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62화 우당탕탕 모험가 생활
* * *
“우리 도시의 영웅이 호위를 맡아 주신다니! 이런 영광이!”
“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것까지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물론입니다! 허허허. 불편한 일이 없도록 모시지요!”
“저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의뢰를 수행하도록 하죠! 몬스터도 도적이고 뭐고 오는 대로 족족 박살을 내주겠습니다!”
“크아! 영웅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헤헤.”
호위 의뢰를 요청한 상단주는 살집이 보기 좋게 올라온 중년 남성이었다. 어디를 봐도 전형적인 악덕 상인처럼 보이는 그는, 저래 보여도 상당히 입지적인 인물이었다.
히리에의 말로는 어린 시절 도적에게 부모를 잃고 발품팔이로 시작해서 40대 중반인 지금에 이르러서는 대형 상단의 주인이 된, 타라스트에서도 매우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만나본 인상으론 어디 가서 사기를 당하거나 손해를 볼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의 상당 규모를 생각하면 고작 옥석 등급 모험가들 정도는 가볍게 취급해도 뭐라 할 사람이 별로 없을 텐데, 이렇게나 깍듯이 대하니 말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상대가 나니까 그렇고, 다른 모험가들에게는 계약한 만큼의 대우를 해주었지만, 그게 어디야. 무엇보다 그에게선 필요 이상의 권위적인 모습과 오만함이 엿보이지 않았다. 큰 재액을 만나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사람이다.
어쨌든, 시세를 잘 알고 사람의 가치를 잘 판단하는 상단주 덕분에 우리는 호위 의뢰로 왔으면서도 제법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다만, 상단주의 같은 마차에 타고 가자는 요청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애초에 호위 의뢰를 받은 모험가가 해도 되는 행동이 절대 아니고, 그가 나를 시험하려는 의도를 바로 알아챘기 때문이다. 남에게 시험받는 걸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뭐, 고용주의 입장으로 생각해 보면 나쁘게 볼 일도 아니다.
요청을 거절했음에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은 걸 봐선, 내가 명성만 높은 머저리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했던 거겠지.
뭐, 머저리인 편이 이용하기는 더 쉬웠겠지만, 머저리가 아니어도 자기에겐 손해가 아니고, 인간적인 호감도도 이쪽이 더 높았을 테니 저런 미소를 보인 거겠지.
그렇게 의뢰를 받은 다른 모험가와 같은 마차를 타고 가게 된 우리는 그들과 통성명을 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옥석 등급 모험가인 피로스입니다.”
“안녕하세요. 마찬가지로 옥석 등급 모험가인 셰라입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녀 모험가. 2인 파티로 움직이는 그들은 나도 길드에서 몇 번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자들이었다. 딱 봐도 연인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다. 건너 듣기로는 소꿉친구라고 들었다. 낭만적이야.
“반가워요. 옥석 등급 모험가인 시그입니다.”
“반갑습니다. 옥석 등급 모험가인 시르입니다.”
“아, 안녕하세요. …새싹 등급 모험가인 라냐라고 합니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좋았다.
다섯 명이 타기엔 조금 좁은 감이 있었지만, 분위기에 악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나는 조금 있다가 지붕 위로 올라갈 생각이었고.
피로스와 셰라. 두 사람은 길드에서도 몇 번 얼굴을 봤었고, 건너들은 얘기로도 평가가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직접 마주하니, 딱 봐도 선량한 사람들이라는 게 느껴졌다.
음. 분명 모험가 경력이 올해로 2년째라고 했지? 1년째에 옥석이 되었다고 들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실력이 없는 건 아니다. 오히려 평균보다 실력이 있는 편이다.
모험가는 인성이나 실적도 중요하게 보지만, 옥석까지는 실력을 가장 먼저 보다 보니, 재능이 없는 사람은 은퇴할 때까지 옥석조차 달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어느 정도 재능이 있어도 옥석까지 걸리는 시간은 평균 2년. 1년 만에 옥석이 된 저 두 사람은 제법 유망주다.
