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60화 (60/93)

〈 60화 〉 60화 우당탕탕 모험가 생활

* * *

자아. 상황을 정리해보자.

나, 시르, 라냐는 제법 좋아진 분위기 속에서 길드로 들어왔다. 들어오기 전 모험가들은 하나 같이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거나 묵례를 하거나 손을 흔들곤 했다. 지난 보름간 내가 한 행동의 결과로서 나는 길드의 유명인이자 모두에게 인정받는 훌륭한 모험가였다.

도시에선 아예 영웅처럼 여겨져서 유력자들도 간간이 찾아올 정도였다. 귀찮았지만, 미래를 생각하면 나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어서 그럭저럭 상대해줬다.

당연히 그런 나를 적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로 나한테 욕을 한 바가지 처먹은 시의원 일파들이 그랬는데, 이놈들의 협잡질은 지구에서 갖가지 시비를 겪어본 내겐 하찮기 그지없어서 코웃음 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역시 이 도시는 너무 오랫동안 평화로웠어. 그러니 정쟁의 최전선에 있는 시의원의 협잡질 수준이 그 모양이지.

그 외에는 갑자기 유명해진 나를 시기하는 무리 정도다. 길드의 모험가들도 다들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라서, 그런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들이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 명성이 워낙 높고 실력은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대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뛰어난 능력 때문에 시기 받는 거야 지구에서부터 이어진 일이기에 별다른 감상은 안 들었다. 오히려 모험가들은 양식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감상이 들었다. 지구에선 내 지위와 명성을 생각 안 하고 시비 터는 새끼들 존나 많았는데.

어쨌든, 그렇다 보니 눈앞의 금발태닝양아치, 줄여서 금태양의 시비는 신선하다 못해 반가운 기분까지 들을 정도였다.

왜냐면 내가 길드에 처음 왔을 때 바라던 시비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이런 식으로 내게 시비를 걸어서, 오히려 내 명성을 높여주는 모험가가 한 명은 나오길 바랐었지.

갑톡튀한 대형신인에게 시비를 거는 선배 모험가! 그야말로 정석 아닌가? 그런데 정작 원하던 때에는 안 튀어나오고 이미 확고한 명성을 가지게 된 지금에서야 튀어나오다니. 역시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모양이다.

더군다나, 이 새끼가 시비를 거는 주체는 나와 시르의 관계!

허허허허. 누가 금태양 새끼 아니랄까 봐. 아주 좆같은 걸로 시비를 거는구나.

나는 클리셰를 마주한 반가움과 감히 시르가 본래 자기 거였다는 식으로 말하는 좃같음에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놈과 그 뒤에 있는 놈의 동료들로 보이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금태양은 이세계 사람치고는 제법 큰 키를 가지고 있었다. 181cm. 체격도 나쁘지 않고 얼굴도 나쁘지 않다. 허리에 차고 있는 롱소드는 손때가 제법 묻었고 손에 박힌 굳은살과 손목의 팔찌가 놈이 애송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려줬다.

강철 모험가인가. 20대 초반으로 보이니, 상당한 유망주였을 거다. 나와 시르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 뒤의 동료들은 덩치가 크고 도끼를 매고 있는 남자와 사제복을 입은 여성과 마법사 복장의 여자로 총 세 명이었다. 그들도 전부 강철 등급의 모험가였다.

흠. 이 4인 파티는 이 도시의 길드에서도 꽤 중요한 전력으로 취급되는 모험가들이겠는데? 순은도 몇 명 없는 도시니까. 거기다가 다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외모. 검사가 금태양인 걸 제외하면 고전 JRPG의 용사 파티 같은 구성이다.

어쨌든 금태양의 동료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곤란해하고 있었다. 도끼남은 고개를 살짝 돌리고 자기는 상관없다는 태도였고, 사제는 뺨에 손을 올리고 한숨을 쉬고 있었다. 마법사에 이르러서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 있었는데, 빨개진 귀와 목이 어떤 심정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럴 거면 이런 짓 저지르기 전에 말리지 그랬냐. 아니, 말릴 틈도 없이 이 녀석이 급발진을 걸은 걸까? 왠지 그럴 것 같은데. 아무래도 이 녀석 내가 누군지 제대로 모르는 것 같고.

