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6화 우당탕탕 모험가 생활
* * *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새하얀 빛 속에서 드디어 제대로 인식하게 된 얼굴에서 보인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에.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내 인지능력이 잘못되었을 리가 없다. 내 영혼이 그녀의 얼굴을 잘못 기억할 리가 없다.
신령의 얼굴은 시르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
마치, 일란성 쌍둥이처럼.
어찌 된 일이지? …설마, 일부러 나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걸까? 아니, 그건 아니야. 신령은 내가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애초에 신령을 뒤덮은 새하얀 빛은 인간의 인지능력을 심하게 떨어트린다. 나조차도 한참을 집중해서야 이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저 얼굴은 나를 동요시키기 위해서 만들고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본래부터 저 얼굴이겠지.
그렇다는 것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는 사고를 되돌렸다.
……위험해.
하마터면 저 쪽에게 내가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킬 뻔했다. 약간의 동요가 드러나기는 했지만….
[역시, 그대라도 이 존재에게는 당황하네?]
“…그러게. 천의 가면이라. 별명만 들어도 골치가 아파.”
신령은 내가 다른 이유로 동요했다고 멋대로 오해했다. 다행이다. 이 녀석이 내 마음을 깊은 곳까진 보지 못해서. 어째서 그럴 수 있는지는 짐작 가는 게 있지만, 물어볼 수도 없으니, 당분간은 확신할 수 없겠지. 능청을 떨면서 관자놀이를 짓누르자 신령은 즐겁게 웃었다.
[다른 아이들이 놀라는 것과 그대가 놀라는 것은 다가오는 느낌이 전혀 달라. 그래. 천의 가면은 신들의 눈마저 속일 수 있는 가면을 쓰는 존재. 우리조차도 놈이 어떤 가면을 쓰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지 못해. 그동안 얻은 정보를 통해 그런 존재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
“그래도 특정 지은 자들이 있으니 알았겠지? 누구누구야?”
[천신교의 주교. 위크리아 왕국의 황금사자 기사단장. 테미르트 상단의 주인. 우리가 알아낸 그 존재들이야. 알아낸 뒤에 곧바로 모습을 감추었지만.]
“……돌겠네.”
이건 연기가 아니라 진심이다. 그래도 신령의 얼굴보다는 내 머리를 덜 아프게 만드는 문제였다. 신마저 속이는 변장술의 귀재. 하늘의 가면이라는 별명은 그런 뜻이겠지.
…타라스트의 시의원들을 부추긴 놈도 이 자식이겠지.
시의원 중에 천의 가면이 숨어 있다. 도시로 돌아가면 시청에 처들어가서라도 찾아야겠군. 그 뒤에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의원이 없어서 찾을 방도가 없었는데, 놔두면 더 위험해질 것 같은 놈이다.
타르스트에 신의 파편이 있다는 걸 알아낸 거도 그 녀석이겠지. 과연, 비밀 조직 간부들의 수장이라 불릴 만한 활약이다. 기사단장도 해봤다고 하니, 무력도 출중할 테고. 천신교의 주교는…. 으음?
“그런데 천신교의 주교라니? 놈들은 잊힌 신들을 추종하는 거 아니었어? 신성력은 신앙심이 없으면 쓸 수 없을 텐데?”
[우리도 처음에는 몰랐어. 그래서 천신교에서 수상한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서 조사 끝에 주교 중 한 명이 암약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신앙심을 위장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었던 건지는 몰라. 그 녀석도 잘 모르더라고.]
내 의문에 신령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녀석이라는 건 천신을 말하는 건가? 분명 이름이 리아스리그였지?
“…자기 신성력을 빨아 먹히는데 상대가 무슨 생각인지도 모른다는 거냐.”
[우리는 힘을 빌려달라는 아이들의 깊은 속마음까지 알지 못해. 진실한 마음만 전해지면, 그 뒤에는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힘이 내려질 뿐이야.]
신앙심과 신성력과 성법의 관계는 책으로도 보고 시르에게도 배워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천의 가면이라는 놈이 천신교의 주교까지 올라간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세계는 신을 등쳐 먹는 게 그렇게 쉬운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신을 등쳐 먹으려고 하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것은 그만큼 신들이 지상에 관심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녀석은 신자들의 마음을 깊숙한 곳까진 모른다고 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 위까지는 아주 잘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다수는 속마음을 아주 깊은 곳까지 숨기지 못한다. 하물며 상대가 신성력을 내려주는 신이라면야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직위가 높은 종교인일수록 그들이 따르는 신의 교리에 충실하다. 그리고 악신이 아닌 이상에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교리가 한가득이라, 이 세계의 종교인들은 지구와 비교하면 압도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깨끗했다.
뭐, 부정을 저지르는 종교인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비율이 적고 그 해악도 작은 구조이다. …반대로 그만큼 실존하는 신들의 영향력이 강한 만큼 그 신이 사악하면 거리낌 없이 악행을 저지르지만.