한나절 만에 옥석이 되고 한 달 만에 청동이 될 예정인 나하고는 비교하면 안 된다. 시르하고도 비교할 수 없고. 라냐는… 음. 우리와 함께하면 두 달 내로 옥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엔토루 새끼는 세 달 째에 옥석이 되었다고 한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어쨌든 두 사람이 훌륭한 모험가가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길드의 안목은 틀리지 않아서 우리는 금세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이 차이도 그렇게 크지 않아서 말도 편하게 하기로 했고.
그리고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 18살로 아직 10대였다. 액면가가 20대 초반인 건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자라고 2년간의 모험가 활동으로 고생해서 겉늙어 보인 것이었다. 안쓰럽다.
“시그 형님의 활약을 직접 보지 못한 건 아쉽네요. 세랴는 형님이 길드를 공격하던 마법사의 마법을 박살 내는 걸 봤다고 하던데.”
“그때는 정말 굉장했어. 주먹을 몇 번 휘두르니까, 마법이 펑펑 터져 나갔다니까? 시그 님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거예요? 특별한 기공을 익히셨나요?”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기합이야. 기합.”
“기합? 기합이 있으면 마법도 막 부술 수 있고 그러나요?”
“그래. 영혼이 마력에 영향을 주는 건 알지? 강한 영혼은 강한 기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고, 강한 영혼은 강한 마법을 부술 수 있기 마련이지.”
“…와. 왜 나는 그걸 몰랐지?”
“나도 처음 들어봐.”
두 사람은 대화 상대로 꽤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반응도 귀엽고 순수하다. 그렇다고 멍청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는 건 아니다. 애초에 2년간 모험가 활동을 한 애들이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그저 웃으면서 우리를 보는 시르와 아싸답게 대화에 끼어들 틈도 보지 못하는 라냐를 보면서 말했다.
“그건 여기 마법사님들에게 듣는 게 어때? 나도 마법은 이론만 조금 아는 수준이거든.”
“아. 그래도 되나요?”
“왜? 안 될 게 있나?”
내가 의아해하자 피로스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시그 형님은 시르 누님에게 다른 남자가 말을 거는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들었거든요.”
“어제 엔토루 씨와의 일도 있고….”
피로스의 말을 세랴가 받았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니, 농담이 아니라 진담인 듯하다.
…아니, 대체 어디서 그딴 소문이 퍼진 거야? 어제 엔토루 새끼를 박살 낸 것 때문에 그런가? 하지만 그건 정당방위였다고! 오히려 엄청 봐줬거든? 자비로운 판결의 미담이 퍼져도 모자랄 판국에 이 무슨!
억울했지만, 이걸 이 두 사람에게 따져봐야 뭔 소용이 있겠나. 소문 좋아하고 유명한 사람 험담하기 좋아하는 건 대다수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소문은 아니라서 다행이네. 그래. 자기 연인에게 다른 남자가 말 거는 걸 기분 좋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오해를 받아서 좋을 건 없었기에 손사래를 쳤다.
“아니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그야, 작업 같은 걸 걸려는 놈은 모가지를 분질러 버리고 싶지만, 이런 단순한 질문에는 손모가지를 분지르고 싶은 기분조차 들지 않는다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물어볼 거 있으면 물어봐.”
“어. 생각해 보니까, 저는 마법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들어도 이해 못 할 게 뻔하죠! 그, 책을 찾아보겠습니다.”
“저도요! …설마, 여자에게도 그러진 않으시겠지만, 만약이라는 게….”
“허허허. 글쎄, 안 그런다니까. 가벼운 농담이라고 농담.”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는데도 두 사람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대신 시르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다니… 정말 기쁩니다. 그럼 저도 앞으로 시그 님에게 말을 거는 여성분을… 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과격하게는….”
“아니! 시르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농담이라니까!”
“후훗. 저도 농담입니다. 시그 님.”
“아이고. 그렇게 심장에 나쁜 농담은 그만해줘.”
“…혹시 그렇게 행동하는 저는 싫으실까요?”
“그럴 리가 없잖아. 오히려 너무 사랑스러워서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후후. 정말, 역시 시그 님이십니다.”
이 사랑스러운 연인을 어찌하면 좋을까! 꽉 껴안아 주고 싶었지만, 장소가 장소다 보니 한탄스러울 뿐이다!