…흠. 좋아. 당장 박살 내진 말아 볼까. 클리셰를 경험해주게 해준 것도 있으니, 조금은 봐줘도 되겠지. 그래도 시르를 자기 것 취급한 건 그냥은 못 넘어가지. 그래서 조금은 인성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나는 금태양을 무시하고 접수대로 향했다.

“………응?”

뒤에서 얼빠진 소리를 내는 금태양의 반응을 즐기면서 이쪽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 있는 히리에에게 말을 걸었다.

“신입 모험가 등록과 3인 파티가 할 수 있는 특수 의뢰를 받고 싶은데. 있어?”

내 태연한 태도에 히리에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평소의 영업용 미소로 돌아와서 차분히 말했다.

“신입 모험가 등록이야 문제는 없지만, 딱 맞는 특수 의뢰는 없네요. 시그 님 파티라면 신입이 있어도 보통 옥석이나 청동 등급 의뢰는 별 문제 없으시겠죠. 다만, 단기 의뢰는 없고 장기 의뢰만 남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장기 의뢰라. 몇 번 해본 적은 있는데, 장기라고 할 만한 일들은 아니지 않나?”

“…그건 시그 님이 이상하신 거예요. 보통 그런 의뢰를 한나절 만에 끝내는 건 시그 님 정도라고요. 보통은 2~3일은 걸리거든요? 하지만 지금 남아 있는 의뢰는 시그 님이어도 최소 3일 이상은 걸리실 거예요. 호위 의뢰와 추적 의뢰밖에 없거든요.”

“아. 귀찮은 의뢰 밖에 없네. 단순하게 몬스터 때려 잡는 건 없어?”

“아쉽게도. 청동 등급에라도 있으면 추천해 드리겠지만, 그쪽도 품귀에요. 강철 등급에는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2등급이나 차이 나는 의뢰는 드릴 수 없어요.”

“규정은 중요하지. 하아. 빨리 보름이 지났으면 좋겠네. 청동은 되어야 좀 활동하기 편하겠어.”

호위와 추적 의뢰는 이제까지 해본 적 없는 의뢰다. 어려워서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들이라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뭐, 그래도 라냐의 실력을 보는 데는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다. 단순히 몬스터를 때려잡는 것보다도 나을 수도 있다. 흐음. 그럼 호위 의뢰로 해볼까. 상단과 연줄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의뢰 얘기와 일상적인 얘기를 하고 있자 시르가 라냐를 데리고 왔다. 라냐는 다른 쪽에 신경이 쏠리는지 그쪽을 힐끔힐끔 보고 있었지만, 시르는 태연한 얼굴이었다. 역시 나의 연인.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구나. 오히려 속이 시원해 보이는데? 저 자식이 귀찮게 굴었었나? …새끼가.

“시그 님. 라냐 양은 새싹부터 시작인데, 옥석 등급 의뢰에 곧바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괜찮아. 길드 규정으로도 문제는 없어. 옥석이 둘에 마탑 인증의 마법사라면 실력이든 뭐든 문제없지. 그렇지?”

“네. 그나저나, 라냐 님이라니…. 그 노엘 님의 수제자를 잘도 얻으셨군요.”

“훗. 이게 교섭능력이라는 거지. 그런데 히리에가 알 정도라니. 꽤 유명한가봐?”

“노엘 님부터가 유명한 분이시니까요. 시그 님이야 격이 맞으니 별문제 없지만… 마탑의 서브 마스터는 차기 마탑주나 다름없는 직위에요. 저 같은 일반인에겐 까마득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죠.”

“…나 그 사람이 서브 마스터인거 지금 처음 알았는데?”

“네? 모르셨어요? …음. 조금 장난기가 있는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시그 님이 당하실 줄이야.”

