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63화 우당탕탕 모험가 생활
* * *
내가 만들어낸 침묵은 오래 가지 않았다.
굳어 있던 사람 중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오우거였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괴성에 초목이 흔들린다.
사자후냐! 몬스터 주제에 불가공부의 정수를 쓰지 마! 속으로 말도 안 되는 불평을 내지르며 곡도를 휘둘러서 두 마리의 목을 더 베었을 때, 오우거의 괴성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아!”
“캬오오오오오!”
“키에에에에에!”
놀들이 제각기 괴성을 내지르면서 상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검, 도끼, 창 같은 무기를 든 놈들은 돌진하고 몇 안 되지만 활을 든 놈들은 화살을 쏘았다.
수가 네 배나 차이가 났고, 그렇다고 개개인의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게 아니던 호위 병력은 몬스터들의 기세에 기가 눌려 있었다. 내가 단번에 다섯 마리의 놀을 베어 죽이고 추가로 네 명을 더 죽였음에도 병사들의 사기는 쉽사리 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반전은 놀들이 시르의 보호막에 부딪히는 순간 일어났다.
티티티티티팅!
“쿠억!”
“카악!”
“케엑!”
화살이 튕겨 나가고 돌진하던 놀들까지 튕겨 나가자 병사들의 안색은 빠르게 변했다. 수십 마리의 놀들이 보호막을 돌파하지 못하고 바닥을 뒹굴고 그 위에 튕겨 나온 화살이 떨어지는 광경에 실소를 짓는 자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시르의 단호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이 보호막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공격은 막지 않습니다!”
“우오오오오!”
“이야아아아!”
피로스와 세랴는 그들을 옥석으로 승급시킨 접수원의 안목을 증명했다.
단번에 보호막의 끝부분으로 돌진해서 제각기 무기를 휘둘러 쓰러진 놀을 찌르고 골통을 박살 냈다. 피로스의 검술은 달인이 될 수 있는 체계가 잡혀 있었고 세랴의 메이스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게 기세가 매서웠다.
고용된 모험가들이 가장 먼저 활약하는 것에 자극받은 걸까? 상단주의 마차를 지키고 있던 호위대장의 추상같은 목소리가 병사들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뭣들 하는 거냐! 당장 공격해!”
“공격! 보호막에 나가지 않게 공격!”
“무리해서 몸을 밖으로 빼지 마! 침착하게 한놈 한놈 찌르는 거다!”
“허둥거리지 마! 보호막 밖으로 나가지만 않으면 안전해!”
“우, 우와아아아아아!”
“죽어! 죽어! 죽어!”
호위대장의 외침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소대장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몬스터를 공격하자 병사들도 용기를 내서 맹렬한 기세로 공격에 나섰다. 시르의 보호막을 부수기 위해 용을 쓰던 놀들은 모험가와 병사들의 반격에 순식간에 십여 마리가 쓰러지고 기세가 꺾였다.
“하나. 둘. 셋. 폭풍은 벼락을 부르고, 벼락은 하늘과 대지를 잇는다! 내가 명하니, 와라! 벼락이여!”
그때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주문이 들리고
콰르르르릉!!!
문자 그대로 벼락이 떨어졌다.
치이이이이익.
작은 소녀의 지팡이에서 뻗어 나온 번개 줄기에 맞은 일곱 마리의 놀은 시커멓게 변해서 김을 뿜어냈다. 그 놀라운 광경에 놀들은 기겁하면서 물러섰고, 일부 병사들도 기겁해서 뒤로 물러서거나 넘어졌다.
정작 그 광경을 일으킨 사람도 파직파직 스파크가 튀는 자신의 지팡이를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역시 실전에서 마법으로 몬스터를 죽여 본 건 처음인가? 그렇게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안전한 곳에서 첫 실전을 경험하는 것은 나쁜 경험이 아니야.
어쨌든, 라냐의 마법을 끝으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병사들의 기세는 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고 놀들의 기세는 바닥을 모르게 떨어졌다. 이 몬스터 군단의 지휘관인 오우거의 외침의 약발이 금세 떨어진 것이다.
나는 그때 스물세 마리째 놀을 쳐죽이고 있었다.
내 활약에 정면을 포위했던 놈들의 대부분은 목이나 허리가 잘려나가 바닥을 구르고 있었고 남은 놈들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그 결과 상단을 공격하는 무리는 양옆과 뒤쪽뿐이었다.
그래서 상단의 병력은 정면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여기 트롤에 오우거까지 있는데 아무도 관심 안 주는 거 실화냐. 너무하네. 진짜. 결국, 나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개소리지만.
댕겅!
