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화 〉 67화 우당탕탕 모험가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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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애애애애애애애애애!!!!!
그야말로 지랄발광을 하면서 날뛰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손톱만큼 남은 이성이 파국을 막았다. 그저 크게 고함을 한번 지르고 온몸을 부들부들 떠는 거로 분노를 털어낸 나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신령을 노려보았다.
[…왜 그러는 거야?]
신령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시르와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곧바로 주먹이 날아갔을 얼굴이다. 이래서 감성이 다른 존재와의 대화는 힘들어! 할리우드에서 외계인들과 대화가 아닌 총탄과 미사일을 주고받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니다. 나는 할리우드 주인공의 심정으로 분노를 참았다.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아니, 씨발. 10년 후에 세계가 망한다는 얘기를 뭘 그리 쿨하게 하고 자빠졌냐. 쿨내에 얼어붙는 줄 알았네. 앞의 두 얘기보다 이쪽이 더 중요한 얘기 아니야? 응?”
말투가 조금 거칠어지긴 했지만, 이게 최대한 억누른 거다. 아무리 그래도 자기들 세계가 멸망한다는 부분의 감성도 다르면 어쩌자는 거냐고. 진짜. 다행히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신령은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게 문제야? 이상하네. 나는 분명 이대로라고 했잖아?]
“…그래. 이대로라고 했지. 싯팔.”
이마를 부여잡았다.
분명 ‘이대로라면 10년’이라고 말했지. 그런데 싯팔. 인간은 그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요! 세계 멸망처럼 거창한 걸, 신령이라는 작자가 함부로 내뱉는 거 아니야!
좋아. 쿨해져라. 시그. 여기선 당황하는 쪽이 지는 거다. 아니, 근데 싯팔 이미 당황할 만큼 당황했으니 졌잖아. 몰라. 그냥 좆대로 할 거야.
“그래. 씨발. 그래서 해결방법이 있으니 그렇게 태연한 거지? 응? 아니면 씨발 내가 그 세계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되어 줄 수도 있어.”
[그대라면 진짜로 그렇게 될 수 있어서 농담으로는 안 들리는데…. 농담이지?]
불안해하는 감정이 느껴지는 표정에 조금이지만 화가 누그러졌다. …하. 시르의 얼굴로 저러니 마음이 약해지네. 동시에 분노도 느꼈다. 씨발. 시르의 얼굴을 하고 이딴 짓 하지 마!!
“…그래. 농담이다. 그러니까, 빨리 해결방법이나 말해.”
[다행이야. 그대에게는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 해결방법은 있어. 우선, 지금 차원에 뚫린 구멍은 우리가 전력으로 막고 있어. 그래서 지상에 내려지는 힘의 총량도 점차 줄어들고 있지. 각 교단의 아이들에겐 이미 이야기가 갔어. 그 아이들은 조만간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치고 했어. 그 아이들과 함께하면 차원에 뚫린 구멍을 막을 수 있을 거야.]
설명을 듣자 분노를 완전히 억누를 수 있었다. 동시에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종교가 있다는 건 어마어마한 이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시는 신이 달라도, 그 신들끼리 사이가 나쁘지 않다면 신들의 명령에 따라 힘을 합칠 수도 있다니. 지구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보고 교단들과 협력하라는 소리?
“굳이 그 일에 나까지 협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앞의 두 개는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차원에 구멍이 뚫린 건 굳이 내 도움이 없어도 해결되는 거 아니야?”
[그건 그렇지. 하지만 그대가 도와준다면 훨씬 빠르고 안전하게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높게 평가해주는 건 고맙지만, 교단과 협력하는 건 싫어.”
이 세계의 종교가 지구와 다르다 하더라도, 종교는 종교다. 유교와 도교의 구도자로서 다른 종교와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건 생리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리고 굳이 내가 가세하지 않아도 해결될 문제라면, 개 고생할 걸 뻔히 아는데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여명이나 악신의 추종자들이야, 이제는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그래. 이득이 아예 없지는 않겠지. 내가 겪은 차원 전이 현상을 명확하게 알고, 어쩌면 귀환할 방법을 알아내거나 기회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리고 나는 지금 훨씬 안전하게 지구로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것을 당장 확인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찔러 보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건 아쉽네.]
