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79화 (79/93)

〈 79화 〉 79화 용사 등장

* * *

“아니. 그럴 일은 절대로 없어.”

즉답이었다.

나는 굳이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는지 시르는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정확히는 그 내용보다 대답이 나온 속도에 놀란 모습이다. 어쨌든 보기 드문 표정이니 정말 값진 반응이다. 머릿속에 영구 저장시켜야지.

“나는 용사 같은 건 천금을 줘도 안 해.”

다시 한번 확답하자 시르는 멍하니 나를 올려보았다.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귀여웠기에 꽉 끌어안았다.

옷 너머로 심장의 고동 소리가 전해졌다. 나에게. 그녀에게.

“…아.”

“뭘 걱정하는지 알아. 내가 아이르세르의 용사가 되는 게 싫은 거지?”

“………….”

“왜 그런지도 알아. 우리의 관계에 용사라는 요소가 추가되는 게 싫은 거야.”

“………….”

“시르는 아이르세르를 믿는 신관이지. 그렇다면 신앙하는 신이 지정한 용사를 대할 때 지켜야 하는 것이 있을 거야. 그것이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거지?”

내 목과 가슴 사이에 얼굴을 묻은 시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호흡이, 심장의 고동이, 작게나마 들리는 흐느끼는 소리가 내 말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그래.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시르는 야천도를 보고 그렇게 열렬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믿는 신이 축복을 걸어준 무기인데 큰 반응이 없다는 걸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묻지는 않았다. 그녀가 믿는 교리가 그런 거에 크게 반응하면 안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내가 불편할까 배려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에 어쩌면 시르는 신앙심이 그렇게 깊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법이 4품이나 되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신이나 교리 얘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게 전부 맞았다.

시르는 아이르세르를 믿는 신관이면서도 신앙심이 깊지 않았고, 님프 중에서도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종족의 신을 그다지 경애하지 않았다. 그래. 특별히 이상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신을 존경하지 않는 신관이 있을 수도 있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 신을 경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가 아는 시르는 아무 이유 없이 종족이 신을 경애하지 않을 사람이 아니다.

“신의 사고 방식은 우리하고는 잘 맞지 않지.”

“……….”

“시르도 신 혹은 화신이나 신령을 만난 적이 있지? 그 때문에 신을 가까이 여길 수 없게 된 거야.”

신의 사고방식은 인간과는 상이하다. 그렇다고 사이코패스라는 건 아니다. 그들은 공감 능력이 없는 게 아니다. 근본적인 감성이 지상의 생물과는 다를 뿐이다. 그래도 그들의 선과 도덕과 정의는 지상의 생물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이 세계의 종교인들은 그것이 신들이 지상의 종족을 만들었다는 증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신이 없는 지구에서 온 내 생각은 다르다.

그나마 그런 부분에선 공감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기에 신들이 지상의 생물들에게 떠받들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부분마저 공감대가 생성되지 않았다면 신앙이 생기지 않았거나, 지상의 모습은 지금과는 아주 많이 달랐을 것이다.

시르는 분명 아이르세르를 어떤 식으로든 만났고, 그 때문에 고향을 뛰쳐나왔다.

즉.

“그래서 시르는 가출한 거야.”

대답은 곧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점차 안정되는 호흡과 그녀의 고동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기다림이 길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시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개를 천천히 들어서 나를 올려보았다.

그 표정과 눈빛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지만, 굳이 그녀는 입을 열어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역시… 시그 님이십니다.”

이제는 버릇과도 같은 말이지만 거기에 담긴 감정과 뜻은 이전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말없이 시르를 껴안았다.

“괜찮아. 시르. 나는 용사 같은 건 하지 않아.”

“…네. 시그 님.”

“아이르세르만이 아니라, 그 어떤 신도 나를 용사나 챔피언으로 만들 수는 없어. 내가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시그 님이라면 능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멀리할 일은 절대로 없어.”

“저도 시그 님과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나는 너에게 벗어날 수 없었어.”

“저도 그날부터 시그 님에게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랑해. 시르.”

“사랑합니다. 시그 님.”

시르는 눈을 감고 내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녀의 체온이, 고동이, 숨소리가 조금 전까지의 불안감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안정되었다.

시르는 확답받고 싶은 것이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을. 내가 단호하게 부정해주길 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소망을 이루어줬다.

그것은 그녀가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기 때문이었다. 용사나 챔피언같이 귀찮기 짝이 없고 타인의 의사대로 움직이는 직책 같은 건, 만금을 줘도 내 쪽에서 사양이다. 그런 내 마음과 의지와 시르의 바람이 일치한 것이다.

