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53화 영웅 시그
* * *
밤이 걷히고 빛이 내려왔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맞으면서 도시의 풍경을 살펴보았다. 어제 그런 난리가 있었기 때문인지, 이른 아침부터 도시는 분주했다. 파괴된 건물과 도로를 수리하기 위해서인지 아침부터 각종 자재를 나르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하늘에는 천인들이 날아다니면서 순찰을 돌고 있었고 5인 소대로 구성된 병사들은 절도 있게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있었다. 습격은 어제부로 끝났으니, 이제는 재생의 시간이다. 더욱 분주해지겠지.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이 도시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해줬다. 재앙을 막고 천공탑을 지키고 길드 마스터와 이웃 영지의 영애를 구출했다. 그런데 여기에 피해복구까지 돕는 건 너무 지나치다. 그런 건 좀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지. 자기들이 사는 곳이잖아. 이참에 토목공사도 좀 하고.
단순히 선의로 나서면 내가 호구라고 생각하는 새끼들이 반드시 나온다. 그렇게 여기는 놈들을 박살 내버리면 되긴 하지만, 괜히 일을 늘릴 필요는 없지.
어쭙잖게 사람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보다는 휴식을 핑계로 방에 틀어박혀 있는 편이 현명하다. 명성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 세상일은 뭐든 적당히 해야 한다.
“으으으음…. 하아.”
…그래. 적당히가 중요해 적당히가.
그런 의미에서 내 옆에서 완전히 축 늘어져서 자는 시르는 내 미숙함의 상징이다. 적당히 하지 못했다. 너무 흥분한 나머지, 열심히 봉사하려 했던 시르를 역으로 몇 번이고 가게 해버렸다. 나도 총 여섯 번이나 사정했지만, 시르는 그 세 배 이상을 절정 했다. 처음으로 몸을 섞었던 날보다 더 격한 섹스였다. 그때는 나도 시르도 많이 미숙했지.
…어쨌든 그런 이유로 배가 부풀어 오를 정도로 내 사랑을 받은 시르는 벌써 두 시간 째 기절 중이었다. 뭐, 도중엔 기절이 아니라 숙면이 되었지만. 깨우기는 싫었다.
시르도 어제 고생해서 피곤할 텐데, 오로지 나를 걱정하느라 본인은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런 시르가 기절할 때까지 섹스한 것은 내 개인적인 욕망도 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시르가 제대로 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점이 더 컸다. 정작 시르는 쉴 생각도 없었던 것 같지만. 거참. 그렇게 자기 몸을 아끼지 않는다니. 기쁘지만, 여러모로 걱정되었다.
내가 옆에서 도와주면 되겠지. …평생 같이하고 싶으니까.
정말이지… 이세계에 와서 좃같은 것도 많지만, 지구에서는 상상도 못 하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사랑도. 투쟁도. 모험도. 지구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특히 다른 건 몰라도 사랑은 시르를 만나지 못했다면 죽을 때까지 못 했을 거다.
시르는 처음 봤을 때 느꼈던 충격이 떠올랐다.
그건정말 색다르고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이제까지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던 내가 당황해서 저도 모르게 감정을 부정하고 숨기려고 했을 정도의 충격. 그것을 사랑이라고 인정하자 몰려온 가슴을 가득 채우는 환희는 여전히 내 영혼에 깊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뭐, 나도 시르의 영혼육백에 크나큰 흔적을 남겼지만.
손을 아래로 내려서 새하얀 나신을 쓰다듬었다. 격렬한 정사를 받아들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작고 가녀린 몸.
신장 151cm. 체중 37kg. 체격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다. 뼈와 근육이 인간보다 가볍기 때문이다. 시르가 인간이 아닌 요정족인 님프라는 걸 다시금 실감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조금 내 욕구를 억제하자. 아무리 시르가 겉보기보다 튼튼해도 매번 이러면 몸도 정신도 버티지 못할 거다.
“오늘은 쉬게 둘까.”
도시 복구엔 참여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다. 어쨌든 나도 어제 있었던 일의 당사자다. 모른 척하고 쉬고 있어도 되긴 하겠지만, 적어도 한번은 회의에 출석해줘야겠지. 당연히 그 회의에서 내게 무리한 요구가 나오면 면전에서 씹어줄 생각이었다.
거기에 참석하는 건 나 혼자여도 충분할 테니, 시르는 적어도 점심때까지는 숙면하는 게 좋다. 그리고 정치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은 곳에 데리고 가고 싶진 않았다.
당연히 시르를 못 믿는 건 아니다. 오히려 믿기 때문에 이런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무슨 용무로 혼자 나갔는지 글은 남겨두고 가야지.
