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에 천재가 가면-54화 (54/93)

〈 54화 〉 54화 영웅 시그

* * *

경악에 빠진 좌중을 무시하고 나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손깍지를 끼면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시의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정면에 있는 노인이었다. 환갑은 훌쩍 넘었을 왜소한 노인. 이세계의 양복에 중절모까지 쓴 노신사는 타라스트의 시장이었다.

그가 눈에 띄는 건 단순히 시장이어서가 아니다. 조금 전에 벌어진 멍청이들의 대행진 속에서 단 한마디로 하지 않은 게 오히려 시선을 끌었다. 분명 평소에는 기개가 없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시의원들을 누르기 시작했다지?

그가 굳이 그 난장판에 끼어들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나를 이용하는 것도 있어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다른 놈들보다는 나으니 일단 보류다. 그래도 나의 팩트폭력에는 여유만만한 표정이 무너져서 분위기 잡던 게 엉망이 된 건 쌤통이다.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을 그냥 둘리가 없잖아?

그 외의 시의원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정치질 좀 하고 자신들의 권위로 타인을 깔아뭉갤 줄밖에 모르는 평균적인 정치인들. 딱히 이세계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지구에서도 그런 정치인들이 대다수였다.

뭐, 워낙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일들을 겪어서 정상적인 판단이 안 되는 건 이해해줄 만하다. 그런 상황에도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 대단한 거지, 공포를 느끼고 거친 반응을 보이는 건 지극히 평범하다. 오히려 이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이 도시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인 나를 얽매려고 했으니, 일단 어떤 식으로든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런 사정은 내가 고려해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쓸 머리가 있으면 우선 교섭을 해야 하는 상대를 핍박하는 짓거리를 하면 안 되다는 걸 먼저 떠올려야지. 이건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평소 인성의 문제다. 귀족도 아닌 투표로 뽑히는 시의원 놈들이 이토록 오만하다니.

귀족들이 그랬으면 이세계의 문화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하겠는데, 정작 테르시아 영애는 내게 굉장히 깍듯했단 말이야. 그녀 한 사람만 가지고 귀족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도시의 시의원들이 내 기준에서 한참 밑인 녀석들인 건 명확하다.

예의? 먼저 예의를 밥 말아 먹은 건 저것들이다. 예의란 쌍방향. 상대방이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 나도 지키지 않으면 그만이다. 나는 지구에서부터 그랬다. 그래서 싸가지없는 새끼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 그럴 때마다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싸가지없는 새끼가 어떤 건지 제대로 보여줬지.

쿵!

몸을 뒤로 젖히면서 양다리를 테이블 위에 거칠게 올리고서 한껏 꼬았다. 조금 전까지 얌전히 자신들의 헛소리를 들어주던 청년이 갑자기 욕을 하고 예의라곤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자세를 하자 시의원들이 얼굴이 재미있게 변했다.

그 표정들을 즐기면서 태연하게 내뱉었다.

“하여간 입만 산 인간들이 목소리는 제일 큰 건 어느 곳이나 마찬가지라니까. 도저히 그냥 들어줄 수가 없어.”

“…이,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화산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붉어진 의원 하나가 외쳤다. 나와 테러리스트의 관계를 의심하던 인간이다. 가장 아니꼽던 인간이로군. 진심으로 그리 믿는 게 아니라 단순히 견제 차원으로 한 얘기겠지만, 그런 사정을 내가 고려해줄 필요는 없다.

“무슨 짓이긴. 댁들이 하던 것의 열화판이지. 예의를 하수도에 갖다 버린 인간들아.”

“이, 이런 무례는 참을 수 없소! 길드 마스터! 당신네 모험가잖소! 시정시키시오!”

