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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천재가 가면-82화 (82/93)

〈 82화 〉 82화 귀갓길

* * *

에밀리아는 이미 악신의 칼날을 하나 참살한 전적이 있다. 놈들에겐 현재의 용사 중에 가장 위협적이고 복수하고 싶은 대상일 것이다. 그런 그녀를 제거하기 위해 악신의 칼날 셋에 악마와 키메라까지 동원하는 건 그렇게 이상하지 않다. 그래도 과잉전력이지만. 에밀리아를 확실하게 살해하고 이 도시까지 쑥대밭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리 과하진 않다.

문제는 어떻게 에밀리아를 이 도시로 끌어들이냐다.

아무리 준비를 해놓아도, 그걸 천년만년 준비 상태로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최대한 타이밍을 맞춰서 계획을 시행하려면 에밀리아의 행적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녀를 최적의 시기에 이 도시로 불러들여야 했다.

즉, 천신교에 놈들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된 자가 있다. 그것도 용사를 움직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 중에. 천신교의 고위층에 악신의 추종자가 있다.

피로우레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얼굴빛이 흐려졌다. 내가 그 사실을 짐작하고 있다는 것도 그가 표정이 좋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외부자에게 본인이 속한 교단의 치부를 들킨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흠. 그래서 내가 용사가 아닌데도 기꺼워하는 건가? 타 종교의 용사가 본인 교단의 치부를 아는 것보다 아예 관련 없는 사람이 아는 쪽이 더 낫긴 하겠지. 이래서 정치를 해야 하는 사람은 피곤하다니까. 뭐, 그렇다고 내가 그걸 굳이 생각해줄 필요는 없지.

심술이나 부릴까.

“그거참. 천신의 인도군요. 제가 없었어도 놈들의 암약 정도는 에밀리아가 해결할 수 있었겠죠.”

“…허허허. 시그 님이 없으셨으면 힘들었을 겁니다.”

움찔했던 피리우레스는 약간 눈을 치켜뜨면서 대답했다. 놀리지 말라는 건가. 뭐, 굳이 계속 기분 나쁘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나는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가요. 하긴, 악신의 칼날 셋은 너무 많긴 하죠. 저도 놈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으면 많이 힘들었을 겁니다.”

거짓말이다. 맨몸이면 확실히 고전했겠지만, 야천도만 있었어도 여유로 박살 낼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자주랑은 존나 쎈 놈이었어. 다음번에 만나면 맨주먹이 아니라 야천도로 조져야지.

“네. …그것들이 셋이나 있던 것은 정말 위험했습니다. 이곳의 영주도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피리우레스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그는 이 도시, 라리레스트의 영주 알레르스크 자작을 대놓고 의심하고 있었다.

뭐, 당연한가? 북부와 중부를 잇는 중요한 요충지인 도시에 악신의 칼날이 셋이나 잠복하고 그가 파견한 감시관 중 하나가 놈들을 돕고 있었다. 이곳 고위 공직자 중에 협력자들이 몇 명 있었다는 것도 영주를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각 교단의 성기사들과 사제들이 자작의 성으로 출발했습니다. 그에게 죄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적어도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는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본래 아랫사람의 잘못은 윗사람이 책임지는 법이죠.”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그 감시관은 알레르스크 자작의 충신이더군요. 연관이 없다면 더욱 이상한 일일 겁니다.”

아예 확신하고 있군. 알레르스크 자작은 뭐가 됐든 간에 된통 당할 것이다. 뭐, 그건 그와 교단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이니 내가 신경 쓸 바는 아니다. 확인할 건 있지만.

“이번에도 억울한 사람은 발생하지 않겠죠.”

“…물론입니다.”

피리우레스는 조금 망설이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할 수는 없나 보군. 자작을 조사하러 간 성기사나 사제가 무고한 사람들까지 조지지 않으리라 확신할 수 없겠지.

나도 거기까지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이렇게 웃고 있는 이상 피리우레스는 그들에게 한마디 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역시 시그 님은 상냥하십니다.”

“…확실히, 영웅의 풍모가 있으세요.”

뒤를 따라오던 두 사람의 말에 나는 훗 웃었다.

“내가 대단하긴 대단하지. 아니, 진짜 대단하다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도 보기 좋습니다.”

“솔직히 조금 재수 없기는 한데… 그만한 실적이 있으니 또 뭐라 하기 힘드네요.”

“아니, 이미 뭐라 하고 있잖아. 재수 없다니. 상처 받거든?”

“이걸로 상처 받을 사람이 아니잖아요.”

