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7화 쿠르시카 도적단
* * *
별빛과 달빛에 번뜩인 섬광이 눈앞을 갈랐다.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도적놈을 배었던 검에 또 다른 피가 묻는 걸까? 직접 죽인 사람은 없지만, 치료받지 않으면 죽을 녀석들은 제법 있었다. 어쨌든 내가 직접 죽인 건 아니니 살인이 아니라 자연사다.
온통 붉은색뿐인 여성의 목에 일격을 날리면서 나는 태연하게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내 일격은 실패했다.
처음부터 예상했던 대로.
검날이 여자의 목에 닿기 전에 거대한 팔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붉은색의 근육투성이의 팔. 기둥같이 거대한 팔. 그 팔에 가로막힌 검날은 너무나도 쉽게 튕겨 나갔다.
정확히는 내가 튕겨 나가게 했다.
일격에 끝낼 수 있다곤 기대도 안 했다. 무엇보다 이런 흉악한 괴물을 두 마리나 데리고 있는데 한 방에 끝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 우선 옆의 괴물 놈들 먼저 쳐죽여주마.
튕겨 나간 힘을 역으로 이용해서 회전하면서 내 일격을 막은 놈의 목을 베었다.
검날의 끝. 가장 날카로운 부위.
제아무리 질긴 가죽이라도 베어낼 힘과 속도와 기교.
설사 강철을 향해 휘둘렀어도 지금 일격이라면 3cm는 잘라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일격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촤악! 살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다. 하지만 깔끔하지 못했다. 깊지도 길지도 않았다. 본래라면 목의 3분의 1을 잘라내었어야 할 일격이 그 반의반도 잘라내지 못했다.
목을 베고 피가 흐르긴 했지만 치명적이진 않다. 그래도 놈에겐 의외였는지 두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이성이 없는 괴물이라고 생각했는데, 고통은 다른 걸까? 하지만 자신의 목의 상처를 막기 위해 손을 올리지 않고 그대로 나한테 휘두르는 건 실로 몬스터답다고 생각했다.
기둥 같은 팔과 그 끝에 펼쳐진 거대한 벽 같은 손바닥을 오히려 놈의 품 안으로 들어가면서 피한다. 동시에 물 흐르듯이 하프소딩으로 놈의 무릎을 찔렀다.
푹! 푹! 푹!
빠르고 짧고 강한 찌르기는 놈의 질기고 두꺼운 살가죽을 찢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깊진 않다. 그래도 상관없다.
무릎은 다치면 전투력이 급감한다. 세 번의 찌르기로도 완전히 망가트리지는 못했지만, 연골의 가닥을 끊었다.
이제 놈은 왼쪽 다리를 자유자재로 쓰지 못한다. 엄청난 재생능력이 없는 이상에야 말이야.
그 순간 섬뜩한 감각이 뒤통수를 간질었다. 그 감각을 느끼는 순간 고개를 움직였고, 동시에 내 머리가 있던 장소를 붉은색 섬광이 뚫고 지나갔다.
섬광의 정체는 붉은색 채찍이었다.
그 채찍의 끝에는 입가를 잔뜩 끌어올리며 웃고 있는 붉은색 여성이 있었다.
쪼개기는.
속으로 비웃으면서 몸을 회전시키며 검을 크게 휘둘렀다. 이미 공격이 날아오는 순간 다음 행동을 결정한 내 몸은 놈보다 훨씬 빨랐다. 붉은 여자는 흠칫 놀라며 손을 뒤로 뺐고, 칼날은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끝만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만으로도 살이 갈라지고 피가 흘러나왔지만, 손가락을 전부 절단시킬 생각이었던 공격이었기에 조금 아쉬웠다. 그 아쉬움을 뒤로하고 끝까지 회전하지 않고 몸을 정지시켰다. 동시에 그 반동을 이용해 앞으로 쏘아지듯이 돌진했다.
단숨에 붉은 여성과 거리가 좁혀지고 그녀의 붉은색 눈동자가 크게 떠졌다.
