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55화 (55/93)

〈 55화 〉 55화 영웅 시그

* * *

방 안이 고요해졌다.

그 안에서 즐겁게 웃고 있는 건 나뿐. 대부분이 창백해졌고, 그나마 유리가 쓴웃음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속 시원하다는 감정과 안타까운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것 같았는데,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품는 건 꽤 흔한 일이다. 그렇게 된 사정은 궁금하긴 했지만, 여기서 물어볼 건 아니다.

나는 여유롭게 몸으로 의자를 흔들면서 말했다.

“되도록 빨리 결정해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래야 저도 여러분들의 소망대로 빨리 이 도시를 떠나지 않겠습니까?”

“…내가, 우리가 무엇을 해줬으면 좋겠소?”

간신히 혼란에서 회복한 시장이 그렇게 되물었다. 꽉 다문 입이 심정을 대변해 주었지만, 그리 신경 쓸 가치는 없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래도 여기서 그걸 물고 늘어지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들은 이 도시의 지배자들.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잡아먹는 건 불가능하다. 영웅이라는 명성을 이용해서 나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게 최선이지. 덤으로 이것저것 지원도 받고. 여기서 기를 한번 꺾어둔 것은 나중을 생각하면 상당히 유용하다.

어차피 이들 중 대다수는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은 놈에게 선동당한 자들이다. 좀 더 냉정해진 뒤에 생각해보면 굳이 나를 건들기보다는 친하게 지내는 편이 더 이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겠지. 나도 굳이 적을 많이 만들 생각은 없다.

욕설? 헹. 고작 그 정도로 깊은 앙심을 품는 인간은 애초에 내 상대가 아니다. 같은 편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치워버리면 그만인 것들. 시의원 중 그럴 자들은 많아 봐야 세 명. 시장도 어디까지나 나를 위협적으로 생각해서 저러는 거지, 내 태도에 앙심을 품은 건 아니다.

뭐, 그렇게 해서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다. 끝까지 숨어있는 건 조금 아쉽긴 했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지. 놈이 이대로 포기한 게 아니라면 반드시 꼬리를 드러낼 거다. 그때 제대로 잡아서 박살을 내주마.

나는 되도록 상냥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치 내가 뭔가 원하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로 보이잖아요? 애초에 나한테 요구하고 핍박하고 협박했던 것은 댁들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이렇게 행동하겠다고 말한 것밖에 없어요.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내가 협박을 한 것처럼 말하지 마시죠?”

“…미안하오. 내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소.”

그래도 눈치는 있는지 시장은 곧바로 다시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본래 고작 이 정도로 사과로 넘어가는 게 내 취향이 아니지만, 미래는 생각하면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겠지.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댁들의 행동에 어떻게 대응할지만 말했어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겠죠. 그 외에는 뭐, 다들 사람으로서, 이 도시의 권력자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도리만 지키면 됩니다.”

“…알겠소. 이 도시의 시장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소. 그러니….”

“인터뷰에서는 시의원분들의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고맙소.”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건 아니지만, 표정은 한결 나아졌다. 이 정도면 앙금이 크게 남지는 않겠군. 애초에 지들이 먼저 잘 못한 거니 어지간한 등신이 아니면 적방하장은 하지 않겠지.

그래. 지금도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저 세 명 말이지. 니들은 조지는 거 확정이다. 이 개새끼들아.

“그럼 이만 일어나도 될까요? 나한테 듣고 싶었던 얘기는 전부 들지 않았습니까?”

“…으음. 그래도 될 것 같소. 혹시 더 듣고 싶은 말이 있는 의원이 있소?”

대답은 없었다. 내게 분노의 눈빛을 보내는 세 명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이제야 내가 강자고 너희들이 약자인 걸 인지했구나? 강자를 물어뜯으려는 이빨도 없는 것들.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꼴사납군.

작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의원들을 쭉 둘러보니 다들 눈을 마주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내게 적개심을 품고 있는 자들도 지금만큼은 눈을 피했다.

내가 이겼고 저들이 졌다.

이 이상의 말은 필요 없다. 이대로 쿨하게 뒤로 돌아서 숙소로 돌아가자. 시르가 일어났으려나~ 그렇게 생각하면서 몸을 돌린 순간이었다.

다다다다닷!

문 저편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 양족다 체중이 가볍다. 여성? 다급하게 이곳으로 오는 두 명의 여성? …이 발소리 익숙한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해서 멈칫하자 뒤에서 의아해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서 유리를 보자, 그녀도 소리를 들었는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왠지 앞으로의 전개가 예상이 되는데?

그리고 예상대로 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명의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들입니까아아아!!!!”

“시그 님!”

우렁차게 고함을 지른 것은 금발의 미인, 테르시아 영애였고 나를 걱정하면서도 탓하는 눈빛을 보내는 것은 시르였다.

저도 모르게 이마를 손으로 짚으면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시르.”

“그런 쪽지만 남겨두시고 혼자 가시다니…. 제가 부족한 탓이겠죠.”

“아니야! 그건 절대로 아니야! 아, 알고 있는 거지? 시르도 내가 왜 그랬는지 알고 있잖아!”

“…후후후.”

필사적인 외침에 옅은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고 넋이 나가버렸다. 시르에게 이런 소악마적인 면모도 있었나? …그래도 그렇게 크게 화가 나진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 보였다. 다행이군.