그렇게 외치면서 벌떡 일어난 것은 내가 월권을 저질렀다고 말한 의원이다. 군사 관련 담당자겠지. 이쪽은 한심하기는 하지만 속이 새카만 게 아니라, 단순히 자기 권한이 침범당한 게 아니꼬울 뿐인 인간인지라 태도가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당사자를 눈앞에 두고 상급자부터 찾다니. 조금 전까지의 당당한 태도는 어디로 가셨나? 그리고 어따대고 명령질이야. 이 무능한 새끼가.”

“무, 무슨…! 이, 이런 모욕을…! 제정신인가!”

부드럽게. 부드럽게.

“내가 틀린 말 했나? 긴급 상황에는 긴급 상황에 맞는 행동요령이 있기 마련이지.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는 인간이 도시의 군권을 가지고 있다? 그게 이 도시의 재앙 중 하나야. 친절한 내가 그렇게 떠먹여 줬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어야지. 결국, 도시의 혼란을 잠재운 건 모험가들이잖아? 재앙에게 맞선 북쪽의 위병들은 용감했지만, 그 윗대가리가 이 모양 이 꼴에서야. 댁은 댁의 직위에만 관심이 있나 본데, 책임감이 없는 것도 정도가 있지.”

“………….”

쉬지 않고 무덤덤하게 쏟아낸 말에 무능한 의원은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입만 쩍 벌렸다. 다른 의원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살면서 이 정도의 말을 들을 기회도 없었던 걸까? 그러니까 다들 저 모양 저꼴이지. 좋게 봐주려고 해도 보여주는 모습이 이따구이니 좋게 봐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 판단한 게 좋은 것도 아냐. 자기 능력이 모자란 걸 모르는 건가? 그사이에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다고 생각하는 거야? 적들의 의도를 간파하고 역으로 찌를 정도의 대처는 바라지도 않아. 적어도 상황 판단은 똑바로 하고 사후처리라도 제대로 해야지. 한 게 없어요.”

“아,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다!”

의원 중 한 명이 발작적으로 소리 질렀지만, 자충수다.

“그럼 뭘 했는데? 말 해보시지?”

“…현황파악과 추후대책을 논의했다.”

“그게 뭐? 그건 기본으로 해야 하는 일이지. 그리고 댁들 일은 현황파악과 추후대책만이 아니거든? 그 씹새끼들이 도시를 씹창내고 있을 때 가장 필요한 걸 안 하고 있던 게 문제야 오히려 길드의 중요 전력 두 명을 댁들을 지키는 데에만 허비시키고 있었지.”

“우, 우리도 습격을 당했다! 네놈이 뭘 안다고…!”

“알지. 씨발새끼야. 아가리 닥쳐.”

욕설과 함께 눈을 한 번 부라려 주자 항의하려던 의원은 그대로 쭈그러들었다. 벌벌 떠는 모습이 실로 보기 좋군.

다른 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한 번 째려보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당당한 태도를 버리고 움츠러들었다. 자기들이 맹수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토끼에 불과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건가? 이런 것도 느리네.

나는 깍지를 쥔 손을 풀고 양손으로 뒤통수를 받치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벌써 치매야? 대체 어제 있었던 습격을 누가 막았다고 생각하는 거야? 테르시아 영애를 구출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길드 마스터를 누가 무사히 데리고 왔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그건….”

“알고 있잖아. 씨발새끼들아. 북쪽의 재앙도. 천공탑의 자주랑도. 쿠르시카 도적단도. 내가 물리쳤어. 내가 죽이고 도망치게 했다고. 거기에 댁들이 보태준 거 있나? 있으면 말 좀 해보시지?”

“……그, 그래도…!”

“그래도는 뭐? 아직도 할 말이 있나? 어디 해보시지? 내가 피투성이가 되면서 적들과 싸우는 동안 댁들은 뭘 했지? 그런 사람에게 댁들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지? 설마, 내가 댁들의 의도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빡대가리 새끼라고 생각했던 건가?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댁들은 내가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나 본데, 댁들이야말로 선을 넘었어.”