가볍게 휘두른 일격이 놀의 허리를 갈랐다. 살가죽과 내장, 척추를 단번에 잘라버린 칼날이 그 어디에서도 흠집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역시 무기를 드는 편이 더 강하다니까. 당연한 얘기지만.
나는 권법도 좋아하지만, 순수한 전투력만 따지면 도검을 들었을 때가 권법을 쓸 때보다 세 배는 강하다. 이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도 맨주먹인 내가 세 명이 있어야 도검을 든 나와 대등한 전투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거기다가 이 곡도는 그 야천랑의 발톱으로 만든 무기. 지구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명도다. 뭐, 내가 직접 만든 그것들에 비하면 몇 단계는 떨어지지만.
야천랑의 발톱으로 만든 곡도는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카타나나 세이버가 아니라 월도月?의 형태였다. 다만, 꺾인 부분의 각도가 좀 더 가파르고 칼등에도 날이 서 있었다. 이는 칼날의 재료인 야천랑의 발톱 모양 때문이었다.
야천랑의 발톱은 바위를 갈라도 흠집조차 나지 않고, 심지어 이 세계의 평범한 강철 정도는 두부처럼 잘라버릴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강도를 가졌다.
그런 걸 무기로 사용하면 당연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겠지만, 그만큼 단단하다는 건 가공하기도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연마하면 무기로 사용하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나는 유심히 눈여겨봤던 대장간의 시설을 대여해서 발톱을 직접 무기로 가공했다.
발톱을 그대로 무기로 쓰려면 낫으로만 쓸 수 있다. 발톱의 가장 날카로운 부분이 끝이 휘어진 안쪽이었기 때문이다. 낫을 무기로 못 쓰는 건 아니었지만, 취향은 아니었고, 그런 무기를 들고 다니는 건 너무 눈에 띄었다. 애초에 대낫은 겉으로는 멋있을지 몰라도 실용성은 완전 맛이 간 중2병 무기다. 그래서 멋있지만!
어쨌든, 그런 이유로 발톱을 월도의 형태로 가공했다. 일반적인 공구로는 발톱을 가공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발톱을 이용해야 했고, 그 결과 발톱 두 개를 반 정도 갈아버린 뒤에야 하나의 발톱을 곡도의 형태로 가공할 수 있었다.
호기심에 내 작업을 지켜보던 대장장이들의 그 감탄하고 놀라워하는 모습들이란!
그렇게 탄생한 곡도는 뜻하지 않게 펄스 엣지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칼날이 커다란 물건에 펄스 엣지는 그다지 의미가 없는데 말이지. 애초에 찌르기로 쓸만한 무기가 아니다.
베는 맛은 끝내주지만.
“하핫!”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리며 놀을 수직으로 쪼개버렸다. 정수리부터 가랑이까지 잘린 놀이 양쪽으로 쓰러지고 그 너머로 겁에 질린 놀들이 보였다. 이제 이쪽에 남은 놀은 고작 다섯. 순식간에 34마리를 죽여버린 결과였다.
정면을 포위했던 몬스터들은 숫자로만 보면 몰살당한 상황.
하지만 전력으로는 여전히 가장 강력했다.
“쿠아아아아아!”
“쿠오오오오오!”
왜냐면 트롤과 오우거가 여기 있거든.
갈색 거인. 트롤이 우악스러운 몽둥이를 휘둘렀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서 공격을 피하자, 몽둥이는 옆에 있던 놀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엄청난 완력과 그에 못지않은 속도에 놀의 머리는 폭발한 것처럼 박살이 났다.
휘유~ 파워풀!
책에서 본 대로야. 지구의 판타지 소설에서 묘사되는 트롤과 이세계의 트롤은 공통점이 많았다. 큰 덩치. 강한 완력. 엽기적인 재생능력. 지능은 높지 않고 무기도 원시적인 걸 쓴다. 그것이 크게 단점이 되지 않을 신체능력이 있다.
뭐, 트롤이 지성체로 나오는 작품도 적지 않지만, 단순한 몬스터로 취급되면 저런 이미지다. 피부색이 녹색이 아닌 것만 제외하면 스테레오 타입이지.
그럼 재생력은 어느 정도인지 볼까? 어떤 작품에선 절단 된 신체도 금세 붙었는데. 그 정도려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날아온 공격을 피하면서 무릎을 베었다. 댕겅. 단번에 잘려나간 다리 아래가 바닥을 뒹굴었다. 트롤의 커다란 눈이 더욱 커졌다. 균형이 무너져서 몸이 휘청거렸다.
재생은… 되지 않는군. 아니, 정확히는 잘려나간 부분이 재생되고는 있었다. 하지만 신체 부위가 재생되는 게 아닌, 상처가 메꿔지는 수준에 불과했다. 바닥에 떨어진 다리가 다시 떠올라 붙는 일도 없었다.