그때 그런 우리를 죽은 눈으로 보고 있던 라냐가 한탄하듯이 말했다.
“…이걸 계속 봐야 하는 거죠? …힘든 수행이 되겠네요.”
그것 참. 미안하게 됐수다. 그렇다고 자중할 생각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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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은 순조로웠다.
순조롭다 못해 졸릴 지경이었다. 마차의 지붕 위에서 먼 산과 초원을 바라보며 고개를 까닥거렸다.
마차 안의 분위기는 좋았지만,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기에 양해를 구하고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처음에는 신기하고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던 광경은 금세 싫증이 나고 지루한 광경이 되었다.
…경운기를 타고 논밭을 달리던 때가 떠올라서 좋기는 했는데, 그것도 잠깐이지 계속되면 지루해질 수밖에. 어릴 때의 추억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지금은 지구를 떠올리면 괴로워질 뿐이라 멀리하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렇다고 올라오고 얼마나 됐다고 다시 들어가는 것도 뭐해서 멍하니 산과 초원과 상단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상단의 호위 병력은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애초에 이 상단은 타라스트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규모가 큰 곳이다. 그런 상단에 사병이 없을 리가 없다.
법 때문에 일정 이상의 사병은 두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한 번의 상행에 동원하는 사병이 삼십 명은 될 정도다. 뭐, 이번 상행은 상단주가 직접 참여할 정도이니, 평소보다 동원 인력이 많은 거겠지만.
사병의 수준도 나쁘지 않았다. 개개인이 어지간한 모험가보다 훨씬 나을 정도다. 소대장으로 보이는 자들은 피로스보다 강했고 대장으로 보이는 사람은 잔쥬루보다도 강했다.
이 정도 사병이 있는데 굳이 모험가를 고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가 금세 사라졌다. 상단주가 영리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굳이 모험가를 고용해서 데리고 다니는 이유는 필시 모험가 길드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서일 거다. 당장은 큰 이득이 없어도 계속해서 모험가를 호위로 고용한다면 길드에서도 상단주를 우대할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지금의 이익보다 미래의 이익을 생각하고 실행하고 성공할 수 있는 시점에서 상단주는 훌륭한 상인이다. 지구에서는 저것의 반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여기도 비슷하겠지.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기 마련이니.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이번에는 마차를 끌고 있는 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래. 말이다. 놈들은 지구의 말들과 거의 똑같이 생겼다. 덩치가 좀 더 크고 다리가 좀 더 두꺼운 걸 제외하면 서러브레드와 흡사하다. 다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는데 이 말들에게는 하나 같이 이마에 뿔이 달렸다는 점이다.
그래. 뿔이다. 뿔! 유니콘이라고! 오리너구리 같은 것도 있는 지구에서도 존재하지 않았던 뿔이 달린 말이라고!
…뭐, 특별히 이 말들만 뿔이 달린 건 아니고, 이 세계에서 본 말들은 하나 같이 뿔이 달려 있었다. 일반적인 이미지의 유니콘과 다른 점이라면 색상이 흰색만 있는 게 아닌 것과 뿔의 길이가 손가락 두 마디 정도로 짧다는 것 정도다.
더군다나 이 세계에는 유니콘이라 불리는 몬스터가 실제로 존재한다. 말들은 어디까지나 짧은 뿔이 달린 짐승이다.
참고로 짐승과 몬스터의 차이는 가축화시킬 수 있냐 업느냐로만 구분한다. 그거 참, 심플한 구분법이야.
그래도 신기하다. 지구의 동물과 거의 같은 모습의 생물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 세계에 대해서 정말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인간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무슨 추측을 하든 정답을 발견할 수는 없을 테지만 말이야.
이 세계를 창조한 존재를 만나지 않는 이상에는.
여러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 저 멀리 산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짐승들의 대규모 이동인가 싶었는데, 그것과는 조금 낌새가 달랐다.
…뭐지? 뭔가 거대한 생물이 움직이는 것 같은데? 나무의 흔들림이 바람의 흔들림이라 보기 힘들어.
다만, 워낙 미세한 변화이고 나조차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들 정도라서 뭐라 확신할 수 없었다. 문제는 저 산은 상행이 지나가야 하는 길이라는 점이다. …경고는 해둬야겠군. 나는 마차를 몰고 있는 병사에게 말을 걸었다.