“…이, 이런 시건방진! 무례한 놈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분개하면서 일어선 것은 내 신분을 가지고 딴지를 걸었던 의원이었다. 그는 내 살기를 이겨내고 분노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대머리와 카이저 콧수염이 인상적이군. 콧수염에 갈 털을 정수리로 보내지 못했나 봐. 안타까워라.

“신원불명의 미천한 동방인 따위가! 어딜 왕국시민을 핍박하는 거냐! 우리는 정당한 투표로 뽑힌 시의원이다! 네까짓 놈이 무시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니란 말이다! 당장 다리를 내리고 제대로 된 예의를 갖춰라! 그리고 이제까지의 모욕을 사과하라!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무례는 용서해 주마!”

“용서 안 하면 어쩔 건데?”

“…뭐?”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의원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거기에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용서 안 하면 어쩔 거냐고. 군대를 움직여서 내쫓을 건가? 아니면 현상금이라도 걸게? 무슨 죄목으로? 그리고 한 가지 더. 지금 내 신분이 명확하지 않다고 대놓고 모욕을 했지? 이건 모험가 길드에 대한 공격이라고 봐도 되겠지?”

“무,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는 트팰리 의원이 하고 있소.”

그때 이제껏 잠자코 있던 유리가 끼어들었다. 내 욕설이 시작된 뒤에는 이마를 부여잡고만 있던 유리는 어느새 진지한 얼굴로 우리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개입에 시의원들은 하나 같이 한 대 맞은 표정이 되었다. 몇 대 더 맞았으면 좋겠는데. 그 바람을 이뤄주듯이 유리를 싸늘하게 말했다.

“옥석 모험가 시그의 신원은 우리 모험가 길드가 보장하오. 이건 우리 지부만이 아니라 상부의 보증. 그의 신분을 의심한다는 건 우리 모험가 길드 전부를 의심하는 것과 같소.”

“그, 그런…!”

“길드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어디서 왔는지 명확하지 않은 동방인을 인정하다니…!”

발작적으로 외친 다른 의원을 향해 유리가 차가운 시선을 향했다. 기세 좋게 외쳤던 그 의원은 그 눈빛에 완전히 움츠러들었다. 유리는 시선 못지않게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오히려 그의 신분을 인정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는 모험가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이번 습격에서 사실상 이 도시를 혼자서 구했소. 테르시아 영애의 구출도 그가 없었다면 실패였지. 나도 구명의 은혜를 입었고. 오히려 나야말로 묻고 싶소. 당신들은 지금 그가 동방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든 걸 인정할 수 없단 말이오?”

선뜻 대답하는 의원은 없었다.

하. 조금 전까지는 실컷 인종차별 해놓고선 유리가 대놓고 물으니까 빼는 거 봐라. 나는 만만하고 유리는 아니라는 거지?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유리는 의원들에게 상당히 양보를 해주고 있었지. 모험가 길드의 특성과 유리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건 아니다만. 그래도 그동안 이어온 스탠스를 나를 위해서 어기겠다는 건 제법 기분이 좋군.

유리는 기세를 줄이지 않게 계속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그대들은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소. 아니, 애써 모른 척하고 있는 걸까? 지금 옥석 모험가 시그가 이 도시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진정 모르오?”

“기, 길드 마스터는 지금 일개 모험가를 보호하기 위해 시청을 협박하는 건가!”

어디서 발작 스위치가 눌렸는지 트팰리라 불린 의원이 개소리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가 시뻘겋게 달아올랐군. 삶은 문어냐?

유리는 이번엔 아예 그자의 말을 씹었다. 현명해.

“다들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소. 귀가 먹고 눈이 멀지 않았다면 알 수밖에 없지. 그런데 그에게 감사 인사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핍박하다니…. 그에게 구명의 은혜를 입은 개인으로서도 공적인 길드 마스터로서도 용납할 수 없는 폭거요. 애초에 당신들은 그를 핍박한 뒷감당을 할 자신은 있소?”

“뒤, 뒷감당이라니…. 다, 당신들! 우리를 힘으로 협박할 셈인가!”

