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78화 (78/93)

〈 78화 〉 78화 용사 등장

* * *

아침부터 예절주입이라는 좋은 일을 한 덕분에 아침밥도 아주 맛있게 잘 넘어갔다. 내 예절주입에 새하얗게 질렸었던 라냐도 지금은 행복한 얼굴로 고기를 입안에 집어넣고 있었다. 시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먹는 모습만 봐도 행복한 표정이었으니까.

아침밥이 맛있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라 여기가 관청이 아니라 어제 빌린 고급 여관인 것과 공짜밥인 것도 있었다.

마법사들에게 예절주입을 해주고 라냐에게 사과를 시킨 뒤에야 뒤늦게 소란을 듣고 나타난 공직자들과 교단 사람들은 그 광경에 말을 잃었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 그들에게 내가 협력할 만큼 협력했고, 아직 아침밥도 제대로 못 먹었으며, 애초에 너희들의 일에 나를 혹사하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이라는 말을 빠르고 논리정연하게 쏟아내서 정신을 쏙 빼놓고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관 사람들은 어제 일어난 일을 정확히는 모르지만, 우리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것보다 좀 더 상세한 사정을 알고 있던 주인은 아예 직접 튀어나와서 우리를 극진하게 모셨다. 덕분에 이 여관에서 가장 비싼 밥을 공짜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은 일을 하고, 고급 음식에, 공짜. 이게 맛이 없을 리가 없지! 예아~! 역시 착한 일을 하면 복이 온다니까!

“히야. 잘 먹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어.”

“그렇습니다. 어지간한 식당보다 실력이 좋습니다.”

“하아. 매일 이런 식사만 했으면 좋겠네요…. 후우.”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배부른 배로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휴식시간을 가졌다.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밤새고, 한 일도 많다 보니 매우 피곤했기 때문이다. 나조차도 피곤함이 얼굴에 나올 정도였으니, 말할 것도 없지.

뭐, 나는 그만큼 개고생을 했지만. 그래도 그 개고생이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실종되었던 부랑아 중에 15명을 구출할 수 있었다.

놈들이 도시 곳곳에 설치해 놓았던 마력폭탄 8개를 발견했다.

비밀 아지트 다섯 곳을 추가로 발견하고 그곳에 있던 끄나풀 38명을 붙잡았다.

놈들을 후원하던 상단 두 곳을 추가로 적발하고 협력하던 공직자 세 명을 체포했다.

사악한 의식을 벌이던 제단 두 곳을 발견하고 파괴했다.

놈들이 이미 소환해 놓은 하급 악마 30마리와 중급 악마 3마리를 박살 냈다. 이놈들이 도시로 풀려났다면 최소 수백에서 최대 수천 명의 인명피해가 났을 거다.

교단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못 대하는 것도 내가 중급 악마 3마리를 순식간에 박살을 냈기 때문이다. 하급 악마도 어렵게 잡던 모습을 생각하면 대악마 전투에서 그들과 나의 격차는 상당히 크다.

인간을 개조해서 만들어낸 키메라 8기를 해치웠다. 키메라에 사용된 인간들의 대다수는 사라졌던 부랑아들이었다. 구해낸 열다섯 명의 부랑아들도 같은 시설에서 발견했다.

아이들의 눈은 죽어있었다. 눈앞에서 친구들이 괴물이 재료로 쓰이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봤기 때문이었다. 한 여자아이는 자신의 오빠를 찾았다. 그 오빠가 합성된 키메라는 내가 야천도로 목을 베었다. 그 아이는 나를 원망할까?

……새벽 동안 겪은 일들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도 정신적으로 지칠 정도였다.

적어도 지구에선 사람을 갈아서 괴물로 만들거나 악마를 소환하기 위해 어린아이의 심장이나 뇌를 바치는 미친놈들을 만난 적은 없다. 어린아이를 폭탄 테러의 용도로 쓰는 것들은 만난 적 있지만… 정신적인 충격은 이쪽이 더 크군.

이런 일이 있었다는 걸 시르와 라냐에게 굳이 얘기해줄 필요는 없었다. 교단 사람들도 굳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거다.

성기사들은 처참한 현장을 보고 구토하더니 눈물을 펑펑 흘리면서 악신의 추종자들을 뼈까지 갈아버리겠다고 맹세했을 정도였다. 광신도 같지만, 놀랍게도 이게 이 세계 성기사들의 평균이었다.

사제들도 그런 점은 다르지 않아서 처참한 광경에 질려 하면서도 악신의 추종자들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이쪽은 그나마 점잖게도 화형으로 만족하는 것 같았다.