옷을 갈아입고 시르의 몸을 시트로 덮어준 다음에 입구의 종을 쳐서 종업원을 불렀다. 며칠 동안 얼굴이 익숙해진 종업원은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지 한 무더기의 시트와 수건을 챙겨 왔다. 그것을 고맙게 받으며 필기구를 부탁하자, 종업원은 별말 없이 갖다 주었다. 거기에 자리를 비우는 이유와 사랑의 말을 잔뜩 적어서 탁자 위에 올려놓고 문단속을 제대로 한 뒤에 1층으로 내려갔다.
식당에는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어제 그런 소란이 있었는데, 늦게까지 잘 정도로 신경이 굵은 사람은 별로 없었겠지. 혹여라도 그들이 나를 알아볼 수도 있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간단한 인사만 마치고 여관을 나섰다.
이른 아침. 이세계의 시간으로는 6시 33분. 어제 있었던 소란 때문에 아침부터 분주한 거리를 지나 길드로 향했다. 아직 내 모습이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닌지 나를 곧바로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몇몇 소식이 빠른 사람들은 나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는데 확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그런 반응들을 은근하게 즐기면서 빠르게 걸었다. 즐기는 건 즐기는 거고 귀찮은 일은 귀찮은 일이다. 다행히 길드까지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길드 앞은 텅 비어있었다. 당연하다. 이런 이른 아침부터 길드에 오는 사람은 없다. 길드의 문은 아침 6시부터 열지만,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하는 건 7시부터다. 이것도 지구와 비교하면 매우 이른 시간이지만, 노동법 같은 게 없는 세계다.
다만, 밖은 몰라도 안은 비어있지 않았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자 바닥에서 자는 모험가들과 길드 직원들이 보였다. 그들 말고도 일반 시민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였다. 어제 길드에서 치료를 받고 그대로 길드에 머물기로 한 사람들이다. 그들 대다수가 집이 사라진 자들이다.
상당히 처량한 광경이었지만, 역시 내가 해 줄 수 있는 건 없다. 놈들을 박살 내서 복수나 해 줄 수 있겠지. 그런다고 사라진 집이 돌아오는 건 아니겠지만. 제각기 다른 이유로 고생한 그들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심스럽게 그 사이를 지나서 접수대 앞까지 다가갔다.
거기에는 현재 1층에서 유일하게 깨어있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접수원 씨야말로 너무 일찍 일어난 거 아닌지?”
접수원은 만들어진 미소를 지으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가늘게 뜬 두 눈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에 어떤 예감이 들어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밤샜어요?”
“한 시간은 잤어요.”
“당장 올라가서 쉬세요. 뭐합니까?”
황당한 표정을 짓자 접수원은 꾸미지 않은 미소를 지었다.
“여러 가지. 정말… 여러 가지가 있었죠. 아. 그렇다고 시그 님을 탓하는 건 당연히 아니에요. 오히려 백 번, 천 번을 감사해도 모자르죠. 정말 감사드려요.”
“감사라면 새벽에 실컷 들었으니, 올라가서 자세요.”
“후후.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아서.”
“접수원이 댁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다른 직원들 다 어디 갔어요?”
“두 명은 저기 바닥에서 자고 있고, 두 명은 외근 중이에요. 그리고 정말 괜찮아요. 밤을 샌 적도 몇 번이나 있는데, 그래도 지금은 쉴 시간이 있으니까요.”
아무래도 길드 접수원은 블랙이었나 보다. 악독하다. 악독해.
뭐, 본인이 저렇게 괜찮다고 말하는데 계속 강요하는 것도 좋지 않지. 지구와는 상식이 다른 곳이기도 하고. 이 정도면 사람의 도리는 다했다.
“그래도 쉴 때는 쉬셔요. 쓰러지면 본인 손해입니다.”
“그 정도로 무리하지는 않을 거예요. 일단, 저기 자는 사람들이 일어나면 저도 쉬러 들어갈 거니까요.”
“아. 그런데 직원들까지 왜 저기서 잔데요? 2층에도 방이 있잖아요?”
“거긴 지금 쓰고 계시는 분들이 계세요. 새벽까지 열심히 활약해주신 모험가님들이 계시죠. 안전한 건물에 있던 저희보단 그분들에게 더 필요한 장소니까요.”
“음. 다들 고생하셨네요.”
“…가장 활약하신 분이 그리 말하니 기분이 묘하네요.”
나는 접수원에게 씨익 웃어주는 거로 그 말을 받아넘기고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길드 마스터는?”