신령은 그 이상 권유하지 않았다. 역시, 간절하거나 필수적인 부탁은 아니었군. 말 그대로 세계적으로 위험한 일이니 도움을 얻을 수 있으면 얻어 보자는 정도의 생각이었을 거다.
나는 슬쩍 찔러 보았다.
“그런데 차원의 구멍을 닫는다니. 신성력은 그런 것도 가능해? 마법으로는 난이도가 장난 아니라고 들었는데.”
[마력과 신성력은 다루는 힘의 종류가 다르니까. 마법도 성법도 쓰지 못할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마법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을 성법은 간단히 하지 못하고, 성법이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을 마법은 간단히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무슨 뜻인지 알겠다. 하지만 신령의 말 중에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마법도 성법도 쓰지 못할 거라고?
나는 동요를 최대한 감추고 조용히 말했다.
“그렇군. 잘 알겠어. 그런데 말이야. 내가 마법도 성법도 쓰지 못할 거라고? 어떻게 그렇게 단언할 수 있지?”
[응? 모르는 거야?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신령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명의 힘을 다루는 기술… 그러니까, 아이들은 기공이라고 하지? 대체 어떤 기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대의 영혼육백은 지나치게 강인하고 완전해. 이렇게 커다란 그릇과 밀도를 가진 영혼육백은 이제껏 보지 못했어. 천상에서도 그대가 내뿜는 빛은 제법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니까.]
“…내가 대단하긴 하지.”
[응. 정말 대단해. 똑똑하고. 그리고 그게 문제야.]
“영혼육백이 강해서 마법과 성법을 익히지 못할 거라고?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 없어.”
[그럴 거야. 전례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알 수 있어.]
신령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 새하얀 손 위에 새하얀 구체가 떠올랐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힘은 틀림없이 기?였다.
[기는 아이들이 말하는 진원?을 육백??으로 가공해서 만들어낸 힘이야. 이것으로 아이들은 신체를 강화하거나 외부로 방출하거나 세상의 사상에 간섭해 다양한 현상을 일으켜. 그것은 자신의 세계를 견고하고 강하게 만들어서 외부의 세계에 간섭하는 행위야. 이런 수준까지 도달한 아이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 수 있기에 외부의 법칙에 굉장한 저항력을 가지게 돼. 그대처럼.]
처음 듣는 얘기다. 그리고 단번에 이해할 수 있는 얘기였다.
그렇군. 기공이란 그런 건가. 기초를 책으로 접하면서 최종적으로는 그런 것이 되는 게 아닐까 싶었지. 단순히 내 망상일 수도 있으니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한 마디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영혼도 강한데?”
[응. 놀라울 정도로. 영혼육백이 전부 강인해. 말했잖아? 그대만큼 완전한 영혼육백을 강한 아이는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상당히 특수한 기공을 익혔다고 생각한 거야. 맞지? 영혼까지 그 정도로 단련하는 기공이라니.]
신령은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것은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이 녀석은 내가 이세계인이라는 걸 몰랐다.
동시에 환희와 절망을 느꼈다.
환희는 내 방식이 틀린 게 아니라는 것에서.
절망은 그렇기에 마법도 성법도 익히지 못한다는 것에서.
…설마, 아무런 이능이 없는 지구에서 시행한 훈련이 판타지 세계에선 이렇게 될 줄이야. 그야, 기본적인 물리법칙을 공유하는 같은 우주이고, 이 세계의 인간과 지구의 인간이 구조상 큰 차이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인 건 아니지만….
거기에서 생각을 끊고 다시 신령을 봤다. 녀석의 얘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 듣고 생각하자.
[기공을 단련하면 영혼도 어느 정도는 단련돼. 당연해. 인간은 영혼육백이 같이 존재하는 생물이니까. 어느 한쪽만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쪽이 이상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이 균등하게 상승하는 것도 불가능해. 하물며 그 수준이 하나 같이 그대와 같은 수준이라는 건…. 나도 오래 살아왔지만 처음 보는 일이야.]