다음 순간 거대한 주먹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여자의 왼쪽에 있던 괴물. 소머리 인간. 익숙한 괴물이다. 판타지의 단골 몬스터. 미노타우로스.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괴물의 이름을 전혀 상관없는 판타지 세계에서 보는 건 고소가 나왔지만, 번역이 그렇게 되니 어쩔 수가 없다.
그런 고찰과는 반대로 놈의 주먹은 실시간으로 가까워졌다.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함일까? 여자의 머리 위를 한참 지나서 날아온 일격은 최적의 루트를 그리지 못했다.
이런 어설픈 텔레폰 펀치 따위에 맞으면 인생의 수치다.
나는 돌진하던 기세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점프했다.
누군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 행동에 담긴 감정에 즐거워하면서 소대가리가 내지른 주먹 위를 왼손으로 살짝 터치하면서 오른손의 검을 크게 휘둘렀다.
노리는 것은 그 밑에 있던 붉은 여자의 정수리.
내가 주먹에 돌진하는 걸 보고 눈을 부릅떴던 여자는 자신의 머리를 쪼개버리기 위해 날아오는 섬광을 보고 다급히 몸을 틀었다. 동시에 채찍을 휘둘렀다.
붉은색 섬광이 공간을 관통했다.
그렇게 반응할 줄 알았어.
그 공간에 내 몸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소대가리의 팔을 타고 올라가 솟구치는 내 몸에서 한참 떨어진 곳을 관통했을 뿐이었다. 붉은색 섬광이 등 뒤에서 하늘로 솟구치는 순간 오른손이 물흐르듯이 움직였다.
칼날이 미노타우로스의 오른쪽 눈을 베었다.
놈이 비명을 지르기 위해서 입을 벌렸다. 그 안에 칼날을 꽂아 넣었다. 단단하다. 아무리 자세가 불안정했다지만 그래도 1cm의 강철은 관통시킬 수 있는 찌르기였다. 가죽만이 아니라 몸 자체가 단단한 건가?
좀 더 힘을 주면 더 깊게 들어갈 것 같았지만, 소요하는 시간 대비 효과가 약하다고 판단해 빠르게 미련을 버리고 검을 뽑으면서 혀를 베었다. 혀도 두꺼워서 완전히 잘리긴 않았지만, 피는 잔뜩 흘릴 거다. 호흡을 방해하는 수준은 되겠지.
그리고 목젖 옆부분을 찔러 보았지만, 역시 깊게 박히진 않았다. 전력을 다하면 뚫리겠지만, 대신 검이 부러지겠지. 아직 그러고 싶지는 않다.
결론을 내리고 곧바로 놈의 팔 밖으로 뛰어내리면서 몸을 회전시켰다. 유려하게 휘둘러진 칼날이 소대가리의 목의 일부르를 자르고 지나갔다. 그러는 순간 내 시선은 한곳에 못 박혀 있었다.
그곳에는 세 명의 여성이 나를 보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유리 베르실.
경악하며 나를 보고 있는 금발 여성… 시엘 테르시아.
그들을 자애로운 녹색 빛으로 치유하면서도 나를 반짝거리는 황금으로 보고 있는 시르 플레인.
나의 연인. 나의 태양.
그녀들의 시선… 특히 시르의 시선이 내게 힘을 불어넣었다. 그래. 시르가 보고 있는데 멋없는 짓은 할 수 없지.
이제부터 제대로 보여주겠다. 내가 20년 동안 단련한 검술을!
[크아아아!!!!]
[부오오오!!!!]
가속하는 의식에 길게 늘어지는 고함과 비명이 들렸다. 소대가리가 광분하며 도끼를 들어 올리고 못생긴 오우거가 대검을 찔러 왔다.
그 순간 나는 소머리의 무릎을 한 번 찌른 뒤에 오우거의 대검에 몸을 날렸다. 내 몸보다 거대한 대검. 무게만 따져도 족히 100kg을 나갈 터무니 없는 무기다. 힘으로 싸우면 완력 이전에 무게의 차이에서 밀린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물리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럼 답은 간단하다. 정면에서 부딪치지 않으면 그만이다.