“방에 계세요. …마스터도 어지간히 고생하셨으니까요. 아직 주무실 거예요.”
접수원의 눈에는 유리를 아끼는 마음이 물씬 묻어 나왔다. 뭐, 무사히 돌아오긴 했지만, 소모가 적진 않았지. 부상은 심하지 않았어도 체력은 거의 바닥이었으니까.
흠. 여기서 좀 죽치고 있어야겠군. 이른 아침부터 길드에 찾아온 이유는 현황파악 및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해서였는데, 자고 있으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2층에서 계단으로 걸어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소리의 크기와 느껴지는 기척을 봐선 내가 찾던 사람이다.
“아니, 잠은 오래 전에 깼다.”
“마스!…터. …몸은 괜찮으세요?”
계단을 내려오는 유리를 보고 소리를 지르려던 접수원은 간신히 소리를 줄일 수 있었다. 걱정스러워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직원을 보고 유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다. 애초에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았지. 체력이 떨어졌을 뿐이다. 이젠 다 회복되었으니 그리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래도…. 후우. 알겠습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뭔가 더 말하려던 접수원은 여러 의미가 담긴 유리의 시선을 받자 체념하고 그리 말했다. 유리는 작게 웃고는 시선을 돌려 나를 봤다. 접수대에 팔을 올리고 두 사람을 가만히 보던 나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네요.”
“어떤 굉장한 사람 덕분에 말이지.”
“호오. 그게 누구려나. 얼굴 한번 보고 싶네.”
“거울이라도 갖다 줘야 할까?”
“됐수다. 뭐, 멀쩡하면 다행이고요.”
피식 웃은 나는 접수원에서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계단으로 갔다. 상세한 얘기는 그녀의 방에서 나누면 되겠지. 하지만 계단으로 가기 전에 먼저 유리가 입을 열었다.
“아니, 2층으로 갈 필요는 없다. …안 그래도 그대를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일찍 길드로 와줘서 수고를 덜었어.”
“그 말은 지금부터 시청으로 간다는 소리죠?”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는 건 정말 좋은 일이군. 익숙하지도 않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유리는 계단을 완전히 내려와서 내 옆에 섰다. 그리고 나를 올려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나눌 얘기는 많이 있으니, 가면서 하지.”
“그러죠. 그런데 누가 부른 겁니까? 의회? 시장?”
“…둘 다. 그런데 어디까지 짐작하고 있나?”
“적어도 순수하게 감사와 칭찬을 하려고 부르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랬으면 이렇게 아침 일찍부터 길드 마스터를 시켜서 나를 데리러 오라고 하지 않을 테니까요. 내 일정에 맞추거나 본인들이 찾아와야죠.”
“후…. 그것들이 그대의 반의반 정도만이라도 머리가 좋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왜 다들 그리 모가지가 뻣뻣하답니까?”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다. 다만, 그치들도 어제 있었던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그렇다. 나까지 죽을뻔했었으니… 그 모든 일을 해결한 당사자에게 상황설명을 듣고 싶은 거겠지.”
“그거라면 보고해줄 사람들이 잔뜩 있지 않나요?”
“샤리스와 데르카가 노력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어. 나도 설명했지만… 새벽에 자네들을 붙잡지 않게 막는 게 최선이었지. 그래도 조금은 이해해줬으면 하는군. 그들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도시의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뭐, 그런 건 직접 만나보고 판단해야죠. 참고로 저는 부당한 대우는 속으로 삭이기보단 그대로 들이박는 걸 선호합니다.”
“……그런 일을 없을 거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정작 본인이 가장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저걸 보니 여기 시의원들이 수준이 어떤지 알만하군. 나름대로 커버를 쳐주기는 했는데, 내가 볼 때 그치들이 잠을 잘 자지 못한 건 일을 해서가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이 자기들을 죽이러 올까, 겁이 나서일 거다. 샤리스와 데르카의 말만 들어도 어떤 인간들인지 가닥이 잡혔다.
뭐,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인 건 아니지만, 그 결과가 나를 이른 아침부터 호출하는 거라면 얘기가 다르지.
좋아. 무슨 말을 할지 한번 보자고.
“뭐, 그것도 직접 보면 알겠죠. 그럼 갈까요? 내 고향에는 ‘쇠뿔도 단김에 빼라’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런 속담을 쓰는 저의가 심히 불안하군.”
유리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올려보았지만, 나는 그저 실실 웃을 뿐이었다. 내 미소를 보고 뭔가를 말하려던 유리는 이내 체념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폭력사태만은 피해주겠나?”
“어허. 누가 들으면 오해할 소리를. 저는 폭력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근래 들었던 농담 중에 제일 웃기군.”