“내 칭찬은 그쯤이면 됐어. 그래서 결론은?”
[기공의 완성도가 너무 높아서 영혼으로 진원을 마력으로 가공하지 못해. 그리고 혼백의 결합이 너무 강해서, 신성력을 내려받을 수 없어.]
“……하.”
예상했던 그대로의 대답에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욕이라도 하면 마음이 편할까 싶었지만, 이미 욕은 충분히 많이 했다. 나는 욕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지만, 너무 많이 하는 것도 안 좋게 생각하니까.
…그래. 씨발.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없구나! 적중률 100%의 직감! 좋은 거야 나쁜 거야?
“그렇군.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겠지. 방법은 있어.”
[…일부러 영혼육백의 균형을 무너트리겠다는 거야?]
내 말뜻을 알아들은 신령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시르가 놀라는 모습과 너무 똑같아. 마음의 동요를 억누르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너트리는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과연, 그거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 하지만 그건 전인미답의 경지야.]
“흥! 언제는 아니었는지 알아? 애초에 실패할 것을 가정하고 노력하는 경우가 세상에 어디 있냐. 노력한다면. 목표로 삼았다면 죽기 살기로 노력해야지.”
나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도전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몸과 관련된 부분에선 앞으로 새로운 도전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신령의 말 덕분에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이 명확하게 보였다.
영혼육백을 더욱 완전하게 만든다. 더욱 완벽하게 만들어서 나 자신이 그 모든 것을 완전하게 다룰 수 있게 만든다.
영혼육백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
나는 이미 육백에 관해선 완전에 가까운 통제권을 가지고 있다. 영혼은… 지구에서도 어느 정도는 다룰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과학적으로 분석해서 논문으로 제출할 정도로 확신할 수 없었을 뿐.
그것을 이세계에 와서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마법을 접하면서 이제까지 내가 영혼을 다룬다고 생각했던 것이, 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흑마법사와 싸울 때 영혼의 힘을 증폭시켜서 항마력을 올릴 수 있었다.
이제 나는 육백과 영혼을 다루는 방법을 안다. 그것을 더욱 심화시켜서 지금보다 더욱 완벽한 영혼육백을 가진다. 그러면 그때는 내 의지대로 진원을 기로, 마력으로 가공할 수 있을 것이다. 신성력도 내려받을 수 있겠지.
…이 세계의 사람들에 비하면 지나치게 멀게 돌아가는 거지. 아니, 돌아가는 게 아니라 남들이 뒷동산만 올라가도 되는 것을 나는 K2 정상까지 올라가야 할 수 있는 거다.
불합리하지만 어쩔 수 없지.
이능이 없는 지구에서도 영혼육백을 다루는 기술을 만들어내고 발전시키던 내 재능이 낳은 결과다. 그 때문에 판타지 기술을 배울 수 없게 되었지만, 그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태극팔괘도를 익히지 않았다면, 자기통제권의 개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면, 시르를 만날 수도 없었고, 만나더라도 그녀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겠지.
그래. 남들보다 오래 걸린다고 해서 뭐 어떠냐. 그렇게 해서 이뤄낼 수 있는 게 더 크다면 도전할 가치는 차고 넘친다.
“그리고 이미 나는 궤도를 올라탔어. 네 덕분에 목표가 더욱 명확해졌으니, 이제는 달릴 일만 남았지. 장담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대단한 자신감이네. 그래. 네 영혼이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를 알겠어. 그 아이가 어째서 너에게 그렇게나 푹 빠져 있는지 이제야 명확하게 알겠어.]
신령이 말하는 게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피식 웃으면서 툭 내뱉을 수 있었다.
“그래서 네가 직접 나를 보러 왔잖아? 아이르세르.”
[역시 알고 있었네. 이제는 놀랄 것도 아니구나.]
애정??과 님프들의 신인 아이르세르의 신령은 시르와 똑 닮은 얼굴로 방긋 웃었다.