그래. 악신의 추종자 새끼들처럼 말이야.
이세계에서 종교인들의 해악이란 악신을 믿는 놈들이 저지르는 것이 99.99%다. 뭐, 정작 그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을 악신이라고 부르면 화를 낸다고 한다지만.
이런 점만큼은 지구보다 훨씬 낫네. 지구의 가장 큰 종교가 이제까지 저질렀던 잘못들을 생각하면, 이 세계의 종교는 대부분이 선순환만 일으켰다. 실존하는 신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인가.
뭐,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놈들의 수장에 가까운 놈이 그런 위장이 가능하다는 거지. 꼬리를 잡으면 반드시 처죽여야겠군.
“어련하실까. 그래. 그놈이 어떤 구조로 그런 일이 가능한지는 당장은 모르고 힌트도 없다는 거군?”
[맞아. 오히려 그런 인간의 기술은 그대 같은 인간들이 더 잘 알 거야. 우리들의 말이 닿는 아이들에게도 알리기는 했지만, 그대보다 믿음직한 인간은 없어.]
“그것 참. 고맙네. 그래서 ‘여명’이라는 놈들에 대한 건 그게 끝?”
[음. 더 떠오르는 게 없네. 정말 끝이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뭐, 그럭저럭 도움이 되는 정보네. 특히 몇 놈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꽤 큰 수확이다. 천의 가면이라는 놈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크다. 걸리기만 해봐라. 작살을 내주마.
“그럼 다음은 악신의 추종자들이군.”
[어리석기 짝이 없는 아이들이야.]
신령은 여명과는 달리 이번에는 경멸의 감정을 내비쳤다. 여명은 그래도 동정하는 기색이었는데, 이쪽은 아예 혐오하는군. 하긴, 오래전에 죽은 동족을 여전히 추종하는 것들과 성향이 정반대되는 동족을 추종하는 것들을 대하는 건 다를 수밖에 없겠지.
“주변에 민폐 끼치는 건 여명이랑 다를 게 없는데.”
[그 아이들은 멸망한 동족들을 부활시키는 게 목적일 뿐이야. 하지만 악신의 추종자들은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더 나아가 천상도 악신의 손에 떨어지길 원하는 것들이야.]
아이들과 것들. 동족과 악신.
단어 선택만으로도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알기 쉽군.
“확실히 정도를 따지면 그쪽이 더 심하네. 죄다 쳐죽여도 되는 것들 뿐이야.”
내 입장에선 여명도 마찬가지지만. 이 말은 굳이 할 필요 없겠지.
신령은 내 과격한 말에 동의를 표했다.
[맞아. 세상에 있어봐야 좋을 게 없는 것들이지. 그것들에 대해선 말해 줄 게 많아.]
여명과는 달리 악신의 추종자들에 대해서 신령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정말 많았다.
놈들의 조직도라든가. 주요 간부들이라든가. 주요 거점의 위치라든가. 어떤 국가의 어떤 귀족들이 놈들과 내통하고 있는 것 같다든가. 정보의 양과 질에서 여명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만큼 악신의 추종자들이 여명보다 더 많이 날뛰고 있다는 소리도 되었다. 심심하면 인신 공양으로 마을 하나를 전멸시키는 놈들이라니. 왜 이것들이 아직 멸종당하지 않았는지 의문일 정도다. 그 의문의 답은 신령의 입에서 금세 나왔다.
[‘악신의 칼날’이 강하니까.]
악신의 칼날. 여명으로 치면 사도에 대응되는 놈들이다. 악신에게 직접 힘을 부여받은 것들. 그만큼 강력한 신성력으로 막강한 성법을 사용하며, 기공과 마법도 상당 수준으로 익힌 살육자들이다.
신령의 말로는 천신교의 성기사 100명이 단 한 명의 악신의 칼날에게 전멸당한 적도 있다고 했다. 천신교는 사람들의 불안을 키우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비밀로 했고, 그 악신의 칼날을 죽이기 위해 교단의 총력을 쏟아부었다.
결국, 천신교에서 용사라 불리는 소녀와 그 동료들의 손에 악신의 칼날은 물리적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부활의 권능도 있다고 하는데, 부활 할 때마다 고깃조각으로 만들어서 결국 완전히 숨통을 끊었다고 한다. 여기 용사님은 화끈하시네.
그리고 그게 고작 7년 전이다.
…상당히 큰일이었는데 언급하는 책이 없던 것을 보면 정보관리를 정말 철저히 했군. 뭐, 이런 놈들의 행적은 널리 알려봐야 일반인들의 불안감을 부추기고 오히려 놈들의 신자를 늘릴 뿐이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까. 부화뇌동하는 것들도 쏟아질 거고. 비밀주의가 그리 좋은 건 아니지만, 필요한 곳도 반드시 있다.