“시그 님의 정신은 굳건하십니다.”

“…시르 님은 정말 한결같네요.”

평소와 같은 잡담을 주고받자 피리우레스는 약간이지만 부러움이 담긴 눈으로 나를 봤다. 하긴, 사제인 그로서는 누릴 수 없는 일상이다. 아무리 신에게 몸과 마음을 맡겼어도 부러움을 느끼는 것또한 인간. 그런데 이 자리에 이 모습을 부럽게 보는 사람은 더 있었다.

“에밀리아 얘는 왜 혼자 간담….”

“걔가 안 그런 적이 있었어요? 언제나 먼저 달려나가서 우리를 곤란하게 만드는 아이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이 분위기에 어떻게 끼어드냐고.”

푸념을 늘어놓은 것은 에밀리아가 버리고 간 그녀의 동료들이었다. 큰 키와 그에 어울리는 체격, 커다란 가슴과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포니테일의 금발 검사 리에스. 그녀와 반대로 작은 키와 체구에 등까지 오는 푸른색 생머리의 사제 파리에.

에밀리아의 동료들이다.

그녀들은 오랜 친구의 돌발 행동에 한탄하면서 우리의 대화를 부럽게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나와 시르의 관계를 아주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에밀리아와 동년배이니, 이제 23살. 그동안 이성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나는 그들의 여정을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 보이는 감정만으로도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래. 본래 용사의 동료란 용사 때문에 죽도록 고생하는 역할이지. 고전적이다.

하지만 나는 굳이 그녀들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에밀리아 때문에 시르에게 눈초리를 받았는데, 굳이 나서서 말을 나눌 필요는 없잖아? 나는 이런 식으로 연인을 화나게 만드는 타입이 아니다. 이번이 첫 연애지만!

그래도 저대로 두는 것도 조금은 불쌍하군. 앞으로의 일도 있고… 하고 싶은 말도 있으니. 뭐, 지금 정도는 약간의 눈초리를 감수해도 되겠지.

“두 사람은 에밀리아의 오랜 친구죠? 옛날부터 저랬나요?”

“예?! 아, 흐, 흠! …네. 맞습니다. 에밀리아는 어릴 때부터 저런 아이였습니다.”

“…네. 예전부터 한결같은 아이죠.”

내가 말을 걸자 리에스는 한껏 당황하더니, 정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파리에는 그것을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보다가 이내 싱긋 웃고는 평범하게 대답했다. 대충 어떤 성격인지 알겠다.

나는 슬쩍 시르의 눈치를 봤지만, 다행히 불쾌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부터 계속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거는 것에 아무런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걸까? ……아. 지금 공처가라는 단어가……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끔찍한 상상을 떨쳐내고 대화를 이어나갔다.

“긴 시간 동안 한결같은 것은 장점이면서 단점이죠. 두 분께서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셨겠군요.”

“알아주시는 겁니까! …아, 아니. 죄송합니다.”

“…어휴. 네. 여러모로 고생이 많았죠. 그래도 고생스러운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에요.”

갑자기 감격하며 오버하려던 리에스는 뒤늦게 부끄러움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걸 한심하게 바라보며 파리에는 빙긋 웃었다.

“에밀리아 덕분에 저희는 아름다운 광경도 많이 볼 수 있었으니까요.”

“그건 틀림없는 장점이죠. 용사에 어울리는 성품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완벽하지 않을 뿐.”

“…완벽이라면?”

부끄러워도 궁금한 건 참을 수 없었는지 리에스가 질문했다. 나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대단한 얘기는 아니야. 저돌적이고 일견 생각 없어 보이고 단순하지만, 용감하고 정의롭고 상냥하지. 그녀의 행동에 뜻하지 않게 고생하는 일도 있지만, 올곧은 일을 할 수도 있겠지. 그건 나보다는 너희가 더 잘 알지?”

자연스럽게 반말을 했지만, 거기에 놀랄지언정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정말 용사다운 성품이야. 그래서 위험해. 세상은 정의감과 선함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도 잔뜩 있으니까. 그렇다고 성격을 고칠 수도 없지. 용사니까. 용사다운 일을 하는 게 뭐가 문제겠어?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이지.”

거기까지 말하고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파리에와 리에스는 진지한 얼굴로 내 말을 듣고 있었고, 라냐와 피리우레스는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내 저의를 의심하고 있었다.

오로지 시르만이 내 의도를 알겠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 보답하듯이 나도 웃으면서 말했다.

