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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에 천재가 가면-48화 (48/93)

〈 48화 〉 48화 쿠르시카 도적단

* * *

달빛과 별빛이 내리는 밤하늘 아래의 초원에서 검을 든 나와 창을 든 소녀, 몬스터들의 호위를 받는 마녀가 대치하고 있다. 그 풍경을 전지적인 관점으로 보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나와는 다른 기분을 맛보고 있는 것 같다.

“………무슨.”

“………끄윽.”

조금 전.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은 상반된 반응을 보였다. 홍색 소녀는 곤혹스러운 얼굴이었고 붉은 여자는 잔뜩 질린 얼굴로 피 섞인 트림을 토해냈다.

시원찮은 반응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분위기다.

좀 더 분노하는 반응이리라 생각했는데. 특히 홍색 소녀는 자존심 강한 알브에 전사이기까지 하니, 광분하진 않더라도 자존심은 상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홍색 소녀는 분노보다는 당혹을 느끼고 있었다.

…음. 지금 내가 한 말이 그렇게나 생뚱맞았나? 매우 분위기에 맞는 발언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왜 강적들과 대치한 상황에서 이런 대사는 고전적이기까지 하잖아? 그렇다고 구린 것도 아니고 꽤 멋이 있는 발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분위기가 살지 않는 걸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답을 깨달았다.

상대에게 처음부터 전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아. 생각해 보자. 일단 붉은 여자는 나한테 신나게 처맞고 내 정체까지 듣고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눈도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살의가 아니라 언제든지 틈이 보이면 내뺄 기회를 노리는 눈이다.

홍색 소녀는? 처음에 기세 좋게 초강력한 투창으로 내 등짝을 노리긴 했지만… 그것도 전력을 다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반응이 조금만 느렸어도 꽤 곤혹스러운 상황이었겠지만, 그녀가 내 정체를 처음부터 알았다면 이 정도 공격은 알아서 피할 거라 예상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뒤에는? 내 정체를 말하고 경계하기는 했지만, 적의나 살의를 드러내는 일은 없었다.

쉽게 말해서 나는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입 닥치고 죽을 준비나 하라고 말한 셈이다. 그것도 한쪽은 시르보다 어려 보이는 소녀. 한쪽은 피투성이가 된 미녀.

야잇, 싯팔! 분위기가 살 리가 없지!

폼잡기에 발생한 심각한 문제에 고민하는 동안 홍색 소녀는 표정을 다잡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당신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지. 하지만 나는, 우리는 이곳에서 당신과 끝을 보고 싶지 않아.”

짐승 새끼와 똑같은 말이군. 같은 소속이라서 그런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새끼는 그리 말하면서도 전의와 살의가 그대로였다면 홍색 소녀에겐 그런 게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고작해야 내가 언제 달려들까 하는 경계심 정도다.

내 눈에서 그런 뜻을 읽은 걸까? 홍색 소녀는 쓴웃음 지었다.

“나는 자주랑이 아니야. 그는 투쟁에 살고 투쟁에 죽는 자. 나도 투쟁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나에게 무의미한 투쟁은 싫어.”

“나는 투쟁 자체가 싫어어어어…….”

아예 눈물까지 보이며 징징거리는 붉은 여자를 보고 홍색 소녀가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과 투쟁을 벌일 필요도 없어.”

홍색 소녀가 손을 들어 올리자 사방에서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숲 곳곳에 대기하고 있던 도적놈들이 횃불을 밝힌 것이다. 그 수는 어림잡아 300이 넘어갔다.

내가 여기까지 오면서 베어 넘긴 녀석이 32명인데 그 열 배에 달하는 숫자다.

…투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건 이런 뜻인가. 수적인 우위가 명확하다는 거군.

손짓 하나로 수백 명을 움직인 홍색 소녀는 자랑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붉은 여자는 자기가 한 것처럼 뽐내고 있었다. 정신연령은 생김새와 정반대네.

한순간 붉은 여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향했던 홍색 소녀는 이내 무덤덤하게 말했다.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싸워주겠어. 하지만 일대일 승부는 하지 않아. 당신의 검날이 나에게 닿으려면 300명이 넘는 시체를 넘어와야 할 거야.”

“…크흐흐흐! 그래! 맞아! 우리에겐 부하가 아직 300명이나 남아 있었어! 잘됐네! 저 자식 여기서 죽여버리자!”

그 말에 붉은 여자가 경박하게 받았다. 홍색 소녀는 이번엔 경멸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붉은 여자를 쏘아보았다. 애처럼 좋아하던 붉은 여자는 그 시선에 움찔하더니 이내 쭈구라들었다.

“…죄송합니다. 그런 시선으로 보진 말아주세요오오오.”

“…하아.”

짧은 한숨으로 수많은 감정을 털어낸 것처럼 보이는 홍색 소녀는 거대한 붉은색 창을 내게 향했다.

“그래서 어쩔 거야? 이래도 우리와 싸울 생각이야?”

“많이 쫄리나 보군.”