대신 엉덩이부터 정수리까지 꼬챙이로 뚫은 다음에 하는 화형이었다.

…나는 그렇게 하면 바로 죽지 않냐고 묻자 환하게 웃으면서 죽지 않게 꽂을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말하던 젊은 사제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어쨌든 덕분에 놈들을 돕던 놈들은 교단 사람들이 알아서 처리해주기로 했다. 전원 극형이겠지. 만약 이 도시의 공직자들이나 영주가 반대한다면 그들까지 이단으로 몰아서 태워버릴 기세였으니 처벌은 확실할 거다.

…시…르가 다른 교단 사람들을 싫어하는 건 이런 과격함 때문이려나? 시르는 이런 과격한 처벌을 입에 담지는 않았으니까. 감성의 차이가 있어서 꺼리는 거라면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나는 그들의 행위가 과격할지언정 대상은 확실히 고르는 점에서 나쁘게 보진 않는다.

적어도 내가 책으로 접하고 직접 만난 교단 사람들은 지구에서 벌어진 마녀사냥 같은 걸 벌일 작자들은 아니었다.

그건 그들이 지구의 종교인들보다 특별히 선해서라기보다는,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니 그런 행위를 용납하지 않는 거겠지. 악신이 아닌 이상, 무고한 사람을 해치는 교리가 있는 종교는 없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나를 존경하고 경외한다. 경계하는 사람도 대놓고 그걸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이 도시의 교단은 내 아군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 소식이 퍼지면 어지간한 교단은 나를 아군으로 보겠지.

애초에 그들은 나를 아이르세르의 챔피언 같은 거로 착각하고 있었다. 야천도에 걸린 축복이 아이르세르의 것이었고, 내가 악신의 추종자 놈들과 엮인 이유를 설명할 때 그녀의 이름을 팔아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 내가 신령을 만났거나 신탁을 받았다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은근슬쩍, 딱 오해하기 좋은 정도의 언행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아이르세르의 챔피언이라고 착각하면서도 그것을 대놓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다른 신의 챔피언의 여부를 직접 물어보는 건 종교적으로 굉장히 무례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다들 내가 사정이 있어서 밝히지 못하고 있다 정도로 생각하고 있겠지. 어쨌든 거짓말은 안 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굳이 이런 일을 벌이는 건 내 위치를 좀 더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챔피언이라고 확정되는 건 싫어서 애매모호 한 태도를 보인 것이다.

정치적인 문제에 엮이면 명성이 굉장히 도움이 되거든. 어지간히 막 나가지 않는다면 명성이 높은 상대에게는 조심스러. 막 나가는 놈이라면? 그때는 부담 없이 패면 된다. 그런 놈은 본래 주변에서 다들 싫어하는 법이니다. 일반론은 아니지만.

“………….”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고 있는 시르와 라냐를 봤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가볍게 씻은 우리는 곧바로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다. 밥 먹고 바로 자면 살찌는데~ 같은 농담을 할 여력도 없었다. 라냐도 시르도 상당히 지쳐 있었기 때문에 침대에 눕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나라로 떠났다.

오로지 나만이 사색에 잠겨 있었다.

휴식? 물론, 취하고 있다. 이렇게 침대에 누워서 생각을 정리하는 게 내게는 휴식이다.

과거, 잠자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바빴을 때. 그래도 몸이 축나는 것은 막기 위해 나는 잠을 자지 않아도 심신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술을 만들었다.

뇌의 극히 일부만 사용하고 나머지는 수면 상태나 다름없게 만들어서 육체도 수면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이 기술을 사용하면 의식이 있어도 육체는 수면 상태이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면서 몸도 쉬게 할 수 있었다. 한시가 아까울 때 여러모로 유용한 기술로 따로 이름은 붙이지 않았다. 명경지수처럼 멋진 이름을 붙이기에 뭣한 기술이기도 하고.

그 기술을 지금 다시 쓰고 있는 이유는 지금 상황이 꽤 복잡하고 생각할 게 많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편히 잘 수 있을 정도로 나는 뻔뻔하지 못했다.

…그래. 굳이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 하지만 역시 그냥 무시하기에는 마음 한곳에 무겁게 남는다. 그런 짐덩어리를 안고 가느니 후회가 남지 않게 처리하는 편이 더 낫다.

나는 이제까지 계속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게 내가 사는 방식이니까.