이심전심?心?心. 심심상인心心??.

그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할까?

“…후후후.”

“…하하하.”

작게 웃은 우리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었다. 대화는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은, 생각은 있다.

우리는 그것을 느끼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을 서로에게 의지해 해소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휴식을 취했다.

……………………………

……………………

……………

발소리에 눈을 떴다.

“………음.”

단잠에서 깨어난 나는 순식간에 상황파악을 끝냈다.

우선, 내 품에 안겨서 행복한 표정으로 자는 시르. 후우.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표정이군. 서로 불안을 털어내고 다시 마음을 확인했기 때문인지 더욱 표정이 좋아졌다.

라냐도 행복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역시 아닌 척했어도 마탑의 마법사들을 두들겨 팬 게 어지간히도 속이 시원했던 거지.

잠에 들고 4시간 32분이 지났다. 점심시간이군. 지금 들리는 발소리는 점심 여부를 물으려는 종업원일까? 아마, 문에 달린 종을 울릴 텐데, 두 사람을 지금 깨울 필요는 없지.

나는 조심스럽게 시르의 품에서 벗어나서 조용히 문으로 갔다. 다행히 시르는 깨지 않았다. 그리고 발소리가 완전히 가까이 오기 전에 천천히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예상대로 이쪽으로 오는 발소리는 종업원의 것이었다. 복도로 나온 나를 보고 종업원은 반가워하면서 입을 열려고 했다. 그것보다 빠르게 나는 손가락을 입술에 올리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

다행히 종업원은 눈치가 있어서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천천히 문을 닫고 조용히 종업원에게 다가가서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종업원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따라왔다.

계단까지 타고 아래층으로 내려온 뒤에야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종업원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볼일인가요.”

“…시그 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종업원의 조심스러운 말에 나는 찾아온 손님이 꽤 높은 직위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귀찮아지는 미래 밖에 안 보이는데. 한숨을 쉬고 싶은 것을 꾹 참으면서 말했다.

“누군데요?”

“천신교의 사제분들이 오셨습니다. 다들 고위 사제 분들이셔서….”

천신교? 이건 조금 뜻밖이네. 찾아온다면 관청이나 영주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사 놈들은 그럴 배짱이 없고. 교단 사람이 무슨 볼일일까?

흐음. 사로잡은 놈들의 심문 결과가 나온 걸까? 하지만 그걸 굳이 내게 알려주기 위해 찾아온 것은 조금 많이 의외다. 그것도 고위 사제들이? 호감도가 낮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이정도는 아닐 텐데 말이지.

뭔가 있어. 아주 귀찮아질 뭔가가.

…하지만 이걸 무시할 수도 없다. 일단, 최대한 빨리 이 도시를 떠나려면 엮여 있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해야 했으니까. 이미 결론을 내린 부분도 있고. 후우. 어쩔 수 없나.

“무슨 용무인지는 못 들으셨죠?”

“네. 그저, 시그 님과 그 동료분들을 모셔달라는 요청만 들었습니다.”

“알겠습니다. 다만, 그 전에 점심을 좀 먹고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밥은 먹고 가야지. 나는 곤혹스러워하는 종업원에게 대은화를 건네주었다. 종업원은 결연한 얼굴로 반드시 원하시는 바를 이뤄드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래층으로 내렸갔다. 돈의 힘이란 이토록 강력하다.

잠시 뒤. 내가 그들의 목적을 검토하고 있을 때 종업원이 재빠르게 달려왔다. 아니, 진짜 빠르네.

“그분들 말씀이, 괜찮으시다면 같이 점심을 드시자고 하십니다.”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럼 준비를 마치고 내려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종업원은 좋은 미소를 보여주고 다시 내려갔다. 이런 단순한 심부름에 대은화를 받았으니, 입이 찢어질 만도 하지. 그런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는 작은 만족감을 얻으면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두 사람을 깨우고 간단하게 상황설명을 했다.

“천신교의 고위 사제분들이요? …대체 무슨 일일까요?”

“…큰 문제는 없겠지만, 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이 뜬금없는 방문에 두 사람은 곤혹스러워하면서도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치장을 했다. 마법은 이런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효과가 좋아서 준비는 금세 끝났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라냐는 그저 그들이 찾아온 이유를 몰라서 고개를 갸웃하는 정도였지만, 교단 사람들을 경계할 이유가 있는 시르는 조금 심각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시르의 손을 살며시 잡아 주었다.