“……죄송합니다. 저는 시그 님이 알고 계신 줄 알고.”

“아. 시르는 알고 있었구나. 아니, 뭐 됐어. 그걸 알았다고 해서 태도가 달라져야 하는 이유도 없으니까. …그런데 여기 마탑 그래도 되는 거야? 그 사람이 차기 마탑주여도 되냐고.”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그래도 제자분 앞에서 그런 말을….”

“죄송합니다. 저희 스승님이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어떤 분인지 조금 알 것 같네요!”

“그렇지? 이런 착실한 제자가 있는 게 신기한 사람이라니까.”

“개성적인 분이십니다.”

“…그럼 모험가 등록으로 넘어갈까요? 라냐 님. 여기에 간단한 인적사항을 적어주세요. 노엘 님의 제자라면 신분은 확실하지만, 필수적인 사항이라서요.”

“아, 알겠습니다.”

“등급은 새싹부터 시작이에요. 이것도 어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랍니다. 시그 님도 처음에는 새싹이었죠.”

“한나절 만에 옥석이 되었지만.”

“제 안목 덕분이죠.”

“내 능력 덕분이지.”

“두 분다 대단하시다는 걸로.”

“인정.”“인정.”

“……뭐하는 건가요.”

즐겁다. 역시 이런 대화야말로 사람 사는 맛이다. 지구나 이세계나 마음 편히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소중한 법이다. 여기에 사랑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금상첨화로군. 후후. 라냐가 태클 역할만 제대로 해주면 앞으로 더 즐겁겠어.

“이, 이게…! 지금 날 무시하는 거냐!”

아. 그러고 보니 저게 있었지?

뒤에서 들린 소음에 우리 모두가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금태양이 삿대질을 하면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내새끼가 얼굴 붉히는 걸 보니 속이 안 좋아지는군.

쩝. 처음에는 손 좀 봐주려고 했는데, 지금 나누는 대화가 즐거워서 그럴 마음도 사라졌는데 말이야. 그래도 굳이 매를 맞겠다고 덤벼 온다면 때려주는 게 인지상정.

나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

“엔토루다! 너보다 까마득한 선배 모험가라고! 실컷 무시해놓고는!”

지금 뭐라고? 아니, 진짜로 내가 들은 이름이 맞아? 어떻게 사람 이름이…. NTR? 진짜?

생김새 그대로인 이름에 잠시 넋이 나가있자, 놈은 그게 자신을 알아보고 지은 표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흥. 이제야 알아보는 거냐. 그렇다 해도 이미 늦었어. 이 자식! 선배 모험가의 말을 대놓고 무시하다니! 장난하는 거냐!”

“장난은 네 이름이지. 아니, 진짜로 이름이 엔토루야? NTR?”

“내 이름이 뭐가 어때서? 그리고 엔티알이 아니라 엔토루다! 동방인이라서 우리 말을 잘 모르는 거냐?”

녀석은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불쾌한 건 내 쪽이었다. …뭔가의 악의 같은 게 느껴지는 이름이로군. 아니, 그냥 우연이겠지만. 그래도 기분 나쁜 이름이다. 하물며 그 상대가 감히 내 연인을 노리던 녀석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예의를 쌈싸 먹은 태도도 그렇고. 생각해보니까 존나 열 받네. 어린 새끼가.

“아니, 잘 알아. 다만 내가 아는 매우 부정적인 단어와 유사한 이름이라서 말이지. 기분 나쁜 이름을 가진 놈이네.”

“뭐, 뭐?! 이, 이 자식!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

“모욕은 무슨. 애초에 다짜고짜 삿대질하면서 반말 싸대는 새끼야말로 실시간으로 전방위 모욕 중이지. 손가락 잘라버리기 전에 접어라.”

“…………윽!”

살짝 기세를 올리면서 노려보자 녀석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손가락을 접었다. 하지만 이내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너, 너…! 시르하고 무슨 관계야!”

“눈깔이 삐었냐? 아니면 뇌가 파먹혔냐? 보면 몰라?”

