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80화 용사 등장
* * *
자아. 우선 변명을 좀 해보겠다.
천신교의 용사. 에밀리아의 무지성 돌진 포옹을 내가 어째서 피하지 못했는가?
피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것도 아니었고, 현묘한 기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말 그대로 빠르게 달려와 무지성으로 날린 포옹에 불과하다. 단순한 물리적인 형상만 보면 피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는 피하지 못했을까?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인 게 첫 번째.
시르의 손을 꽉 쥐고 있어서 움직임이 제한된 게 두 번째.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용사를 보고 당황한 게 세 번째.
그 용사에게서 압도적인 호의를 느꼈던 게 마지막이다.
…요컨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움직임이 제한 되고 어리버리 타다가 포옹을 당했다는 소리다. 무엇보다 이게 공격이 아니라 호의가 넘치는 행동인 게 결정타였다. 나는 악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호의에는 둔한 편이라서…….
뭐가 됐든 변명이다만.
“…………흠.”
그러니까 그런 싸늘한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줘! 시르!
그렇게 애원하고 싶은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두를 경악시켰던 천신교의 용사는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천신교의 용사! 에밀리아 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시그 님!”
“…아, 예. 잘 부탁드립니다.”
“편하게 대해주세요! 시그 님 같은 분께 존대를 들을 수는 없는 법! 저보다 연상이시기도 하고요!”
“……그래. 그러지.”
환하게 웃는 용사를 보고 머리가 지끈 아파서 이마를 짚었다. 그런 나에게 라냐가 동정 가득한 시선을 보내는 게 더 뼈아팠다. 자기는 아까부터 이 자리에 적응 못 해서 벌벌 떨고 있었으면서! 누가 누굴 동정해!
하지만 자리가 자리다 보니 그런 소리는 못 하겠다.
이곳은 천신교 사람들이 아예 전세를 내버린 고급 레스토랑.
여관에서의 충격적인 만남 이후 우리는 당황 속에 용사의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왔다. 우리가 아직 점심을 먹지 못했다는 소식에 용사는 아주아주 기뻐하면서 같이 식사를 할 수 있게 해준 천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는데, 그 기도문에 나를 찬양하는 대목을 넣은 부분에서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얘 왜 이렇게 눈을 빛내는 거야? 왜 이렇게 텐션이 높아? …왜 이렇게 호감도가 높은데? 이해가 안 되네. 나하고 상성이 안 맞는 인간이다!
어쨌든 용사와의 과감한 행동과 그걸 보조하는 고위 사제들의 농간에 우리는 용사 일행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본래 이런 걸 거절해야 하는 내가 당황한 것도 있었고, 애초에 용사의 돌발 행동을 막지 못한 이상 이런 전개가 그렇게 나쁜 것도 아닌 것도 있어서 무리해서 거부하진 않았다.
……시르의 기분이 상한 게 가장 큰 문제지만. 괘, 괜찮을 거야!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몇 번이고 확인했으니까! 지금 잠깐만 저럴 뿐이지, 결국 용서해 줄 거다! …젠장. 이러니까 쓰레기 같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껴안은 건 용사지만, 그걸 허용한 건 나니까! 내 잘못도 분명히 있다!
나는 우울한 마음을 감추고 시르와 라냐의 각기 다른 시선을 받으며 용사를 제대로 살펴봤다.
허리까지 오는 붉은 머리를 뒤로 묶은 용사는 아직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소녀였다. 겉보기만 보면 라냐와 비슷한 나이로 봐도 무방한 외모.
에메랄드가 박힌 것 같은 초록색의 커다란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고, 새하얀 피부와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은 미소녀라 불려야 마땅한 조형이었다.
붉은색 머리카락도 묘하게 윤기가 나고 있어서, 격한 전투를 치르는 전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갑옷도 기능미보다는 화려함을 중시하다 보니 게임이나 판타지 만화에서 나올 법한 모양새였다. 내 취향은 아니야.
즉, 종합적으로 전통적인 용사보다는 아이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뭐, 실제로 이 세계의 용사는 아이돌과 비슷한 일들도 많이 한다. 책에서 봤을 뿐이지만. 말이 좋아 용사지 실제로는 각 교단의 선전 요원이나 다름없다.
물론, 그렇다고 외모만 내세우는 쭉정이들인 건 아니다. 용사라 불릴 만한 힘과 용맹은 갖추고 있다. 그래도 주로 하는 일이 홍보인 건 부정할 수 없다.
그건 그만큼 지금 시대가 평화로운 탓도 있었다.
…그래. 여명이나 악신의 추종자 같은 게 있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 하지만 그런 위협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왔고, 놈들은 최근 100년 동안은 비교적 얌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반대로 말하면 이렇게 큰 사건을 연달아 일으킨 것은 100년 만의 일이라는 소리다.