시르가 모시는 여신. 모든 님프의 어머니가 다름없는 존재. 그렇게 따지면 내 장모님이 되지만… 뭐, 어때! 본인도 신경 쓰지 않는 일에 내가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래서 그녀를 대하는 방법은 이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다만, 한가지 반드시 물어볼 게 있었다.
“여러 가지 묻고 싶은 말이 아직 잔뜩 있기는 한데… 너, 시간 괜찮냐?”
[아니. 앞으로 5분 정도일까.]
“…하아. 그런 중요한 건 반드시 미리 알려줘야 한다는 걸 굳이 설명해줘야 하나?”
[조금 있다가 하려고 했어.]
“끝나기 1분 전에?”
[역시 똑똑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이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면 장모님을 패는 게 되는 걸까?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2초 정도 한 뒤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됐고. 선수금이나 빨리 줘.”
[선수금…?]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에 하마터면 주먹이 나갈 뻔했다. …그래. 감성이 다르지. 그래도 날로 먹으려는 심보는 정말 열 받는군. 본인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호구가 아니야.
“설마, 정보만 준 거로 끝내려고? 그런 중대한 일들을 맡긴다면 당연히 선수금도 줘야지. 선수금이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돈을 달라는 건 아니고. 내게 도움이 되는 물건을 주면 돼.”
[……미안. 생각도 못했어.]
아이르세르는 시묵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래도 뻔뻔하게 나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은 마음에 드는군. 감성은 다르지만, 양심은 있다는 점에서 웬만한 인간보다는 낫다.
“쯧. 당장 가지고 있는 건 없나. 그러면 축복이라도 해줘. 되도록 영속되는 거로. 신이니까, 그 정도는 가능하지?”
[음. 불가능하진 않지만…. 그대에게 축복을 걸어줘 봐야 그다지 쓸모없을 텐데?]
“…축복도 신성력이라서 그런 거냐. 그거 내가 받는 쪽도 문제가 되는 거냐고.”
[당연하지. 그대의 육체는 신성력만이 아니라 마력도 거부해. 그것이 그대에게 이로운 것이라 해도, 저항하고 분해해버리겠지. 음. 혹시 회복 성법을 받아본 적 없어?]
“있어. …괜히 오래 걸린 게 아니었군.”
자주랑과 싸운 뒤에 부러진 팔을 시르는 성법으로 치료해줬다. 그때도 시르의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 시르는 별말 하지 않았는데, 그때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던 거겠지.
내가 마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을 보고 짐작 가는 게 있었겠지만, 나를 배려해서 말하지 못했을 거고. 신령보다 아는 게 적을 테니, 명확한 원인은 모르면서 내가 마력과 신성력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말밖에 해줄 수 없었을 테니 말이야. 정말 천사 같은 마음씨라니까.
[맞아. 그래서 그대에겐 영속되는 축복을 걸어줄 수 없어. 보통 사람이라면 평생 지속하는 축복이라도 그대는 세 달 만에 해체 시켜 버릴 거야. 당연히 축복의 효력도 계속해서 떨어질 테고. 그대의 영혼육백은 계속해서 신성력을 깎을 테니까.]
“…그럼 장비에 걸어주는 건? 그것도 안 되나?”
[그대의 육체와 직접 접하고 있는 건 안 돼. 예를 들어서 그 특이한 옷이라든가.]
“그럼 칼은 되겠군.”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촌장을 만나러 갈 때도 차고 갔던 곡도의 손잡이를 툭 건드렸다. 아이르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해. 다만, 영속까진 못 돼. 아마, 10년이면 효력을 다하지 않을까. 당연히 축복의 성능도 계속해서 떨어질 거야.]
“…손만 닿아도 그러냐고. 뭐, 어쩔 수 없지. 그거라도 해줘.”
[알았어. 잠시 기다려.]
아이르세르는 눈을 감았다. 그러자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새하얀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래도 나는 그녀의 모습을 완전하게 인지할 수 있었지만, 마을 전체가 새하얗게 빛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의 광량이었다.
그것에 불안을 느끼는 순간, 새하얀 빛이 폭발했다. 그 다음, 한 점으로 응축되더니, 거대한 광선으로 변해 내 곡도를 향해 쏘아졌다.