놈의 대검 옆면에 내 검을 댄다. 대검에 비하면 이쑤시개처럼 보이는 작은 검. 하지만 그 검에는 내가 단련한 힘과 기술이 완전히 녹아들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이. 직선으로 내질러 오는 운동 에너지의 방향을 조금 왼쪽으로 이동시켰다.
태극팔괘도는 맨몸으로만 쓰는 무술이 아니다.
감괘?? 치수??
찌르기의 방향이 이동한다.
좀 더 왼쪽으로 이동한 찌르기는 미노타우로스의 배를 향하고 있었다. 오우거의 두 눈이 점차 커지는 게 보였다.
그것을 보면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오우거는 이 힘의 흐름을 바꿀 수 없다. 단순히 힘이 강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단련을 거친 기술이 없다면 내 앞에서 단순히 크고 강한 힘은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어린애 장난감이나 다름없다.
그 결과 오우거의 대검이 미노타우로스의 옆구리에 박혔다.
그리고 미노타우로스가 뒤늦게 내려친 도끼가 오우거의 팔에 박혔다.
푸홧!
양쪽에서 거대한 생물들의 살이 갈리고 근육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아쉽게도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
내가 무릎을 찌르고 오우거의 대검이 옆구리에 박힌 결과 동료의 팔을 내리찍은 거대한 도끼에 실린 힘이 부족했다. 그래도 그렇게 속이 상하진 않겠지.
옆구리를 찔렸는데 고작 팔 하나 찍은 거잖아?
원래 친구들끼리는 서로서로 놈에 날붙이 하나씩은 박아보는 거다. 대검과 도끼의 교환으로 시작되는 우정! 전우애! 로맨…… 야잇, 싯팔. 너무나도 역겨워서 장난으로도 상상하지 못하겠다. 우엑.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참으면서 두 괴물이 이뤄낸 참사 사이를 빠르게 지나간다. 그 안에는 회수한 채찍을 들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붉은 여자가 있었다.
주저하지 않고 여자의 목에 검을 날렸다.
여자는 연달아 일어난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하고 있었다. 그 당황을 내가 유도했다. 그 틈을 찌르지 못한다면 이런 상황을 만들 이유가 없다. 두 괴물이 서로를 찌르게 만드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나에게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실패한다곤 추호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러니 이 일격은 준비된 일격이다.
동시에 막힐 것을 예상한 일격이다.
퍼억! 붉은 여자는 채찍의 끈 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그 사이로 내 검을 막아냈다. 채찍엔 붉은색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천공탑에서 싸웠던 짐승 새끼가 주먹에 담았던 것과 비슷한 기운이다. 하지만 그 녀석보다는 약하다. 그래도 내 검은 채찍과 붉은 기운을 완전히 뚫지는 못했다.
아주 살짝 베여나간 채찍을 보고 나는 바로 미련을 버렸다. 오히려 질긴 가죽에서 오는 반탄력을 이용해서 몸을 반대로 회전시켰다. 그리고 뒤돌려차기로 배를 걷어찼다.
“컥…!”
짧은 신음과 함께 붉은 여자가 뒤로 날아갔다. 아직 남아 있는 회전의 힘으로 앞으로 박차고 나가 번개 같은 찌르기로 양다리의 무릎을 노렸다.
퍽! 퍽! 사람의 피부가 아닌 두꺼운 가죽을 후려친 느낌이었다. 놀랍게도 붉은 여자의 붉은색 가죽 바지는 내 찌르기에서 주인의 몸을 보호했다. 하지만 칼날은 관통하지 못했어도 충격은 그대로 전해졌다. 붉은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여자는 날아가는 도중에 손잡이를 쥔 오른손이 움직였다.
붉은색 섬광이 다시 한 번 어둠 아래를 갈랐다.
역시, 이번에도 스치지도 못했다.
내 몸에서 한참 벗어난 곳을 관통한 붉은 섬광을 따라 내달렸다. 붉은 여자가 고함이라도 치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지만, 그 순간 이미 내 앞차기가 여자의 배에 날아가고 있었다.
“…컥!”