“병사 아저씨. 잠깐 시간 됩니까?”
“어, 아. 네. 시그 모험가님. 무슨 일이십니까?”
젊은 병사는 화들짝 놀랐다가, 이내 공손하게 되물었다. 명성이 높으면 이게 편해.
“상단주께 전할 말이 있는데, 잠깐 시간이 되는지 좀 물어봐 주실 수 있겠어요?”
“어, 그런 거라면 제가 전달해드리겠습니다.”
“직접 말해야 될 것 같아서 그래요. 귀찮으시겠지만, 부탁 좀 하겠습니다. 마차는 제가 당분간 몰게요.”
그리 말하면서 나는 대동화 하나를 손가락으로 튕겨주었다. 병사는 깜짝 놀라서 허둥지둥 대동화를 받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힘차게 대답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당장 말씀 전하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을 게요.”
지붕에서 내려온 내가 자리를 잡자마자 병사는 내가 마음이 바뀔까봐 전속력으로 상단주의 마차로 달려갔다. 상단주의 마차는 뒤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려면 고생 좀 하겠지만. 뭐, 서행 중이니 땀 좀 흘리면 되겠지. 대동화 하나는 그 정도의 값어치가 있다.
“시그 님.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시르가 마차에서 상반신을 빼내면서 물어왔다. 귀가 좋은 그녀답게 밖의 대화를 전부 들은 것이다. 나는 걱정말라는 듯이 손을 흔들면서 웃었다.
“아직은 별거 아니야. 기우가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대비는 해둬야할 것 같아서.”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내 대답에 시르의 분위기가 180도 변했다. 당장이라도 전투를 벌일 수 있는 준비에 들어간 시르가 너무나도 믿음직스럽다. 뭐, 나와 시르가 있으니, 어지간한 상황이 벌어져도 별 문제는 없겠지.
“아직은. 때가 되면 신호할게. 저기 산에 들어갈 때부터 긴장해야 할 것 같아.”
“알겠습니다. 안에도 전달해 두겠습니다.”
“응. 나는 계속 밖에 있을게. 그 편이 보기 더 편하고.”
“네. 저는 언제라도 밖으로 나올 수 있게 준비해두겠습니다.”
“시르만 믿어.”
“저도 시그 님을 믿습니다.”
훈훈한 대화 끝에 우리는 훈훈한 미소를 주고받았다. 그때 상단주에게 말을 건넨 병사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시르도 그것을 보고는 마지막으로 훈훈한 시선 교환을 하고 다시 마차로 들어갔다. 그쪽은 믿고 맡기면 되겠지.
“허억! 허억! 허억! 후우! 시, 시그 모험가님! 상단주께서 직접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고생하셨어요.”
심부름 값으로 대동화 하나를 더 던져주자 병사는 지친 기색에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봉급이 짜진 않을 것 같지만, 역시 이런 사람들에겐 대동화 하나도 크다.
나도 초기에는 대동화 몇 개에 감동했었지. 고작 16일 전 일인데도 굉장히 오래 전 같네.
병사와 마부 역할을 교대한 나는 순식간에 상단주의 마차로 접근했다. 굳이 달릴 필요는 없었다. 걷는 것만으로도 바람을 가르는 내 모습을 보고 몇몇 병사들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런 시선 때문에 내가 차력쇼를 못 끊는 거야!
기분 좋게 상단주의 마차에 도착한 나는 또다시 나를 시험하려는 듯한 미소를 짓는 상단주와 그 곁에 있는 호위대장에게 간략하게 내가 본 것을 설명하고 본격적인 경계는 안 해도 조심은 하는 게 좋다고 말하고 미련 없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상단주나 호위대장은 뭔가 더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 눈치였지만, 어차피 확실하지도 않은 거 길게 얘기해봐야 내가 잘 못 봤다면 신뢰만 떨어지는 꼴이다.