파아아아아앙
기묘한 울림이 퍼지고, 손잡이부터 칼날까지 새하얀 기운이 한번 흩고 지나가자, 칼날이 떨렸다.
지이이이잉
가슴을 울리는 검명은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나는 크게 감동했다. 무협지에서 검명을 본 뒤로, 그것을 듣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그것을 이세계에 와서 경험하게 되다니! …그게 내가 신검합일을 이룩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검명이 사라지고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던 새하얀 빛도 사라졌다.
아이르세르의 육체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빛의 입자로 변하면서 흩날리는 그녀는 나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내 축복이 그대의 여정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
“그래. 잘 쓸게. 그리고 시르에게 더 잘해줘라. 따지고 보면 나는 용사고, 시르는 그런 용사를 보좌하는 성녀잖아?”
본인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태연하게 하면서 장난스럽게 웃자 아이르세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당황하는 모습을 즙겁게 보고 있을 때, 몸의 절반이 사라진 아이르세르가 활작 웃었다.
[그 아이는 정말 큰 사랑을 받고 있구나. 부러워. 알았어.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게. 아. 혹시 진짜로 내 용사가 될 생각은 없어?]
“절대 없어. 농담이라고. 농담.”
[후후. 그럴 것 같았어. …그래. 시간이 없는 게 이렇게 아쉬울 줄은 몰랐어. 그럼 안녕. 우리의 용사님.]
“에에. 괜한 농담을 했네.”
나는 투덜거리면서 아이르세르를 배웅했다.
그녀는 그런 말에도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미소도 이윽고 빛의 입자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천상으로 돌아간 거겠지. 신들이 살고 있다는 천상으로….
언젠가, 나도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
“하. 시르에게는 승천 같은 건 생각도 말라고 했는데, 나도 다를 바 없구만. 뭐, 내가 원하는 승천은 조금 다르지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잠시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 세계의 별자리는 당연히 지구와는 다르다. 별의 밝기도 지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다. 모든 것이 지구의 밤하늘과는 다르다. 하지만 밤하늘의 아름다움은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별 아래에서 기수식을 취했다.
태극팔괘도의 기본자세.
이어서 천천히 품새를 펼치기 시작했다.
품새와 실전에서 사용하는 기술은 다르다.
품새는 속도도 느리고 실리는 힘도 적다. 하지만 품새로 그리는 투로는, 형?은 실전에서 기술을 쓰기 위해선 반드시 능숙해져야 하는 길이다.
손이 길을 그리고 몸이 그 길을 따랐다. 춤을 추듯이 품새를 펼치고 형?에서 형?으로 이어지는 길에 의?를 담는다. 의?는 념?을 끌어당겼고, 념?은 심心을 곧추세웠다.
형의념심???心
태극팔괘도의 핵심 사상을 처음부터 펼쳤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초심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나아간 길을 처음부터 다시 되짚는다.
나는 이 수련 방법을 발견한 뒤로 15년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시행했었다. 하지만 2년 전부터 이 수련을 그만 뒀다. 이 이상 나아갈 길을 발견하지 못햇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무의미한 행동을 몇 년이나 계속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아니다.
길은 찾았고 이제는 그 길을 걸어갈 일만 남았다. 그 길의 끝에 도착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이고 노력의 방법을 아는 천재이며 그 모든 것을 즐길 수 있는 심성의 천재이다.
별빛 아래에서 내가 가진 모든 기술을 처음부터 펼치면서, 나는 웃었다.
즐겁게. 즐겁게. 즐겁게.
춤추며. 춤추며. 춤추며.
노닌다. 노닌다. 노닌다.
내가 숙소로 돌아간 것은 해가 뜨기 시작했을 때였다.
숙소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시르는 활짝 웃고 있는 내 얼굴과 허리춤의 곡도를 보고 수많은 말들을 삼키고 딱 한 마디만 했다.
“축하합니다. 시그 님.”
“고마워. 시르. 그리고 사랑해.”
“…………. 저도 사랑합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는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기공도 마법도 성법도 쓰지 못하지만, 오늘 나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