입에서 튀어나온 건 고함이 아니라 짧은 비명. 하지만 예상한 것보다 피해가 적다. 이번 일격으로 최소한 기절이라도 시킬 생각이었는데, 여전히 의식이 남아있었다.
고개를 살짝 내리니 붉은색 기운이 내 발을 막고 있는 게 보였다. 앞차기를 날리는 순간 여자는 배를 보호한 것이다.
그 정도 보는 눈은 있다는 건가?
짐승 새끼에 비하면 많이 모자라지만, 제법 무술에 소양이 있는 여자다. 그리고 이 여자를 호위하던 괴물들. 아직도 서로에게 꽂은 무기를 빼지 못해 끙끙대고 있는 머저리들을 생각하면 상당히 높은 직위일 거다. 만약 저 괴물들을 조종하는 자가 이 여자라면 간부 확정이다.
여기서 죽일 수는 없다. 단순히 첫 살인을 짐승 새끼로 예약해서가 아니라, 생포하면 얻어낼 수 있는 이득이 너무 컸다.
흐음. 그래도 저 붉은 기운을 관통해서 타격을 주려면 위력을 좀 더 높여야 하는데… 검으로는 그렇게 하기 힘들지. 그렇다면 역시 그 방법뿐인가.
발을 빼고 몸을 왼쪽으로 돌렸다. 그 순간 채찍을 회수한 여자가 다시 한번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채찍은 허무하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왼쪽으로 이동한 나는 검이 아닌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일격.
콰앙!
“……캭!”
천둥이 쳤다.
진괘?? 천둥은 주먹으로 쓸 수 있는 기술 중에서 가장 빠르고 가볍다. 즉, 속도는 있지만, 위력은 약하다. 무게를 거의 싣지 않은 초고속 잽. 전투복의 기능을 풀로 활용하면 음속조차 훨씬 뛰어넘는 일격이지만, 지금처럼 적을 죽이지 않고 잡기에도 최고다.
옆구리에 박힌 일격은 체중 차이로 인해 여자의 몸을 공중으로 뛰었다. 이제 움직일 수 없는 여자가 기절할 때까지 천둥으로 난타하면 끝이다. 그 뒤에는 부상을 입은 괴물 놈들을 하나하나 도륙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천둥에도 전의를 잃지 않은 붉은색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살의가 가득 담긴 눈동자는 익숙하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불길한 기운은 익숙하지 않았다. …아니, 이건 위험하다!
본능적으로 옆으로 돌았다. 그리고…
콰아아아앙!!!
내가 있던 자리에 어마어마한 불기둥이 치솟아 올랐다.
바로 옆에 있던 내게 열풍이 들이닥쳤다. 몸이 날아가거나 균형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엄청난 위력이다! 치솟아 오른 불기둥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저걸 직격당했다면… 제아무리 나여도 치명상이었다. 내가 가진 마법 저항력을 생각해서 그 정도다. 마법 저향력이 없다면 순식간에 뼈까지 탔겠지!
……저걸 단순히 노려본 것만으로 했다고?
바로 깨달았다.
이건 비장의 수다.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 예상대로 비장의 수가 빗나간 여자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은 붉은색 눈동자마저 가리고 있었다.
…이거, 마안이지? 폭발의 마안? 폭염의 마안? …와. 그래. 이런 것도 있을 거라 상상은 했었는데… 진짜로 마안을 보니까 기분이 참 묘하네. 내 안의 중2병이 존나 자극돼.
그리고 위험해. 존나 위험해!!! 리스크가 큰 것 같기는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네이팜 폭격에 맞먹는 현상을 일으키다니! 내가 이세계에서 가장 죽을 뻔했던 순간이야!!
…연발할 수 없고, 피할 수 있는 건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자의 등 뒤로 돌아간 나는 척추에 천둥을 갈겼다.
“………!!!”
이번에는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분수처럼 뿜어져 나온 피가 하늘로 솟구쳤을 뿐이다. 그리고 여자의 몸이 앞으로 쭈욱 날아갔다. 아직도 혼란스러운 자신의 호위들을 향해서.