시르는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보았고, 나는 거기에 미소로 화답해주었다. 시르의 불안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거기엔 포근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나를 믿어 시르.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바라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 일어나게 두지도 않을 거고.

1층으로 내려가자, 입구 부근에 모여있는 천신교의 사제들이 보였다. 그 수는 무려 열다섯 명. 그것도 가장 앞에 있는 다섯 명은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사제들이었다. 문밖에는 성기사들까지 대기하고 있었다.

무슨 용사를 맞이하려는 것처럼 휘황찬란 구성이군.

내 손을 잡은 시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것을 부드럽게 받아들이면서 당당하게 아래로 내려갔다. 이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라냐는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지만, 우리가 사이좋게 손을 잡고 내려가자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왔다.

우리가 홀까지 내려가자 가장 앞에 있던 가장 늙고 직위가 높은 천신교의 사제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면서 반겼다.

“이런 시간에 찾아 뵈어서 죄송합니다. 시그 님. 하지만 한시를 다투는 일이라 무례를 무릎 쓰고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 천신교의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일개 모험가에게 할 말이 아니다. 나도 조금 놀랐고, 시르는 표정이 대번에 안 좋아졌고 라냐는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올려보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벽 쪽에서 이쪽을 훔쳐보던 직원들과 다른 손님들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하아. 이건 또 무슨 개수작이야?

짜증이 솟구쳐 올랐지만, 상대가 무슨 수를 쓰든 시르를 슬퍼하게 만들 생각이 없는 나는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걸 아시는 분이 이렇게 화려하게 찾아오신 겁니까? 나는 일개 모험가에 불과합니다. 이런 환영은 과하군요.”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대답. 그야말로 형식에 맞춘 최저한의 예의만 갖춘 말에 고위 사제는 물론이고 다른 사제들도 눈을 부릅떴다. 구경꾼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오로지 시르만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을 가렸을 뿐이었다. 라냐는… 음. 이 오빠를 그런 미친놈 보는 눈으로 보지 말아주렴.

그런데 고위 사제는 만만치 않은 인간이었다. 그의 당황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그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시그 님. 하지만 시그 님 같은 분께 이 정도의 예의도 갖추지 않고서야 어찌 신을 믿는 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은 저희가 시그 님을 찾아온 목적과도 크게 연관이 있습니다.”

이야. 이거 대체 무슨 수를 준비하고 있기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지? 뒤에 있는 사제들도 딱히 불쾌감이 보이지 않는 걸 봐선 내 행동이 그렇게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건데….

…으음. 아니, 설마 그건 아니겠지?

불안한 예감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얼마나 거창한 목적이기에 이런 난리를 일으키는 겁니까? 나는 할 만큼 했습니다. 설마, 또 내게 설명을 요구하는 겁니까?”

“당연히 그런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시그 님의 대접에 부족함이 많았지요. 저희가 찾아온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것을 사과하고, 뜻깊은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서입니다.”

날 선 말에도 고위 사제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내 태도를 기꺼워하는 게 구린 냄새가 너무 강하게 풍겼다. 그래서 이 자리를 아예 파토 내버리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명성이라면 그 정도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고….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내 눈에 저 멀리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세 명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복장과 풍기는 기운에 나는 최악의 예상이 맞았다는 사실에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시르도 굳은 얼굴로 내 손을 꽉 잡았다.

그 반응을 보고 고위 사제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슬쩍 고개를 돌리고는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연극을 하듯이 아주 천천히 말했다.

“허허허. 마침 오시는 군요. 저기 오시는 분들이 바로 제가 시그 님에게 소개시키드리고자 하신 분입니다.”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저 여성들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래서 고위 사제의 연극 같은 말투에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고위 사제는 고위 종교인답게 철판을 깔은 얼굴로 태연하게 말했다.

“저희 천신교의 용사님들을 소개드립니다.”

그리고 마치 달리듯이… 아니, 진짜로 달려서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온 붉은 머리의 소녀가 나를 보고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면서 크게 외쳤다.

“반갑습니다! 용사 시그 님! 저는 천신교의 용사 에밀리아입니다아아아아아아아앗!!!!!!!!!!!!!!!!!”

그리고 나를 힘껏 껴안았다.

시르의 얼굴에 음영이 드리우면서 손이 부서질 것 같은 악력이 전해졌다.

절체절명.

생명의 위기다.

야이, 싯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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