좋아. 결정했다. 그러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해야겠군. 역시 하루 만에 이걸 다 처리하는 건 무리겠지? 그렇다고 이계형 던전을 놔둘 수는 없고. 결국, 대행 처리를 해야 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을 하루 만에 만들 수 있을까? 교단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가장 확실하기는 한데… 빚을 지는 것 같아서 싫단 말이야. 다른 방법이 있으면….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계획을 세우면서 얼마나 지났을까?

“……….”

시르가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게 침대에서 일어난 시르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것을 곁눈질로 보고 있던 나는 시르가 무슨 생각인지 궁금해서 자는 척을 했다.

시르는 그런 나를 유심히 내려보더니, 이내 옅은 미소를 짓고는 조심스럽게 내 이불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와 내 몸 위에 자신의 몸을 포갰다.

…오우. 설마? 아니, 잠깐만. 싫은 건 아닌데! 진짜 싫지는 않은데! 라냐가 있잖아! 애가 옆에 있어요오오!

아니나 다를까. 시르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내 벨트에 손을 대더니 천천히 그것을 풀기 시작했다. 아니, 잠금장치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은 없는데! 옆에서 본 것만으로도 구조를 알게 된 거야?!

아니, 그보다 왜 갑자기?! 성욕이 폭주라도 하셨나요?! 시르는 그런 아이가 아니……지는 않았지! 은근히 밝히고 야했어! 하지만 그래도 이런 짓을 하는 사람은……!

아.

뒤늦게 그녀의 진의를 깨달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조용히 말했다.

“…일어났어. 시르.”

“후후후. 언제 그만두시나 했습니다.”

장난스럽게 말한 시르는 벨트에서 손을 떼고 다시 위로 올라왔다. 내 가슴을 넘어 나와 얼굴을 정면으로 맞댄 시르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황금에 비친 내 얼굴은 그야말로 사랑에 빠진 얼간이었다. 그 얼간이의 얼굴을 향해 그녀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향기로운 꽃냄새가 입안 가득히 퍼졌다.

짧고도 긴 접촉과 교환이 끝나고 짧지만 긴 이별이 찾아왔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타액의 선은 금세 끊겼다. 그것을 아쉽다는 듯이 바라보는 황금을 보고 나는 모든 체면을 다 던져버릴까 하는 강렬한 유혹을 느꼈다.

시르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면서 속삭였다.

“오래간만의 키스는 어떠셨습니까?”

“미치겠는데. 계속하고 싶어.”

“후후. 기쁘지만 그건 안 됩니다. 이 이상은 라냐 양에게 실례이니까요.”

시르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목덜미에 키스했다.

…아니, 이 이상은 안 된다면서요? 왜 나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거야? 사실, 원하는 거지? 이거 내가 다 내던져 버리고 덮쳐주길 바라는 거지?!

내가 어마어마한 충동을 느끼고 있을 때, 시르는 그대로 어깨와 목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르세르 님은 잔혹하신 분입니다.”

“………뭐?”

너무 뜻밖의 말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반문이 나왔다. 시르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 상태로 계속 말했다.

“저는 그분이 시그 님에게 찾아오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야, 보통 자신이 믿는 신이 연인을 만나러 올 줄은 생각 못 하겠지. 하지만 시르의 표정과 어투에는 그것보다 더 깊은 이유가 있어 보였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날 밤… 시그 님의 칼에서 그분의 힘이 느껴졌을 때 저는 기쁨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기쁨이라면 당연히 내가 아이르세르의 인정을 받았다는 부분. 그렇다면 절망은…?

“…다행히 시그 님이 그분께 축복을 받은 건 검뿐이더군요. 저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시그 님은 그야말로 영웅이시니까… 그분께서도 관심을 가지고 만나 뵈러 오셨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녀가 불안해하는 게 느껴졌다. 말투가 흔들리고 있었다. 좀 더 편한 말투로 해달라고 해도 고집스럽게도 변하지 않던 말투가 불안감에 흔들렸다.

시르는 고개를 들어서 나를 올려보았다. 나도 시르를 내려보았다.

“그런데 시그 님이 이 도시에 와서 하신 일들은……. 물론, 아주 훌륭하시고 굉장한 일입니다. 악신의 추종자는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는 존재들. 그들을 격멸하고 사악한 음모를 막은 것은 대대손손 찬양받아 마땅한 업적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기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미소 위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시르는 말없이 나를 올려보았다.

나도 말없이 그녀를 내려보았다.

영원 같던 침묵이 끝낸 것은 시르였다.

그녀는 불안 속에 짙은 슬픔을 묻으면서 말했다.

“시그 님은 용사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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