오히려 곧바로 찾아오지 않고 병사를 보내서 시간이 되는지 물어본 시점에서 내가 얼마나 신중하고 예의 바른 사람인지 두 사람 다 느꼈겠지. 부하를 전령으로 썼다고 불평을 하고 싶어도 병사의 행복한 얼굴을 봤으면 내가 정당한 값을 줬다는 것도 알 테고. 그 정도도 모를 바보들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 뒤에 병사들의 경계가 이전보다 확연하게 올라갔다. 조심해서 나쁠 게 없고, 산을 지나갈 때까지만 이 정도 경계를 유지하면 될 테니 불만도 적겠지.
실제로 문제가 터지면 내 명성이 올라갈 테지. 뭐, 그래도 되도록 안 터지는 게 좋은데 말이야.
무엇보다 저 산은 타라스트에서 고작 50km 떨어진 곳이다. 이런 곳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설마, 놈들일까? 그렇다면 정말 부지런하고 귀찮은 새끼들이다.
그리고 산길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이세계에 온 뒤로 나쁜 예감 적중률 100%를 다시 한번 달성했다.
“쿠아아아아아아아!!!”
“쿠어어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아아악!!!”
산을 어느 정도 오른 순간, 사방에서 몬스터들의 기괴한 고함이 터지더니, 백여 마리의 몬스터가 상단을 포위했다.
한순간에 주위를 둘러보면서 세보니, 정확히는 137마리.
이런 작은 산에서 숨어 있기에는 지나치게 많은 몬스터들이 마치 지휘를 받는 병사들처럼 상단을 포위하자 미리 경고를 전해 들은 병사들조차 동요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그 몬스터들의 구성이 하나 같이 덩치가 크고 근육질의 괴물들이니 위압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개의 머리에 약간 등이 굽었음에도 신장이 170cm에 달하는 이족 보행 몬스터. 판타지의 단골 괴물.
놀.
그 놀들 사이에서 신장이 3m에 가깝고 양팔이 기형적으로 길며, 양다리가 역관절로 꺾인 갈색 대머리 괴물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 우악스러운 손에는 사람 허벅지만 한 크기의 나무 몽둥이를 들고 있었는데, 이미 여러 희생자를 만들었는지 곳곳에 검붉은 얼룩이 보였다. 역시 단골 중의 단골.
트롤.
마지막으로 그 모든 괴물의 가장 후미에는 3m가 넘는 키를 가진 흉악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 대검을 들고 서 있었다. 지난번 녀석과는 달리 붉은색 피부를 가진 놈은 어떤 의도인지 뻔히 알 수 있는 흉악한 미소를 지으면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며칠 전에도 만난 적 있었다. 다른 놈이지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단골 몬스터.
오우거.
무슨 판타지 단골 몬스터 조합선물세트냐?
그렇게 속으로 비아냥거리면서, 미리 경고를 전했음에도 비명을 질러대는 상단 직원들을 무시하고 나는 정면의 놀들을 향해 주저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허리에 차고 있는 곡도曲?를 발도하면서 단번에 놀 세 마리의 허리를 두 동강 내버렸다.
잔뜩 흥분해서 기괴한 함성을 지르던 몬스터들의 입이 다물어졌다.
비명을 지르던 직원들조차 입을 다물었다.
동요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비명을 지르지 않고 전투준비를 하던 병사들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상단주는 마차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아마 크게 당황하고 있겠지.
마차에서 즉각 뛰쳐나온 피로스와 세랴는 무기를 꺼내 들고 임전 태세를 갖추고 있었지만, 황당함을 감추지는 못했다.
라냐는… 놀랍게도 모두가 놀라고 있는 와중에도 침착한 얼굴로 지팡이를 들고 서 있었다. …아니, 저건 그냥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는 거로군. 차라리 저게 낫기는 하다만.
유일하게 이 상황에서 냉정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은 시르뿐이었다.
그녀는 내 행동과 슬쩍 보낸 눈빛만으로도 모든 것을 깨닫고 창끝을 땅에 꽂으면서 여전히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쳤다. 그러자 반구형의 녹색 보호막이 모두를 감쌌다. 좋아. 저러면 이제 쓸데없는 피해자는 나오지 않겠군.
그럼 안심하고 이 빌어먹을 괴물새끼들을 도룍할 수 있겠어.
야천랑의 발톱으로 만든 곡도를 들어올리면서 즐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