“너희들이 지켜줘야지. 저 바보같이 정의로운 용사님을 지켜줄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야지. 이번에 일어난 일이 너희들에게 찾아와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져. 너희도 에밀리아도. 너무 약해빠졌다고. 그래서 용사 할 수 있겠어?”

“………우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을 때, 라냐의 입에서 감탄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가 튀어나왔다. 다른 사람들의 표정도 대동소이했다. 특히 진지하게 내 말을 듣던 두 사람은 난데없는 폭언에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이었다.

크케케. 내가 흔해 빠진 격려를 할 줄 알았냐? 뭐, 폭언인 건 둘째치고 말에 거짓은 없다. 에밀리아든 이 두 사람이든, 전부 약했다. 셋이서 힘을 합치면 악신의 칼날 한 명은 충분히 이길 수 있겠지만, 두 명이면 백중지세고 세 명이면 필패다.

여기에 놈들이 준비하던 악마와 키메라까지 달려든다면? 완벽한 오버킬. 놈들은 정말 철저하게 천신교의 용사파티를 전멸시킬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걸로 끝일 리도 없지.

……뭐, 이제는 얘네보단 내게 집중하겠지만. 지금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그에 대한 짜증이 조금은 있었다. 대신해서 어그로를 끌게 되었으니 이 정도 쓴소리는 충분히 할 수 있지.

아니, 애초에 이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다. 지금처럼 약한 채로 방심하면서 살다간 나중에 후회하게 될 테니까.

나는 얼이 나간 두 사람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런 얼빠진 표정 그만 짓고. 뭐, 본인들은 지금 수준으로도 또래에서 상대할 자가 없다고 생각해서 만족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볼 때 너희는 한참 멀었어. 아직도 더 강해질 여지가 있다고. 에밀리아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제대로 단련 좀 해봐. 재능이 아깝다. 아까워.”

“……그, 그렇습니까?”

“……그 부분에만 반응하다니. 참.”

약간 곁들인 칭찬에 반응했던 리에스는 파리에의 차가운 시선에 곧바로 침몰했다. 그리고 파리에는 불만을 감추지 않고 나를 올려보며 말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지만 약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네요. 저희는….”

“약해.”

그녀의 말을 냉혹하게 끊으면서 나는 피식 웃었다. 얼핏 겉으로는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 가장 다혈질 기질이 강한 파리에는 울컥하면서 반박하려고 했지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없었어도 너희들이 살아남았을까?”

“읏……!”

파리에는 나오려던 말을 삼키고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에는 내 도발적인 말투에 곧바로 반박이 나왔지만, 냉정한 현실을 알려주자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다혈질 기질이 가장 강하지만 동시에 냉정하고 이성적인 면모도 가장 강하기에 나올 수 있는 반응이었다. 그녀라면 놈들이 잠복하고 있던 이유가 자기네를 노리기 위한 것도, 그 전력을 자신들은 감당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도 그대로 인정하긴 싫었는지 말을 쥐어짜냈다.

“그, 그건 해보지 않으면….”

“그래. 살 수 있었겠지. 너희들은.”

“………!”

그것을 나는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리고 내 말뜻을 깨닫고 파리해진 파리에와는 달리 대화를 따라오지 못하는 리에스를 보면서 말했다.

“에밀리아는 동료들만이라도 살리려고 했을 테니까.”

“………!”

그제야 리에스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닫고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렇게 머리가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이 정도로 말했으면 모를 리가 없겠지.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내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던 시르는 제외하고 라냐와 피리우레스는 놀라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그래.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이 두 사람을 대화로 끌어들인 이유기도 하고.

나는 비웃음은 조금도 담기지 않은 상쾌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강해져. 소중한 용사님을 지키고 싶으면 말이야.”

그리고 이 이상 할 말이 없다는 태도로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먼저 걸어갔다. 그 뒤를 시르가 웃으면서 따라왔다. 그녀는 조금 발걸음을 빨리해서 내 옆에 서더니 내 손을 살짝 잡았다. 그리고 나를 올려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시그 님은 짓궂으십니다.”

“피차일반이네요.”

우리는 뒤늦게 뒤를 따라오는 다른 사람들을 보고 피식 웃고는 손을 잡고 걸어갔다. 라냐가 무슨 욕을 한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우리 착한 라냐가 그런 심한 욕을 할 리가 없잖아?

그리고

“시그 니이임!!! 대련을 신청합니다아아아!!!!!!!”

굳은 얼굴로 검을 빼들고 외치는 에밀리아를 보면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정말이지.

세상이 내 의도대로 움직이는 건 정말 즐거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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