나는 일부러 녀석에게 과시하듯이 시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걸 본 녀석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그걸 보고 피식 웃고 고개를 살짝 돌리자, 시르가 조금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불쾌해하지도 않았지만.

역시, 귀찮게 굴던 녀석이었군. 다른 모험가들의 반응도 그렇고, 저 녀석 동료들의 반응도 그렇고. 이걸로 무슨 일이었었는지 그림을 못 그리면, 그쪽이 바보다.

나는 한심해하는 표정으로 담담하게 말했다.

“연인이잖아. 그렇지. 시르?”

“그렇습니다. …그, 그래도 이런 장소에서 그렇게 대놓고 말씀하시는 건 조금….”

역시 노엘 때문에 내성이 약해졌어! 그동안 기른 내성이라면 이 정도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을 텐데! 그런 풋풋함도 좋아 죽겠지만! 흐뭇한 마음으로 금태양을 보자 녀석은 그야말로 나라 잃은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렇겠지. 좋아하던 사람이 자기가 없던 사이에 다른 남자와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거니까. …와. 생각하니 끔찍하네. 지구에는 그런 장르를 전문적으로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음. 생각해 보니 저 녀석이 얄밉기는 해도 이미 패배한 놈에게 추가타를 가하는 건 너무 잔혹하구나. 애초에 나는 시체 차기나 패배자를 조롱하는 걸 안 좋아한다.

지금이야 저 자식의 도발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조금 놀린 거지, 본격적으로 하면 이 자리에서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 들게 만들 수도 있다.

무엇보다 저 표정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예의가 없는 건 짜증 나지만 정신 붕괴를 일으킬 정도의 죄는 아니고. 봐줬다. 새끼야. 내가 그쪽 장르를 혐오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그리고 처음에 네가 했던 말은 워낙 개소리라서 내가 무시했는데. 애초에 시르와 너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잖아. 그런데 시르가 마치 네 것이었다는 것처럼 얘기하는 건 대체 무슨 정신머리냐? 그런 태도가 시르에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도 모르는 거야?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조차 없는 녀석이 그딴 태도로 나오는 거냐?”

“…윽! 나, 나는… 그런 의도가…!”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은 내심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거지. 그래. 알겠어. 20대 초반에 강철 등급 모험가가 되었으니, 자신만만할 만도 하지. 얼굴도 나쁘지 않고 키도 크고 스스로 생각하기에 인성도 나쁘지 않으니, 지금은 자신을 거부해도 언젠가는 자신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지?”

“어, 어어어! 너, 너 뭐야…?! 무, 무슨 말을…!”

정곡을 찔렸는지 처참하게 일그러졌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공포심에 잠겼다. 아이고. 진짜였냐. 대충 찔러 본 건데 아주 정곡을 찔렀나 보다. 그래. 나는 지구에서도 심리분석가로도 이름이 높았지. 당연히 전문가는 아니고 인터넷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였지만.

이놈의 정신 수준은 인터넷에서 똥글 쓰는 애들이랑 다를 게 없구만. 아직 어려서 그런가? 하지만 이 세계의 성인은 16살부터고. 모험가 경력도 있다면 충분히 어른인데.

…흠. 제법 재능이 있고 계속 승승장구한 게 오히려 독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겠군. 인성이 크게 못나지 않았으니, 주변에서 교정해주려는 생각도 안 했겠지. 그래. 새끼야. 서비스다. 네 녀석의 그 썩어빠진 정신머리를 치료해주마.

“하아. 한심한 새끼야.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지만, 멍청한 자신감은 가지지 말아야지. 세상이 다 네 마음대로 되겠냐? 더군다나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 부분에선 그런 확신을 가지면 안 돼. 사랑에 눈이 멀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정상참작 가능한 부분도 있지만, 잘못은 잘못이지. 다행히 시르가 마음이 넓어서 너를 그렇게 크게 불쾌하게 여기지 않으니, 나도 이 이상 말하진 않으마.”