“그럼 웃어야죠. 웃으세요. 웃으면 복이 와요.”
“……하하하.”
메마른 웃음을 흘린 유리는 이내 진짜로 피식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어떤 부분이 그녀의 포인트를 건드렸는지는 몰라도 역시 웃는 모습 쪽이 더 보기 좋았다.
“그럼 이젠 진짜로 가죠. 상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고요.”
“후후후. 그러지. …뭐, 그 바보들도 한 번 정도는 혼쭐이 나는 게 좋겠지.”
유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으면서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기 전에 조금 멍한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던 접수원을 봤다. 그녀도 내게 시선을 맞췄다.
“그럼 나는 이만 가볼게요. 괜히 무리하지 말고 쉴 수 있을 때는 쉬세요. 접수원 씨.”
“……시그 님. 제 이름은 히리에에요.”
“알고 있어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접수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이도 찬 사람이, 그런 표정 지어봐야 귀엽지 않거든? …솔직히 조금 귀엽긴 하다. 시르와는 비교하는 게 모욕이지만.
“언제야 이름으로 불러주실 건가요?”
“반말해도 된다고 허락해주면.”
접수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이젠 어느 정도 친해졌고 나보다 연하니까 반말을 해도 되겠지. 그렇다고 갑자기 반말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나는 연소자가 연장자에게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듯이 연장자도 연소자에게 지켜야 하는 예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예의란 자고로 양방향인 법이다.
접수원의 당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꾸민 게 아닌 진심이 담긴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그러세요.”
“그럼 히리에. 괜한 고집 부리지 말고 잠이나 자러 가. 저기 자는 애들보다 네가 더 고생했잖아? 일을 너무너무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챙길 건 챙겨야지.”
“…정말 사양이 없으시네요.”
히리에는 쿡쿡 웃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면서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유리에게 향했다. 히리에도 나와 마찬가지로 손을 흔들면서 우리를 배웅했다. 그러다가 내가 유리의 옆으로 왔을 때 검지로 입술을 누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시르 님에겐 비밀로 할게요.”
뭘 비밀로 한다는 걸까? 나는 찔리는 게 하나도 없는데?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다. 뭐지? 자의식 과잉?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말 없이 엄지를 치켜세워졌다. 히리에도 웃으면서 엄지를 치켜세워졌다. 후. 이게 우정이지.
그런 우리를 유리는 황당한 눈으로 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시르는 질투심이 강한가. 이거, 나도 조심해야겠군.”
……무슨 의미로 한 말이야?
묻고 싶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기에 안 들은 척 길드를 나섰다. 유리도 그 이상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부터는 시청에 가서 어떤 개소… 아니, 어떤 신박한 말들을 들을지 예상할 시간이다. 유리와 현황과 앞으로의 일들을 의논하면서도 시의원들의 사고패턴을 분석해서 그들이 어떤 개소… 헛소리를 할지 예상하고 대비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시청에 도착하고.
“놈들의 행동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아차릴 수 있었소?”
“예상했다고? 어떻게 그렇게 정확한 예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군.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위병들에게 명령을 내렸던데, 그건 명백한 월권행위네. 길드 마스터는 어떻게 생각하시나?”
“도시군은 일개 모험가의 말로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이 아니네. 명확하지 않은 정보로 움직였다가 겉잡을 수 없는 문제가 생기면 대체 책임은 누가 지는가?”
“꼭 그 안에서 싸워야 했소? 마력생성기 몇 대가 고장 났소. 천인들은 따로 피해보상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도시 기능의 일부가 마비되었단 말이오.”
“시청의 도서관? 거기엔 아무것도 없소. 흥. 얼빠진 놈들이 잘못된 코어를 뺀 거겠지.”
“결국, 간부급들은 아무도 잡지 못했다는 거 아닌가? 기껏 잡은 놈들은 아는 게 없더군.”
“흠. 동방에서 왔다던데… 모험가 길드는 신원이 확실한 사람만 자격을 부여하기로 약조하지 않았나? 고향이 어디인지부터 상세히 말해보게.”
“수상하군. 어떻게 우리 도시에 오자마자 그런 일들을 겪을 수가 있는 거지? 정말 그놈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건가?”
“그런 힘을 고작 옥석 모험가에 묶어두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언제 또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모험가 길드 마스터는 부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기 바라네.”
이 개씨발새끼들은 말이 되지 못한 헛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나는 이 헛소리를 무려 20분이나 들어주었다.
이것이 내가 이것들에게 욕을 하게 된 진상이다.
전혀 급발진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까지가 안전운전이었다.
액셀은 이제부터 밟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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