좋아. 이제 한 방만 더 먹이면 쓰러지겠군. 그리고 곧바로 괴물 놈들을 죽인다. 마안이라는 변수가 생겼지만, 감당 못 할 수준은 아니다. 뭣하면 눈알을 뽑아버리면 되지.
그렇게 마무리를 짓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본능은 언제나 나의 좋은 친구다. 그 본능대로 움직이게끔 피를 토하는 단련을 한 나는 현명한 인간이다.
그 모든 행위가 지금의 움직임을 만들었다.
전진하려던 힘을 곧바로 옆으로 덤블링하는 힘으로 전환한다. 땅을 한 번 짚고 옆으로 이동한 순간… 내가 있던 장소를 붉은색 섬광이 꿰뚫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콰아아아앙!
폭음이 귀를 울렸다. 하지만 붉은 여자의 마안처럼 불기둥이 치솟진 않았다.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번개처럼 날아온 섬광의 정체가 그 사이로 보인다.
그것은 붉은색 창이었다.
길이만 족히 3m에 달하고 어른의 팔뚝만 한 굵기의 창대와 어지간한 장검 길이의 창날이 달린, 거대한 창.
그것을 유심히 보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서 섬광이 날아온 방향을 봤다.
그곳에서 작은 인영이 걸어오고 있었다.
시르보다도 한뼘은 작은 키의 소녀.
소녀는 붉은색 빵모자를 쓰고 붉은색 가죽 갑옷을 입었다. 바지는 붉은 여자와 마찬가지로 가죽 바지다. 어깨까지 오는 붉은색 머리와 붉은색 눈동자가 인상 깊었다.
그런 특징은 채찍을 쓰는 여자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여자가 적赤이라면 이 소녀는 홍?이다. 무엇보다 얼굴이나 분위기가 전혀 닮지 않았다.
뾰족한 귀와 뾰족한 송곳니.
저 소녀는 알브였다.
그리고 전사다.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방심하지 말라고.”
소녀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 대상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서 피를 토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붉은 여자였다. 붉은 여자는 힘겹게 몸을 돌려서 충혈된 눈으로 소녀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캬, 캬핫! …누, 누가 방심을… 했다는 거야앗! 저…… 저런 새끼가… 올 줄 누가 알았냐고오오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외침이었다. 억울함과 분노가 느껴졌다. 그 외침에 소녀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건 그런가. 나도 보고를 듣고 놀랐어. ……자주랑을 패퇴시킨 인간이 이곳으로 올 줄이야. ……아니, 올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어.”
“그, 그 짐승새끼가…? 아니, 씨발, 진짜…? ……왜! 왜 그걸 이제야 말해!!! 알았으면 튀었을 거라고오오!”
“……그럴 땐 방심하지 않았을 거라고 말해야지?”
홍색 소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붉은 여자는 거친 욕설을 내뱉으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서로를 찌르고 혼란에 빠져 있던 두 괴물이 정신을 차리고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역시, 저년이 저것들을 조종하고 있었나. 강제로 움직이고 있군.
홍색 소녀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도 덤덤히 소녀를 바라봤다. 잠시간의 침묵. 그녀는 내게 말을 거는 대신 손을 뻗었다. 그러자 거대한 창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그녀의 손으로 날아갔다. 탁. 마치 자신과 한몸인 것처럼 거대한 창을 붙잡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반가워. 드래곤 슬레이어. 아니, 이젠 재앙 살해자라고 불러야 할까? …자주랑을 패퇴시킨 당신 같은 전사를 이런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어.”
“말이 많네.”
”………뭐?“
내가 내뱉은 말에 홍색 소녀가 두 눈을 깜박거렸다. 외모가 외모이다 보니 귀엽긴 했지만, 이미 시르의 귀여움에 흠뻑 빠진 내겐 아무런 동요도 일으키지 못했다.
나는 작게 심호흡을 하고 검을 얼굴 앞에 들었다.
수직으로 뻗은 검면에 내 얼굴의 일부가 보였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얼굴.
강자를 만나… 비교적 마음 편하게 강적과 싸울 수 있는 상황에 기뻐하는 얼굴.
그 얼굴을 보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곧 뒤질 것들이 참 말이 많아.“