하는 선에 타격을 주기엔 미미한 오해다.

어쨌든 에밀리아는 자신이 용사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게 증명했다. 사건의 뒤처리를 위해 모인 사람들은 조금 불만이 남기는 했지만, 그 결과는 다들 이해하고 그렇게 처리하기로 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결과는 없는 법. 무엇보다 나로서는 괜히 이 문제를 오래 끌고 싶지 않았다.

바쁘다고. 빨리 타라스트로 돌아가고 싶어. 이계형 던전 꼭 가야 한다고. 진인사대천명. 내가 여기서 할 일은 다 끝냈으니 나머지는 여기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지? 뻔뻔하고 염치없게 구는 사람을 나는 제대로 상대하지 않는다. 그래도 되는 힘이 있고 명성이 있고 능력이 있다.

그 결과 나는 그 회의에서 우리 일행이 내일 아침 일찍 이 도시를 떠나는 것을 모두에게 이해시킬 수 있었다. 두 명 정도가 끈덕지게 들러붙으려고 했지만, 야천도를 슬쩍 보여주면서 조용히 설득하자 이해해줬다.

역시 대부분의 문제는 대화로 해결할 수 있다니까!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만 얻어내면 되었기 때문에 도중부터 아예 간섭하지 않았고, 용사 에밀리아의 분투만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 만에 회의를 끝내고 우리는 신전을 떠나려 했지만, 피리우레스의 간곡한 부탁에 저녁은 먹기가기로 했다. 본래라면 그런 부탁은 무시했었겠지만, 나도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줬다.

그리고 저녁 식사 전까지 신전을 구경하고 시르와 라냐와 함께 즐겁게 떠들기를 한 시간. 잔뜩 굳은 얼굴의 에밀리아가 찾아왔다.

에밀리아는 잠시 할 얘기가 있다고 신전에 마련된 훈련장으로 와달라고 부탁했고, 나는 올 게 왔다고 생각해서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훈련장에 오자 에밀리아는 검을 뽑고 지금처럼 외친 것이다.

“시그 니이임!!! 대련을 신청합니다아아아!!!!!!!”

묘한 고성이 웃겼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 웃음을 참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소위 말하는 강자의 미소. 귀여운 하수가 까부는 것을 여유롭게 받아주는 미소였다. 나는 강자의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바, 받아주시는 겁니까?”

내가 너무 흔쾌히 수락하자 정작 기세 좋게 대련을 신청한 에밀리아가 당황해서 되물었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대련이 뭐 그리 대수라고.”

“…그렇죠. 어디까지나 대련이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납득 못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자기는 진지한데 나는 가볍게 받아들이는 것 같아서 그렇지? 맞아. 가볍게 받아들이고 있어. 다만, 모욕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 또한 그녀를 위한 거다.

후우. 정말 나는 너무 착하다니까.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 정도로 서비스를 해주다니! 지구에서도 이 정도의 서비스를 무료로 해준 사람은 없었어.

네가 올바르고 정의로운 용사라서 이 정도나 해주는 거나. 에밀리아. 그러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성장해서 부디 오래오래 꺾이지 말고 살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네 자존심을 좀 많이 뭉개버릴 생각이거든.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야천도를 풀어서 시르에게 건네주었다.

“시르. 미안하지만 잠시만 맡아줘.”

“알겠습니다. 시그 님.”

“에, 에? 저기, 왜 갑자기?”

이신전심이라고 시르는 내가 뭘 하려는 바로 알고는 옅은 미소를 띠었지만, 아직 이해도가 낮은 라냐는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나는 피식 웃어주는 거로 대답을 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훈련장의 가운데로 이동했다. 이미 얘기가 된 건지, 아니면 훈련 시간이 아닌 건지 텅 비어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 사이즈의 훈련장 가운데서 나는 팔짱을 끼고 섰다.

그것을 라냐와는 다른 의미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보던 에밀리아는 조금 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얼굴을 확 붉혔다. 내게 내밀은 검날이 부르르 떨렸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건지….”

“보다시피. 대련 준비잖아?”

팔짱을 낀 채로 어깨를 으쓱한 나는 에밀리아와 그런 그녀를 걱정하면서 나를 어처구니없어하는 시선으로 보고 있는 그녀의 동료들을 봤다.