이번에는 다른 놈이 빡대가리 같은 소리를 했다. 아니, 빡대가리니까 빡대가리 소리를 하는 건 당연한가?

상상력도 빈곤하고 상황판단능력도 떨어진다. 저런 인간이 투표로 뽑히다니… 여기 사람들의 안목이 의심스러웠지만, 지구에서도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투표하는 방식을 생각하면 그렇게 실망스러울 것도 없지.

애초에 이 도시는 이제까지 큰 문제 없이 운영된 곳이다. 이들도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라면 이렇게나 지능이 떨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을지 모른다. 평시에는 뭐, 부정부패만 덜 저지르고 쓸데없는 일만 저지르지 않으면 그 인간의 속에 뭐가 들어있든 간에 투표로 뽑아 주는 게 문제가 될 리가 없지.

그리고 모험가는 투표권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을 크게 아쉽게 여기지도 않기 때문에­ 모험가인 내게 강짜를 부려도 큰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멍청한 판단이지만.

유리의 말처럼 귀가 먹고 눈이 멀지 않은 이상 내 명성이 어떤지 모를 리가 없다. 다들 현실도피라도 하는 건가? 권력욕 때문에? 권위가 손상 되니까? 그냥 나라는 강력한 무력과 명성을 가진 존재가 두려워서?

어느 쪽이든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뭔가가 부족하다.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와 유리의 반박에 저쪽이 아예 대응하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 반박하며 나서는 것도 십여 명 중에 고작 한두 명뿐이다.

오로지 감정적으로 흘러왔다면 한두 명이 아니라 대다수가 우리의 말에 감정적으로 대응했어야 했다. 아무리 우리의 기세에 쫄았다지만, 그 얼굴에 분노보다는 두려움이 엿보이는 건 이상하다.

저 두려움은 나와 유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리 길게 논쟁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유추할 수 있는 자들이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단순한 정치기술이라 보기는 힘들다.

즉, 누군가가 저들의 여론을 이런 쪽으로 선동했다.

…마법의 낌새는 보이지 않는다. 몇 번의 경험으로 내가 그런 것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아서 습득한 기술로 몇 번을 확인해봐도 그런 기색은 없다.

그 말인즉 교묘한 화술과 분위기로 여론을 주도했다는 건가? 시의원 중에 놈들의 스파이, 최소한 협력자가 있다는 소리다.

…쯧. 알기 쉽게 행동했다면 바로 알아볼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은 내가 온 뒤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면, 지구에서도 그런 놈들을 꽤 여러 번 겪어 보았기에 그 특성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의원들이 선동당하고 있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것도 그 선동의 주체가 지금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그랬다면 곧바로 알아차렸을 텐데. …용의주도한 놈이군. 미리 분위기만 조성하고 본격적인 공격에는 끼어들지 않겠다는 거냐.

…시장은 아니다. 저자의 표정과 반응은 홀로 이성적이고 냉정한 분위기를 유지해서 시의원들보다 우위에 서려는 행태다. 본인은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선동하는 놈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을 테니, 오히려 이용당하는 쪽이다.

진짜로 똑똑했다면 시의원들의 개소리를 적극적으로 막았어야지. 그랬다면 나랑 유리의 호감도는 수직 상승 했을 테고, 그건 곧 시민들의 지지로 이어진다.

시의원들과의 관계? 그들은 선동으로 멍청한 선택을 했을 뿐. 기본적으로 머리가 그렇게 돌대가리들인 건 아니다. 몇 명은 실제로도 돌대가리인 것 같지만. 어쨌든, 그런 자들이라면 상황의 흐름을 보고 오히려 시장에게 편승했을 거다.

이 정도 판단도 못 하는 걸 보면 시장도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흠. 평화로운 도시라서 그럴까? 정쟁도 그리 크게 일어난 적이 없는 것 같네. 전체적으로 정치의 기술이 떨어져. 우리나라의 국회도 개판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지지를 받는 영웅에게 저딴 식의 말은 절대로 하지 않을 텐데 말이야. 영웅을 우대하는 척하거나, 우대하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홀대하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엿을 멕이려고 하진 않는다.