그나저나 악신의 칼날이라는 것들은 진짜 위험한데. 결국, 용사라 불리는 소녀에게 쓰러졌으니 무적은 아니겠지만, 해낸 업적만 생각하면 여명의 사도들보다 강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여명의 사도 녀석들과 비교하면 수준 차이가 너무 심한데?”
[아니. 오히려 평균 수준을 따지면 그 아이들이 더 강해.]
“뭐? 하지만 내가 경험한 녀석들의 수준은….”
[그건 그대가 그 아이들보다 강하기 때문이야. 자주랑이라고 불리는 아이만 하더라도, 지금 천신교의 용사아이와 그 동료 아이들을 혼자 여유롭게 죽일 수 있을 거야.]
“…와우.”
…이건, 진짜 의외다. 아니, 그러면 그 짐승 새끼보다 한참 약한 녀석에게 성기사가 100명이나 죽었다는 소리잖아?
뭐지? 이 세계의 파워레벨이 그 정도로 낮은 건가?
하지만 신령이 직접 강하다고 인정할 정도이고, 이 세계의 몬스터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그렇게 약할 리가 없다.
오래된 종교의 정예 성기사들이 그렇게 약하다면 이 세계에 인간들의 문명은 꽃을 피우지 못했을 거다.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걸까?
내가 의아해하자 신령도 의아한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놀라는지 모르겠네. 그대는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나도 내가 강한 걸 알아. 하지만, 내가 상대한 녀석들의 수준을 생각하면…. 성기사들이 그렇게 약한가? 라는 생각밖에 안 든단 말이지.]
[아니. 그 녀석의 아이들은 강해. 단순한 강함만 비교하면 나의 아이들보다도 강하지. 그런 아이들을 백이나 죽인 악신의 칼날도 강해. 그 악신의 칼날보다 용사 아이와 그 동료 아이들이 강해. 그리고 그 아이들보다 자주랑이 더 강해.]
”…나도 아는 사실을 쓸데없이 길게 늘어 놓지 마.“
[그런데 왜 약하다고 하는 거야?]
”………흐음.“
나는 대답 대신 턱을 쓰다듬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걸까?
뭐, 그야. 이제까지 싸웠던 녀석 중에 목숨의 위기를 느낄 정도의 상대는 없었다. 위험한 순간들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전부 극복 가능한 위기였다.
…아무래도 이건 내가 이제껏 만난 놈들을 전부 현대 병기와 무의식적으로 비교해서 생기는 문제 같군.
야천랑은 전차 2소대면 큰 피해 없이 잡는다.
자주랑은 전차 4소대면 큰 피해 없이 잡는다.
청자경은 전차로는 상대하기 힘들고, 대신 전투 헬기가 4대만 있어도 여유롭게 잡을 수 있다.
홍마창도 청자경과 비슷하다. 화력은 더 놓아 보이지만, 기동성이 떨어지니까.
적마희? 얘는 본체의 전투력으로는 전차 1소대도 감당하기 힘들다. 채찍으로 엔진을 노려서 한 대, 마안으로 한 대를 잡으면 남은 한 대에 산산조각이다. 미노타우르스와 오우거는 파워는 있지만, 속도가 느려서 전차의 밥이고.
뭐, 얘네들이 몸빵하면 한 소대는 잡겠네.
이처럼 현대 병기와 비교를 하다 보니, 나는 이 녀석들이 그렇게까지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조차도 전력을 다해도 기갑사단을 혼자 감당하기 힘들다. 뭐, 특제 무기들을 쓰면 가능하지만, 지금은 무리지.
고화력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들이라면 조금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결국 대인 레벨의 기술밖에 안 된다면 현대 병기와는 끝까지 비교하기 힘들다.
…후우. 현대 병기와 비교하는 건 그만두는 게 좋겠네. 나쁜 버릇이야. 여기는 검과 마법의 판타지 세계. 사람을 효율적으로, 최대한 많이 죽이기 위해 발전한 무기들과 비교하는 건 옳지 않다.
”뭐, 됐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그놈들에 대한 정보는 그걸로 끝이야?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지.“
[흐음. 똑똑해서 그런가. 다른 아이들과는 시각이 많이 달라. 알았어. 그럼 마지막. 최근 자주 벌어지고 있는 차원 전이 현상이야.]
앞의 두 개도 상당히 흥미 있는 정보였지만, 이것만큼은 아니다. 나하고 가장 밀접하게 연관된 정보이니까. …조금이지만 긴장되네. 아직, 이 녀석이 내가 이세계인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확신할 수가 없어.
신령은 담담한 얼굴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차원에 구멍이 뚫렸어. 이대로라면 10년 이내로 우리들의 세계는 멸망할 거야.]
”그걸 왜 그렇게 담담한 얼굴로 말하냐고오오오!!!“
내가 왜! 달밤에! 이런! 고함을! 질러야! 하냐고오오오!!!
키애애애애애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