그 사이에 각 교단의 용사가 어디 숨어 있는지 모르는 악적을 물리치는 것보다 홍보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렇게 비판할 만한 일은 아니다. 나는 그런 순수주의자도 아니고.
거기다가 눈앞의 용사. 에밀리아는 확실한 실적도 있다.
그녀는 악신의 칼날을 죽였다. 혼자서 죽인 게 아니라고 하지만, 그래도 근래 활약이 없던 용사 중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용사이다. 비록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각 교단에선 확실히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게 7년 전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못 해도 20대 초반일 텐데. 너무 동안 아니야? 이 세계의 다른 사람들은 나이에 비해 나이가 많아 보이는 편이다 보니 더더욱 눈에 띄었다. 피로스랑 셰라만 봐도 그렇지?
천신의 용사이니 뭔가 축복이라도 받았나.
그 생각을 끝으로 용사에 대한 판단을 마친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런데 그렇게 예의를 따진다면 조금 전의 행동도 사과해야지?”
“네?”
내 말에 용사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반면에 시르는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특히 용사의 동료들은 한 대 얻어 맞은 표정이었다.
그 속에서 나만이 미소를 되찾고 유유히 움직였다.
“처음 보는 사람을 다짜고짜 껴안다니. 여기의 예의가 어떤지는 몰라도, 내 고향에서는 굉장히 무례한 짓이야. 하물며 나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몸. 과년한 처자가 함부로 껴안아서는 안 되는 사람이지.”
“…………에. 그, 그게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용사는 내가 뭘 말하는지 깨닫고는 멍하니 있다가, 이내 폭발적으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후우. 이제야 부끄러움을 깨달은 거냐. 대체 얼마나 단순한 성격인 거냐고. 그런데 시르는 왜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있어? 나는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리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 했어.
“아까 전에는 나도 경황이 없어서 말하지 못했지만, 마침 이런 자리가 되었으니 확실하게 말해 두지. 나를 좋게 봐주고 대단한 사람으로 여겨주는 건 기쁜 일이지만, 상대의 상황이나 기분도 고려해서 행동해야 하는 법이야. 그러지 않으면 본인이 품고 있는 호의가 무의미해져. 물론, 그것을 고려하고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그렇게 행동하고, 그 뒷감당도 본인이 하면 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행동을 한 걸까?”
“아, 아니에요! 저는 시그 님을 곤란하게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에요! 그, 그게 그러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고개를 붕붕 휘젓는 모습은 20대 초반으로 보이지 않았다. …설마, 진짜로 라냐랑 동년배인가? 10살에 악신의 칼날을 잡은 건 아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지만 나는 상당히 곤란해 졌어. 솔직히 지금 같이 식사를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야.”
“그, 그런…! 죄,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그렇게 곤란하셨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식탁에 머리를 박을 기세로 허리를 숙이고 사과하는 용사의 모습에 나를 제외한 모두가 정신이 가출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여유로운 나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좋아. 악의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니까. 용서해줄게.”
“감사합니다! 정말 자비로우십니다!”
“앞으로는 호의를 표할 때 갑자기 껴안거나 하지마.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닌 사람들에겐 꽤나 무례한 행동이야.”
“네! 명심하겠습니다!”
“하하. 그렇게 경직될 필요는 없어. 곤란할 뿐이지 크게 불쾌한 기분은 아니니까. 하지만 내 연인에게 오해를 사는 건 아주 나쁜 일이거든.”
“오, 오해를 받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시그 님을 함부로 껴안아서 정말 죄송합니다!”
용사가 자신에게까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자 멍하니 있던 시르는 화들짝 놀라더니 손을 마구 흔들었다.
“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 모르고 하신 일이지 않습니까? 호의를 표할 때 포옹을 하는 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고…. ……시그 님의 예의범절이 유난히 엄격하신 겁니다.”
“에. 뭐야, 시르. 그건 내가 꼰대라는 소리야?”
“그렇게까지는 안 말했습니다. …후후. 역시 시그 님입니다.”
장난스러운 말에 장난스럽게 대답하자 장난스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좋아. 이걸로 시르의 화는 완전히 풀렸다. 역시 살아날 길은 어디에나 있는 법이다. 용사가 지나치게 솔직하고 단순한 성격인 걸 아주 잘 이용했군.
이처럼 약간의 쪽팔림과 충돌을 각오하면 곤란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는 법이다. 자기네 용사가 쩔쩔매는 모습에 고위 사제들은 뼈가 아픈 표정이었지만, 애초에 나한테 호감도 만땅인 용사를 데려온 시점에서 이런 결과는 예정된 거였다.
케케케. 이 몸이 너희들 따위의 의도대로 움직일까 보냐? 니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용사를 내 마음대로 다뤄주마!
“두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보기 좋습니다! 그야말로 천생연분! 빛이 나는 것 같군요!”