“……뭐?”

도발적으로 내뱉은 말에 홍색 소녀가 눈을 크게 떴다. 붉은 여자는… 이제 이쪽은 굳이 보고 싶지도 않군. 한 번 처맞았다고 저러다니. 전형적인 강약약강이다.

나는 조금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홍색 소녀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나는 너희들의 계획을 몇 번이나 망쳤지.”

“………….”

“나는 재앙이라 불리는 그 개새끼를 패죽이고 자주랑이라는 짐승새끼를 패서 쫓아내고, 타라스트의 모험가 길드 마스터와 테르시아 영애의 살해 및 납치를 막아냈어. 네놈들은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뤘지만, 모든 목적을 이룬 건 아니야. 잘해봐야 30% 정도에 불과하겠지. 완전 실패는 아니지만, 투자한 것에 비하면 부족한 성과일 테지.”

“………….”

“네놈들이 이 지역에 혼란을 일으켜서 정확히 뭐를 이루려고 했는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좋은 목적이 아니라는 건 그 누구라도 알겠지. 그리고 너희는 나를 고려하지 못한 결과 혼란을 일으키는 목적은 실패했어. 두 번 다시 이 지역에서 같은 시도는 하지 못할 거야.”

“………….”

“그런데 그런 놈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한다는 짓이 숫자로 협박해서 안 싸우는 거라고? 그럴 이유는 단 두 개뿐이야. 첫 번째는 이미 목적을 이룰 만큼 이뤄서 이 이상의 손해를 보면서까지 나를 죽일 필요가 없는 경우. 두 번째는….”

검으로 홍색 소녀를 겨눈다. 거대한 창과 그에 비하면 왜소한 검이 마주 보았다. 겉보기엔 비교도 안 되는 무장. 하지만 나에겐 내 검이 홍색 소녀의 창보다 훨씬 거대하게 보였다.

나는 증명했다. 이세계에서. 난데없이 떨어진 판타지 세계에서. 판타지스러운 힘이 없어도 이세계의 강자도 박살을 낼 수 있다는 것을. 거대한 괴물들을 내 마음대로 희롱할 수 있다는 것을.

그러니 겁을 먹을 리가 없다. 자신감을 가지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나는 확신한다.

이대로 싸워도 내가 이긴다.

300명의 도적과 치명상은 입지 않은 두 괴물과 거대한 창을 든 홍색 소녀와 전부 싸워도 이길 수 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붉은 여자는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확신해서 말할 수 있었다.

“나한테 너희들이 전멸당할 것이 두려워서.”

나의 말이 진실이다.

“첫 번째는 아니야. 너희들은 너희들의 목적을 아직 완전히 이루지 못했어. 타라스트에서도 여기서도. 불완전하지. 나 때문에. 나라면 나 같은 걸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어떤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죽여. 내 앞을 반드시 가로막을 강적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아. 너희들이 그 정도로 멍청한 새끼들이라곤 생각 안 해. 그렇다면 답은 하나 뿐이야.”

“………….”

“내가 두려운 거야. 여기 있는 전력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거지. 그게 너이든, 네 위쪽이든.”

홍색 소녀도 붉은 여자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밤바람이 불었다. 초원의 풀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달빛과 별빛을 받은 칼날과 창날이 번뜩였다. 하지만 움직임은 없었다. 그런 기묘한 정적을 끝낸 것은 소녀의 작은 입술이었다.

“나는 자주랑 같은 놈이랑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거대한 창이 움직였다.

지금까지 홍색 소녀는 족히 50kg은 되어 보이는 창을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그것을 양손으로 잡는다. 허리를 숙이고 양다리를 벌리고 팔로, 몸으로 창을 지탱했다.

붉은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조금 전보다 가늘게 떠진 두 눈이 내 모습을 담는다. 이제까지 없었던 전의가 소녀의 몸에서 피어오른다. 홍색 기운이 그녀의 몸과 창을 감싸 안았다.

적의와 전의가 가득 차 있는 시선이 얼굴을 찌른다.

“아무래도 근본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나 봐.”

“……자, 잠깐….”

홍색 소녀의 자세와 분위기를 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깨달았는지 붉은 여자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나와 홍색 소녀를 보고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이내 이를 악물고 채찍을 들었다. 그에 맞춰서 뒤에 기립해있던 두 괴물이 낮은 함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그걸 슬쩍 보고 옅은 미소를 지은 홍색 소녀는 그 미소를 내게 향했다. 다만, 미소에 담긴 감정은 180도 달랐다.

진득한 살의. 내가 바라던 반응.

“당신은 여기서 죽이겠어.”

“곧 뒈질 것이 혓바닥이 길어.”

돌아오는 말은 없었다. 대답은 다른 형식으로 이뤄졌다.

돌아온 것은 폭발적인 가속에 이은 찌르기.

거대한 붉은색 창이 날아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웃었다.

기껏 멋진 말까지 했는데, 싸우지 않는 건 너무하잖아?

웃으면서 덮쳐오는 거대한 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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