저들을 조종하는 스파이 내지 협력자 만이 조금은 정치의 기술을 아는 놈이다. 쉽게 말하면 협작질에 능하다는 거지. …좋아. 이 정도라면 시의원들을 모조리 박살 낼 필요는 없겠군. 여기서 슬슬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하고. 과연, 너는 끝까지 가만히 있을까?

사고를 끝낸 나는 유리보다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예의를 차려도 되겠군. 반말과 존대를 오가는 건 기본 스킬이다.

“협박이라니. 듣는 사람 안 좋게. 뭐, 간단히 말해서 내가 이 도시를 뜬다는 겁니다.”

“…도시를 뜬다고?”

반문한 것은 이제까지 잠자코 있었던 시장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다른 시의원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는데, 심지어 유리 마저 깜짝 놀란 얼굴이었다.

아니, 이 사람들이? 내가 이런 수단을 취할 거라는 것을 생각도 못 한 거야? 이거, 선동당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머리가 나빴던 거 아닐까?

…음. 유리까지 저러는 걸 봐서는 이런 수단까지 쓸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거려나? 나 참. 지구의 정치만 겪다 보니 이 정도 수단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군. 지구가 매운맛이라면 여기는 순한맛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고 장난스러운 미소까지 지으면서 말했다.

“다만, 떠나기 전에 미리 약속을 잡은 인터뷰를 하고 떠나야겠죠. 천인 중에 아리야라는 여성을 하십니까?”

“그, 그녀는…!”

“역시 아시는군요. 지난번에도 인터뷰를 한번 했었고, 이번에는 도움을 받은 것도 있어서 상세하게 인터뷰를 해주려고 하거든요. 아무래도 다들 제가 이 도시에 있는 게 불편한 것 같으니, 뭐. 그렇다면 떠나드리죠. 다른 도시에서 모험가를 못 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안 그렇나요? 길드 마스터.”

내가 방긋 웃으면서 말하자, 멍한 표정이던 유리는 이내 내 의도를 깨닫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담담하게 시의원들을 보면서 입을 열었다.

“그렇소. 그가 이 도시를 떠난다면 우리 길드로서도 그를 막을 이유가 없소. 주거지 변경은 엄연히 모험가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이오. 오히려 나는 추천장을 써줄 생각이오.”

“그, 그런…!”

이제야 상황파악이 된 대머리가 경악한다. 다른 시의원들도 창백해졌다. 시장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계획이 전부 틀려먹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래도 이중엔 그나마 머리가 돌아가는지 다급히 입을 열었다.

“허허허. 잠깐 기다려 주실 수 있소? 시그 군. 인사가 늦었소만, 나는 이 도시의 시장인 맥그레이버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시장님.”

인사가 늦은 걸 아는 인간이 사과도 안 하네? 꼴받기는 했지만, 이 이상 이걸로 들이박아 봐야 시간 낭비다. 흐음. 아직은 별다른 행동이 없군.

“우선, 시장으로서 그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소. 어제 이 도시를 위기에서 구해주어서 정말로 감사하고 있소.”

그리 말하며 고개를 살짝 숙이는 시장을 보고 몇몇 의원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시장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서? 아니면 모험가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는 시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둘 다일 수도 있고 상상하는 시간도 아까운 조잡한 이유일 수도 있다. 그리 관심이 가는 사안은 아니다.

“별말씀을.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 게 저뿐이겠습니까? 재앙과 싸우다 전사한 북문의 위병들과 화재를 진압하고 사람들을 구출하는 데 온 힘을 다한 천인분들,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보호하고 치료한 모험가분들. 이분들 모두가 있었기에 어제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거죠. 시장님께서 제게 감사한다면, 그분들 모두에게도 감사하셔야 합니다.”

“…허, 허허허. 그렇지. 모두가 도시를 지킨 영웅들이오.”