하긴, 그런 흡혈귀 같은 수준의 재생력이 있었다면 트롤의 위상이 더욱 높았겠지. 책에서는 어지간한 중상도 가볍게 회복하는 괴물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신체 절단까지 회복하지는 못하나 보다. 약해. 더 볼 것도 없군.
트롤은 간신히 균형을 잡으면서 몽둥이를 내리쳤다.
“쿠어어어어!”
처절하게까지 느껴지는 기성이 뒤따라온다. 그것까지 베어내듯이 하늘로 검을 휘둘렀다. 내리치던 팔뚝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조금 늦게 머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무기가 좋으니 이렇게 두꺼운 놈도 단번에 베어버릴 수 있군. 그날 썼던 롱소드라면, 이렇게 압도적으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트롤을 단번에 죽여버리고 잠시 여운에 잠겨 있을 때 정수리를 향해 거대한 대검이 떨어졌다.
쾅!
대검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애꿎은 산길에만 흔적을 남겼다. 옆으로 훌쩍 물러나서 공격을 피한 나는 눈을 부라리고 있는 오우거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었다.
“이젠 네 차례라는 걸 아는 구나?”
“크아아아아악!”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려는 걸까? 오우거 놈은 괴성을 지르면서 대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트롤보다 빠르고 강하지만, 딱 그것뿐이다. 그날 밤에 싸웠던 오우거보다도 훨씬 느리고 약한 공격이다. 그놈의 공격은 나도 꽤 집중했었지만, 이놈은 하품하면서도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
기술? 말할 것도 없었다. 오로지 타고난 근력과 체격에만 의지한 휘두르기! 검술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뭐, 강력한 육체를 가지고 있으면 기술은 부차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와 신체능력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을 때의 얘기지, 비슷한 수준이라면 당연히 기술이 있는 쪽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힘을 끌어내는 방식부터, 힘을 사용하는 방식까지.
무술이란, 신체를 최적의 효율로 사용하고 힘을 증폭시키는 기술이다. 만화처럼 모든 공격을 흘려내는 화경 같은 건 확실히 꿈같은 얘기지만, 그 원리의 근원을 깨닫는다면 비슷한 짓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제까지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거칠게 날아오는 대검에 곡도를 가져다 댔다. 압도적인 질량 차이와 속도 차이는 내가 아무리 힘이 강해도 팔이 날아갈 정도였다. 하지만 대검과 곡도가 충돌하는 순간 날아간 것은 내 팔이 아니라 대검이었다.
태앵!
전력을 다해 휘두른 오우거의 대검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충격에 떨리는 팔과 하늘로 치솟은 대검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오우거의 눈동자에 놈의 바로 앞에 있는 내 모습이 비쳤다. 그 안에 어떤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공포.
그래. 두려워해라. 식인 괴물 자식아.
곡도가 아닌 다리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놈의 무릎을 향해 내리찍었다.
곤괘?? 지락??
쿵!
단번에 오우거의 무릎이 박살나고, 놈의 허리가 앞으로 굽어졌다. 그리고 충격의 반동으로 치솟아오른 내 발이 놈의 명치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건괘?? 승천??
명치를 꿰뚫은 발끝이 놈의 폐와 심장을 짓눌렀다. 한순간에 얼굴이 새하얘진 놈의 허리가 다시 꼿꼿하게 세워졌다. 나는 올라간 다리로 진각을 밟으면서 곡도를 수평으로 휘둘렀다.
이 일격은 산을 가를 일섬이다.
간괘?? 절산山
야천랑의 발톱이 공간을 갈랐다. 살가죽과 내장, 척추가 잘린 오우거의 상체가 뒤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때를 맞춰서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내 몸이 완전히 뒤로 돌아가는 순간, 쿵 소리를 내면서 오우거의 상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뒤이어 내가 한 발자국으로 앞으로 걷는 순간, 놈의 하체가 앞으로 넘어졌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의 호흡이 멈춘 것 같았다. 심지어 시르 마저도 멍하니 나를 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과 몬스터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즐기면서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러다가 내가 옆까지 왔음에도 멍하니 있는 놀 한 마리의 목을 무심하게 날려버리고서 말했다.
“뭐합니까? 싹 쓸어버리지 않고.”
그 말이 신호탄이었다.
호흡이 정지되어 있던 것 같은 장소에 뜨거운 열기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그 함성은 몬스터들의 비명을 집어삼키고 산길을 놈들의 피로 물들였다.
그 학살의 현장에서 나는 태연하게 시르에게 걸어갔다. 보호막을 완전히 해체한 시르는 약간 지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내게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온 세상을 다 가진 것같은 행복을 느꼈다.
그래. 이게 인생이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