반면에 테르시아 영애는 내게 꾸벅 인사를 한번 하고는 당당한 발걸음으로 얼이 나가 있는 시의원들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에 힘이 넘쳤다. …이 아가씨는 또 왜 이래? 짐작 가는 게 없진 않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길 바랐다.

“도시를 구하고 저를 구해주신 영웅을 이런 아침에! 이런 장소에! 불러 놓고 심문을 하다니! 타라스트의 시의원분들이 이런 사람들이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사실이었다.

…그런 성격이지 않을까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실제로 겪어보니 생각보다 더 심하다. 주변 영지에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던데… 귀족은 이런 성격을 좋아하는 걸까?

그냥 냅두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그랬다간 앞으로의 계획이 틀어질 것 같아서 멈추기로 했다. 나는 내 옆을 지나가려는 테르시아 영애의 팔을 붙잡았다.

“엑? 으, 은공?”

은공이라니! 새벽에는 그렇게 안 불렀잖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말했다.

“자자. 이제 다 해결된 문제니까, 테르시아 영애도 그만하시죠. 그보다 아침은 드셨나요? 아직이면 저희와 함께 가시죠. 혹시 싫어하시는 음식은 따로 있으세요?”

“네, 네? 저, 저기 그게… 딱히 싫어하는 건 없습니다만…… 그, 그보다! 저 자들이 은공에게 무례를…!”

“그건 제가 해결했으니, 이쯤에서 물러나시죠. 저들도 테르시아 영애를 보고 반성하고 있을 겁니다. 자,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고 밥 먹으러 갑시다. 밥. 제가 살 테니.”

“…은공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밥은 제가 사겠습니다! 저 시엘 테르시아! 은공에게 밥을 얻어먹는 후안무치가 아니니! 그리고 시의원님들은 나중에 따로 시간을 내서 만나 뵙도록 하죠!”

테르시아 영애는 삿대질까지 하면서 당당하게 외치더니, 몸을 휙 돌렸다. 저런 행동에서도 기품이라는 게 느껴지다니. 귀족 영애가 맞기는 맞네.

나는 얼이 빠진 시의원들을 보고 피식 웃고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고 전력으로 부끄러워하고 있는 유리에게 손을 흔들어준 다음에 시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테르시아 영애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저, 으, 은공. 이제 그만 팔은 놓아주셔도….”

아. 그랬지. 참. 나도 모르게 계속 팔을 붙잡고 있었네. 나이도 있는 아가씨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손을 놓고 사과했다.

“이런. 죄송합니다. 실례를 저질렀군요.”

“아, 아닙니다! 잡고 계시고 싶다면 계속 잡으시고 계셔도 됩니다!”

…대체 뭔 헛소리야? 내가 왜 댁 팔을 잡고 싶어 하냐? 황당했지만, 잔뜩 붉어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뭐라 말하기 힘들었다. …이 아가씨는 착각이 심한 타입 같은데.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아. 혹시 제가 너무 강하게 잡았을 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으, 은공의 손은 실로 부드럽더군요! 단순한 행동에도 그 상냥함이 묻어 나왔습니다!”

……말을 말자. 괜히 여기서 더 말 걸었다가 나까지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나는 옅은 미소를 짓는 걸로 모든 대답을 포기하고 시르에게 다가갔다.

……시르는 눈가에 음영을 드러누이며 웃고 있었다.

무서워! 새벽의 싸움보다 100배는 무서워!

큭! 그렇다고 여기서 두려움에 물러나는 건 남자가 아니다! 정면돌파다!

“시르는 먹고 싶은 거 있어?”

“저는 시그 님이 좋다면 어느 것이라도 괜찮습니다.”

평소와 같은 태도이지만, 미소가 무섭다. 아니, 왜 눈가에 음영이 생기는데? 그거 만화적인 표현 아니었어? 이게… 현실?

그때 테르시아 영애가 끼어들었다.

“시르 님께서는 실로 헌신적인 분이시군요. 은공을 향한 그 마음은 실로 아내의 귀감입니다.”

또 폭탄 발언이냐! 대체 이 여자의 사고회로는 어떻게 되먹은 거야?! 시의원들을 상대로도 위협을 느끼지 못했던 내가 지금 여자 한 명에게 엄청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아, 아내라니…!”

그래도 덕분에 시르에게 머물던 어두운 기분이 단박에 사라지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만이 남았다. 머리 위에서 김이 피어오를 것 같군. 귀여워. 사랑스러워. 후. 지금 당장 껴안고 빙글빙글 돌고 싶다.

“응? 아니십니까? 저는 두 분이 같은 숙소를 쓰시기에 당연히 그런 거라고….”

“워워. 테르시아 영애님. 여기는 그런 얘기를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군요. 자자. 빨리 밥 먹으러 갑시다. 배고프네요!”

거침없네, 진짜!

“아, 아내…. 그, 그건 아직은….”

시르는 진짜 귀엽네!

“…빨리 가지 않겠나? 뒷수습은 내가 할 테니.”

그때 내 귀로 힘이 잔뜩 빠진 유리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마법으로 목소리만 보낸 것이다. 나도 그녀와 동감이었기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고 시르의 반응에 어리둥절한 테르시아 영애와 한방에 함락당한 시르를 이끌고 방을 빠져나왔다.

…시의원들을 상대한 시간보다 두 여성을 마주한 시간이 더 지치다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이거. …이게 영웅의 삶?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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