시장은 내가 시의원들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대범하게 넘기려 했다. 하지만 내가 그걸로 끝낼 리가 없잖아?

“그리고 당연히 말뿐인 감사만으로는 안 되죠. 특히 재앙에 끝까지 맞선 북문 위병들과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들에게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상이 필요합니다. 참고로 저는 천인 아리야와의 인터뷰에서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목숨을 걸고 싸웠는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할 생각입니다.”

“…그, 그렇지.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오. 그들은 마땅한 보답을 받게 될 것이오.”

“모험가들은… 흠. 길드 마스터.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명확한 보상규정이 있습니까?”

우리의 대화를 조금 즐거운 눈으로 보고 있던 유리는 곧바로 대답했다.

“있다. 길드에선 모두에게 합당한 보상을 줄 거다. 그리고 모험가들의 기여도에 따라서 시청에서도 보상을 지급해줘야 한다. 이건 길드와 시청이 맺은 계약으로 어길 시엔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가 부여되지.”

“이야. 좋은 제도네요.”

능글맞게 그 말을 받으면서 시의원들을 둘러보자 다들 얼굴이 핼쑥했다. 무지성 공격을 하다가 현실적인 얘기로 반격을 당하니 머리가 아플 거다.

시장에 이르러서는 눈을 질끈 감고 있는 게 여기까지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러게 간을 봐도 왜 이딴 식으로 봐? 나를 대체 얼마나 호구로 본거람.

자아. 그럼 마무리를 지어볼까.

“그럼 제 기여분과 보상금은 전부 위로금과 피해복구 금액으로 써주세요. 제 이름으로 길드가. 공정하게 해줄 수 있죠?”

“………진심인가?”

순간 내 말뜻을 못 알아들었는지 멍한 얼굴이 되었던 유리는 이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시의원들의 태반은 아예 이해 못 한 얼굴이었고 몇몇은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뭘 그렇게 놀라시나? 이게 너희들이 원하던 호구의 모습이 아닌가? 뭐, 호구라기보다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이렇게 해서 얻는 이득이 더 크니까 하는 거지만. 기분도 좋고. 일석삼조인데 안 하는 게 등신이다.

“당연히 진심이죠. 나는 돈으로 장난치지 않아요. 어차피 재앙의 시체만 팔아도 돈은 충분하고 길드 마스터에게 따로 받기로 한 것도 있죠.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저는 돈을 쌓아두고 관상용으로 쓰는 취미는 없거든요. 뭐든지 적재적소입니다. 적재적소.”

“……그런가. 알았다. 가장 필요한 곳에 쓰드록 하지.”

유리는 내 말뜻을 알아듣고 감탄하며 대답했다.

훗. 그래. 나 머리 좋지? 어차피 보상금이나 기여금이나 액수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을 거다. 그것을 사업자금으로 모을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하는 편이 더 큰 투자라고 나는 판단했다.

푼돈으로 인심을 살 수 있다니. 남는 장사다.

나는 유리의 결연하게까지 느껴지는 대답에 옅게 웃고는 다시 시의원들과 시장을 둘러보고 말했다.

“이것도 인터뷰에서 말할 겁니다. 그리고 다음 날 도망치듯이 도시를 떠날 거고요. 천인분들은 저를 좋게 봐주고 있고, 이런 특종을 놓칠 정도로 장사수완이 없는 분들도 아니죠. 길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 뒤의 일은 뭐. 대단하신 시의원분들이 알아서 하시겠죠? 신분도 불명확한 미천한 동방인이 어찌 이 도시의 권력자분들에게 대항하겠습니까? 자아. 그럼 어서 추방하시죠? 나가라고 한다면 나가드리겠습니다. 빨리. 뭐 하세요? 왜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어? 조금 전까지는 아주 상전처럼 떠들더니만. 네?”

아마, 나는 지금 아주아주 기분 좋게 웃고 있을 거다.

기분 째지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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