내 시선을 받자 두 사람은 움찔하더니 살짝 시선을 피했다. 그녀들은 내 예상대로 내 말을 어떤 식으로든 에밀리아에게 전했고, 그 말에 에밀리아는 대련을 신청하러 온 것이다.

뭐, 저 녀석들 성격상 나쁘게 말하거나 왜곡하지는 않았을 거다. 오히려 반성하자는 의미 아니었을까? 어떤 포인트에 에밀리아가 꽂혀서 덤벼오는지는 알겠다. 그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건 굳은 각오지 적의가 아니다. 실력 부족이라는 말에 자존심을 자극받은 것이다.

그녀도 머리로는 알 거다.

내가 그녀보다 압도적인 강자라는 걸. 하지만 사람이란 무릇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에밀리아에게는 용사 일을 하기엔 너무 약하다는 말이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래도 음습한 마음 없이 정면에서 대련을 신청한 것은 마음에 든다. 그것도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에서 신청을 하고 싸우는 장소도 사람이 없는 것도 마음에 든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이것은 우리들만의 문제로 끝내겠다는 소리니까.

좋아. 좋아. 용사라면 당연히 이 정도 인성은 기본에 자존심도 가지고 있어야지. 네가 내가 생각하던 그대로의 인간상이어서 정말 다행이야. 에밀리아. 귀여운 녀석.

나는 그렇게 에밀리아를 칭찬하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지만, 에밀리아는 그게 강자의 오만으로 비쳤나 보다. 그녀는 발끈하면서 외쳤다.

“맨손이라니…! 검을 들어주세요!”

“착각하고 있구나. 에밀리아.”

“네…?”

내 단호한 말에 에밀리아는 다시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순진한 녀석. 그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자주랑이라는 녀석을 알아?”

“…그, 이름은 들어본 것 같기도 하네요.”

대련을 신청하고 맨손이라는 것에 화를 냈으면서도 대답은 꼬박꼬박 공손하게 한다. 역시 성실한 녀석이야. 나는 시선을 돌려서 멍하게 이쪽을 보는 파리에를 봤다. 시선을 마주친 녀석은 움찔 놀랐지만, 내 뜻은 알았는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자주랑. 본명은 빌쟈크. 또 다른 별명은 폐륜권사. 12년 전에 자신의 스승과 사제들을 모조리 살해한 파산절해류의 권사. 그 뒤 갖은 패악질을 벌이다가 갑자기 실종되었어. 그게 10년 전이야.”

“아…! 맞다! 그런 악한이 있었죠!”

파리에의 설명에 에밀리아도 떠올렸는지 깜짝 놀랐다. 10년 전이면 13살 때이고 10년 동안 소식이 없었으면 바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지.

“그런데 갑자기 그 악한의 얘기는 왜 꺼내신 건가요?”

조금 전까지의 진지한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진 에밀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분위기 전환이 빠른 아이야. 나는 피식 웃으면서 대답했다.

“왜긴 왜겠어. 내가 그 놈이랑 며칠 전에 한판 했으니까 그렇지.”

“네?! 그 악한이랑요?!”

“자주랑이 다시 나타났다고요?!”

“처음 듣는 얘기인데….”

세 사람의 반응을 즐기면서 나는 훗하고 웃었다.

“그래. 그것도 그냥 싸운 게 아니야. 도시의 운명을 결정 짓는 대단원이었지.”

“도시의 운명을…! 그, 그곳에서도 이 도시와 같은 싸움이 있었다는 건가요!”

“규모나 적의 수준은 여기보다 더 높았어. 왜냐면 자주랑은 악신의 칼날 세 명을 합친 것보다 강했거든.”

“…………!!!”

세 사람이 눈을 부릅떴다. 특히 파리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했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는 그 자주랑을 맨손으로 이겼다.”

“………….”

대답은 없었다. 착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에밀리아는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나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로 에밀리아를 봤다. 굳은 의지를 담은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다.

“그래도 내가 널 모욕하는 것 같냐?”

“………죄송합니다.”

허리를 꾸벅 숙여서 사과한 에밀리아는 다시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것을 보고 리에스와 파리에가 숨을 삼켰다. 나는 각오서린 에밀리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팔짱을 풀었다.

“선수는 양보하지. 와바.”

“…가겠습니다!!!”

힘찬 기합과 함께 에밀리아가 달려들면서, 용사와의 대련이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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