“으, 으윽. …너, 너한테 그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

“있어. 시르의 연인은 나고, 너는 그런 나를 부당하다고 말한 새끼니까. 너 말이야. 지금 연인이 있는 여자를 빼앗으려고 발버둥 치는 인간으로 밖에 안 보인다는 걸 알고 있냐?”

“뭐, 뭐…?! 아, 아니 나는…!”

녀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히 호의적인 시선은 없었다. 재미있어하거나 장난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모험가들은 몇 명 있었지만. 나참. 나잇값 못하는 사람들 같으니. 남의 연애사를 보니 재미있어 죽겠지?

특히 녀석의 동료들이 보내는 싸늘한 시선에 녀석은 아주 크게 충격을 받았다. 마음에 비수가 박힌 것 같은 얼굴이로군. 뭐, 동료들 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야 처음에는 좋아하던 사람을 빼앗겨서 달려드는 것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내 정신분석에 반응하는 걸 보고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겠지.

그럼 슬슬 마무리 지어볼까. 진짜 많이 봐줬다. 새끼야.

“아니라고? 그럼 네가 조금 전까지 하고 있던 건 뭐였지? 너는 너와 시르가 무슨 관계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시르가 아직 새싹이나 목본일 때 조금 도와준 것 정도로 대단한 관계가 맺어졌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지?”

“으, 으헉! …아, 아니야! 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

그렇게 생각했구만. 슬쩍 시르를 보자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초기에 이런저런 선물을 주셨지만, 전부 거절했습니다. 당시에 조언을 해주신 건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저는 엔토루 님을 단 한 번도 이성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도 매번 말했었습니다만…. 듣지 않으셨죠.”

“맞아요. 저도 몇 번이나 봤어요.”

시르의 한탄하는 말에 히리에가 보충했다. 쓴웃음을 짓고 있는 게 이 상황이 썩 유쾌하지 않은 것 같군. 그래도 굳이 입을 여는 건 나를 위해서인가. 의리가 있다니까.

“유명했죠. 엔토루 님이 시르 님에게 열중하는 건 길드 사람들이 전부 알고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두 분이 같은 파티를 맺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고, 길드에서 몇 번 조언을 들었을 뿐이에요. 그 이상의 도움은 시르 님이 한사코 거절하셨었죠. …애초에 시르 님에게 구애한 사람이 엔토루 님만이 아니고. 결국, 전부 나가떨어졌지만요.”

인기인의 비애다.

그야, 뭐 시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니까, 벌레가 꼬이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이거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군.

나는 시르에게 훈훈한 미소를 지어줬다.

“고생 많았구나. 시르.”

“후후. 괜찮습니다. 시그 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알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시르는 어깨를 감싸 안은 내 손등에 손을 올렸다. 옆에 있던 라냐가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숙이고 부들부들 떠는 게 인상깊었다. 너는 스승이랑 많이 다르구나. 계속 그대로 있어다오.

“…으, 으어어어어어.”

그리고 금태양… 그래. 불쌍하니 이름으로 불러주마.

엔토루는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절망하고 있었다. 쯧쯧. 다 큰 녀석이 저렇게 울다니.

완전히 침몰한 엔토루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놈이 그래도 동료라고 안타까웠는지, 도끼남과 사제가 가까이 와서 눈물을 닦아주고 몸을 감싸주었다. 새끼. 동료들은 좋게 뒀네. 역시 기본 인성은 나쁘지 않은 건가.

그리고 마법사는 그런 녀석을 착잡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나와 시르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이면서 사과했다.

“동료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립니다.”

“아니, 괜찮아. …저렇게 우는 걸 보니까, 좀 더 살살 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고.”

“아뇨. 아주 잘 하셨습니다. 저 새끼는 저렇게 한 번 꺾여 봐야 해요.”

허리를 든 마법사는 웃고 있었다.

아주 속이 시원하다는 미소를 보니, 대충 무슨 관계인지 알 것 같았다. …새끼. 복 받았네.