용사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우리의 관계를 칭송했다. 시르는 그 가감 없는 말이 부끄러웠는지 얼굴을 붉혔지만, 나는 뻔뻔하게 굴었다.
“호오. 보는 눈이 있네. 맞아. 시르와 나는 천생연분이지. 우리는 서로 보는 순간 깨달았어. 이 사람이 나의 운명이라고.”
“오, 오오오! 그, 무슨 로맨틱한…!”
“시, 시그 님…!”
한술 더 뜨는 내 말에 용사는 엄청나게 흥분하면서 감탄했고, 시르는 폭발할 것처럼 빨개진 얼굴로 나를 말렸다. 그걸 즐겁게 보면서 말했다.
“나는 원래 운명을 믿지 않았지만, 시르를 보는 순간 그게 내 오만이었다는 걸 깨달았지. 기존의 세계가 지워지고 그녀는 나의 세계에 새로운 색을 색칠했어. 그것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였지. 시르는 나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는 정말 사랑스러운 연인이야.”
“…굉장합니다! 그런 책에서나 나올 법한 인연이라니! 머, 멋있어요! 동경하게 됩니다!”
“………….”
흥분이 지나쳐서 식탁을 엎어버릴 기세인 용사와는 반대로 시르는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작게 떨리는 손과 귀까지 빨개진 모습이 미치도록 귀엽다. 후후.
그때 주문한 요리가 완성되었는지 종업원이 카트를 끌고 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주변을 환기시키기 위해 가볍게 손뼉을 치고 말했다.
“자아. 이제 음식도 오는 것 같으니, 간단하게 제 소개만 하고 식사를 하죠. 밥 먹는 중에 떠드는 건 우리 동네에선 그다지 예의가 아니니, 조용히 먹기를 바라기도 하고요.”
“예의는 중요하죠! 저도 조용히 먹겠습니다!”
이제는 충실한 나팔수가 된 용사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나는 짐짓 점잖게 말했다.
“다들 알겠지만, 시그입니다. 동방 출신이고, 나이는 25살. 활동 도시는 타라스트. 이 도시는 의뢰차 들렸다가,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군요. 그리고 다들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저는 용사 같은 게 아닙니다. 챔피언도 아니고요. 왜 그런 오해가 생긴 건지.”
“예에?! 용사가 아니셨습니까?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우셨는데도 용사가 아니시라고요?! 성검도 가지고 계시다던데!”
“업적이랑 용사랑 관게 없지. 그리고 그건 성검이 아니라 가벼운 축복이 걸린 조금 좋은 칼이야. 야천랑의 발톱으로 만들었지.”
“야천랑! 재앙급 몬스터지 않습니까! 그걸 또 어디서…!”
“소식이 늦네. 얼마 전에 타라스트에 야천랑이 쳐들어 왔었거든. 그걸 때려잡고 무기로 만들었지.”
“재앙급 몬스터를…! 역시 용사시지 않습니까!”
“아. 글쎄. 용사 아니라니까. 나는 신에게 선택받지 않았고 축복도 안 받았다고. 보면 알잖아.”
“으으으. 그, 그건 그렇지만….”
용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면서 고민했다. …아니, 내가 용사가 아니라는 게 저렇게 고통스러워할 일이야? 그리고 그런 용사의 태도에 이제까지 우리의 대화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했던 고위 사제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용사가 눈을 번쩍이더니 벌떡 일어섰다.
“그래도! 시그 님이 굉장하시고 정의로우신 분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에게 선택받지 용사가 아니시더라도, 시그 님은 틀림없는 영웅! 존경합니다! 시그 님!”
“그래. 잘 알겠으니까, 그만 앉아. 밥 먹자.”
“네!”
일어선 것만큼이나 힘차게 자리에 앉은 용사는 이전보다 더욱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봤다. …솔직히 부담스럽다. 얘 조금 미친 것 같아.
뭐, 덕분에 뭔가 말하려던 고위 사제가 완전히 침몰한 건 좋은 일이다. 그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봤는데,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너희가 선택한 용사이고 너희가 주선한 만남이다.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똑. 똑. 똑.
“들어오세요.”
드르르륵.
그때 종업원이 노크를 했고 내가 허락하자 음식이 담긴 카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방 안의 분위기를 보고 흠칫했다가, 이내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의무를 수행했다. 프로정신이 투철하네.
그렇게 음식이 다 준비되자 나는 다시 손뼉을 치고 말했다.
“자아. 조금 늦었지만, 점심이나 맛있게 먹죠.”
그리고 나는 다른 말을 안 듣겠다는 태도로 먹기 시작했다. 내 말을 충실히 따르게 된 용사… 그래. 에밀리아도 내 식사 자세를 완전히 따라면서 조용히 먹기 시작했다. 이 자리에서 실질적인 지위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는 두 명이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으면서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한 명인 라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툭 내뱉었다.
“시그 님은 조금 미친 것 같아요.”
뭐 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