“애초에 저희가 제대로 말렸었어야 했어요. 평소에는 저렇지 않은데 시르 양과 관련된 일에는 폭주해서…. 후. 이젠 그러지 않겠죠. 저희도 잘 타이르겠습니다.”

“그래. 동료니까. 소중하게 대해주라고.”

“후후. 네.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이 정도로 끝내주셔서. 도시의 영웅에게 지나치게 무례하게 굴었는데….”

역시 알고 있었나. 엔토루는 모르는 것 같았는데. 그 녀석은 내가 시르와 연인이라는 것만 알고 내가 어떤 활약을 했는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지. …설마, 일부러?

“아니, 알면 저 녀석에게도 말해 주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시르 양에게 연인이 생겼다는 말만 듣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오는 바람에 그만….”

진심으로 한심하게 여기는 표정을 보니, 일부러 숨긴 건 아닌가 보군. 역시, 급발진은 어느 세계나 문제다.

“저희는 장기 의뢰를 처리하고 오늘 아침에 막 도시에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파악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고 말았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시그 님. 시르 양. 저희의 도시를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마법사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엔토루 녀석은 이런 멋진 동료를 두고 어딜 보고 있는 건지. 이번 기회에 주변이나 똑바로 봐라. 새끼야.

“감사는 고맙게 받을게. 그리고 저 녀석에 대해선 걱정하지 마.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이상 내가 더 손을 대는 일은 없을 테니까. …뭐. 먼저 시비를 걸어도 선을 넘지 않으면 적당히 봐줄 거고.”

“후후. 역시 영웅님은 그릇의 크기가 다르시네요.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엔토루가 저대로 무너지지 않았으면 하니까요. 그럼 이만. 실례했습니다.”

마법사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다른 동료들도 하나같이 내게 인사를 한 뒤에 완전히 넋이 나간 엔토루를 데리고 길드를 나섰다.

음. 처음에는 폭력 사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꽤 원만하게 해결했군. 그리고 신기한 기분이다. 내가 살다 보니 치정 관련으로 싸우네. 지구에서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

나는 떠나는 마법사의 등을 보고 감탄을 느끼고 있는 라냐에게 장난스럽게 말했다.

“저 사람도 마탑의 마법사지? 이름이 뭐야?”

“시라에 씨입니다. 마탑에서 모험가 길드로 파견한 마법사 중에 한 분이세요. …대단하신 분이시죠.”

“그래. 그런데 네 스승은 왜 그럴까?”

“저한테 물으셔도…. 오히려 제 쪽에서 묻고 싶은 말입니다. 진짜로 왜 그러는 걸까요….”

“수수께끼야. 수수께끼.”

차기 마탑주는 저런 개념 있고 예의 바른 사람이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우리가 그런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때, 2층으로 이어진 계단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소리군.

이윽고 계단을 내려온 여성은 1층의 분위기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내 쪽으로 시선을 향하더니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였구나. 시그.”

“아니, 뭐야. 그 표정은? 내 탓 아니거든?”

“엔토루의 격양된 목소리가 들리기에 내려와 본 건데, 너와 시르가 있으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만하지. …음. 그런데 피는 안 보이는데?”

“아니, 대체 나를 얼마나 폭력적인 사람으로 보는 거야? 주먹도 안 휘둘렀거든?”

“너라면 손가락 정도는 자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네.”

“………….”

“…그런 말을 하긴 했구나.”

“실행하진 않았으니 무죄.”

“그래. 그렇다고 해두자.”

그렇게 말하면서 즐겁게 웃은 것은 붉은 머리의 모험가. 리에나였다. 그동안의 교류로 편하게 말을 나누는 사이가 된 그녀는 이내 웃음을 멈추고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마침 잘 됐어. 같이 하고 싶은 의뢰가 있는데. 들어보겠어?”

“일단, 들어보고 판단하자고. 괜찮지?”

“네. 저는 상관없습니다.”

“…그, 저도 괜찮습니다.”

동료들의 허락을 받은 나는 리에나를 따라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먼저 이렇게 요청을 하다니. 대체 무슨 의뢰일까?

기대 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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